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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역사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서남해 마고성에서 동서 2만리 남북5만리를 다스린 마고여제가 바로 중국인들이 섬긴 서왕모다.
중국이 단군조선의 뿌리가 되는 요하문명을 중국사로 주장하고 있는데,이것을 깨는 길은 요하문명의 뿌리가 서남해 중심의 마고한국문명의 줄기임을 인식시켜 주는 일입니다.요하문명은 봉황.옥.암각화 문화 등 한반도문명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그런데 요하홍산인들은 여신상을 만들고 여신전을 만들어 여신을 섬겼습니다.그 여신이 바로 마고지요.9천년에 달하는 홍산문명의 뿌리가 어디일까요? 바로 마고지요. 제주도 창조신이 마고지요.홍산인들의 옥문화는 제주도에서 출토된 옥기가 수천년 앞섭니다. 홍산인들의 적석(피라미드)문화는 남방식 고인돌이 원형이죠
중국인들이 시조로 삼는 황제헌원은 공손씨로 염제신농씨와 함께 배달국의 신하였던 소전씨의 후손입니다...소전씨는 우리 민족의 농업신 고시씨의 방계입니다. 중국인들은 우리 조상 고시씨의 방계에 불과한 소전씨의 후손 공손헌원을 시조로 삼은 것입니다. 곧 중국문명은 한국문명의 줄기라는 명백한 족보지요
단군한국의 정신문명은 만민을 이롭게 하자는 대동홍익주의다.바로 대한민국의 한류정신이다.
흉노신라와 선비족 조선의 소중화사대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단군한국(대부여)의 정신과 기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박근혜대통령은 부여황실의 공주되시는 파소님의 아드님으로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박혁거세님의 후손이시지요. 단군한국의 황족의 피가 흐른다고 할 것입니다.박혁거세의 아버지는 부여시조 해모수의 후손으로 추정됩니다.
색정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난하서쪽의 열양지역을 다스린 욕살(지방관)이였는데 다스림이 덕스럽지 못하여 3대 가륵단제의 분노를 사서 흉노족이 거주하는 약수(고비사막지역)로 추방되어 유배를 살다 후에 유배에서 풀려나 흉노왕으로 임명받았다...역시 우상화 신격화로 세뇌시켜 인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인민들은 굶겨 죽이고, 한국드라마 봤다고 공개총살시킬 정도로 세습군사독재로 덕스럽지 못한 정치를 해 온 김일성일가가 바로 개흉노족의 후손입니다.피는 절대 못 속입니다.
김일성일가의 조상이 되는 흉노족은 코카서스와 피가 섞인..투르크종이지요...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은 박근혜대통령의 조상이 되는 부여황실의 공주 파소의 아들인 박혁거세의 사로부여를 무너뜨리고 흉노신라왕조를 세운 투르크종이 만든 유라시아 초원무덤군입니다.
진덕왕이후부터 중국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개흉노신라왕족은 고려.조선의 권력을 차지하면서 소중화사대주의 노선으로 조선개혁을 실현하려던 정조사후 조선권력을 장악한 경주.안동 김씨 중심의 노론집단이지요,노론집단이 부정부패비리로 농민까지 수탈하자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게 되자,노론집단은 청나라에 진압군을 요청하지요.이에 강화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참여하게 되고, 결국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노리게 되는데,이 때 을사5적으로 대변되는 노론집단이 국권을 상납하게 됩니다.민족사와 한반도사를 굴종의 역사로 만든 주범들이 흉노족이죠.
황하문명을 낳은 요하문명은 서남해 중심의 마고한국문명의 줄기이고, 일본문명은 영산강중심의 마고한국문명의 줄기다
현재 일본왕실은 백제왕실입니다.일본인들에게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왜에 대한 혐오감과 열등감을 극복해야 합니다.왜는 본래 한반도지역에 있었던 단군한국의 해양세력입니다.북방의 기마족이 남하하자 열도로 많이 이주해 갔고,광개토태왕 남정이후 왜는 한반도에서 열도를 가리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후한서/한전-마한 진왕이 다스리는 3한은 마한인들이 왕노릇한다]남3한 때 경상도지역도 서남해 마한의 진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였는데 부여황족인 박혁거세가 왕이 되면서 조공을 거부하자,마한 진왕이 해양세력인 왜를 동원하여 공격을 하게 된 사건기록이 바로 삼국사기-신라본기의 왜침략 기록내용입니다.
