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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은오는 우진에게 선생님 이상으로 생각하거나 바라보지 않았다. 마치 1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은오야, 매점갈래?”
쉬는 시간에도 책을 바라보고 있는 은오에게 안나가 물었다. 은오가 고개를 들어 마희와 안나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둘이 다녀올래?”
“그럼, 올 때 크림빵 있으면 사다줄까?”
“응..”
은오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안나와 마희가 교실을 나갔다.
“잠을 잘 못자는 것 같지?”
“잘 먹지도 않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걱정스런 얼굴로 공부하고 있는 은오를 바라보다가 은오가 좋아하는 크림빵을 꼭 사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교정에서, 복도에서 우진과 마주치면 은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
쳤다. 우진을 지나쳐가면 은오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건물을 돌아서면 벽에 기
대어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몸
을 돌려 가는 은오는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그 날 저녁에 우진은 찻집에서 석류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지수와의 기념일도 아니었다.
아니 얼마전부터는 이곳에 와도 지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늘 이 곳을 찾은 것은 자꾸 눈
에 보이게 그를 피하는 은오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려고 왔다.
‘뭐하는 건지.. 좋아하지 말라고 했다가 또 무시하지 말라고 하려고.. 정신 나간 녀석.. 그렇게 미움 받기 싫으면서.. 그렇다고 좋아한다고.. 어떻게 그래.. 어린 녀석을.. 나를, 내 집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어떻게 말하냐고.. 하지만.. 그래도 미움받긴.. 싫은데..’
복잡한 마음으로 그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우진씨?”
흠칫 놀란 우진이 뒤를 돌아보니 지수가 서 있었다.
“지수야..”
밝게 웃으며 지수가 의자에서 일어난 그 앞에 섰다.
“오랜.. 만이야.”
“그래. 건강하지?”
“응.”
“앉아서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지수가 앉으려고 하자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 누구 기다리던 중이라..”
지수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나를.. 잊었구나? 다른 사람.. 생겼어. 그치?”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야? 예뻐?”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보호해주고 싶고.. 그래.”
“뭐야? 나한테도 그런 표현 한 번도 해 준적 없으면서.. 질투나네?”
우진의 표정이 조금 싸늘해졌다.
“여긴 왜 왔어?”
“이모가 주시는 차 마시고 싶어서.. 가끔 와. 우리.. 기념일이 아닌 날에.. 당신.. 얼굴 보면 미안하니까..”
“뭐가.. 뭐가 미안해?”
“나.. 돈 받았어. 그 돈으로 건물도 사고 제법 괜찮은 사람이랑 결혼도 하고.. 아이 낳고 잘 살아.”
우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은 거야?”
“가족 버리고 날 선택해 줄만큼.. 날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하지 못했어. 결국 상처받는 건 내가 될 거다.. 겁먹고 도망친 거야.”
“난 가족 버리고 널.. 선택했을 거야.”
“아닐걸?”
“뭐?”
“당신.. 항상 내가 먼저 했어. 뭐든지.. 첫눈에 반한 건.. 당신이 아니라.. 나야. 내가 먼저 반
했었어.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니까 당신 어머니가 만나자고 했을 때도 엄청 겁났었
어. 오히려 나랑 헤어지고 나서야 당신이 나를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 기념일마다 여기에서
기다리는 거..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당신이랑 마음이 달라졌으니까..”
“미안해..”
“그 말.. 섭섭해. 정말 내가 당신을 더 많이 좋아했다는 걸 확인해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그래서.. 이번 여자는.. 어떻게 할 건데? 가족들 버리고.. 그 여자를 선택할거야?”
“몰라.. 그 녀석이 날 버릴까봐.. 걱정이거든.”
지수가 놀란 표정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당신.. 변했다. 더 멋있어진 것 같아. 이번 사랑은 꼭 이뤄지길 바래.”
“응. 너도.. 건강해라.”
지수는 이모한테서 차와 떡을 테이크아웃해서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은 우진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날 은오는 찻집에 오지 않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요즘 은오는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마희가 은오를 불렀다.
