당신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네?"
"당신은 기억을 잃었다구요. 기억을요."
하얀 가운에 멋진 갈색 수염을 기르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의사는 기억이라는 말에 더욱더 강조를 주며 내게 확인을 시켜주었다. 뚱딴지같아. 기억을 잃어버리다니.
"그러니까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거죠? 저의 기억을 말입니다."
의사는 자신의 권위를 의심하는 듯한 내 태도에 희한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나를 처다보며 딱부러지게 얘기했다.
"그래요. 당신의 기억 중 일부는 훼손되었거나, 아니면 지워졌을 것입니다. 앞으로 가족과 친인척, 친구들을 통해서 기억을 되찾도록 노력하세요. 식후에 약 먹는 것을 거르지 말구요."
그는 그렇게 말을 마친 후 카르테를 덮었다. 다음 환자가 들어올 차례가 된 것이다. 사실, 요 근래 들어와서 뭔가가 맥이 빠지고 피곤했다. 무기력감이 시도때도 없이 나를 엄습하였으며 강의 시간 내내 창 밖을 내다보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비단 어제 오늘은 아니었다. 나의 매우 어렸을 때도, 사춘기 때에도 그리고 지금은 어른이라 부를만한 대학생 때도 이러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것은 고질적인 문제였다. 결국 나는 내 몸에 무언가 문제가 있으며 이것은 결코 육체적인 문제가 아닌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맙소사. 그런데 이 의사는 내가 바라는 '당신은 과대 망상이오', '정신 분열증이오.'라는 굉장히 이해하기 쉬운 말을 놔두고 '기억 상실'이라니. 그런 것은 어딘가에 대단한 충격을 받아야 거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진찰실을 나오면서 얼굴을 계속 찌푸렸다. 어떤 기억의 어느 부분을 잃어버렸다는 거야? 간호사는 나에게 잠시 대기하라며 자신의 업무를 봤다. 나는 병원의 가죽 소파에 앉아서 내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보같은 소리! 잃어 버린 기억을 어떻게 다시 찾는단 말인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찾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리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까의 잃어버린 기억 보다 더욱더 긴박한 문제는 그것이다. 기억이 훼손되었다는 것. 훼손된 기억은 이제 어떻게 다시 정리해야 할 지 그것이 너무나 문제였다.
"민준홍님! 투약하십시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돈을 지불하고 약을 받았다.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나는 알약이 나의 구세주가 되는냥 소중히 안주머니에 넣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매연과 소음 천지였고 나는 적당히 음침한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수업은 마쳐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강의가 시작되어서도 나는 줄곧 그 생각뿐이었다. 망할. 어디서부터가 잘못되었는 지와 무엇이 잘못되었는 지를 내가 판단해야 한다니. 그런 건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해주는 거라고. 지루하고 긴 강의가 끝나고 친구에게로 갔다. 2살 아래인 후배 준희다. 같이 조촐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러 갔다. 원목과 노란 나트륨 등의 색이 잘 어울리는 우리가 자주 가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묻는다.
"병원에서는 뭐래?"
"내가 기억을 잃었대."
그녀는 마시던 맥주를 코로 뿜어낼 듯이 맥주잔을 잡고 맹렬하게 웃었다. 그에 비해 나의 인상은 더욱 구겨졌고.
"웃지마, 나는 심각해. 내 기억중 일부가 잘못되었거나 지워졌다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좀 돌리고 키득거린 다음에 테이블에 바짝 붙어 혀를 차기 시작했다. 알코올에 물들어 홍조를 띈 그녀의 모습이 예뻐 보인다.
"그건 모순이야."
"왜?"
"너의 기억이 잘못되거나 지워졌다면, 이렇게 생각해볼까? 그 병원에 갔다왔다는 너의 기억 잘못되었다고 넌 판단할 수 있냐? 마치 '모든 그리스 인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얘기한 그리스인의 말과 같아."
똑똑하네, 계집애. 준희는 글라스의 맥주를 낼름 비웠다. 나는 그녀의 잔을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채워주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건 객관적인 기억이야."
나는 처방전을 보여줬다. 이름도 당당히 기억 상실증이다. 그것은 위엄을 가진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깟 것이 감히 나를 부정하려하는가. 그녀는 내가 바로 몇 시간전에 지었던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끌어 올렸다.
"의외로 심각하네?"
다시 한번 글라스를 끌어들려 마시는 폼이 능숙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녀는 나의 병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니라면 저 앙큼한 계집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애써 무관하려는 것이라든가. 어느 쪽이건 좋아. 나 역시 글라스로 맥주를 마셨다. 쓰고 달다. 나는 일단 내 기억을 다시 찾아내고 정리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일을 정리하였다. 예를 들자면 계곡에서 유리병을 깨서 엄지 손가락 반 정도를 잘라먹은 일 같은 거 말이다. 그건 내 엄지 손가락에 상처가 나있다. 그건 확실한 기억이다. 그런데 이게 유리병이 아니라 유리창에 베인 거라면? 아니라면, 계곡이 아니라 바닷가라면? 경우의 수가 우수수 늘어나버린다. 이제 내 기억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취기가 조금씩 들어오자 이제 더더욱 확실하다고 느끼는 것조차 의심스럽게 보였고 틀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묻는다.