박근혜대통령은 부여황실의 공주되시는 파소님의 아드님으로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박혁거세님의 후손이시지요. 단군한국의 황족의 피가 흐른다고 할 것입니다.박혁거세의 아버지는 부여시조 해모수의 후손으로 추정됩니다. 외조부는 부여의 동명왕인 고두막 한(칸)으로 추정됩니다. 파고공주가 한나라의 부여침략을 물리치고 민심을 얻어 해모수왕조를 접수하고 부여단군에 즉위한 동명왕고두막 으로부터 왕권을 상실한 해모수 황족의 자식을 혼인도 하기 전에 잉태하자,망명을 보낸 것으로 추정됩니다.만주 눈강을 거쳐 함경도에서 배를 타고 경주지역으로 들어 왔죠..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3신 하나님이 점지한 3천리 무궁화 에덴동산 마고성 한반도(성경의 에덴동산은 동방의 한국)에 뿌리박고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지낸 마고이래로 1만년 대한민족을 하나님이 무한이 사랑하셔서 무한한 축복을 쏟아 부어 부실 것이다. 정보교환으로 인류의식수준이 더욱 고양되는 인터넷시대에는 혹세무민하는 거짓영들은 이 땅에 생존하기가 어려워지게 되고, 정직한 영들(홍익인간들)이 대한민족과 인류를 이끌고 나갈 것이다/코리아 대칸
부여황실의 피가 흐르는 박근혜 대통령
우리 역사 바로 알기
- 정신나간 민족은 망한다 -
[삼국사기/신라본기-박혁거세]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주지역 진한6촌장의 추대를 받아 왕에 올라 사로국을 세운 박혁거세는 단군왕검이 개국한 단군한국을 계승한 부여의 공주 파소의 아들이다.경주지역에서 부여무덤 토광묘와 부여기마유물들도 발굴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박혁거세 후손으로 단군한국을 계승한 부여황실의 피가 흐른다. 부여황실의 피가 흐르니만큼 기품이 다르지 않는가? 그래서 피dna는 절대로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백제는 부여나라이니만큼 가야계 이후 백제왕족이 왕노릇해 온 일본황실도 부여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100가를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한반도로 정착하여 백제를 세운 개국시조 구태가 부여 동명왕(고두막/부여5대 단군임금) 후손이니 부여황족이다.
출생의 비밀을 숨기고 신격화한 [박혁거세 신화]
"진한 땅 여섯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 갔다. 남쪽을 보니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흰 말이 엎드려 있었다. 가까이 가자 말은 붉은 알 하나를 두고 하늘로 올라 가 버렸다. 알을 깨어 보니 단정하고 잘 생긴 남자 아이가 나왔다. 동천(東泉)에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빛났다. 이로 인해 세상을 밝힌다는 뜻에서 '혁거세'라 이름짓고,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씨라 했다.
사람들이 모두 왕으로 받들며 배필을 구하려고 했는데, 그 날 '알영'(閼英)이라는 우물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 같았다. 월성의 북천(北川)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 졌다. 태어난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하고 남산기슭에 세운 궁에서 혁거세와 함께 봉양되다가 13세 때 혁거세와 혼인하여 왕후가 되었다."
박혁거세의 출생의 비밀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抵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 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十三 岐祥然夙成有聖德 於是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斯盧 (사로/신라의 전신)의 始王(시왕)은 仙桃山(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夫餘帝室(부여 제실:공주)의 딸 婆蘇(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嫩水(눈수:만주중부지방에 있는 강)로부터 도망쳐 東沃沮(동옥저:오늘날 함경남도 동해안)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가까운 해안의 辰韓(진한)의 奈乙村(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때 蘇伐都利(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데려다 집에서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이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居世干(거세간)으로 삼고, 도읍 徐羅伐(서라벌)을 세우고 나라를 辰韓(진한)이라 칭하고, 또한 斯盧(사로)라고도 하였다. 사로는 후에 (흉노족이 사로국을 무너뜨린)신라의 모체이다.[끝]
[자료/동감하며]부여공주 파소가 임신한 박헉거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필자는 남의 혈통을 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저는 처음 우리 북부여사를 조금이라도 밝혀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 글을 지었지만 이내 깊이 감춰 두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가 중국中國 제실帝室의 딸인 사소娑蘇로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라고 거짓 오도하고 있는 현실을 방치하는 것은, ‘미필적 고의’이니 곧 김일연과 같은 공동정범이 되는 것으로, “그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역사의 중죄인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글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 중의 하나인 박씨 일족이 ‘추악한 중국인’이 되는 것은 면하게 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 글이 대한민국의 영명한 선비들과 박씨 가문의 출중한 자제들을 자극시킨바 되어서, 진정한 박씨의 혈통을 찾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면 “이 또한 천추만대의 공덕이 아닌가.”하는 간절한 바람에, 용기를 내어서 세상에 공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글은 일대 논란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논란 속에서 더 좋은 생각, 더 좋은 이론이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고귀한 혈통인 박씨 가문이 진짜 자기 조상을 되찾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역사가 왜곡되면 혈통을 부정하게 되고, 혈통을 부정하게 되면 혼혈을 자초하게 됩니다. 일단 혼혈이 되고 나면 역사는 영원히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 혼혈된 나의 조상은 이미 한민족이 아닌 지나인, 왜족, 유대인, 게르만인, 니그로인 등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 글을 바탕으로 박가들이 스스로의 혈통을 되찾고, 그 고귀한 혈통을 영원히 순수하게 간직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전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글은 환단고기를 토대로 한 필자의 개연성 있는 상상합니다.