“은오야, 이모가 이따가 집에 갈 때 찻집에 들렸다가 가래.”
“왜?”
“몰라.”
“알았어.”
집으로 가기 전에 잠깐 찻집에 들렸다.
“이모, 저 왔어요.”
“왔어? 저기에 앉아.”
“네.. 그런데 왜 오라고 하셨어요?”
이모가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밥상을 차려주셨다.
“이모..”
“마희가 한 걱정을 하더라.. 제대로 먹고 있기는 한 거야? 아니지? 안색이 많이 안 좋아. 이거 다 먹고, 밑반찬 싸놓았으니까 갈 때 가져가.”
“이모.. 이렇게 안 해 주셔도 되요.”
“왜.. 맛이 없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죄송해서.. 죄송해서 그래요.”
“그럼, 다 먹고 가. 알았지?”
“네.”
은오는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먹는 다는 생각에 숟가락을 들었다.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이모
가 바라보고 계셔서 그녀는 나름 열심히 먹고 있는데 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오는 남
은 밥을 한입에 넣었다. 그리고 물을 마시면서 씹어 삼켰다. 그녀는 이모가 싸준 찬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 저 갈께요.”
“천천히 먹지..”
“다 먹었어요.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또 올게요.”
그녀는 이모에게 인사를 하고 우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그녀는 그를 지나쳐 문을 열고 집으로 걸어갔다. 우진은 그런 은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고 있는 마희이모와 눈이 마주쳤다.
“저는 커피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우진이 자리에 앉자 잠시 후 이모가 커피가 담긴 찻잔을 들고 나오셨다. 그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잠깐 앉아도 되요?”
“네. 그러세요.”
이모가 우진 맞은편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는 거에요?”
“네?”
“은오는 내 조카 친구이기도 하지만, 내 딸 같은 아이기도 해요. 바쁜 부모님이 잘 챙겨주지 못해도 불평하지 않고,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착한 아이는 처음 봤어요.”
“네..”
“왜 은오한테 전 애인을 만났다는 걸 말해주지 않으시는 거에요?”
우진이 차를 마시려고 찻잔을 들다가 멈칫하고 이모를 바라보았다.
“만나셨잖아요...”
“이모님..”
“아프게 하지 마세요. 충분히 힘들고 아픈 아이를.. 아프게 하지 마시라구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래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모가 우진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은오는 일어나면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욕실에 가서 지난밤에 먹은 것을 고스란히 토해내야 했다. 하지만 그다지 좋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도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은오야.. 너 왜 그래? 아파?”
“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
“감기인가..”
“그래? 보건실 가자.”
은오가 고개를 저었다. 1교시 수업이 영어였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토해서 지금은 좀 괜찮아.. 수업 시작하겠다.”
우진이 들어왔지만 은오는 명치가 너무 아파왔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선생님.. 은오가 아픈 것 같은데.. 보건실에 데리고 갔다와도 되요?”
은오의 창백한 얼굴을 지켜보고 있던 안나가 손을 들고 말하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
안나가 은오의 팔을 잡고 등으로 다른 팔을 둘러 안았다. 우진은 교과서를 설명 하면서 교실
뒷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은오와 안나를 - 정확히는 은오를 -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은오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은오야!”
우진이 교과서를 교탁위에 내려놓고 교실 뒤로 뛰어가 은오를 안아들었다.
“병원에 데리고 갔다 올 테니까 자습하고 있어. 안나는 교무실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알았지?”
“네.”
우진이 교실을 빠져나오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마치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는 은오를 바라보았다.
“이런 바보같으니라구..”
우진이 그의 차 뒷좌석에 은오를 눕히고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어, 형.. 웬일이야, 이 시간에.. 학교에서 수업할 시간 아닌가?>
“환자 한명 데려 간다. 응급실에 자리 하나 비워 놔. 이름은..”
그가 설명을 하며 차를 조금 빠르게 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 내가 괜히 이모한테 그런 말을 해서..”
