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황궁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한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황단(皇壇)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는 곧 3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으므로 조선은 국호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해져 황단(皇壇)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3한(三韓) 영토를 통일(統一)하였다. 태조(太祖)께서 용흥하는 처음에 여도(輿圖)로써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욱 넓어져 북쪽으로 말갈(靺鞨:간도)의 살피(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쪽으로 탐라(耽羅: 제주도)을 거두어 탐라에서 귤과 풍부한 해산물을 바쳤고(貢)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말갈(靺鞨: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이르는 영토를 통일(統一)하는 업적(業)을 세우셨다. 산하가 공고하여 복(福)을 우리 자손만세(子孫萬歲) 반석의 종(宗)에 드리셨고 상제(上帝)께서 위태함을 돌려 평안(平安)함을 갖게 하고 독립(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自主)의 권리(權利)를 행하게 하셨다. 고조(高祖)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밝혀 대한시대가 시작되었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종묘를 태묘(太廟)로,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여 고쳤다. 1895년 일본군에 살해된 왕후 민씨(閔氏)를 대한제국(大韓帝國)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였으며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황태자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비로소 거행하였고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였다. 일본이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 사이에 국제법적으로 불법적인 국경선을 제멋대로 획정하고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적으로 적은 거짓꾸민 교과서의 검정 승인에 이어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청서,방위백서를 발간하였다. 일본의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적은 외교청서,방위백서 발간, 교과서의 검정 승인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에 대한 침략 도발임으로 즉각적인 영토주권 침해의 시정을 촉구하고 국제수로기구(IHO)에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영문 적기 환원을 요구해야 한다. 1909년 11월 대한국(大韓國:Korea)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를 적은 옛지도를 상설전시, 교육홍보하고 역사적,국제법적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확립하여 대한국(大韓國:Korea) 114년 역사를 바로세우고 일본 정부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밝혀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9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 한반도 제주도, 간도(間島), 대한해(Sea Of Korea), 독도(Dokdo,) 울릉도(鬱陵島) 대마도(對馬島)를 비롯한 인접 섬과 바다를 다스리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국(大韓國)의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獨島)를 넣고,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대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하고 대한제국 서울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한일의정서)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제(日帝)는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으나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은 독도를 울릉군 소속이라고 밝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이며 울릉군에 소속된 행정관할구역임을 확인하였으며 1907년 현성운(玄聖運)이 제작한 대한전도(大韓全圖)와 현공렴(玄公廉)이 1908년에 제작한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에 대한해(大韓海)로 적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불법 병합하고 1929년 대한해(Sea Of Korea)를 일본해로 몰래 바꿨으므로 국제수로기구(IHO)는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영문 적기를 되살려야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과 한반도와 제주도,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 등 영토를 되찾았으며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제주도,울릉도,독도(獨島)를 일본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한 지령(SCAPIN) 677호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와 영토를 계승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는 1952년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인 독도(獨島)가 들어가는 인접 바다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선포하고 1954년 독도(獨島)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를 새겨놓았다. 1897년 10월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건국(建國)한 근대적 자주독립국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가 1899년 8월 17일 반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헌법적 법전의 이름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모두 9조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국국제 1조에서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의 공인된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皇帝)의 육해군 통수권, 계엄령 발포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면권, 외국과의 조약(條約) 체결권·선전 강화권·사신 파견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 발발 징후가 보이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대외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강점한 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체결하고 독도를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했다.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체결하여 1900년 10월 25일 고조 광무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독점 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체결하였다. 1909년 9월 간도 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조약 체결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이범윤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청나라에 불법 양도했다.