신라新羅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이니 곧 ‘파소婆蘇’다. 파소는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딸로서 남편이 없이 임신한 여인이다. 그런 파소는 몰래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으로 도망을 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
부여夫餘 제실帝室의 딸 파소는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임신을 하였을까? 또 왜 도망을 쳤을까? 그것도 수 천리 머나먼 길을 혈혈단신으로 도망을 쳤을까?
황실皇室의 딸이 혼전 임신을 하고 도망가야 하는 경우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황실의 명예를 크게 더럽힌 경우와, 왕권에 위협적인 아이를 잉태한 경우다.
훗날의 일이지만 고구려 평강열제平康烈帝의 딸 평강공주는 가난한 평민의 아들 온달溫達과 결혼을 했고, 훗날 사위는 실력으로 평강열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 경우 혼전 임신이랄 수는 없지만, 평강공주가 생면부지의 바보 온달溫達과의 결혼을 고집하자, 황제가 공주를 쫓아 낸 경우의 일이며, 이것은 정권유지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던 일이었다.
이것은 오히려 유력 귀족과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평강공주를 유력 가문에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평강 공주의 고집으로 좌절되자, 상대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 평강 공주를 쫓아낸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파소는 몰래 도망갔다. 고두막한이 황녀皇女를 위해 쫓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자신과 더불어 복중의 아이를 살리기 위한 가장 확실한 선택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고주몽高朱蒙이 동부여의 태자 금와金蛙를 비롯한 귀족들로부터 모진 견제와 냉대 그리고 살해 위협을 끊임없이 당한 일이 있었다.
본래 고주몽은 해부루解夫婁의 태자太子 금와金蛙 보다 2살이 위였는데, 동부여 사람들이 동부여東夫餘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주몽은 어쩔 수 없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북부여로 도망갔다.
이 때 고주몽은 동부여 군사들에게 쫓기어 엄리대수에서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다. 이 때 고주몽을 죽이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두 살 아래로서 경쟁관계였던 금와로 봄이 타당하다. 그 경쟁관계는 훗날 금와의 아들 제3대 동부여왕 대소帶素의 고구려 침략으로 이어진다.
금와가 해부루의 아들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대저 해부루는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이 마주 대한 것을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왕은 하도 괴이하여 돌을 굴리게 하자, 그 속에 금빛 개구리를 닮은 사내아이가 나오자, 이내 기뻐 소리쳐 외치며 “이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대를 이을 아들을 주었다.”하며 거두어 길러 태자로 삼은 아들이다.
이상을 보면 해부루는 압록 변실을 지나던 중, 자신의 조카인 불리지의 아이를 밴 유화를 동부여로 데려와 거둔 이래, 그 이 삼년 후에 다시 곤연에서 금와를 얻었으니, 이는 해부루에게 아들이 없었음을 뜻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연로한 해부루의 핏줄인 아들이 없었음으로, 고두막한은 해부루의 청을 받아들여 해모수의 종묘사직을 보존하는데 쉬이 동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해부루의 선택은 비슷한 연배인 고주몽과 금와에게 있어서는 피말리는 왕권 경쟁을 불러왔던 것이다.
대저 고주몽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차남인 고진의 손자인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의 아들이다. 더불어 배달, 조선, 북부여 시대 유력 황후족皇后族이었던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결국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그 혈통과 재능으로 인해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드디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에서 동부여군의 추격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여, 단숨에 후북부여後北夫餘의 제7대 단군이 된 인물이다. 모름지기 해부루왕의 입장에서는 고두막한의 의심을 피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여야 함으로, 부여 일대에서 “활 잘 쏘는 자를 일러 주몽이라 한다.”고 크게 소문난, 너무나도 탁월한 주몽의 혈통과 재능은 불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동부여에서의 고주몽의 왕권 경쟁에서의 패배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하겠다. 모름지기 동부여는 제후국이요, 북부여는 황제국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주몽은 동부여를 탈출함으로써 북부여의 황제가 되었다.
각설하고 박혁거세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점에 있어서는 고주몽과 비슷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받을 수많은 견제와 의심 그리고 살해 위협은 고주몽과 비슷하였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파소의 선택에 의하여 일순간에 해소된다. 이는 어머니 파소가 박혁거세를 임신한 채 북부여 황실皇室을 도망쳤기 때문이다.
대저 고주몽이 엄리대수를 건너 살길을 얻고, 파소가 눈수를 도망쳐 살길을 얻은 점은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고주몽은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북부여北夫餘의 단군檀君이 되었고, 파소는 눈수嫩水를 도망쳐 그 아들이 진왕辰王인 거서간居西干이 되었다.
삼신오제본기에는 북부여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문화가 있어, 어린 생명을 죽이지 않고, 임신한 생명을 죽이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삼신에게 받은 성性, 명命, 정精을 온전히 태아의 몸에 발현시키는 태교胎敎 문화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으니, 이가 바로 북부여 초기 해모수 단군 때 시작된 ‘공양公養 태모지법胎母之法’이다.