마희가 걱정스런 얼굴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응?”
“요즘 밥을 잘 못 먹는 것 같다고.. 어제 아마 밥 차려주셨을 텐데.. 그거 먹고 체했나봐..”
“아.. 급체하면 저럴 수 있나?”
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많이 먹고 급체한 적이 있거든.. 증상이 비슷했어.. 물론 나는 튼튼해서 기절은 안 했지만..”
“후~~. 선생님이 같이 가셨으니까.. 괜찮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같은 반 학생인 진아가 말했다.
“뭐가 이상해?”
“유쌤 말이야.. 학생이 기절한 거에 너무 놀라신 것 같던데..”
“당연히 놀라지.. 나도 놀랐는데?”
“요즘 은오를 자꾸 바라보시는 것 같던데?”
“전교 1등이면 나라도 바라보겠다. 은오덕분에 지난 달에는 보너스도 받으셨다던데?”
“그래?”
“응. 그 돈으로 회식하셨다고 하셨어.”
“아.. 그랬구나..”
“은오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마희와 안나가 움찔했다. 그런데 조용히 책을 보고 공부하고 있던 반장 하성이가 말했다.
“여학생들 중에 담임 안 좋아하는 학생도 있었냐?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게 우리랑도 격이 없이 운동도 같이 하고.. 권위의식도 별로 없어서 남자인 나도 좋아하는데?”
“하긴.. 나도 좋아해..”
마희와 안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마희가 고개를 돌려 하성이를 바라보았다. 하성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멋지다..”
“그래?”
“응. 멋진 것 같아.”
“나도 쫌.. 그런 것 같아.”
둘은 조그맣게 웃었다.
은오가 다시 눈을 뜨자 하얀 천정이 눈에 들어와 자신이 보건실 침대에 누워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주위가 시끄러워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
“깼냐?”
“네..”
“.... 잠깐 기다려.. 의사 불러 올게.”
우진이 일어나려고 하자 은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은오야..”
“조금만요.. 여긴 학교가 아니니까.. 조금만..”
우진이 다시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은오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아프라고 했어?”
은오가 피식 웃다가 아픔이 느껴지자 인상을 썼다.
“그게 그 말이죠.. 난 선생님을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니까.. 아플 수 밖에 없잖아요..”
“좋아한다더니.. 언제 바뀐거야..”
“좋아하는 건.. 그냥 좋기만 한데.. 사랑은.. 아픈 것 같아요..”
“넌 생각하는 게 여고생이 아닌 것 같아. 애 늙은이..”
“여고생.. 아니에요?”
은오가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들어 까슬거리는 그의 턱을 만지며 물었다. 그가 은오의 손에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그래.. 여고생.. 아니야.. 아니게 됐어.. 덕분에 난 변태가 됐고..”
“풉... 아...”
은오가 웃다가 다시 아프자 우진이 “의사 불러올게.” 라고 말하고 일어나 의사에게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찾아온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마희와 안나가 보였다. 병실도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
“기지배...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괜찮아?”
두 사람이 눈물을 글썽이며 은오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괜찮아. 좀 어지러운 것 말고는 괜찮아.”
“도대체 얼마나 안 먹은 거야.. 체중도 많이 빠진 것 같다던데?”
“훗! 그런가? 집에 체중계가 없어서 몰랐네..”
“웃어? 웃음이 나와? 너 쓰러질 때 내가 놀란 걸 생각하면..”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해.”
“아니야.. 넌 힘든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옆에 있어 줬잖아. 지금도.. 이렇게 걱정해 주고.. 고마워.”
“기지배..”
은오가 그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 꿈 꿨어..”
“응?” “무슨 꿈?”
“선생님이랑 손 붙잡고 있다가.. 아닌가..”
은오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녀의 엄마가 오셨다.
“엄마..”
“어.. 어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어요? 넌.. 괜찮아?”
“가게는 어떻게 하고..”