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박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는 1907년 7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한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네덜란드에 특사(特使)로 파견했고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다. 일제가 강제한 을사조약을 까밝히려 했던 고조 광무제의 계획은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대한제국 대표들이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만국평화회의를 계기로 열린 국제회의에서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 이위종 특사의 '대한제국을 위해 호소한다'는 연설은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대한제국 강제 병합을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7월 20일 고조 광무제를 무력 동원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 황실 황위 승계 서열 1위 의친왕 대신 어린 영친왕을 영친왕비 민갑완(閔甲完)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7월 24일 군대 해산,사법권·경찰권의 위임,법령권 제정·관리임면권 간섭하는 정미늑약(丁未勒約)을 늑결했다. 1910년 8월 16일 일제 통감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경술조약안을 밀의(密議)하고 18일 내각회의에서 경술조약안 합의를 보게 한 후 22일 대한국 황제가 불참한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치게 하고 29일 한일 병합을 공포하였으나 통감부(統監府)가 조약 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술조약(庚戌勒約) 처리를 강행했으며 대한제국 조약 체결권자 고조 광무제의 조약 체결 친필 서명없이 일제 통감부가 조약 관련 주요 문서들을 위조(僞造)하였으므로 경술조약(庚戌勒約)은 불법 무효하다. 1904년 2월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불법 체결(勒結)하고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1897-1919)의 국방과 재정의 실권 장악,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을 통한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노골화했고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8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의 독점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에게 을사조약(乙巳勒約) 늑결을 강요했다. 일제(日帝)는 을사조약의 불법 체결을 위해 고조(高祖) 광무제에게 협박을 거듭했으나 불응하였고 1905년 11월 17일 고조 광무제가 불참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이등박문은 을사5적(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을사조약(乙巳勒約)을 불법 체결(勒結)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統監府)는 대한 황실 궁내부(宮內府)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여 교육기관,연구기관,문화기관과 외국에서 불법 소장중이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1일 대한 황실이 창경궁(昌慶宮)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일제 총독부에 의해 대한제국 문화재 조사 수집 또는 강제 기탁 불교문화재,도굴 및 구입 장물과 함께 경복궁,경운궁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불법 반출 또는 서울박물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고궁박물관은 황실박물관(Imperial Museum)으로 개칭하고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대한제국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외국으로 불법 반출 후 환수하였거나 불법 이관되어 교육기관·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KOREA·태극기·애국가·대한국국제·국새·칙령(勅令)·실록·의궤·일기·등록·법전·어찰·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독도(獨島)·간도(間島) 및 도성궁궐도·대한 황실 및 궁궐 유리원판 사진 등 대한 황실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대외관계실을 신설하고 통치체제실을 확대개편하여야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제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KOREA,대한국국제,태극기,애국가,국새,어보,칙령,실록,의궤,일기,등록,법전,어찰,백자,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독도(獨島)·간도(間島)·도성궁궐도, 궁궐 및 대한 황실 유리원판 사진,황실 복식,환구제를 적극적으로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국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안전 관리하고 전문가 및 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건국한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0년 황자(皇子) 의친왕(義親王), 영친왕에게 친왕(親王) 책봉(冊封)하였다. 고조 광무제는 명성황후 민씨,귀인 장씨,귀비 엄씨,귀인 이씨, 소의 이씨,귀인 정씨,귀인 양씨 등 모두 7명의 황후,후궁과의 사이에 많은 황자(皇子)들이 있었고 고조 광무제와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 경운궁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19년에 대한제국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했다.
제정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9월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직계 후손은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의 후손인데 의친왕(義親王)과 10여명의 후궁 사이에 13황자 9옹주가 있으며 공주는 없었다. 의친왕은 1893년 12월 6일 의친왕비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으며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의친왕(義親王)은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친일파가 득세하였고 1910년 8월 경술늑약 체결 이후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김가진,전협(全協)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간도 안동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돌아(崩御)가셨다. 대한제국 고조(高祖) 광무제는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책하였으며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으며 1910년 8월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체결은 무효이고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돌아가심(崩御)으로
9월 상해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 후 득세한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었던 귀인 엄씨이고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되고 택일하여 가례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이등 통감이 영친왕을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고 영친왕은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된 민갑완(閔甲完)은 영친왕을 기다리며 책을 벗삼아 지냈다.
