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강해 제 28장 부활하신 예수
본서의 시작은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의 탄생에서 비롯되었고 본서의 마지막은 ‘만왕의 왕’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궁극적 승리와 영광으로 마감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을 심한 허탈과 좌절에 빠지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비록 예수께서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부활을 상상하기도 어렵거니와 정작 예수의 부활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서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새 역사의 장을 여는 초월적 용기를 지닌 일군으로서, 복음의 용사로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1. 그리스도의 부활 (28:1-10절)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그 시각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하였다. 시체를 밤이 새도록 십자가에 두는 것은 거룩하고 정결해야 할 약속의 땅을 더럽히는 행위로 간주되었고 특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바로 유월절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더욱 급히 장사를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장사되신 후 그 다음 날 토요일은 안식일이었다. 부활의 기사는 안식 후 첫 날 곧 주일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하루 동안이다. 그 안식일이 다 지나고 그 다음 날 아침 미명이 밝아올 때였다. 이 날은 오늘 날 일요일이며 주일이다. 이 날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이며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일로 대체되는 중요한 날이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창조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주일을 성수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미명’에 해당하는 말 ‘에피포스코’는 ‘날이 밝아오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주일 아침이 밝아오는 때였다. 이미 예수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는 두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을 보려고 그곳을 찾아왔다.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것이며 그녀들의 예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주께서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변함이 없었다. 이 초월적인 사랑은 예수 부활의 최초 증인이라는 영광을 안게 된다. 실제로는 예수께서 이미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향유를 받으시고 장례 절차를 마치셨기 때문에 그녀들의 향품은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마태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 시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 이 지진은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구약 율법 세대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여인들이 본 두 번째 사건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무덤 문을 막고 있는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은 것이다. 이 천사들은 예수의 탄생 때 하늘로부터 내려와 찬송을 불렀던 그 천사들이다. 천사들은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는데 마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천사들은 예수의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하고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종의 영광스러운 도구였던 것이다. 마태는 천사들의 형상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그 모습이 번개와 같았다. 이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 밝고 환한 광채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 옷이 눈 같이 희다고 하였다. 이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변화 산에서 예수의 변화된 모습을 연상하게 하며 계시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마가는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하고,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라고 했으며, 요한은 ‘흰 옷 입은 두 천사’라고 하여 천상적 존재의 신비한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무덤 앞에는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자들이 있었는데 그 군사들이 천사의 임재 앞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무서워하며 떨고 죽은 자 같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본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공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상을 초월한 이적 앞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했던 것이다.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너희는’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 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되고 여인들에게만 ‘무서워말라.’는 위로의 말이 주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는 사람이 있고, 위로를 받는 선택된 사람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여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복음서의 시작에 천사들이 나타나 계시의 중재자로서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임무를 했는데 복음서의 마지막에도 역시 계시의 중재자로서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천사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고 전했다. 예수께서 생전에 하신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제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말은 예수의 자력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말로서 예수의 신적 권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이기도 한 것으로 이를 종합하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와 성자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였다. 천사들은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와서 그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다. 빈 무덤은 예수가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나중에는 예수의 빈무덤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더 이상 그 무덤에 머무를 수가 없었고 또한 천사들이 예수의 부활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그 내용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이며, 거기서 제자들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빨리 전하라는 명령이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 들었다면 예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즉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두 번 나타나셨으며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여인들은 두 가지 상반된 심리 상태를 나타내었다. 즉 무서움과 큰 기쁨이었다. 천사들의 임재와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지만 한 편으로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접하여 큰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여인들은 천사의 명령을 받은 후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려갔다. 여인들은 달려가는 도중에 다시 놀라운 일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의 산 증인으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큰 소망과 위로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평안하냐’라는 말 ‘카이레테’는 ‘기뻐하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인사말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요16:20-2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전해들은 여자들은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러운 실체를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는데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발을 붙잡고자 하는 여인들의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온전한 경배로서 그 발 앞에 엎드러진 모습을 기쁘게 용납하셨던 것이다. 이로써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가장 확실한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천사들이 한 말과는 차이가 있다. 천사들은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의 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겁에 질려 무서워했던 것에 반하여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뵙는 경외감에서 오는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가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시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메시야는 천대 받는 지역에서 나와서 천대 받는 백성들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방의 갈릴리는 이방 선교라는 주제와 잘 어울린다.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 선교를 준비하고 시작하시는 것이다.
