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수필>
- 착한 여자 -
권다품(영철)
우리 장인어르신은 올 해 연세가 드디어 100세가 되셨다.
어떨 때는 지팡이를 짚고 식사하러 나오셨다가 식탁 옆에다 세워둔 지팡이를 잊어 버리고 당당히 그냥 걸어들어가실 정도로 건강하신 편이다.
연세가 있다보니, 가끔 치매와는 조금 다른 섬망 증세가 나타나긴 하지만, 그래도 연세에 비해서 건강하신 편이라며 다들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 식사를 하시고 들어가시더니, "여기 한 번 와 봐라 어요. 방에서 연기가 난다." 시길래, 깜짝 놀래서 들어가 봤더니, 연기도 안 나고 아무 이상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걱정하시지 마세요." 안심을 시키고 나왔다.
또 조금 있으려니까 "어요, 여게 와 봐라. 벽에 저게 우짠 글이 저래 까맣게 저래 많이 써 있노? 한 번 봐라 어요." 하신다.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이후로도 방에 누워서 혼자 무슨 말씀인지를 자꾸 하신다.
한참만에 밖으로 나오시더니, "권서방 내 말 한 번 들어봐라 어요. 누가 내보고 서울을 가자 캐서 멀리 서울까지 안 갔더나. 갔디마는, 내 생각에 아매 서울 밑에 수원이지 싶어. 거 가이끼네, 해해~이 우짠 사람들이 그래 많겠노 어요. 아이구 무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까딱하마 밟혀죽을 판이라. 저 쪽에는 밭에서 뭐를 캐는 사람들도 있고, 삽 가지고 땅을 파는 사람도 있고, 아이구 사람도 많은 기라. ................."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혹시 요즘 TV에서 탄핵 집회다 탄핵반대 집회다 하는 뉴스를 자주 보시다 보니, 당신의 생각들이 그런 환상을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외에도 나를 불러서 이런 정신없는 말씀을 수시로 하신다.
또, 당신 딸이 오니까 나한테 하셨던 비슷한 말씀을 또 하신다.
아내도 아버지가 제 정신이 아니다는 걸 알고는 "아버지 꿈꿨는가배. 신경쓰지 마라." 하고 만다.
저녁 늦게 작은아들이 오고, 당신 딸을 붙들고 한참 무슨 말을을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샤워하려고 옷을 다 벗었는데, "한솔이 오디마는 어데 갔노? 여게 오라 캐 봐라. 내 할 말이 있다."시며 불러 내리시더니, 또 그 말씀을 하신다.
젊은 놈이 하루종일 일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짜증도 안 내고 다시 옷을 입고 내려와서는 할아버지를 쳐다봐 드리면서 가만히 들어드리고 앉았다.
가족들이 다 잠든 밤에도 계속 나왔다 들어갔다 하시면서 거실 불을 다 켜고는 나를 불러서 무슨 말씀을 자꾸 하신다.
새벽 2시쯤이 되니까, 또 거실 불을 켜서 나를 부르더니, "권서방, 은행가서 교회 헌금할 돈 좀 찾아온나." 하신다.
"지금 새벽 2 십니다." 라고 적어드렸더니, "아이구, 시간이 그래 됐나? 그러마 못 찾겠다." 시며 자리에 또 누우신다.
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혼자 무슨 말씀인지를 하신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내 신경은 항상 긴장중이다.
또, 4시쯤에 거실 불을 다시 켜시고는 나를 부르시길래 갔더니, 또 통장을 주시며 돈 찾아오라신다.
"아직 새벽 4십니다." 하고 적어드렸더니, "아이구, 그렇나? 그러마 할 수 없고 ...." 하시며 또 자리에 누우셔서 계속 혼자 뭐라고 말씀을 하신다.
저러시다가 잠이 드시겠지 했더니, 결국 오늘 아침까지 안 주무신다.
오늘 새벽에는 "중앙교회에 밥먹으러 오라카는데 영희하고 가자." 시며 내복바람으로 나오시더니, 밖으로 나가시려고 하신다.
겨우 모시고 들어가서 다시 눕혀 드렸다.
아침에 또, 나를 불러서는 "교회 고기 볶아놨다고 오라 카는데, 영희하고 가보자." 하신다.
마침 아내가 깨서 내려오더니, "아버지는 이가 없어서 고기도 못 드시는데, 거 뭐하러 갈라꼬?" 했더니, "어허이, 오라카는데 가보지 뭐. 꼭 무야 되는강." 하시며 짜증까지 내신다.
몇 번이나 자꾸 밖으로 나가시려니까, 아내와 나는 말리다가 말리다가 할 수 없어서 "밖에 추운데 나가봐야, 추워서 못가겠다 싶어서 들어오시겠지." 하며 둘이서 밖으로 모시고 나가봤다.
"아버지, 봐라. 추워서 못 가시겠재? 다음에 가자." 고 했더니, 또 짜증을 내시다가, 나와 딸의 힘에 끌려 들어오신다.
100살 노인이신데도 힘이 대단하시다.
아내는 혹시 치매 패치를 너무 오래 붙여서 저런 증세가 나타나나 싶어서 어제는 안 붙였단다.
자꾸 더 심해지길래 할 수 없이 오늘 아침에는 다시 붙여보자며 다시 붙여드리고 자리에 눕혀 드렸다.
이번에는 옆에 있던 한참을 사용을 안 해서 차갑게 식은 배를 따뜻하게 하는 뜸질용 현미 주머니를 당신 배에다 얹으시길래, 내가 데워드렸더니 "아따, 뜨뜻한 기 좋다." 하시더니, 그만 스르르 주무신다.
어제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숨도 안 주무시다가 주무시는 걸 처음 본다.
나도 어제 아침부터 여태까지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묵직한데도 혹시 하는 마음에 잠이 들지 않는다.
저길로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오래 산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닐 수도 있겠다.
보고싶은 자식들을 못 보고, 요양병원에 버려져서, 오지도 않는 휴대폰만 자꾸 확인하며 오래 사는 노인들이라면, 오래 살아도 좀 그럴 것 같다.
그래도 우리 장인 영감님은 당신 입 속의 혀처럼 챙겨주는 딸내미가 있고,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사는 자녀들이 찾아와 줘서 참 다행스럽다 싶다.
자기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드리는 내 아내를 보면, 원래 심성이 착한 사람인가 보다 싶다.
내 아내는 우리 엄마한테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년동안 고맙게 잘 했다.
내 혈육들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작고 못생긴 여자로 생각될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만하면 착한 여자겠다 싶다.
어이, 나는 아무리 예쁘고, 설사, 돈이 엄청나게 많은 부잣집 딸이라 캐도, 예의없고 못된 여자하고는 못살겠더라꼬.
2025년 2월 14일 오전 11시 1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