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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우진이 차를 세웠다.
“지금 가냐?”
“네.”
“타.”
“....”
“얼른..”
은오가 조수석에 앉아 문을 닫자 차가 출발했다. 우진이 그녀를 슬쩍 바라보다가 짐짓 놀란 듯 은오에게 말했다.
“인기 좋아..”
“네?”
은오가 깜짝 놀라 우진을 바라보았다.
“4반 박정민한테 고백받았다면서?”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 인생에 남자가 없어? 그럼.. 난 뭐야.. 남자가 아닌 건가...”
“들으셨어요?”
“그래, 인마..”
“그럼 바로 거절한 것도 들으셨겠네요?”
“그랬지.”
“남자는 없다고 말할 때.. 조금 뜸 들인 것도 알아차리셨겠네요?”
“글세..”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오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직 마희랑 안나한테는 말을 안 해서.. 그리고 그 상황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가..”
“그건 아주 잘했어. 혼내려는 게 아니야. 단지.. 나와 사귀는 게 너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래. 이럴 때 내가 선생이 아니라 학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전 괜찮아요..”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지?”
“네.”
안나는 오늘 밤에도 그네에 앉아있었다. 은오가 말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마희는 눈치를 못챈
것 같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은오는 분명히 선생님과 뭔가가 있었다. 그 동안 은오가 선생님에
게 일부러 반응을 안 보이자 선생님은 오히려 은오를 신경 쓰고 계셨다. 눈으로 은오를 쫓아
가는 선생님의 모습을 몇 번 보았다. 그리고 축제 날.. 울고 있는 은오를 두고 교실밖으로 나
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은오를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은오가 쓰
러졌을 때.. 다른 아이들이 느낀 그 이상함을.. 그녀도 느꼈다. 정말 가슴아파하는 표정이 순
식간에 지나갔다. 은오가 병원에서 말했던 꿈이.. 꿈이 아니라 정말 일어난 사실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선생님과 은오가 정말 사귀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잘 된 일이긴 한데..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그래도 학창시절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조용히 있으면 된다.. 곧 졸업이고, 은오가 대학생이 되
면 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짝사랑이 시작된 마희의 표정에서 설레임을 읽었다. 그
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친구들에게 드디어 행복이 찾아오는 건가..
“안 피곤해?”
그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예정일이 거의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 엄마의 배가 커다랗고 동그란 바가지를 넣은 것 같았다.
“엄마.. 안 주무셨어요?”
“자다가 깼어. 네가 혼자 있는데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면서..”
“아니에요. 나름 행복해지려는 순간인데요?”
“그래?”
안나가 떨리는 손으로 엄마의 배를 만져보았다.
“이상해?”
“네.. 하지만.. 신기하기도 해요.. 이 안에 있는 아가가 다 듣고, 엄마가 드시는 걸 먹고..”
순간 발길질을 하는 아이를 느끼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마희는 하성이에게 줄 미니머핀을 만들고 있었다.
“음.. 맛있는 냄새..”
아빠가 한 개 집으려고 하자 마희가 “아빠는.. 이따가 드릴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라고 말했다.
“지금 하나 먹으면 안 될까?”
“하나가 두 개가 되고.. 그러다가는 줄 것도 안 남잖아요.”
“누구 주려고? 누구?”
아빠가 질투에 어린 표정으로 마희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다가와 아빠를 끌었다.
“당신은 왜 마희가 다 만들지도 않았는데 만지고 그래요.. 어련히 알아서 줄텐데..”
“누구 줄 건데.. 좋아하는 녀석 생겼어?”
“그럼.. 한참 좋을 때.. 연애도 안 해요?”
“공부해서 대학가야지. 연애는 무슨..”
“난 대학 안가요. 말씀 드렸는데..”
마희가 앗차.. 하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자 엄마가 눈을 꿈벅이셨다. 아빠가 마희와 엄마를 바라보셨다.
“이게 무슨 소리야? 대학을 왜 안가?”
“내가 하고 싶은 건 피트니스요가 강사인데.. 그건 졸업해서 학원 다니면서 자격증 따면 되거든요.”
“대학 가야지.”
“가고 싶은 과도 없고,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 하러 비싼 돈을 버려요..”
“그래요. 마희가 하고 싶은 걸 하게하고 싶어요. 당신도 그걸 원하시잖아요.”
“하지만.. 하지만.. 난 마희가 요리사가 될 줄 알았다구..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났잖아..”
“물론 요리하는 것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치?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
“네?”