“아빠 혼자 보시라고 했어. 딸내미가 쓰러졌는데 가게를 열고 싶냐고.. 싸웠지..”
“괜찮아요.. 어서 가 보세요.”
“싫어. 오늘은 네 옆에 있을거야.”
“그럼, 저희는 갈게요.”
“다음에 또 봬요, 어머니.”
"그래요. 고마워요.“
안나와 마희가 인사를 하고 은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병실을 나갔다.
“혼자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나만 힘든가? 엄마, 아빠가 더 힘드시지.. 나 대학교 장학금 주는 데로 갈 거에요. 그리고 아
르바이트도 해서 엄마, 아빠 고생하시지 않게.. 그럴 거에요. 졸업하면 돈 많이 주는데 취직해
서.. 여행도 가고, 비싸고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그래.. 우리 딸.. 말만으로도 고마워. 그런데.. 그런 거 다 필요없어. 너만 건강하면 돼. 알았어?”
“네.. 앞으로는 건강하면서 돈도 많이 벌게요.”
“그래..”
엄마가 은오의 이마에 입을 맞추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누구야, 형? 지난번에 감기 같이 걸려서 진료 받은 그 학생 아니야?”
“우리 학년 전교 1등인 학생이야. 귀한 대접해 줘야지.”
“이야~~. 전교 1등?”
“그래 인마. 저 녀석 덕분에 보너스도 받았다구..”
“귀~한 몸이신데.. 그렇게 건강하진 않은데?”
“그래?”
“특별하게 큰 병이 있는 건 아니고.. 일단 영양이 불균형이야.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은데? 아직 자라는 학생이, 그것도 귀한 몸이 영양불균형이면 치명적이라고.. 수능시험보다 저렇게 쓰러지면.. 전교 1등도 소용없는 거 아니야?”
우진이 은오의 병실을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나는 그 날 밤, 잠을 못 이루고 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정말.. 은오.. 못 말려.. 얼마나 놀랐는지.. 그런데 오늘 좀.. 분위기가 이상했는데.. 아닌가..?”
안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발을 콩콩 부딪치며 미소를 지었다.
“물개야?”
안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다가오는 재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나온 거냐? 설마.. 보고 있었냐? 소름 돋게?”
“미쳤나? 부모님이 나가보라고 하셔서 나온 거거든?”
“아.. 그래? 마당에 있는데 뭘 걱정하시고..”
“밤 12시에 정신 나간 여자처럼 그네를 타니까 걱정을 하시지.”
“뭐?”
“그럼 아니야? 무슨 일인데 그런지 알아보라고 보내셨어. 나 피곤해. 그러니까 빨리 말해. 뭐가 문제야?”
“없는데?”
“그럼 들어가서 자.”
“응. 알았어.”
“왜.. 왜 그래? 받아치지 않고.. 이상하게..”
“야.. 사랑은.. 참 대단한 것 같아.”
“뭐?”
“그냥.. 힘들고, 가슴 아프고, 눈물 나게도 하지만.. 그렇지만 참 멋진 것 같아.”
“뭔 소리야..”
안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뭘 알겠니.. 아직 솜털도 보송보송한 네 녀석이.. 들어 가자.”
“누나 보다 어른이거든?”
“웃기시네~.”
“키도 한 참 작으면서..”
“이 자식이~!”
안나가 팔을 휘두르자 그가 피했다.
“어라?”
그녀가 다시 팔을 휘두르자 그가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키가 작으니까 손이 아니라 발을 사용해. 그 편이 유리해. 알았어?”
“난 원래 그렇거든?”
안나가 발을 휘둘러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아.. 누가 지금 하래?”
안나가 웃으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으로 다가왔다.
“잡히면 죽어.. 누가 내 몸에 손대래? 엉?”
안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2층으로 달려갔다. 재원이 현관문을 잡고 열었을 때 이미 안나는 자신의 방문을 닫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오셔서 재원을 바라보았다.
“뭐래?”
“별일 아닌가 봐요. 이상한 소리만 해요.”