전제군주제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돌아가심(崩御)으로 4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됐다. 대한제국 황족의 책봉권자인 고조(高祖) 광무제는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고 1910년 8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체결은 불법 무효이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민주공화정으로 전환되어 대한제국 황제의 치세는 1919년 4월에 끝났으며 심청색 이화문 적의(翟衣)는 대한제국 황후,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입은 대례복이다.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일본 왕족 마사코를 일본으로 송환하고 영친왕릉에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합장(合葬)해야 한다.
고궁박물관은 제왕기록실과 대한제국실의 대한제국 황실 연표에 1대 고조 광무제(1897-1919),
2대 순종 융희제(1919), 황태제(皇太弟) 의친왕,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으로 바로 적어야 하며 대한제국실의 영친왕비 사진을 민갑완으로 교체하고 왕실생활실의 심청색 이화문 9등 적의(翟衣)를 대한제국 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입은 대례복으로 바로 전시 설명하여야 한다.
대한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돌아가시(崩御)자 3월 4일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봄 ,여름,가을,겨울의 사시,동지(冬至) 후 3번째 술일(戌日)의 납일(臘日)과 한식,단오,중추의 영절(令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인석, 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금천교 안쪽 좌측에 규모가 큰 재궁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식재되어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2대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 그리고 순정황후 윤씨(純貞皇后 尹氏)의 능이며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황제로 등극함으로써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다. 一 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홍전문까지 문인석·무인석,기린·코끼리·해태·사자·낙타·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중앙에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서울시,경기도, 강원도에 소재한 조선시대(1392년-1897년) 506년 동안 존속된 25대 임금과 왕비 그리고 사후 추존된 임금과 왕비의 릉과 대한제국시대(1897년-1919년) 황제릉을 조선 왕릉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렸는데 문화재청은 연조(燕祖),광조(光祖) 묘호(廟號) 추존 및 왕릉 능제 격상, 완친왕릉 능제 격상,영친왕릉에 영친왕비(英親王妃) 민갑완(閔甲完)을 합장(合葬)하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제 의친왕의 능제를 격상하고 황제릉 능호를 부여하여야 하며 고궁박물관은 조선 왕릉 및 대한제국 황제릉을 재지정하고 교육홍보하여야 한다.
번호 41738 글쓴이 동북아의 문 (namoon) 조회 160 누리 15 (15,0, 1:3:0) 등록일 2011-9-16 09:50 대문 1 |
|
|
야생 돼지를 사로잡아 우리에 가둔 다음, 사료를 먹여 살을 찌우고, 흉년이 들자 잡아먹는다면 돼지는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까? 미국은 무상원조를 통해 한국 경제 기반을 무너뜨린 다음, 차관을 통해 하청기지로 만들어 규모를 키웠고, 경제 위기에 몰리자 드러내놓고 수탈하기 시작했다. 이제 먹고 남은 뼈다귀로 뼈다귀탕을 해 먹자는 게 한미FTA다.
지난 회에 이어 이번에는 경제, 문화 분야에서 어떻게 한국 사회가 미국에게 예속되었는지 살펴보겠다.
3. 예속 경제 만들기
보통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제 수탈을 위해 약소국을 지배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나토군이 리비아를 침공한 것도 석유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 38선 이남의 한반도에는 지하자원이 많지도 않았고 발달된 산업 기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애초에 미국은 한국을 경제적으로 수탈하기보다는 강력한 반공군사기지로 만드는 데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미국의 원조가 주로 군수물자에 집중된 것도 이를 증명한다.
▲석유를 노린 더러운 전쟁을 풍자한 그림
물론 정치는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안정된다. 미국이 한국에 친미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미경제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래서 미국은 적산불하라는 명분으로 한국에 남아있던 일제 재산을 몰수하여 친미 자산가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미국에 남아도는 농산물과 소비품들을 몽땅 원조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경제는 자생력을 잃어버리고 미국 경제에 철저히 의존하게 되었으며 친미 매판자본가들이 육성되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미국은 한국 경제에 대한 정책을 변경한다. 한국은 낙후한 봉건 경제가 유지되는 반면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은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낙후한 국가들 속에서 반공의식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쇼윈도 자본주의’라는 체제경쟁 정책을 펼쳤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줄이고 유상원조, 즉 차관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경제개발계획을 공동 수립하는 식으로 차관을 자신들의 뜻대로 관리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의 급격한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졌으나 이는 결코 정상적인 경제 발전이 아니었다.
