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그 날이 찾아왔다. 3월 14일.. 여학생들이 기대하는 날이었다. 마희는 정말 많이 받았다.
“너는 받았어?”
“아버지랑 그 자식한테.. 너는?”
“나도 아빠한테..”
은오와 안나가 부러운 시선으로 쇼핑백으로 몇 개분의 초콜릿과 사탕을 받은 마희를 바라보았다.
“마성의 여자 같으니라구..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내가 좀 그렇지..? 어떻게.. 나누어 먹을까?”
“됐어~.”
“나도 됐어..”
은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날 담임인 우진은 막대사탕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와 여학생들, 남학
생들 할 것 없이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은오는 피식 웃었다. 수업을 마치고 은오는 안나와
마희와 인사를 하고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부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사탕생각에 주머
니에서 사탕을 꺼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소 짓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고 공부를 하기 시작
했다. 늦게까지 공부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동동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안 만나려나..?”
하지만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실망하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갔다. 문득 오늘도 기념일일거라는 생각에 은오는 찻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갔다. 이제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아서 안경이 뿌옇게 되지 않았다.
“어?”
은오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이모가 미소를 지었다. 이모 옆을 지나가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대추차 주세요..”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오가 등을 돌리고 차를 마시고 있는 우진에게 다가갔다. 목소리를 조금 바꾸어 그를 불렀다.
“우진씨..”
그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등 근육이 긴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은오가 움찔했다. 은오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죄.. 죄송해요.. 장난이 지나쳤어요..”
그가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은오를 바라보았다.
“은오야..”
그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가슴이 아파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은오를 바라보았다.
“장난을 쳐 놓고 울면 어떻게 해.. 화를 낼 수가 없잖아..”
은오가 울음을 참느라 어깨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자 바닥으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인마..”
이모는 물론이고 가게의 다른 손님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수군거리자 우진은 은오의 손목을 잡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걸어갈 동안에도 은오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만 울어.”
“죄송.. 흑.. 해요.. 제가..흑흑.. 너무 큰.. 흑.. 잘못을.. 흑흑..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흑흑..그렇게..흑.. 놀라실지 몰랐어요..”
은오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낌을 참으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울던가 말하던가.. 하나만 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흐응.....”
은오가 입술사이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헛수고로 돌아가자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울었다.
학원에서 집으로 오자 엄마가 안나의 손을 바라보셨다.
“왜 빈손이야?”
“응?”
재원이 피식 웃더니 인사를 하고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내가 언제 받아오는 거 봤어요?”
“그래도.. 우리 딸이 인기가 그렇게 없나? 미인... 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데..”
“엄마는.. 주무세요.”
안나도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침에 새아버지와 재원에게 받은 선물을 풀어보았다. 새아버지는 고급스러운 초콜릿이 들어있는 커다란 상자였다.
“오~~. 맛있겠다..”
안나는 한 개를 입에 넣고 재원이 준 상자를 집었다.
“쪼잔하기는.. 여자친구한테 주는 건 사이즈가 엄청 크더만..”
안나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선물상자를 바라보다 포장지를 풀었다.
“어? 초콜릿이 아니네..”
고급 주얼리 마크가 찍혀 있는 상자를 열어보니 예쁜 나비 모양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혹시 선물이 바뀐 건 아닌지 상자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쪽지나 편지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재원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이 조금 열리며 재원이 고개만 쑥 내밀었다.
“왜?”
“저기.. 선물이 바뀐 것 같은데?”
“안 바뀌었어.”
그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인상을 쓰고 있는 그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 왜?”
“정말.. 이게 나한테 주는 거라고?”
그녀가 목걸이를 들어 보여줬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구나? 그렇지? 그게 그렇게 신기해서 피곤한 사람을 괴롭히는 거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별 말씀을..”
그가 문을 닫았다. 안나는 볼에 바람을 넣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목걸이를 들어 바라보았다.
“무슨 비싼 선물을.. 아하~. 카메라 때문이구나? 그 카메라가 엄청 비쌌다는 걸 알아줬구만~.”
그녀가 피식 웃으며 목걸이를 상자에 다시 넣었다.