다음 날 학교에 온 마희가 은오와 안나에게 불평을 했다.
“내가 아빠 때문에 대학에 가게 생겼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넌 피트니스 강사 한다면서.”
“그래.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있고 말이야.. 부럽게스리..”
“요리전문학교에 가서 자격증 따길 바라셔. 나보고 두 개 다 하라고 하시네.. 먼저 대학가서 요리사 자격증을 따면 피트니스 자격증을 따게 해 주신다고.. 그러면 두 개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가게를 내 주신대.”
“우와~~. 부럽다..”
“진짜.. 그러면 정말 좋겠다. 요리해서 먹고, 운동하고.. 좋네.. 사실 너는 요리솜씨가 버리기엔 아까웠어..”
“요리 솜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은오야, 이거.”
조그만 상자에 미니머핀이 두 개 들어있었다.
“나 먹으라고?”
“설마~. 선생님 드리고 와.”
“응? 왜..?”
“왜긴.. 선생님한테 다시 점수를 따야지. 좋아하는 사람이 더 노력해야 하는 거야. 힘내. 알았지?”
“마희야..”
은오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힘내~.”
“알았어..”
안나가 두 손을 마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상자를 그 손 위에 올려놓았다.
“오예~~. 그런데 난 내가 먹으면 되는 거지?”
“네 동생 갖다 줘.”
“에?! 왜~~. 내가 먹을래.. 네가 만든 거 오랜만에 먹는단 말이야.”
“그럼, 한 개씩 나눠 먹던지..”
“그 녀석한테는 왜 주는 건데?”
“음.. 잘생겨서.”
“뭐?”
안나가 인상을 찡그리자 마희가 웃었다.
“그런데 네가 들고 있는 상자가 우리 거랑 사이즈가 다른 것 같은데요~~.”
자신과 은오의 상자와 크기를 비교하고는 우월하게 큰 상자 마희가 하나를 들자 안나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건 내가 하성이에게 주는 거야.”
“정말?”
“응. 좋아하면 노력해야지.”
은오는 도서관에 가지 않고 우진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아직 집에 오지 않아서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희가 하성이를 찾았다.
“김. 하. 성~.”
“아.. 마희야.. 왜?”
“이거.. 공부하다가 먹으라고..”
하성이가 마희가 내미는 상자를 받아 안을 바라보더니 눈을 깜박였다.
“왜 주는 거야?”
“그냥~. 그럼 공부 열심히 해.”
마희가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재원이 물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개코.. 학원 오기 전에 먹어버릴걸.. 집에 가서 천천히 먹으려고 했는데..’
“응.. 마희가 머핀을 만들어 줬어.”
“머핀?”
“응. 머.. 먹을래?”
“됐어. 너 먹으라고 준거잖아.”
안나는 두 개 다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 때 재원의 핸드폰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마희누나..”
안나는 깜짝 놀라 재원을 바라보았다.
‘응? 마희가? 핸드폰 번호를 아네.. 나도 모르게 둘이 통화하는 사인가?’
“아.. 그런 거였어? 고마워. 잘 먹을게. 응. 내일 봐.”
안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집에 도착해서 손 씻고 나올 테니까 그 때 줘.”
재원의 말에 안나는 입술이 자동적으로 뾰로통하게 나왔다. 정말 샤워를 마친 재원이 그녀의 방 문을 두드렸다. 안나가 문을 열고 상자를 열자 그가 머핀 한 개를 꺼내갔다.
“진작 말하지.. 혼자 먹으려고 했구나?”
“둘이 언제부터 연락하는 사이가 됐어?”
“누구 덕분에..”
“응?”
“예전에 마희누나랑 사귀게 해 준다고 어설픈 연기를 했잖아. 마희누나가 미안하다면서 저녁을 사줬거든. 그 때부터.. 음~ 맛있네.. 다음에 또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재원이 한 입을 베어 먹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치.. 마희가.. 내 친구 마희가..”
안나는 축 처진 어깨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재원이 다시 방문을 살며시 열고는 피식 웃으며 다시 닫았다.
“은오야.. 여기에서 잠들면 어떻게 해..”
은오가 그의 현관 앞에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
“얼마나 기다린 거야?”
“잘 모르겠는데요..”
그가 은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서 그런지 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잠깐.. 아니다. 집에 데려다 줄게.”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어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떡만둣국 끓여줄 때도 갔었고, 선생님이 아침으로 라면 드실때도 갔었는데요?”