또 살생에도 법이 있는데 위로는 국왕에서 아래로는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때와 대상을 가려 한 생명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자고로 “부여에서는 말이 있어도 타지 않았고, 죽이는 것을 금하여 방생하였다.”하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고로 잠든 것을 죽이지 않고, 알 낳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은, 곧 때를 가림이요, 어린 것을 죽이지 않고, 유익한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은, 곧 대상을 가림이니, 생물을 소중히 여김이 지극하다 할 만하다. 삼신오제본기>
아무튼 파소는 이런 문화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쳤다. 왜 그랬을까? 부여에서 어린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쳤다. 왜 그랬을까?
그 의문에 대한 가정으로 먼저 황실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와 비슷한 경우로 하백녀河伯女 유화柳花가 있다. 비서갑의 하백 가문은 배달倍達 이래 황후皇后를 가장 많이 배출한 황후족皇后族으로 황실皇室에 버금가는 존귀함이 있었다. 대저 배달의 시조 거발환 환웅의 부인인 바로 웅씨왕녀熊氏王女이며, 단군성조의 어머니 또한 웅씨왕녀다. 그리고 단군 왕검 또한 비서갑 하백녀를 황후로 삼았으니, 비서갑菲西岬이란 배달국 초대 거발환居發桓 환웅桓雄이 봉한 웅녀군熊女君의 나라를 뜻하며, 하백河伯이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대감大監인 왕검王儉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모든 하백의 여식이 황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비 황후皇后로서의 품격을 지녀야 할 하백녀 유화는, 그만 옥저후 고모수와 처음 눈이 맞아 압록강鴨綠江의 변실邊室에서 사통을 하고, 그 날 그만 고주몽을 잉태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훗날 상제上帝에 천명天命에 의하여 천하天河의 용궁龍宮에 들어가 사해용왕四海龍王이 되는 아버지 하백”은 압록 변실 중에 가두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잠시 가두어 둔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는 백번 죽여야 하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자 임신한 생명을 당시의 풍속에 따라 절대 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고모수와 함께 살며, 불리지 고모수와 처음 만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이듬해인 동부여 해부루 8년 임인壬寅 5월 5일에 고주몽을 낳는다.
돌이켜보면 하백이 불같이 노하였던 까닭은 당대 새로운 삼한三韓의 주인이 된 고두막한 때문이다. 훗날 고모수의 소생인 소서노와 유화의 소생인 고주몽이 결혼한 것을 보면, 고모수와 유화는 그 나이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할 것임으로, 후북부여의 태자 고모수의 태자비太子妃로 하백의 딸인 유화가 간택되었을 가능성 내지 태자비로 선택될 가능성은 농후했다 하겠다.
또는 하백의 딸들 중에 한 명은 태자비로 간택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겠다. 그런 하백의 입장에서 딸의 탈선은 이미 엎지러진 물임으로 가문도 살리고, 딸도 살리고, 사위도 살리려면 하백은 사위를 죽일 듯이 뒤쫓는 척하며 놓아 주고 딸은 유폐시켜는 척하며 살려줘야 했을 것이다.
훗날 해부루가 압록 변실 중에 유폐되어 있던 유화를 불리지의 청탁에 의하여 동부여로 데려간 것을 하백이 묵인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전실 황실의 최고 어른인 해부루解夫婁에 대한 친분 때문이며, 딸을 아끼는 아버지 하백의 너무도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것이다.
아무튼 가문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던 유화를 생각해보면 파소婆蘇의 도주는 지나친 감이 있다. 본래 여인의 정숙한 품행이 더욱 요구받는 것은 황족皇族보다는 황후족皇后族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소가 제실帝室도 예기치 못한 필사의 도주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의심 때문이다. 그것을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아비 없이 임신하였음으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볼 것은 아비 없이 임신하였으면 황실의 망신이요, 나라 망신인데, 역사의 기록에 “황실의 망신”이란 말 대신 “의심을 받았다.”고 표현 하였으니, 이 의심은 바로 역모에 대한 의심이다.
이 정권 도전에 대한 의심은, 곧 그 뱃속 아이의 혈통에 대한 의심이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만일 평강공주가 임신한 온달의 아들과 같았다면 정권에는 전혀 도전이 되지 못한다. 그 신분이 원래 비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파소가 도망갈 이유가 되지 못한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개국 공신 또는 유력 가문의 자제라면 적극 혼인시켜 황권을 강화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옛날 평강열제는 원래 유력 귀족의 가문 자제와 결혼 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만 하더라도 왕권 강화를 위해 귀부한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 자신의 딸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의심 받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적국의 혈통血統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적국의 황실인가? 그것은 이미 망한 해모수 북부여의 황실이다. 본래 북부여 제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전 북부여의 마지막 황제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이 병을 이루어 급서한 인물이다. 동명국 고두막한이 갑오년甲午年(BCE 87년) 10월에 병력을 앞세워 나라를 내 놓으라고 위협하니 그만 그 달에 붕어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우루 단군은 재위년在位年이 총 34년이니 그 장성한 아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고우루의 전대인 제3대 고해사高奚斯 단군 또한 그 재위년이 49년이었음으로, 고우루 단군의 임종년臨終年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임으로, 고우루 단군 34년 갑오에 그 자녀들 또한 그리 어리지 않은 셈이 된다.