미국은 자국 국민들의 반발을 사는 공해산업과 경쟁력이 떨어진 노동집약산업을 한국에 이전하였다. 한국은 농업말살정책으로 확보한 값싼 노동력으로 눅은 소비품을 몽땅 생산해 다시 미국에 수출하였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후진국들에서 확보한 값싼 소비품으로 자국 물가를 관리하며 노동운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은 미국의 하청기지로 전변되었다.
우리가 흔히 7, 8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하는 경제 발전은 이처럼 철저히 미국의 통제 아래 미국 경제의 부속품이 되는 과정이었지 일반적인 선진국 경제를 따라가는 과정은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한국에는 선진국을 따라잡을 산업이 없었으며 그저 싼값을 장점으로 내세워 미국 시장에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한강의 기적. 진실은?
양적으로 확대된 한국 경제가 얼마나 허약한지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경제위기를 통해 드러났다. 한국 경제의 흥망은 미국 경제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그나마 한국 경제 확대의 공은 군사독재자나 재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3권을 빼앗긴 채 묵묵히 일해 온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한편 미국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차관에서 직접투자, 주식투자로 정책전환을 추진한다.
이는 당시 동구권 붕괴를 기회로 이곳에 정부 자금을 집중하기 위한 측면과 함께 미국 경제가 제조업에서 금융 중심으로 변화한 데서 비롯한다. 미국은 한국에 금융시장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에 한국 정부는 92년부터 외국인의 주식 시장 직접 투자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미국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미국은 본격적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수탈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시장은 완전히 개방되었고 한국 주요 산업은 외국 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였다. 론스타 먹튀 사건은 대표적 사례로 이 과정에 한국 경제 관료들도 협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0년 외국인 투자자가 배당금으로 챙긴 액수만 4조9700억 원으로 전체 배당금 총액의 36.83%에 이른다. 한국 기업이 돈을 벌면 1/3 이상을 외국인이 가져가는 구조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를 보기로 들면서 이제 한국 경제도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 선진국과 경쟁하는 시대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왜 지금의 상황을 용인했을까? 사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결코 자신들의 핵심 기술을 후발주자에게 전수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사양 산업, 경쟁력이 떨어진 산업, 위험부담이 큰 산업을 넘겨줄 뿐이다.
보기를 들어 한국이 반도체 강국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핵심 설계 기술이 없어 부가가치가 떨어지는 메모리 분야만 기형적으로 비대하다.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 분야는 자신들이 독점한 채 메모리 분야의 진출만 허용한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분야도 마찬가지로 선진국 기술을 따라가기에 바쁠 뿐 앞지를 수가 없다. 간혹 핵심 기술을 터득해 자국 산업에 위협적인 수준에 오르기라도 하면 가차 없이 짓밟는다. 특허분쟁, 덤핑판정, WTO 제소 등 명분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한미FTA는 뼈다귀탕 수순일 뿐
한국 경제가 미국에 예속된 역사를 훑어보면 이렇다. 먼저 미국은 공짜원조를 통해 한국 경제 기반을 무너뜨렸다. 그 다음 차관을 통해 미국의 하청기지로 만들어 규모를 키웠다.
그 후 미국이 경제 위기에 몰리자 드러내놓고 수탈하기 시작했다. 비유하자면 멧돼지를 사로잡아 우리에 가둔 다음, 먹이를 주어 살을 찌우고, 흉년이 들자 잡아먹는 셈이다.
이제 먹고 남은 뼈다귀로 뼈다귀탕을 해 먹자는 게 한미FTA다.