재원은 그녀가 방문을 두드릴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아까 학원가는 길에서부터 긴장하고
있었는데 별 반응이 없어서 안 풀어봤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언제 노크를 할지 몰라 아직 교
복을 입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 노크를 하면 당황할까 봐서였다. 이제 그는 편안한 마음
으로 교복을 벗고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 아래에 서서 물을 틀었다. 머리를 적
시다가 물을 껐다.
“표정을 보니.. 정말 처음 받은 것 같은데?”
재원이 피식 웃고는 다시 물을 틀었다.
마희는 집에 와서 먹지도 않는 초콜릿, 사탕을 부모님께 드렸다.
“하나 먹어보지?”
마희가 부모님을 노려보았다.
“다시 돼지 되라고? 많이 드세요..”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런닝머신 위로 올라가자 부모님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2kg 아령을 양 손에 들고 바른 자세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 새 은오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다. 우진은 수퍼에서 사온 음료수를 그녀에게 내밀었
다. 은오가 받아들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는 한 숨을 삼키며 그녀 손에 쥐어 주고 그
도 옆의 그네에 앉았다.
“누가 보면.. 내가 엄청 나쁜 사람 같잖아. 잘못을 한 사람은 넌데 말이지..”
“죄송해요..”
그녀가 입술을 깨물자 그가 한 숨을 내쉬었다.
“또 울라고 한 말은 아니고.. 제발.. 그만 울어. 원래 그렇게 눈물이 많나?”
“그건 아닌데요..”
“괜찮아.. 나한테 우진씨라고 부른 사람이 네가 처음도 아니고..”
“하지만..”
은오가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와~. 얼굴 장난 아니네..”
은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반대편으로 돌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목소리가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아직도 괜찮지 않은가보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주제넘게 행동해서 정말 죄송해요.”
“미안하지?”
은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그럼 이번 중간고사에서 담임으로서 기 좀 살려주면.. 용서 해 줄게.”
“기를.. 살려드려요?”
“어? 은오야!”
은오는 그네에서 벌떡 이러나 이제 집으로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오 부모님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올해 담임 맡고 있는 유우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은오 아빠가 손을 내밀어 우진과 악수를 하시면서 미소를 지으셨다.
“저희가 가게일로 바쁘다 보니.. 고 3이 되었는데도 찾아뵙지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은오가 잘 하고 있어서요.”
“그런데 지금은 왜 은오와 함께 계셨는지..”
부모님이 분명 울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은오를 바라보고 다시 우진을 바라보았다.
“아, 그게..”
“중간고사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내가 울고 있는데 선생님이 위로해주신 거에요. 선생님도 저쪽에 사시거든요.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아.. 이런.. 선생님을 귀찮게 해드렸구나?”
“네..”
은오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우진이 “아닙니다. 시험 스트레스는 다른 학생들도 흔히 있는 일인걸요. 오히려 학생에게 도움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럼, 피곤하실텐데..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선생님도 조심해서 가세요.”
“은오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도 선생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아.. 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봬요.”
“그래. 그럼.”
우진이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바라보던 은오도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이불 속에 누워있던 은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은오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녀는 이불을 입에 물고 조용한 비명을 질렀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세 사람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고~. 좋다~.”
안나가 마희의 허벅지를 베고 벤치 위에 누웠다.
“야.. 치마 입고 뭐하는 거야~.”
마희가 안나의 치마를 손으로 내려주며 말했다.
“안에 반바지 입었다니까 그러네.. 누워서 보니까 좋다.. 하늘도 푸르고, 흰 구름도 예쁘고, 햇살이 비쳐서 사또밥같은 벚꽃도 예쁘고..”
“뭐..? 과자말이야..?”
“응.”
마희가 안나의 말에 키득거렸다. 안나가 고개를 뒤로 꺾어 참고서를 보고 있는 은오를 거꾸로 바라보았다.
“그냥 시험 봐도 전교 5등 안에 들면서.. 왜.. 잘 보이려고?”
은오가 미소를 짓자 마희도 웃었다.
“좋댄다~.”