“이상한 소리?”
“네. 뭐.. 사랑은 대단하다.. 그러던데요?”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2층을 바라보셨다. 그러다 재원을 바라보셨다.
“미안해. 늦은 시간에..”
“아니에요. 안 자고 있었는데요.”
“고마워. 얼른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재원은 인사를 하고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안나의 방문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안나가 그가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품을 하며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다음 날 은오는 엄마를 아빠에게 보냈다. 그리고 퇴원수속을 밟기 위해 혈압이랑 체온을 재러 온 간호사언니에게 물었다.
“저기.. 퇴원하려고 하는데요.. 접수하는 데 가면 돼요?”
“제가 알아보고 말씀 드릴께요.”
“네.”
다시 찾아 온 간호사는 “퇴원시키지 말라고 하셨어요. 병원비는 이미 일부 계산 되셨어요.” 라고 말했다.
“이미.. 일부.. 계산 됐어요?”
“네.”
뭔가 말이 안 맞았다. 의사는 아직 퇴원하길 원하지 않았는데 돈을 누가 벌써 냈다는 건.. 은
오는 짐작을 하고 “아..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나간 후에 그녀는
환자복을 벗고 교복을 입으려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의 다 맞은 링거를 뺐다. 그리고 오른 팔
을 구부린 상태에서 환자복을 벗으려고 왼쪽 팔을 빼고 오른쪽 팔을 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
고 우진이 들어왔다.
“아!”
“아!”
우진은 들어와 얼른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은오도 몸을 돌려 다시 환자복을 입고 앞을 여몄다. 뒤를 돌아 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셔서 문을 닫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런가?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우진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서서 말했다. 은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 제가요.. 꿈을 꿨는데요..”
“응? 무슨 꿈?”
“선생님이.. 변태인 걸 인정하시는 꿈이요..”
“....”
“꿈.. 이에요?”
“....”
“아니죠? 아닌 거.. 맞죠?”
“은오야..”
그는 여전히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가 어느새 그의 뒤에 섰다.
“그럼.. 도망가지도.. 밀어내지도 말아 주세요..”
은오가 그의 등에 이마를 댔다. 그리고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곳에 오른 쪽 볼과 귀를 대
고 눈을 감았다. 우진이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배 앞으로 마주 잡고 있는 은오의 손을 잡
았다. 그리고 천천히 풀면서 몸을 돌려 은오를 바라보았다. 은오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나 때문에 네가 이것보다 훨씬 더 아플까봐.. 무섭다..”
은오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플 때마다.. 이렇게 안아 주세요.. 그거면 충분해요..”
은오가 그의 품에 안기자 우진도 은오를 꼬옥 안았다.
“아직 학생이고, 어리고, 세상물정도 모르는 꼬맹이를.. 사랑해.. 사랑한다, 은오야..”
은오가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랑해요..”
은오와 우진은 서로를 안은 팔에 힘을 더 꼬옥 주었다.
“그런데.. 수액은.. 네가 뺐니?”
“....”
은오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우진은 은오를 안았던 팔을 풀고 그녀의 양쪽 어깨를 잡아 살짝 떼어내며 은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은오가 눈길을 피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이.. 아직 퇴원하면 안 돼.”
“하지만.. 돈이 없어요. 선생님이 1인실로 잡으신거죠?”
“당연하지. 낯선 사람들이랑 같이 둘 줄 알았어?”
“조금 전까지는 병실도 잡아 주시고, 입원비도 대신 내주신 선생님이 싫었는데요.. 지금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왜?”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으면.. 이렇게 못하잖아요..”
은오가 수줍은 미소를 짓자 우진이 얼굴을 붉혔다.
“흠.. 누가 들으면.. 뭐.. 엄청 나쁜 행동을 했는 줄 알겠네.. 흠.. 어험..”
은오가 당황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있어. 병원 밥 잘 먹고, 조금 건강해져서 퇴원하자.”
“폐 끼치기 싫어요. 퇴원해서 잘 먹을게요.”