"넌 내 여자 친구야? 아니라면 애인? 아니라면 설마 너 원수인거야?"
그녀는 별 이상한 녀석 다 보겠다는 듯이 말한다.
"불행히도 네 여자 친구다."
그렇구나. 이 아이는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았으니 일단 이 여자와 내 관계는 확실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이 여자를 좋아했는 지가 궁금해져버렸다. 이 여자의 어떤 점이 좋았는 지, 어떤 모습에 반한 건지, 이 애가 나를 좋아했냐고 말했는 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억은 감정을 조정하는 구나. 씁쓸하게 웃으며 취기 때문에 그런 망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실만큼 마셨는 지 주섬주섬 일어나려고 한다.
"나 내일 레포트 제출할께 많아. 정리할 것도 많구. 일단 술 마시고 멀쩡하게 얘기하는 거 보니 크게 아픈 것 같지는 않구나."
주희가 일어서며 잠시 휘청한다. 재빨리 옆으로 다가가서 팔을 잡아준다. 이상하다? 이 아이는 이렇게 취하는 일이 없는데. 아니, 취한 일이 많았었나? 내가 아는 주희는 몇 시간이고 술을 마시는 아이였다. 그런데 겨우 맥주 몇 잔 마시고 취하다니. 난 잠시 테이블을 내려다 보았다. 분명히 맥주를 담아둔 큰 피치가 비어있었다. 둘 중의 하나는 많이 마셨을 것이다. 나는 내가 저것을 다 마셨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녀가 다 마셨을 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취기 탓으로만 돌릴 수 가 없었다. 모든 것이 어지러웠고 굉장히 어려웠다. 정말 기억 상실증인가보다. 그녀는 잠시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날 보며 얘기했다. 내 자취방으로 가자. 자취방? 그래. 그녀는 분명 고향이 서울이 아니고 자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집이 서울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그런데 자취방이라니? 하지만 학교에서 주말마다 집에 내려간다고 얘기하는 그녀가 기억이 났다. 이런 경우에는 준희가 취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 편할까? 그냥 이 아이는 서울이 고향이고 서울에 집이 있으면서도 엉뚱하게 자취방으로 가자는 것이 아닐까? 준희가 취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른채 일단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한 다음 무작정 나왔다. 준희는 그저 내 팔을 꼬옥 붙잡고 고개를 기댄 채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만 갔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가야만 하는 곳은 어디인가? 집이겠지. 스스로 대답하며 집으로 가려고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나의 집이 어디있는 지 기억이 안 난다. 준희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이 계속된다. 나는 무슨 얘기인지 분간 할 수 조차 없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굉장히 어두우면서도 밝은 거리를 걸어간다. 몇 번이고 자동차의 헤드라잇이 나의 몸을 훑고 지나갔으며 나의 정신은 더욱 맑아지면서 마찬가지로 기억이 모두 녹아서 그림자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계속 움직이고. 나는 내 기억의 모든 것들을 그림자에 녹힌 채 마냥 걸어만 가고 있었다. 이 여자가 깨어나면 나는 모든 것을 물어봐야지. 내가 누구인지. 어느덧 준희의 웅얼거림이 조금은 커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확연히 알아들을 정도가 되었다.
"바보야. 우린 헤어진 1주년 기념으로 만난 거야. 네 기억 모조리 지워져버렸으면 좋겠어. 우리가 마냥 즐거웠던 그때의 기억으로 네 자신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수많은 중얼거림이 끝나고 그녀의 말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기억 같은 거 우스운 거야. 네가 그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누구라도 자신의 기억은 지워지고 또 왜곡되는 거야."
그렇구나. 준희의 상처가 가슴속에 파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왜 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난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에게 동정으로 비스켙을 던지는 것처럼 이 여자에게 동정을 느껴서 아픔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파해야 하는 이유라면 기억이 관리하고 있었고 기억이 부재중인 이상 그 이유는 무의미 하니까. 그러나 나는 그녀를 마치 이해한다는 것처럼 다정하게 감싸안고 걸었다. 다시 또 많은 차가 지나다니고 나는 내 옷에서 약봉투를 꺼냈다. 거기에는 '기억 상실증'이란 병명이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란 말야. 난 내 기억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한단 말야. 과장된 몸짓으로 약봉투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힘차게 걸어갔다. 기억은 다시 만들면 되는 것이고 나는 그녀에게 내일 좋아한다고 얘기할 것이다. 이렇게 따스한 목덜미를 가진 여자는 내 기억에 없으니.
2002년 5월 10일 금요일.
v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