“너는 공부 안해도 돼?”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집에서도 하고, 학교에 와서도 하고.. 내 뇌에서 열이 나지 않을까 몰라..”
은오가 키득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안나를 바라보았다.
“못 말려.. 너 때문에 집중이 안 되잖아..”
“여기까지 나왔으면 조금 쉬자. 꽃이 예쁘잖아..”
“그러게.. 예쁘네. 시험 끝나고 어디 놀러갔다 올까?”
“그럴까?”
“선생님도 같이 가자고 해 볼까?”
“글세.. 어렵지 않을까?”
“시험 잘 봐. 전교 1등하면 선물로 같이 가줄지 아냐?”
“그래 주실까?”
“한 번 시도는 해 보자고.”
“응.”
재원과 그의 친구들이 점심 운동을 마치고 수돗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 중 한 명이 벤치에 누워 있는 안나를 보았다.
“야.. 저기 네 누나 아니냐? 뭐야.. 여자가.. 아니면 여자이길 포기한 건가?”
친구 녀석들이 키득거렸다.
잠시 후에 입가에 상처가 난 재원이 벤치로 다가왔다.
“어? 네 남동생 오신다.”
마희가 고개를 숙여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가 고개를 돌려 점점 다가오는 재원을 바라보았다. 은오가 그의 입가의 상처를 보았다.
“얼굴은 왜 저래? 싸웠나?”
“정말.. 손에도 상처가 있는데?”
은오와 마희의 말을 들으며 안나가 벤치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가온 재원이 그녀의 다리 쪽에 자신의 교복 재킷을 벗어 던지듯 덮어주었다. 그의 뜬금없는 행동에 안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하는 거야?”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뭐 보기 좋은 다리라고 그러고 있어?”
“나 반바지 입었어.”
“그럼 그렇다고 푯말이라도 세우던지..”
재원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야.. 멋지다~.”
“멋지긴.. 어디서 똥폼을 잡고.. 속에 반바지 입었다니까..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지나 말지? 싸가지..”
“그래도 동생이라고 챙겨주네..”
“별로 안 고맙거든?”
마희와 은오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바지 입었어도 일어나.”
“아. 진짜..”
안나가 일어나자 재원이 재킷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에 들고 짜증섞은 손놀림으로 재킷을 털었다.
그와 함께 학원에 가려고 학교 앞에 주차된 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세 명의 남학생들이 다가왔다.
“누나. 죄송합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90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아.. 재원이 친구 혁수요.. 지난번에 잠깐 인사 드렸었는데..”
“아.. 그래요..? 그런데 뭐가 죄송해요?”
“아..”
고개를 들은 그 남학생의 눈 아래 부근과 입가에 상처와 멍이 나 있었다.
“아까 누나가 벤치에 누워있을 때.. 농담을 했는데 재원이가 갑자기..”
“이 자식 엄청 맞았어요. 다시 한 번 더 누나에 대해 농담하면 죽는다고.. 같이 웃었던 우리들한테도 경고했구요.”
“잘 말해 주세요. 그 자식이 나를 안 본다고..”
“누나.. 부탁드려요.”
“알았어요.”
그 학생들이 인사를 하고 가고 나자 한 참후에 그가 나왔다. 그는 그녀를 안 바라보고 조수석에 올랐다. 안나도 뒷좌석에 올라 재원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안나가 문을 닫자 차가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와 아빠가 재원의 얼굴을 보고 놀라셨다.
“뭐야? 싸웠어?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올라가 볼게요.”
재원은 꾸벅 인사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너는 알아? 재원이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연고랑 소독약 어딨어요?”
안나는 구급약 상자를 들고 그의 재킷을 들고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가 방문을 열었지만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물었다.
“뭐야?”
“나 반바지 입었어.”
그가 눈을 감으며 미간에 주름을 깊게 만들었다. 안나가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어디 봐봐.. 나 좀 보라고..”
그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순간 그의 눈빛에 가슴이 아픈 것 같았다. 마치 꼭 체한 것처럼. 안나는 눈길을 돌리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 약상자를 바닥에 놓고 뚜껑을 열어 그 안에서 소독약을 꺼냈다.