“고집은.. 의사한테 물어보고 올게.”
“네. 그 동안 옷 갈아입고 있을게요.”
“알았어. 문 잠그고 해. 여기 자물쇠 있으니까..”
“알았어요.”
우진이 밖으로 나가자 은오는 자물쇠를 잠그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우진의 차에 올라타려고 뒷좌석쪽으로 가려는데 그가 조수석문을 열었다.
“아니에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여기에서 누가 본다고.. 얼른 타.”
은오가 미소를 지으며 조수석에 올랐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우진이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출발했다.
“우진이 다니는 학교 학생 아닌가? 교복을 입고 있는데..”
“네, 맞는 것 같습니다.”
“알아봐요. 누군지.. 되도록 상세하게..”
“네.”
차안에 있던 우진의 어머니인 장여사가 비서가 먼저 내려 문을 열자 천천히 내리면서 선글라스를 썼다.
우진은 가는 길에 은오와 죽집에 들렀다.
“천천히 먹어.”
“네. 서..”
은오가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일부러 의식하면 더 오해받는다구..”
“네. 선생님도 드세요.”
“그래.”
두 사람은 따뜻한 죽을 든든히 먹고 은오 집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은오의 집을 바라보던 우진이 조그맣게 한 숨을 내쉬었다.
“항상 기분이 그랬어. 불이 꺼진 집에 들어가는 너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더라구..”
“저만 그런 거 아니에요. 부모님이 모두 직장생활하시는 아이들은 전부 그런데요?”
“그건 그렇지만..”
“마희랑 안나에게 말 해야겠죠?”
“그래야겠지.. 후우~~.”
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운전대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불편하시겠죠?”
“그렇겠지? 안나는 몰라도 마희는 표시가 날 것 같은데..”
은오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순진하고 착해서 그래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죠..”
“그래도 네 친구들이니까.. 알긴 알아야 할 테지..”
그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너에게 맡기마.”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은오가 인사를 하고 내리려고 하자 우진이 은오의 손을 잡았다. 은오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불 꺼진 집에 들여보내기가.. 문 잘 잠그고 있어.”
“네. 그럴게요.”
은오가 우진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차에서 내렸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불을 켜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은오는 양 손으로 볼을 감싸고 눈을 감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해.. 정말 만화 주인공이 되어 버렸네.. 훗...”
우진은 한참을 그렇게 불이 켜진 은오의 집을 바라보다가 시동을 걸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은오는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 동안은 마음이 아파서 못 잤는데 어젯밤은 너무 설레
고, 이게 정말 꿈은 아닌지 확인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조금 늦
은 시간이었다. 은오는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그리고 감은 머리를 드라이
기로 대충 말렸다. 교복을 입고 안경을 썼다.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으러 갔던 은오가 돌아와
거울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버스정
류장을 향해 가면서 은오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다 결국 달리기를 시작했다.
지각을 면한 은오는 교실에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숨을 고르고 있었다.
“뭐야.. 왜.. 또 어디가 아픈거야?”
“그래? 또 아파?”
마희와 안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은오를 바라보았다. 은오가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응? 아침 인사하는 거야?”
“괜찮다는 것 같은데?”
은오가 숨을 고르며 피식 웃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나와 마희를 안았다.
“아... 지각하는 줄 알았네.. 반갑다, 친구들아..”
“응? 나도 반가워..” “퇴원 축하해..”
“응. 고마워.”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잘 먹으면 괜찮대.”
“여전히 안 좋아 보이는데.. 어제도 공부하느라 잠을 못 잔거야?”
“그건 아니고..”
“설마.. 고민 있어?”
마희가 큰 소리로 말하자 은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금방 소문이 날 것 같았다. 마희가 나빠서가 아니라..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 은오는 미안하지만 거짓말을 했다.
“며칠 빠져서.. 기말고사에 성적이 안 나올까봐.. 걱정 돼서..”
“너도 참..”
“그래.. 별걸 다 걱정한다..”