이 시대는 또한 강적인 도만 위적 그리고 한나라 등과의 전쟁 속에서 황실의 보존을 위해 혼인과 출산이 전대에 비하여 비교적 빨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적과의 전쟁이 많을 경우에는 동서양의 왕조가 왕이 비명횡사하는 경우를 대비해 반드시 태자를 정하는 일이 많았으니, 고우루 단군 또한 비상시를 위해 태자太子들 두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고우루가 갑자가 죽는 상황에 있어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을 비롯한 국인들은 연륜이 지극한 황제의 동생 해부루를 맞아들여 그 후사로 옹립하였고, 이듬해인 을미乙未(BCE 86년)에 해부루는 스스로를 낮추어 왕王이라 하고 동부여로 옮겨갔으니, 이 때 만일 고우루의 후손이 있었다면 졸지에 황제는 고사하고 왕은 물론이며 왕권王權이나 황권皇權을 회복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쳐 버린 꼴이 된다.
이제 전부여 왕실이 항복하고 동부여로 떠나간 이후 그 빈 도성에는 고두막한이 들어왔으니, 그곳은 바로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혹은 난빈蘭濱이다.
이 때에 파소도 전북부여의 도성都城에 들어갔을 것임으로, 이 때 망한 황실의 후예와 파소가 점차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북부여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훗날 드러나는 일이지만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는 북부여 제6대 단군이 되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시집가지 않은 자신의 딸인 소서노를 고주몽와 결혼시켜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고우루의 혈통이더라도 굳이 도망갈 필요가 없을 유일한 경우라면, 고두막한의 아들과 손자들이 많아야 한다. 하지만 파소가 도주하였음은 역설적으로 고두막한의 후손 중에 남성男性이 극히 드물었음을 반증한다. 그 결과가 파소의 도주와 고주몽의 단군 계승이다.
그럼 파소가 박혁거세를 임신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의 즉위 원년은 갑자년(BCE 57년)이다. 이 때 혁거세의 나이 13세였으니, 임신했던 때는 신해년(BCE 70년) 무렵이다. 이때는 고두막 재제위在帝位 17년이니, 전북부여가 동부여로 밀려난 지 17년째가 된다.
그런 점에 있어 파소는 고우루의 아들 보다는 고우루의 손자와 사랑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부여에 망국의 후손을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 황실의 가문에 준하여 예우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국 부여의 시작은 제3기 단군 조선의 시조인 제44대 구물丘勿 단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단군 조선은 47대 고열가高列加 단군을 끝으로 막을 내리니 고열가는 제43대 물리勿理 단군의 현손이다. 이 고열가 단군을 결과적으로 몰아낸 것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이니, 해모수는 구물 단군의 후손일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고열가 단군 시대에 해모수는 종실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물 단군의 아들은 제 45대 여루余婁 단군이며, 여루 단군의 아들은 제46대 보을普乙 단군이다.
이제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해모수의 혈통인 제2대 모수리慕漱離, 제3대 고해사高奚斯, 제4세 고우루高于婁로 이어지는 북부여의 제위를 빼앗았음으로, 고두막한은 이제 마찬가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상대방이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전통에 따라, 라이벌인 해모수의 직계 혈통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던 것이다.
대저 부여夫餘에 책화責禍가 있었으니, 임금은 그 재앙에 대한 책임을 지었다. 그 재앙 중에서 가장 컸던 것은 외적의 침입이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내외內外의 병란兵亂을 극복하고 종통宗統을 수호한 사람이 보위에 오르게 된 것을 뜻한다.
제43대 물리 단군 때에 융안隆安의 엽호獵戶 우화충于和沖의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백민성 욕살 구물이 그 공으로 제44대 단군이 되었고, 이어 제46대 보을普乙 단군 때에 한개韓介가 이끄는 수유須臾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한 상장군 고열가가 그 공적으로 제47대 단군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오로지 공덕과 실력에 의하여 제위에 오른 경우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모수 단군은 대부여大夫餘 말기의 극심한 분열상을 극복하고 보위에 올랐으며, 또한 고두막은 한무제의 침략을 모두 격퇴한 공덕으로 보위에 올랐으니, 이는 모두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대부여의 역사를 조용히 관조해 보면 이는 어언 400여년 가까이 내려온 부여의 전통인 책화責禍라 할 수 있으니, 이 책화의 전통에 의하면 고우루의 후손이 황실의 버금가는 예우를 받으며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생존했을 가능성은 컸다 하겠다.
하지만 책화란 외적의 침략과 국가를 뒤흔들만한 반란에 당하여 탁월한 공덕을 세워야만 황제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니, 황실의 혈통血統을 이를 사람이 극히 부족하고, 장차 내외의 도전이 예상되는 때에 파소가 고우루의 후손을 임신하였다면, 이는 역심逆心으로 밖에 비춰질 수 없게 된다.