“그때는 그때고.. 아~. 여하튼 지금은 안 돼. 가자. 데려다 줄게.”
“혼자 갈 수 있어요. 오늘은 이것 때문에 왔어요.”
은오가 상자를 내밀었다. 우진이 받아 들고 열어 보고는 “머핀이네?” 라고 말했다.
“마희가.. 선생님 드리라고 줬어요.”
“커피랑 먹고 싶네.. 같이 먹고.. 아니다. 잘 먹겠다고 전해 줘. 고맙다고..”
은오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모네 찻집에 가실래요?”
“음.. 그럴까?”
두 사람은 찻집에 들어갔다.
“어, 은오야.. 선생님. 오늘은 같이 오시네요?”
“네. 마희가 머핀을 줬는데 같이 먹으려구요. 저는 커피 주세요.”
“저도요.”
“너 커피 안 마시잖아.”
이모가 물어오자 은오가 “머핀을 보니까 같이 먹어보고 싶어서요.” 라고 말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리세요.”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
“네?”
“오래 기다려서.. 전화를 하지.. 참. 핸드폰이 없지..”
“괜찮아요. 핸드폰은.. 졸업하고 사려구요. 학생한테 핸드폰은..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럼 오늘처럼 그렇게 기다리는 건 하지 마. 알았지?”
“네. 죄송해요.”
이모가 커피와 빈 접시 두 개와 포크 두 개를 주셨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너도.. 맛있게 먹어.”
“네.”
두 사람은 커피와 함께 맛있는 마희표 미니머핀을 먹었다. 집으로 가면서 은오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왜?”
“태어나서 커피는 처음 마셔보는데요.. 향기가..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카페인이 많이 들어있으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네. 입에서 아직도 커피향이 나는 것 같아요.”
“그래?”
“네..”
은오가 다시 우진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은오가 종종 뛰어 우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선생님..”
“얼른 들어가.”
“선생님...”
은오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순진한 애를 상대로.. 내가.. 아후.... 내일 보자.”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응?”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길모퉁이를 돌았다. 은오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길모퉁이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은오를 바라보던 우진은 벽에 머리를 콩하고
찧고는 “아!” 라고 말하며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쯧...”
그가 한 숨을 깊게 내쉬며 몸을 돌렸다.
마희는 일단 요리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관심이 없던
터라 맥락을 잡기 힘들었다. 안나가 다니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틈만 나면 공부를 했다.
은오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기도 했지만 왠지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는데 하성이 다가왔다.
“다시 살이 찔까봐 물만 마시는 거야? 점심으로도 야채만 먹는 것 같던데..”
“아.. 하성아..”
“너무 안 먹으면 뇌가 일을 할 수가 없어. 적당히 먹어. 지금은 충분히 날씬하니까..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까..”
“충고는 고마워. 하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
“요즘 공부하는 것 같더라?”
“응. 원래는 대학에 안 갈 생각이어서 공부도 대충했는데..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두 마리 토
끼를 다 잡기로 했지. 문제는.. 그 동안 열심히 안 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데 있어. 이러
다가는 결국 한 마리 토끼밖에는 못 잡을 것 같아.”
“지난번에 머핀 맛있게 잘 먹었어. 네가 만든 거지?”
“응.”
“부모님이 바쁘셔서.. 누군가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 준 음식을 처음 먹어봤어.”
“정말?”
“그래서 말인데.. 종종 맛있는 걸 만들어 주면.. 대신 내가 네 공부를 좀 봐줄게.”
그가 손을 들어 턱아래를 긁으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종에.. 거래를 하자는 소리야?”
“뭐.. 그렇지.”
“네 공부를 방해할까봐.. 그게 걱정인데.. 은오한테 물어보다가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못 물어보고 있었거든..”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 돼. 너무 힘들어지면 말할게.”
“오케이~. 그럼.. 부탁해.”
“그래. 일주일에 한 번이면 좋겠네..”
마희는 하성을 바라보며 미소지었지만 하성은 언제나와 마찬가지인 시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기말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은오는 콧물이 나는 것 같아 훌쩍였는데 공책위로 피가 툭하고 떨어지자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코피..”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더듬 휴대용 티슈를 찾았다. 하지
만 그게 바라보지 않고 왼손만 이용해서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인상을 쓰며 티슈 찾기에 집
중하고 있는데 우진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뭐하냐?”
“아..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녀는 소곤소곤 말했다. 우진은 대답대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코아래에 대 주었다.
“잡고 있어.”