2. 부활의 은폐 노력 (28:11-15절)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빨리 달음질하는 여인들과 달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은폐하려고 하였다. 저들은 파수꾼들로부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자초지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날조하여 헛소문을 두루 퍼뜨린 것이다. 이들에 대해 예수께서 미리 예언하신 바가 있다.
*눅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 무덤의 경비병들이 일어나서 지금까지 모든 된 일을 보고하기 위하여 황급히 성내로 들어갔다. 이들이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보고했다는 것은 로마 군병들이었지만 대제사장들에게 인계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빌라도를 찾아가지 않고 유대인들을 찾아갔다. 저들은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지진, 천사, 빈 무덤, 등을 보고한 것이다.
병사들의 보고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는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예수의 부활을 은폐하고 거짓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릴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전에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가룟 유다를 돈으로 매수했으며,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파수꾼들을 돈으로 매수한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가 조작한 예수 시체 도난 사건은 참으로 조잡한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무덤을 군인들이 교대로 불침번을 세우고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돌을 옮기고 인봉을 뜯고 시신을 훔쳐갈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겁이 많고 자기 신변 안전에 몰두해 있던 제자들이 로마법을 어기고 시체를 훔쳐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시체를 도둑맞았다고 하는 군인들이 자기 입으로 그 사실을 유포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군인 의무 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게 된다면 산헤드린 공회가 책임을 지고 빌라도의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시체에 관하여 빌라도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설사 빌라도가 문제를 삼는다고 하여도 유대인들은 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군인들이 지어낸 이 이야기는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유포되었고 오래 동안 회자되어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3. 지상 대 명령 (28:16-20절)
본서는 예수께서 갈릴리의 한 산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본문에는 강열한 여운이 있는데 본서 전체를 마감 짓는 결론의 성격과 아울러 개시될 교회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서언의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 어느 산인지 알 수 없으나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으로 하나님의 대 명령을 선포하는 장소로 적절하다. 마태복음에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열한 제자들은 예수를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많은 가르침도 주셨다. 이제 예수께서 승천하실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제자들을 다시 부르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 경배를 드렸는데 ‘프로스퀴네오’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높이고 예배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경배를 드린 것은 예수께서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주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는 도마라고 말하지만 사실 도마는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 진심으로 신앙고백을 드렸다.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렇다면 도마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 중에 믿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상은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했다 할지라도 진정한 부활을 믿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 가까이 나아와서 말씀을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영광’을 다 예수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권세’라는 말 ‘엨수시아’는 ‘능력’ '힘‘과 같은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병을 고치시며, 죄인을 용서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제 지상에서의 권세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까지 가지셨음을 확정하고 계신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한 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께서는 온 우주의 권세를 다 받으시고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 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너희는 가서’라는 말은 계속 진행형으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가서’라는 말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인 선교를 하라는 명령이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는데 일찍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하셨고,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자를 만들라는 명령은 가르치고 훈련하라는 것이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인도함을 뜻하는 것이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요구를 순복하는 자를 말한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자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회개의 신앙과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며 영원토록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는데 초대교회에서 처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다가 점차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되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상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 하나님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 처음에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 속에는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하게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님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름’이라는 말 ‘오노마’는 하나님의 품성과 전인격을 암시하며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오노마’가 단수라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제자로 삼은 모든 이들에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는데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병 고침’과 ‘전파’를 명하셨지만 ‘가르치는 것’은 명령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의 공생애는 유일하신 선생님은 예수 한 분 뿐으로서 가르치는 권세가 주께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의 일군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책임과 권한을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가르쳐’라는 말 ‘디다스콘테스’는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로서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게 해야 한다. 이것은 전의지적인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 있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서의 처음에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다.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다시 강조되는 약속은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이다. 또 다시 ‘임마누엘’의 약속이 선포된 것이다. 이 약속은 제자들에게 힘과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예수께서는 잠시 후에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주님은 여전히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로서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을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세상 끝 날까지’라는 말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 또 ‘항상’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라는 의미로서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모두를 가리킨다. 이 말씀 속에는 세상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 있다. 세상은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것과 그 날까지 주님은 신앙 공동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속적으로 선교해야 하며 주의 재림을 예비해야 하며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본서에 기술된 다섯 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내용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써 끝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 날까지’ 종결되지 않는 미완성의 책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