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는 1564년 11월 24일, 영국 길링험에서 태어났다. 12살때 부친과 사별한후 라임하우스 조선소의 소유자인 니콜라스 디긴스 밑에서 도제생활을 하게된다. 애덤스는 12년에 걸쳐 조선술과 천문학, 항해술등을 익히게 된다.
왕실해군에 입대해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경 밑에서 에스파냐 무적함대와 전투를 치른 경험도 있는 애덤스는 해군 복무가 끝난 후 바르바리 무역회사에서 조타수로 일하게 된다. 무역상회에서 일하는 동안 애덤스는 북동쪽 항로를 통해 시베리아 해역을 거쳐 극동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기위한 북극 탐험에 2년 동안 참가하기도 한다.
1598년에 34세가 된 애덤스는 네덜란드로 간 후 극동아시아로 향하는 다섯 척의 선단을 이끄는 수석 항해사로 뽑히게 된다.
애덤스는 1598년 6월에 '데 후프' - De hoop호를 타고 로테르담을 떠난 후 같은 달 24일에 나머지 선박들과 합류하게 된다.('데 리프데 - De Liefde', '헤트 겔루프 - Het Geloof ', '데 트라우 - De trow', '블리지데 부드스코프 - Blijde Boodschap ') 항해하는 동안 선단은 아프리카 서해안과 남아메리카의 동해안을 거쳐 마젤란 해협까지 지났으나, 칠레 해안선에 이르러 함대는 흩어지게 되고 여러선박들이 실종되었다. 애덤스는 '데 리프데'호로 갈아타고 산타 마리아 섬에서 다른 배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직 '데 후프'만이 돌아왔다. 두척의 배가 서역풍을 타고 일본으로 항해해간 시기는 1599년 늦은 11월이었다. 1600년 1월 말에 '데 후프'호마저 태풍으로 침몰하고 만다.
1600년 4월 19일 '데 리프데'호가 분고(豊後) - 오늘날의 오이타 현 - 에 상륙했을때 24명의 선원들 중 오직 9명만이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애덤스가 일본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포르투갈인들이 규슈에서 50년이 넘게 무역거래를 하고 있었고 의심할 바 없이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규슈에 거주하던 포르투갈인들의 모함으로 인해 애덤스 일행은 해적일당이라는 혐의가 씌워졌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힘을 합쳐 유럽 안팎에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대항해 해상무역의 패권을 두고 바다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애덤스는 드레이크 함대의 전선 중 한척을 지휘하는 선장으로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와 전투를 벌인 경험도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애덤스와 동료선원들을 심하게 학대해 애덤스가 영국인이라는게 알려진 후에도 그는 자신이 무적함대와 전투한 경력에 대해서는 결코 실토하지 않았다. 애덤스와 동료선원들은 감옥에 갇혔으며 그들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오사카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알려졌다.
이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의심할 바 없이 나이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다음번 쇼군에 오를 수 있도록 보필하고 조언하는 가장 실력있는 섭정이자 조언자로서 오사카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내의 권력중심이 눈에 띄게 이에야스에게 집중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권력이동의 첫번째 움직임은 어린 히데요리와 그 어머니 요도기미(淀君)를 보필한다는 서약을 지켜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내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에야스의 행동은 일본의 정치적 섭정을 맡고 있던 다른 5인의 후원자들을 동요시켰으며 얼마 후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후원자들과 대결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애덤스가 일본에 도착했을 당시 히데요리는 아직 9살의 어린아이였고 오사카성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는 '데 리프데'호와 화물을 압수하고 선원들을 분고에서 오사카로 압송해온 후 애덤스 일행의 정체가 무엇이며 이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판단이 설 때까지 오사카성의 감옥에 가둬두었다.
'데 리프데'호의 선적물은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제 무기들의 보고였다. 데 리프데호는 배수량 400톤에 26문의 대포를 보유했다. 선적물은 550정의 머스킷과 5.000개의 대포알, 5,000파운드의 화약등이었으며, 이와 비슷한 양의 사슬포탄과 유산탄도 실려있었다. 이 엄청난 양의 무기와 화약들은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유용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애덤스가 도착한 지 6개월이 지난 1600년 10월 21일 아침 세키가하라 전투(關ヶ原の戰ひ)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의 지배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옮겨오게 된다.
새로운 쇼군은 애덤스를 총애했으며 결국은 그를 외교및 무역에 관한 조언자로 대우하고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1604년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이즈(伊豆) 반도에서 서양식 범선을 건조할 것을 명령한다. 80톤급의 배가 만들어졌으며 쇼군이 더 큰 배를 만들 것을 지시하여, 다음 해에는 120톤급의 배가 만들어졌다.
이에야스는 애덤스의 노력과 공로의 댓가를 높이 사서 새로운 수도인 도쿄에 큰집을 선사하였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하사품은 2개의 검이었다. 지위와 권위의 훈장인 이 검들은 애덤스를 영국인 항해사에서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으로 변신시켰다. 애덤스는 사무라이의 지위와 함께 오늘날 요코스카시 지역의 땅을 봉토로 받았으며 에도성의 관료이자 고귀한 사무라이인 마고메 가규의 딸인 오유키라는 아리따운 신부마저 얻게된다.
애덤스와 오유키는 요코스카(横須賀)에 정착했으며 조셉이라는 아들과 수산나라는 이름의 딸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안진은 정착해서 사는게 자신에게는 힘들다는걸 깨닫고 항해를 다시 시작한다. 처음에는 과거에 비켜갔던 북극항로를 다시 찾기위해 탐험대를 조직하는 어리석은 짓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613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나가사키 근처에 무역창구를 만드는 걸 도운이후에 그는 영국과의 무역을 혼자서 선점하게 된다. 영국 회사와 계약을 맺은 후 애덤스는 오키나와, 태국, 인도차이나를 항해했다.
애덤스는 1620년 나가사키(長崎) 북쪽 히라도(平戸)에서 5월 16일 사망한다. 56세였다.
제임스 클라벨(James Clavell)의 소설 '쇼군'(Shogun)의 줄거리는 윌리엄 애덤스의 일본에서의 행적에 기초하고 있다.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_^
집에 저 쇼군이 있는데, 세로쓰기의 압박이.. -_-
정말이지 왕마귀님의 자료는 볼때마다 즐거워지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