“하지만 더러워질텐데..”
“잡고.. 있어.”
은오가 손수건을 잡자 그가 그녀의 가방에서 티슈를 꺼냈다. 그리고 티슈를 빼서 은오에게 건
네고 다시 한 장을 꺼내 반으로 찢은 후에 코안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말아 주었다. 은오는
먼저 받아 든 티슈로 코와 코 아래를 닦은 후에 다음으로 받은 것을 코에 끼워넣었다.
“코피냐.. 잘 먹지도 못하는 녀석이..”
은오가 웃자 그가 인상을 썼다.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그래.”
은오가 화장실에 가서 물로 닦은 후에 다시 다른 티슈로 코를 막고 나왔다. 그가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음.. 여기 공부하는 구나..”
“어쩐 일이세요?”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
“아까운 피를 흘렸잖아. 영양보충을 해야지.”
미소 짓고 있는 우진을 은오가 수줍게 바라보았다. 결국 은오는 그와 함께 차를 타고 고깃집에 갔다.
“여기 비싸지 않아요?”
“비싸지.. 한우인데. 많이 먹어. 여기 소화제도 사놨어. 혹시나 촌스럽게 배탈날까봐.”
은오가 웃었다.
“자꾸 웃어..”
“그럼요. 얼마나 행복한데요.”
“그래? 행복해?”
“네.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어요.”
“돈 많이 벌어야겠다. 우리 은오.. 맛있는 거 많이 사주려면..”
“저도 많이 벌게요. 그래서 선생님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그래~.”
두 사람은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열심히 먹었다.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있던 안나는 자꾸 졸음이 오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가루 원두커피를 보온병에 담았다. 하품을 하면서 손을 들어 뒷목을 쓸고 있었다.
“뭐해?”
“아.. 깜짝이야..”
안나가 손을 가슴위에 올렸다.
“미안해. 되도록 큰 발소리를 내면서 왔는데..”
“물이 끓는 소리에 못 들었나봐. 지금 졸려서 약간 제정신도 아니고..”
“그럼 자야지. 커피는 왜 마셔..”
안나가 입을 벌리고 크게 하품을 하고 대답을 했다.
“졸려서. 오늘까지 해야 할 분량을 다 못했어..”
“이해력이 좀 늦은 편이지?”
“쯧.. 아픈 곳을..”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아.. 네.. 너는 공부하는 방법을 알아서 좋으시겠네요..’
“속으로 내 욕했지?”
안나가 뜨끔했지만 짐짓 아니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닌데?”
“쯧. 오히려 수상하다구. 거짓말 진짜 못해.. 어떻게 다 표시가 나지?”
“아니야..”
“나도 한 잔 줘.”
“응.”
안나는 보온병에 물을 담기 전에 그가 내미는 머그컵에 물을 붓고 원두커피를 넣었다. 그리고 보온병에 물을 부었다.
“밤 새려고?”
“아니.. 앞으로 두 시간만..”
“그럼, 수고해.”
“응.”
그가 먼저 올라가고 조금 후 그녀도 올라갔다. 정확히 두 시간 반 만에 분량을 끝낸 안나가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다음날 늦게 일어난 안나가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양
치질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심지어 양말 한쪽은 신으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어~~”
순간 재원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
“조심 좀 하지.. 눈앞에서 누군가 피 흘리는 걸 아침부터 보기 싫거든?”
“미안. 고마워.”
안나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갔다 와.”
“네.”
안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스정류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에 오른 안나는 방금 재원이 잡았던 팔을 자신도 모르게 툭툭.. 털어버렸다.
드디어 기말 고사 전날. 마희는 하성과 마무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 끝났다. 고마워. 덕분에.. 잘 볼 것 같아.”
하성이 마희가 만든 골드 블루베리 바이츠를 입에 넣기 전에 “나도.. 고마웠어.” 라고 말하고는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참.. 맛있게 먹어주니까 기분은 좋네..”
“네가 맛있게 만드는 거지.. 이건 빵집에서 파는것보다 맛있는 것 같아.”
“그래? 고마워. 그럼 조심해서 가.”
“그래.”
마희는 “음~”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고 있는 하성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는 그 동안 너무 무리를 했는지 기운이 별로 없었다.
“힘들어?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요. 저 저녁 안 먹고 올라가서 잘래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와 자신의 방에 들어간 안나는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 엎드렸다.
“아... 얼른 끝나라.. 얼른...”