더욱이 이 때 고우루의 후손이 특히 고우루의 태자太子 또는 장남長男 그리고 장손長孫이라면 단순히 묵과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이와 더불어 고우루의 후손이 자신의 세력을 모으려 한다거나, 아니면 동부여와 연결하려 시도했다 발각되었다면, 아무리 자비로운 황제가 보호한다 하더라도 고두막을 따르는 수많은 개국 공신들이 파소와 그 배우자를 그대로 놓아두기 어렵게 된다.
이외에도 “나중에 파소가 황실에 머물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권모술수의 재능으로 기회를 엿보아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보위에 오르게 한다면”이란 가정은 기득권층인 삼백 오가 열후 귀족이라면 누구나 상상하기 조차 싫은 생각이다. 이는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오가 귀족들에게 견제되었던 이유와 같은 경우라 하겠다.
[환단고기]에는 파소가 도망을 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진실을 알고 보면 파소의 아버지인 고두막께서 피신을 시킨 것이다. 고두막은 본래 호방한 준걸이었음으로, 나중에 자신에게 도전한다 할지라도 뱃속 생명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용병을 잘하였음으로 도전을 하면 능히 꺾을 자신이 있었음으로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더구나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잔인하게 죽여, 천추만대에 잔인한 군주로 남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고두막한은 자신의 딸을 자신과 태자 고무서를 따르는 신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딸을 저 멀리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시켰다.
파소의 도주한 길이는 장장 3천리가 넘었으니, 이는 오로지 아버지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파소는 북부여의 수도 졸본卒本에서 육로로 지금의 함경도 일대인 동옥저東沃沮에 이르고, 다시 동옥저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徐羅伐에 도읍을 정한다.
그렇다면 파소는 왜 진한으로 도망쳤을까?
본래 진한의 뿌리는 북진한이니 지금의 만주 일대다. 이 진한의 주민들이 훗날 남쪽 마한 땅에 정착하였으니 이를 일러 남진한이라 한다. 이 남진한은 지금의 경상도 일대다.
이 남진한이 형성된 계기는 북부여 제2대 모수리 단군 정미 원년(BCE 193년)에 도적 위만衛滿이 북번한을 강탈하면서 부터다. 이 때 번한番韓의 상장군 탁卓이 남쪽 마한馬韓 땅에 중마한中馬韓을 세워 스스로 임금이 되고, 변한弁韓, 진한辰韓이 백리의 땅을 봉함 받았으니, 이것이 곧 남변한, 남진한이다.
이 남진한은 이 때 북진한 출신 백성들 중심으로 세워진 이래, 고우루 단군 3년 계해(BCE 118년)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의 침략을 받아 북진한의 영토인 해성海城 이북 50리의 땅을 점령당했을 때, 이곳에 사는 진한의 백성들이 남진한으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이 땅 남진한은 전북부여의 황실에 대한 향수가 강하였을 터이니, 유약했지만 인정 많았던 고우루 단군의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할 것이다.
이제 파소는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였던 한무제漢武帝를 격퇴한 한민족의 불세출의 영웅인 후북부여 단군 고두막의 딸이자, 고우루의 혈통을 임신한 까닭으로, 이곳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받게 된다.
이곳에서 출생한 혁거세는 그 나이 13세에 진왕에 올랐으니, 그 새로 고친 나라 이름은 사로국斯盧國이다. 혁거세가 전통적으로 삼한三韓의 중심을 뜻하는 진한辰韓의 이름을 버리고 감히 사로국이라 한 까닭은 다름 아닌 그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고사로高斯盧였음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로국’이라 한 것이다.
어머니 파소가 아버지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끝까지 자기 아들의 핏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아들이 북부여 고두막한과 고무서 사후에 나라를 세움에 이르러 그 아버지의 이름을 국명으로 삼았으니, ‘사로’는 박혁거세의 아버지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이다.
혁거세는 진한의 이름을 사로라 함으로써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효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세인의 말과는 달리 아비 없는 자신이 아닌, 영원히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보다 먼저 파소가 북부여를 탈출했을 때, 박혁거세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것은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도리蘇伐都利’였다. 여기서 고허촌의 고허古墟란 ‘고씨의 터’를 뜻하니, 곧 소벌공蘇伐公은 고사로를 추종하는 유력한 신하였다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파소와 혁거세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았던 것은 ‘고두막高豆莫’이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고두막의 심려원모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두막한은 전북부여 황실을 격하하여 제후로 삼았듯이, 그 전북부여의 직계 혈통 또한 자신의 제후로 삼아, 반독립적인 상태로 남아있던 중마한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런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으니 고두막한(혹은 고무서)은 자신의 딸 파소를 매금寐錦으로 봉한다. 이것은 훗날 소서노를 여왕인 어하라로 봉한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고구려본기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라 하였으니 이는 두 여인이 사실상 신라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흘러 파소가 도망친 지 11년 후인 임술년壬戌年(BCE 59년)에 고무서가 6대 단군에 올랐을 때 마침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에 이르고, 그 일 년 후인 계해년癸亥年에 고무서高無胥 단군이 아들이 없는 까닭으로 이제 막 사위로 삼은 고주몽에게 보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로서 고주몽은 북부여의 제 7대 단군이자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그 일 년 후인 갑자년甲子年(BCE 58년)에 혁거세는 사로의 시왕이 된다.