4. 친미 문화 만들기
한국을 반공군사기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미 정부, 예속 경제와 더불어 사회 전반을 친미화하는 게 중요하다. 국민들이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사대정권도 무너지고 미군도 쫓겨날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일찍부터 한국인들 속에 친미 사상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만의 독특한 사상문화의 특징은 첫째, 자기 민족을 멸시하는 허무주의가 가득하고 둘째, 미국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대주의가 판을 치며
셋째, 미국식, 일본식 문화가 전통 문화를 밀어내고 중심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런 사상문화를 자리 잡게 하려고 일찍부터 선교사를 보내 친미 인사들을 육성했으며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 문화를 선전하고 미국 유학을 몽땅 받아들여 자발적 친미 집단을 양성했다.
▲언더우드의 신혼여행 겸 지방순회 장면
미국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선교단, 평화봉사단 등의 이름으로 들어와 기독교 교회, 병원, 학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지어 한국인들의 환심을 샀다. 한 통계에 따르면 1893년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의 90% 가까이가 미국인이거나 미국 교회에서 보낸이들이라고 한다. 알렌의 제중원, 아펜셀러의 배제학당, 스크랜톤의 이화학당, 언더우드의 연희전문학교 등 이들은 의료, 교육사업을 통해 한국에 근대 서구 문화를 전파하였고 이를 통해 친미 인사들을 육성할 수 있었다. 1910년 당시 인가된 학교의 35%가 미션스쿨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수준 높은 교육 환경을 통해 엘리트 지식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되었다.
또한 미국은 풀브라이트 장학재단 등을 통해 한국인 유학생을 몽땅 받아들였다.
미국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 대학생들을 해마다 수십~수백 명씩 선발하여 유학을 보냈으며 이들은 다시 귀국하여 한국 내 정치인, 교수, 고위 공직자, 성직자, 언론인 등 사회 지도층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친미 정서를 퍼뜨렸다. 지금도 미국에는 10만 명이 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존재하며 재미 유학생 규모 1, 2위를 다투고 있다.
▲‘저질 양키 추방’을 주장하는 유인물
미국 문화를 선전하는 주된 거점 가운데 주한미군도 있다. 미군이 주둔하는 곳에는 미군방송을 개설하는데 한국에는 AFKN이 있다. AFKN은 자국 방송이 발달하기 전 한국에 각종 미국 문화를 선전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또 미군기지 주변에는 이른바 기지촌이 형성되는데 주한미군은 이곳에서 음란물, 마약 등 저질퇴폐문화를 퍼트렸다. 1998년 한해만 동두천 미군기지에서 음란비디오 600가지, 음란잡지 수천부가 퍼뜨려졌다고 하며 동두천 기지촌 여성 3000명 가운데 절반이 넘게 마약중독에 빠져있다고 한다. 기지촌이 갈수록 쇠퇴하면서 미군들은 서울 홍대, 신촌 등 시내 중심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 미군은 인스턴트 음식과 부대찌개, 구제옷 등 음식, 의복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땅은 한국땅이고 사람도 한국인이지만 한국 고유의 주체적 사상문화는 거의 사라졌으며 미국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가수 신해철씨는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국은 한국이라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치밀하고 끈질기게 예속화를 추진하였다. 우리사회연구소는 7월 12일 발표한 논문을 통해 한국 경제를 ‘예속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규정하였는데 전적으로 타당한 분석이며 경제뿐 아니라 군사, 정치, 문화 등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예속적이고 천박한 속성은 고스란히 나타난다고 하겠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 장면
미국이 반세기에 걸쳐 한국을 예속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로 만들었지만 한국 국민들은 결코 이에 순응하지 않았다.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예속을 거부하는 국민들의 싸움은 80년 광주항쟁 이후 폭발적으로 이어져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92년 윤금이 살해 미군 처벌 시위,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살해 미군 철거 시위,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시위로 발전하였다.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모순의 근원을 직시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정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0.9.16)
더 많은 <동북아 평화번영 프로젝트 문>의 글을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