곧 그녀의 코고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 문을 두드리고 먹을 걸 들고 있던 재원은 안
나의 코고는 소리에 “뭐야.. 이렇게 빠른 시간에 잠들다니.. 대단한데?” 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우진이 은오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은오가 차 문을 닫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우진을 바라보았다.
“기말시험도 잘 볼게요.”
“무리하지 말고..”
“걱정되는데요? 이번에 1등 놓칠까봐..”
“놓치면 어때.. 너무 1등만 해도 재미없어.”
“그래요?”
“응. 스트레스 받아서 아플까봐.. 난 그게 더 걱정이야.”
“헤...”
“들어가. 오늘은 푹 자. 내일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우진은 가려는 은오의 손을 잡으려다가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그것도 모르고 은오는 깡충깡충 뛰어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우진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하다가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힘들게 지나간 기말고사가 끝이 났다. 눈 아래 그늘이 턱까지 내려온 안나가 책상에 엎드렸다.
“아~~. 죽는 줄 알았네.. 끝나서 다행이다.”
마희가 안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공부를 하니까 시험보는 것도 좀.. 재미있는 것 같아.”
“누구누구한테 특훈을 받아서 그렇겠지.. 나도 받을까? 반장한테?”
안나가 고개를 돌려 볼을 책상에 붙이고 마희를 바라보았다.
“맛있는 걸 줘야하는데.. 넌 요리하는 거 싫어하잖아..”
“아~~. 왜 난 잘 하는 게 없는 걸까.. 은오는 공부를 잘 하고, 너는 요리를 잘하고.. 나는.. 먹는 걸 잘하는데.. 마희야~. 나도 맛있는 거.. 떡 먹고 싶다. 우리 오늘 이모네 갈래?”
“그래. 은오야.. 어때?”
마희와 안나가 고개를 돌려 은오를 바라보았다. 은오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인상을 쓰고 시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끝났는데 그걸 왜 보고 있어..”
마희가 은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
“응?” “왜..?”
“밀려쓴 것 같은데..”
안나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정말?”
“응.. 밀려서 쓴 것 같아..”
“어떻게 해..”
“아.. 어떻게 하지..”
“무슨 과목인데?”
“여.. 영어.”
“잠깐 기다려. 내가 가서 확인해 보고 올게.”
안나가 일어나자 은오가 잡았다.
“안나야..”
“확인 만.. 어떻게 한다는 게 아니라.. 네가 하긴 좀 그렇잖아.. 그치..”
은오가 마른 침을 입술에 묻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안나가 교실을 나가자 마희가 은오를 바라보았다.
“네가 실수를 하다니.. 피곤했어?”
“그게..”
안나가 교무실에 들어가 우진 앞에 섰다. 우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안나인 걸 확인하고는 다시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왜?”
“선생님.”
“응.”
“....”
안나가 말이 없자 우진이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데..”
“밀려서 쓴 것 같은데요.. 확인 좀.. 해 주세요.”
“안 돼~, 인마. 끝난 걸 확인해서 뭐하려고.. 쯧. 무슨 과목인데?”
“오늘 본 영어시험인데요..”
“에고~. 담임 시험을 밀려서 쓰셨어요..?”
“제가 아니라..”
우진이 미소 짓고 있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얼마나?”
“확실하지 않아요. 그래서.. 확인 좀 해 주세요.”
“알았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찻집에서 하자.”
“네.”
안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진이 안나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맣게 말했다.
“고맙다.”
안나가 우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교실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나가자. 일단 집으로 가자.”
“알고 가야 하지 않아?”
“가자. 응?”
“응.”
마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책가방을 챙겨 은오와 안나를 따라갔다. 셋은 이모 찻집에 앉아 있었다. 조용한 은오와 안나를 마희가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나 모르고 둘만 아는 거 있어?”
안나가 은오를 바라보았다. 은오도 눈을 들어 안나를 바라보았다. 마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 삐진다..? 뭐야~. 불안하게..”
은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선,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뭘?”
“나.. 선생님이랑 만나고 있어.”
“정말? 어.. 너는 왜 안 놀라? 알고 있었어?”
마희가 바라보며 말하자 안나도 마희를 바라보았다.
“분위기로 짐작만 하고 있었어. 나도 은오한테 직접 듣는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래? 왜 난 몰랐지?”
“너는.. 그러게. 왜 몰랐지? 그렇게 둘이 표시나게 구는데?”
“내가 좀.. 그 분야는 둔하잖아. 언제부터 만나는데? 아니다. 일단.. 축하해~~.”