“상처 보자고. 싸움 못하는 구나? 때려주기만 해야지, 왜 맞냐?”
안나가 다시 일어나 그의 입가의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주려고 하자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치웠다.
“그럼 네가 바르던지..”
안나가 소독약 뚜껑을 닫으며 그에게 내밀었다.
“반바지 입은 걸 다른 학생들이 다 알아도.. 그러지 마.”
“창피해?”
“여성스럽게 굴라는 거 아니야. 그냥.. 조심 좀 해.”
“조심하고 있는 건데?”
그가 턱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나 피곤해.”
“먼지 털긴 했는데 주말에 세탁해 줄게.”
그녀가 내민 교복재킷을 거칠게 가져간 재원이 문을 닫으려고 했다. 안나가 손을 들어 문을 잡았다. 재원이 턱근육을 긴장시키듯 하더니 힘없이 말했다.
“싸울 힘.. 없다고..”
“약 바르고 자.”
안나가 구급약상자를 건네자 그가 손에 들고 문을 닫았다.
“싸가지.. 기껏 귀여워 해주려고 했더니.. 왜 신경질을 내냐고..”
안나가 닫힌 문을 흘기듯 바라보고 입술을 뾰로통하게 만들고는 몸을 돌려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재원은 한 숨을 내쉬며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내가 왜 화가 났지?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뭐지..?”
그가 고개를 돌리자 구급약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젠장..”
그가 눈을 감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요일 오후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엄마가 밝게 미소짓고 계셨다.
“뭐해?”
“공부하죠.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머리도 식힐 겸.. 외출 할까?”
“네?”
외출 준비를 마친 재원이 문을 열고 나와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준비하고 내려와.”
“엄마.. 난 집에 있으면 안 돼요?”
“응. 안 돼.”
“진짜.. 시험이 코앞인데 외출은..”
문설주에 기댄 재원이 그녀에게 들리도록 궁시렁 거렸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공부 잘할 것 같으면 죄다 명문대 갈거야. 그치? 식힐 머리나 있나? 공부에 쓰는 머리가 아니잖아?”
“이 자식이..”
그가 비웃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안나가 방으로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싸가지.. 돌아왔구만.. 쯧..”
욕실로 들어가 외출준비를 했다.
네 사람이 같이 간 곳은 백화점이었다. 안나는 보기만 해도 눈이 커졌다.
“우와..”
“촌스럽긴..”
안나가 고개를 확 돌려 옆 자리에 앉은 그를 노려보았다.
“쳇!”
고개를 돌리고 문쪽으로 몸을 옮기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안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쇼핑을 시작했다.
안나의 표정이 혼자 너무 안 좋았다. 조금 앞서 걷고 있는 재원은 백화점에 와도 별로 이상할 게 없는 복
장이었지만 안나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스타일이었다. 청바지에 빨간 후드티셔츠에 운동화
차림이었기 때문에 안나는 창피했다. 재원이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무 촌스럽게 입고 온 거 아니야?”
“너는 여기 올 줄 알고 있었지? 힌트라도 주면 어디가 덧나냐?”
“내가 왜? 언제 물어보기라고 했나?”
‘치사한 자식..’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몰랐나?” 라고 대답했다.
“그거.. 그만 해.”
“뭘?”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고 한 것처럼 대답하지 말라고~. 기분 나빠.”
“얼굴에 다 써 있는 걸?”
“뭐?”
“단순해도 너무 단순한 거지.. 오늘 여기 왜 오자고 한 거겠어? 태어날 아기 용품 보러 오신 거잖아. 어머니 임부복도 새로 사셔야 하고.. 뻔한데 혼자만 너무 생각이 없는 거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앞서 가시는 엄마와 그 분은 유아용품을 파는 층에서 멈추어 걸어
가고 계셨다. 안나는 티셔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터덜터덜 걸었다. 뒤를
보던 재원이 놀란 표정으로 달려와 그녀의 모자를 벗겼다.
“뭐하는 거야. 정말 창피하게..”
재원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안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인 척 하면 될 거 아니야. 알게 뭐야..”