대저 신라新羅가 유독 동명제東明帝를 받들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파소는 아버지 고두막한의 딸에 대한 뜨거운 마음, 그 애끓는 애정을 몰랐다.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지아비인 고사로를 덧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 원망을 오직 아버지에게 돌렸다. 이제 그 서운함이 아버지로부터 여왕의 작위를 얻었다 하여 풀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알랴? 파소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으나 후인이 역사 왜곡으로 그 부녀의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이제 본국으로 눈길을 돌려 고구려에는 고주몽과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유리琉璃가 동부여서 도망쳐 온다. 예씨 부인은 어머니 유화가 친정인 하백 가문에서 들인 딸로 추정되는 여인이니, 소서노召西努는 자신의 남편 고주몽高朱蒙의 뜻이 예씨禮氏 부인 소생의 유리에게 있음을 눈치 챈다.
소서노는 본래 처녀로서 고주몽에게 시집을 간 황녀이니 임종한 해도 같은 여인이다. 그녀는 세인의 요설처럼 첫 남편 우태와 사별한 과부가 아닌 것이다. 황제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고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비류와 온조溫祚가 제위를 계승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오백리의 장원을 일구며 훗날을 대비한다. 훗날 소서노가 오백리의 장원을 가지고 본조인 고구려에 귀부하여 여왕女王인 어하라於瑕羅에 책봉되니, 이는 지금 천진天津 일대인 패대浿帶 지방으로 훗날 비류가 계승하여 된다.
그리고 온조는 그 이듬해인 계묘년(BCE 18년) 무렵 중마한의 영토 일부인 지금의 경기 하남시 검단산 일대 하남河南 땅으로 이주하여, 중마한의 봉지를 받아 백제百濟를 건국하게 된다.
비류가 나라를 세운 것은 고주몽과 소서노가 같이 붕어한 해인 고주몽 재위 40년 임인년(BCE 19년)이다.
비류 사후에 그 신하가 그 영토를 가지고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터를 잡은 온조에게 투항하니, 이 나라가 훗날 아시아의 넓은 바다를 지배하며 22담로국을 설치하고 태평양을 건너 남북 아메리카를 오가며 교역했던 해상왕국 백제다. 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고대 중국 배의 파편이란 모두가 백제의 배이니, 곧 백제가 장악했던 중원 해안의 광동성 일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 해모수의 혈통을 물려받은 고모수高慕漱와 비서갑 하백녀 유화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주몽은 당대의 단군 고무서로부터 보위를 물려받았다. 그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아! 당대 단군 고무서의 딸로서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온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다.
아! 치우천황 이래 만고에 무력을 떨친 고두막한의 딸 파소와 고우루 단군의 자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혁거세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바로 신라다.
우리 삼국은 모두 서로 사이좋은 형제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부여의 역사가 철저히 말살되고 왜곡됨으로 해서 모두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말았다.
3. 혹설
부여의 역사는 훼손됨이 너무 심하여, 그 가정을 위의 본설에만 한정할 수 없음으로, 위 본론에 더하여 몇 가지 개연성 있는 혹설을 더하고자 한다.
해부루가 곤연에서 금와를 얻은 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연출이다. 그 금와는 자신의 친자일 수도, 아니면 고우루의 핏줄일 수 있다.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하백 가문의 자제일 수 있다. 그러나 황족과 황후족은 원래 서로 혼인 관계가 두텁다. 비단 일방적으로 황실 가문의 일족에 딸들을 공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실 가문의 딸들과 하백 가문의 자제와의 결혼도 그 수만큼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하백녀 유화는 이미 몰락한 전 황실의 황족 불리지와 사통하였음으로, 하백 가문은 고두막한의 눈 밖에 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때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황실의 가문 제녀帝女 파소가 이미 눈 밖에 난 하백 가문의 자제와 사랑하여 임신하고 말았다면, 이는 지엄한 황명을 어긴 것이 되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멀리 도주하는 길 밖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게 된다.
글 : 송호국 9207. 8. 16. 수정 9207. 9. 20.
참고서적 :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대배달민족사, 개벽실제상황, 통곡하는민족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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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연헌 사로신라 박혁게세의 자손인 밀양박씨를 ..
백제계나 고구려계인 부여계에 가져다 붙이시면서까지...
신용비어천가를 조작해 내고 계신 윤선생님의 의도는 무었이신지요...?
언젠 경상도 흉노족 욕에 골몰하시더니...
박근혜 여제께만은..자신이 여직 주장한 모든 사서해석까지 스스로 변형시켜 바치고 싶으신 겁니까...?
박근혜 정권에게 경제적 도움 좀 받고 싶으신 겁니까...?