“그래, 나도.. 축하해.”
“고마워.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 때부터.. 만났어.”
“헤~~. 한 달 동안 우리 몰래.. 응?”
안나가 미소 지으며 은오의 어깨를 슬쩍 밀자 은오가 볼이 붉어졌다.
“넌 어떻게 알았어? 덜렁이가..”
“그러게.. 이상하게 난 그런 건 금방 알게 되더라. 덜렁이가 쓸데없는 데 민감하지? 그냥.. 분위기가 어색하더라고. 선생님이 너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도 감추는 것 같고..”
“혹시 다른 아이들이 알면 선생님이 곤란해 하실 것 같아서.. 말 못했어.”
“괜찮아~. 그런 건 괜찮아..”
“나도, 이해해. 앞으로 2학기 동안.. 정말 우리도 조심해야지. 특히 너..”
안나가 마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마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나? 내가 왜?”
“감정 숨기는 게 안 되잖아.”
“하긴.. 어떻게 하지? 차라리 모르고 있을 걸.. 나 때문에 두 사람이 곤란해 지는 거 싫어.. 어떻게 해.. 안 들었다고 생각해야지.. 아아아아..”
마희가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여러 번 쳤다.
“선생님이 너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어.”
“고마워..”
“아니야. 행복해?”
은오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희와 안나도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밀렸으면 어떻게 하지?”
“이미 끝난 거잖아. 어쩔 수 없지. 대신 2학기에 정신 차려서 해야 해. 네가 가고 싶은 대학은 만만치 않은 곳이잖아.”
“맞아.. 그래서.. 더 힘들겠다.. 많이.. 아니 하나도 안 밀렸으면 좋겠다.”
“그러게..”
안나와 마희는 은오에게 선생님 잘 만나라고, 혹시 성적이 떨어져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말하고 각자 집으로 가고, 은오만 찻집에 있었다. 잠시 후 우진이 들어왔다. 은오가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은 우진을 바라보았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두 손을 꽉 잡았다.
“얼마나.. 밀렸어요?”
우진이 조용히 은오를 바라보았다.
“....”
우진이 경직된 표정으로 은오를 바라보자 은오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죄송해요.. 선생님이 채점하신다는 생각에 긴장을 해서.. 더 잘해야지 해 놓고.. 죄송해요..”
“바보.. 이러면 내가 너랑 만날 수가 없잖아. 너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은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지금 이 얼굴을 우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손 내리고.. 얼굴 좀 보자.”
은오는 손을 내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다행히 몇 개 안 밀렸더라. 하지만.. 1등에서는 내려와야 할 것 같아. 뭐 어때.. 별거 아니야. 인생에 전교 1등만 했다고 하는 녀석들 보면 재수 없더라..”
“....”
은오는 아프게 눈물이 섞인 침을 아프게 목으로 넘겼다.
“은오야..”
“죄송해요. 내일 봬요.”
은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책가방을 들고 어깨에 매며 가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 후 뒤따라 나온 우진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은오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은오야..”
“....”
“얼굴 좀 보자..”
우진이 천천히 은오의 손을 잡아 몸을 돌렸다. 은오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
다. 우진은 손가락을 은오 턱 아래에 대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
는 은오의 눈이 우진을 힘겹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너무 세게 물어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는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피가 나잖아.. 영양보충 해 줘야겠네..”
은오가 이 상황에서 농담을 하는 우진 때문에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손을 들어 우진의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우진은 손에 힘을 더 주어 은오의 볼을 감쌌다.
“선생님..”
“....”
우진이 은오의 양 볼을 감싸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은오는 우진을 잡은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우진은 은오의 입술로 내려오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은오의 붉어진 콧끝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젠 은오의 머릿속은 밀려 쓴 영어시험지가 아니
라 방금 전의 일로 가득 찼다. 눈물이 멈추고 방금 일어난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태풍이 몰아쳤다.
첫댓글 정주하고있어요.....주연이 좀 많네요...^^
그렇네요.. 어찌하다보니 출연 인물들이 많아졌어요.. ^^
글 감사히 잘보고갑니다. 예전느낌이 많이나요. 지금도 늦지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나이먹었음을 느끼는순간이... 저런 감성을잃어버려서 슬프네요.
저도 그렇답니다..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어제 늦게까지 읽어주시더니 아침 일찍부터 읽어주시네요. . ^^
재밌게 봤어요
다행입니다..^^
정주행하고 있습니다! 작가님 잘 보고 갑니다~
늦은 시간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