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몽골과 고려와의 전쟁 당시에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중에는
한반도 출신의 고려인들이 대거 있었다.
몽골와의 전쟁이 장기화에 따라서
몽골에 포로로 잡혀거나 투항한 고려인들이 많았다.
몽골은 요동의 심양 요양 등지에 이런 고려인들을 대거 거주하게 했다.
최소 수만에서 최대 십만 정도의 고려인들이 거주하였는데
몽골은 자신들한테 귀화한 고려 무인출신의 홍복원하여금 통제하게 했다.
고려군민만호 라는 벼슬을 받고 홍복원은 이들을 통치하였다.
후에 몽골은 홍복원을 제거하고 인질로 몽골에 온 영녕공 왕준하여금 대신
관리시켰다. 그러다가 홍복원의 아들 홍다 구가
성장함에 따라 몽골황제는 왕준 대신 요양 심양 등지의 고려인을 관리하게 했다.
이러듯, 대몽항쟁 시기에 요동의 심양 요양 등지에 수많은 고려인이
거주하였는데, 몽골정부는 전쟁 후반기에 고려를 침략할 병력들중 상당수를 이 곳에서 징발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할 장수로
몽골에 귀화한 홍복원 홍다구 부자, 영녕공 왕준 하여금 통솔하게 했다.
한반도를 침공한 몽골군에 이러한 고려인들이 대거 들어감에 따라,
한반도 지리에 밝은 이들 때문에 고려는 낭패를 보게 된다.
고려성의 약점을 잘 파악하여 몽골군이 단기간에 함락시키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농성중인 고려인들을 선동하여 몽골에 항복하게 만들기도 했다.
고려인 출신의 몽골군은 여타 다른 몽골군보다도
고려에 더 많은 나쁜 짓을 하여 고려주민들이 꺼려 했다는 말도 있었다.
대몽항쟁 시기에 고려 강도(강화도)정부가 몽골에 굴복하게 된 배경에
몽골군에 활동하던 고려인들의 공이 크다는 말도 있었다.
고려 수도 강화도를 고립시키면 고려무인정권이 항복할 것이라는 계책과 그 일의
선봉도 다 몽골에 귀화한 고려인들이 하였다.
강화도는 육지에 나오는 세금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라서
서해안의 항구를 초토화 시켜면 장기간에 걸쳐서 고려정권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몽골에 알려준 이는 고려 사신으로 왔다가 몽골에 귀화한 고려인들이었다.
그리고 강화도에 세금을 보내기 위해선 해안가에 그 세금을 보관할 거대한 창고 건물이 있어야하고
그 세금을 건네 주기 위한 배들도 있어야 하고 , 배들이 이용할 수 있는 항구가 있어야 했다.
고려가 이런 항구시설을 이용하지 않게 철저하게 장기간에 걸쳐서 초토화 시키면
무인정권은 피폐함에 따라 저절로 무너져서
몽골이 전쟁에 승리하게 된다.
몽골군은 장기간에 걸쳐서 이런 항구가 있는 지역을 초토화 시키기 위해서
그 일을 고려인 출신들에게 대거 맡겼다.
즉 영준공 왕준과 홍다구가 이끄는 고려인 출신 몽골군이 그 약할을 한 것이다.
대몽항쟁 역사책을 보면 몽골군이 수군을 동원하여 해안가 항구는 물론이요,
인근 섬지방까지 공격하는 일이 비일 비재한 것도 다 고려인 출신 덕분이었다.
대몽항쟁이 끝나고 몽골에 굴복한 고려는
얼마 안 있어, 동북면과 서북면의 영토까지 빼앗긴다.
몽골이 심양 요양등지 뿐만 아니라, 동북면과 서북면의 옛 고려 영토에 까지 고려인들을
병력으로 징발하여 삼별초의 진압에 동원하기까지 한다.
당시 삼별초 항쟁 당시에 홍다구가 이끄는 고려인 출신 몽골군 2000명은
진도, 제주의 삼별초 세력을 무너뜨리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도 있다.
몽골는 즉 원나라는 삼별초 의 저항을 분쇄시키 후에 일본 원정을 도모하는데에도
고려인들을 대거 이용했다.
요양 심양 등지와 서북면과 동북면에 고려인들을 대거
몽골군에 징발했다.
당시1차 일본 원정 당시에 동원된 25000명의 몽골군중에
고려인출신이 1/3 정도 된다고 하니 대단한 비율이 아닐 수 없다.
고려본토에도 13000명의 고려인이 동원되었으니
일차 일본원정에 고려인이 최소 절반 , 최대 60%까지 동원되었다고
하니 놀랄 일 이었다.
당시 동북면에 이성계 선조들도 병력을 이끌고 몽골군 일원으로 참가했다고 한다.
2차 일본 원정에서도 1차 원정과 마찬가지로 고려인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하니
참으로 서글픈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