족보를 밝혀 주는 거지요...그리고 국민지지받으며 박근혜대통령 잘 하고 있쟎아요? 종북세력도 확실히 일소하고..ㅎ..묵은 체증이 확 내려갈 만큼....아무나 대통령 하나요? 그리고 박혁거세가 부여황실의 외손이 아니라구요? [환단고기]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데...ㅎ...부여왕 고두막의 외손으로 추정되는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해모수 후손으로 추정하면 박혁거세의 성씨는 해씨가 맞다고 해야지요
@동방의 태양 코리아 그런 식으로 해석할거면...
세계는 다 아담과 이브인 아프리카 깜둥이의 후예이니...아무것도 혈통 따질일 없다란 논리입니다.
백제가 부여의 후예인 남부여지...어찌 사로신라가 부여와 더 가깝겠습니까...?
권력에 대한 아부십니다...아부...
그걸 정당화 시키기 위한 궤변이시고여...
쓰레기......................
김일성집안인 김씨족이 신라왕조세운 흉노족이고, 진조선유민들을 모아서 사로부여국을 세운 박혁거세는 부여황실의 피가 흐르는 부여족이에요^^
박근혜 황태후에게 잘 보이시기 위한...
본인의 기존 사관까지 변종으로 만드시는...궤변이요 아부의 절정이십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개잡종쓰레기들이 물만난 듯 설쳐대는구나~
궐한씨 이 카페는 대륙조선 부정한다쟎아요..자꾸 헛소리하는 이유가 궁금해요..이성계조선이 한반도 한양(서울)이 아니라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고 주장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는다니까요. 왜 상식을 거부하고 망상에 사로 잡혀 사는지?..
난 미친사람 취급받으면 그만이지만...
님은 그때 그때 자기가 주장한 사관마져 바꾸는...권력아부형 궤변자로 취급받을까 걱정입니다.
단군신앙과 기독신앙도 적당히 버므려 사이비 신흥종교 만드시고 싶으십니까...?
@궐한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큰 목소릴 내 다니..참으로 부끄럽네요..
미친놈새끼 나랑부도지 토론걸고 카페나가느냐마느냐 내기해볼랴?
운영자님! 위에 넋빠진 개자식좀 안보게 할 수 없겠소? 고 소원입니다...
정신 나간놈을 보고 미친놈이라고 욕 할 수도 없고...! 이놈아 네놈의 피는 순수한가보나? 조금은 그럴것도 같이 생각되는것은 글을 이모양으로 쓴것을 보니 이해는 갈것 같기도 하지만....! 대학원 까지 다녔는데 목사도 못되어 헤까닥했니? 그라나 해석은 목사답다!
니 조심해라 김씨들한테 맞아 죽는다 ..쓰레기 색키야
초겨울에 접어드니 할일없이. 짖어짐이 더 심해진 멍멍이 한마리 혹자는 변종이라하고, 혹자는 개잡종이라하고 혹자는 넋빠진 개라하고, 혹자는 쓰레기라 하는데 멍멍이는 알고있을까요?
개쓰레기사이코 인간말종 보켜나 나도 박씨성을 쓰고있지만 그네누나와 같은 성을 쓴다는게 안타까운데 니놈은 우리박씨의 정통성을 세워줘서 고맙구나 ㅎ 그러나 너같은 개쓰레기의 추켜세움은 거부한다 차라리 니놈 이웃종족 다카끼나 오카모도 의 족보를 캐내어 찬송하거라 ㅋ
쓰레기 글에 장미 한 송이를 피워 놓을까나...... 공자, 예수, 혁거세, 알지의 공통점은 아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회원님의 말마따나... 뱃속 아이의 아버지를 알고있는 사람은 그 여인뿐이지... 이게 김자가 주장한... 서기 전 후까지 세계는 가부장제가 확산되기 전인 모계중심사회였다는 반증이다... 거기다대고 아비를 찾는 것은... 얼간이 중에서도 상얼간이나 하는 짓이다.
좀 아시네여...
예수의 경우 유대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가 로마군인 백부장이고
이름 실명까지있는데 실제로 예수의 외모는 혼혈인의 그것이었다고 합니다.
좀 다른 이야기로,
박혁거세의 혼령을 불러보면 자기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한다는데
나라를 들어서 다른데 넘기려고 했다는 오해를 사서 부인과 같은 날 암살되었다는데
그 원한의 반복과 연장이
계유정난과 궁정동이라고 봅니다.
박근혜씨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딸 --선덕여왕 --세조 딸의 전생
박정희대통은 -- 박혁거세 태종 세조의 환생 가능성
이 가능성을 열어놓고 역사추적을 하면 다 연결이 됩니다.
전돤장군은 왕건 이성계의 환생으로 풀어도 연결이 됩니다.
광주사태까지 다 설명이 됩니다.
광주사태의 주 희생자들은 전생 혹은 선대에서 왕건에게 이주당한 서라벌 시민들
^^그렇습니까? 저는 제 자신을... 원효, 김시습, 김병연의 후신이 아닐까?... 술 취한 밤이면 문득 생각해 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와도 전생에 인연을 맺었겠네요 확실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