“걱정해야지. 앞으로 기말도 얼마 안 남았고, 수능도 곧 다가올 테니까..”
어느새 교실로 들어온 우진의 말에 다들 야유를 보냈다.
“앉아. 조회 시작할게.”
은오는 우진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표시가 날까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힘 내자..”
반장이 일어나 “차렷..”라고 말하자 우진은 “됐어~. 쉬어..” 라고 말하고 교실을 나갔다. 은오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복도를 지나가는 우진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멋지시네..’
우진은 교무실에 돌아와 뻣뻣한 목을 문질렀다. 조회를 하면서 은오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복도로 나오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도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래서 그
런지 목이.. 아픈 것 같았다.
“유선생님.. 왜 그러세요?”
“네? 아.. 잠을.. 잘 못잔 것 같습니다..”
“파스 붙이세요.”
“네.. 보건실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냄새나는 파스 붙이게 생겼네..끄응..’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은오야, 매점 갈래?”
“그래. 가자. 크림빵이 있을까?”
“얼른 가자.”
“그래~.”
은오는 안나와 마희와 함께 매점에 들렸다가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빵과 우유를 먹고 있는데 어떤 남학생이 다가와 은오를 불렀다.
“서은오.. 잠깐 나 좀 보자.”
은오가 우유를 먹다가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서는 좀 그런데..”
“그냥 여기에서 해.”
남학생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결심을 했는지 은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
“4반 반장 박정민.”
안나가 마희를 바라보며 조그만 소리로 “맞아?” 라고 묻자 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아~..” 라고 소리 없이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널 좋아해. 나랑 사귀자.”
“에?” “응?” “싫어.”
안나와 마희는 남학생을 보며 놀라다가 은오의 즉답에 다시 놀라 은오를 바라보았다.
“에?” “정말?” “응.”
“왜?”
“너랑은 학생회의시간에 잠깐 본 게 다고.. 개인적으로 말을 해 본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러는 너에게 물어 볼게. 너는 나를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예쁘지도 않고, 집안이 잘 사는 것도 아닌데. 혹시 내가 전교 1등이라서?”
“그건 아니지만..”
남학생이 얼굴을 붉혔다.
“정곡을 찔렸구만..”
안나가 마희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말하자 마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고백하면.. 곤란하지 않아? 그것도
고 3이고 한참 공부할 때에? 난 공부해서 장학금 주는 대학 갈 거야. 그리고 아르바이트 하면
서 공부해서 돈 많이 주는 회사 들어가서 고생하신 우리 부모님이랑 여행가고, 맛있는 거 많
이 사드릴 거야. 미안해. 내 인생에 남자는.. 남자는 없어.”
남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들에게서 떠났다.
“정말.. 네 인생에 남자는 없어?”
은오가 피식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지?”
“참.. 나 요즘 하성이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마희의 말에 은오랑 안나가 바라보았다.
“그래?”
“응. 공부도 잘하고, 착한 것 같아. 시크한 게.. 멋진 것 같아.”
“그래.. 축제 때도 칭찬했다면서..”
“그랬어?”
“응.”
“축하해..”
“축하는.. 또 짝사랑인데..”
“아.. 다들 너무 부러워~~”
“너도 해..”
“나는 뭐.. 그 쪽은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까 패스~.”
“네 남동생이랑 이루어지는 소설도 있다더라? 어떻게.. 하나 구해다 줘?”
“됐어~!”
마희와 은오가 웃음을 터트리자 안나도 그녀들을 보며 웃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한참을 까르르 웃었다.
첫댓글 오늘 참 힘든하루였습니다. 날씨도 덥고 습하고 사람들에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중심을 잡고 있는다는것이 참 힘이 듭니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아닌일에 웃을수있길 바래봅니다. 감정이 점점 메말라가는걸 느끼는순간 좋은글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맞아요. 오늘도 엄청 뜨겁고 습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오늘 말복이니까요.. 곧 시원해 지겠죠..? 힘 내세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미난글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해요.. 폭풍댓글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