“뭐?”
“난 관심 없으니까.. 음식 파는 곳에 가 있을게. 그렇게 말씀드려 줘.”
안나는 다시 모자를 쓰고 몸을 돌려 지하 1층 식료품 파는 곳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재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식료품점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딸기상자가 쌓여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달려가 그 앞에 섰다. 그녀는 투명 플라스틱 상자를 하나 들고 코에 가까이 가져가 딸기향기를 맡았다.
“음~. 딸기.. 냄새 좋고~. 지금 딸기 철이 아닌데.. 백화점이라서 있는 건가?”
금액을 확인한 안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그렇게 비싸.. 딸기 씨에 금가루라도 뿌렸나..”
그녀는 그렇게 한 참을 딸기 향기를 맡다가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먹고 싶으면 사.”
흠칫 놀란 안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재원이 서 있었다.
“언제 왔냐?”
“냄새만 맡고 그냥 가는 거야?”
“너무 비싸. 냄새만 맡아도 행복하니까.. 그걸로 됐어. 쇼핑은 다 하셨대?”
“아직. 같이 있으면서 고르면 안 돼? 꼭 그렇게 싫은 내색을 해서 두 분 마음 아프시게 해야겠냐?”
“네가 보기에 내가 여우과로 보이냐? 아니지? 맞아. 난 여우보다는 곰이야. 억지로 하는 건 얼굴에 다 표시나. 너도 아까 말 했잖아. 얼굴에 다 써 있다고.. 나 대신 네가 하지 여긴 왜 왔냐?”
“네 동생이야.”
“알아. 태어나면 잘 해 줄거야.”
“태어나기 전에도 좀 잘하면 안 돼?”
“너나 잘해. 태어나는 아가가 널 보면 뭘 배우겠냐? 누나한테 야, 너 하는 거 보고 그 아이도 너한테 야, 너 하겠지.”
“너랑 태어날 아가랑 같아?”
“다르지. 그 아이는 너랑 절반은 닮았을테니까..”
재원이 턱에 힘을 주었다.
“비아냥거리지 마. 기분 나빠.”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두지 왜 건드려?”
“누나라고 부르면.. 잘 할 거야?”
재원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안나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자 재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안나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노력할 거냐고..”
“좋아. 너도 노력한다면 나도 노력해 볼게.”
“응.”
“불러 봐.”
“뭐?”
“불러 보라고~.”
“이 씨..”
“됐어, 그럼~.”
안나가 몸을 돌려 부모님이 계실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나..”
그녀는 들었다. 작지만 분명히 자신을 부르는 재원의 목소리를..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동생아. 부모님께 가자.”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재원이 뒤에서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가에 미소를 만들며 엄
마에게 갔다. 엄마가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셨다.
“안나야.. 이거 어때?”
“아들인지, 딸인지 아직 모르시죠?”
“응.”
“그럼 흰색이 좋을 것 같아요.”
“이거?”
“네.”
안나가 주위를 돌아보다가 작고 예쁜 아가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저녁에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안나가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재원이 서 있었다.
“동생.. 무슨 일이야?”
재원이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억지 미소를 만들며
봉지를 들어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가? 동생?”
“거 말끝마다.. 그렇게 할 거야?”
안나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재원을 바라보았다.
“누.. 후우.. 누나..”
“그래. 동생. 이거 나 주는 거야?”
“응. 오늘 수고했어.”
안나가 봉지를 받아 벌려 안을 바라보았다. 딸기가 들어있었다. 안나가 고개를 들어 재원을 바라보았다.
“이거..”
“오늘 부모님이 기뻐 보이셨어. 고맙게 생각해.”
“딱히 네 말 때문에 한 건 아니야.”
“알아. 열심히 한다고 성적이 오르진 않겠지만.. 이거 먹고 기분이라도 좋으라고..”
“이 씨..”
“그럼.. 열심히 해, 누나.”
재원이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건 또 언제 샀대..? 정말 좋은 동생이 되도록 노력하는 걸까?”
안나가 고개를 들어 재원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ㅋㅋ 그런가요..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잼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