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존 가드너는 모든 문학에 단 두 가지 줄거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누군가가 여행을 가거나 낯선 사람이 마을에 찾아 오는 것이다. 이 조용한 소설에서 두 낯선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을 통해 세상에 등을 돌린 노인들의 은둔처에 도착한다. 이어진 이야기는 상처받은 사람, 사랑, 치유의 이야기이다.
337개의 그림을 남겨두고 자연사한 노인(찰리)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며 작품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나타난다. 죽음은 모든 에피소드에서 맴돌고 모든 페이지를 엿본다. 중심 인물들인 노인네들은 팔십이 넘었기 때문에 죽음은 낯설지 않고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조슬린 소시에의 세 번 째 장편 소설인 ‘새들이 비처럼 내린다’(Il Preuvait Des Oiseaux)는 캐나다 퀘백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숲 속에 사는 노인네들의 생의 지평선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프(Gruff), 실용적인 찰리(Charlie), 쾌활한 톰(Tom), 지역 바에서 연주하는 젊은 가수 테드(Ted)와 또다른 늙은 태드(Ted)는 호수가 있는 숲에서 문명과 담을 쌓은채 단순함(마리화나 식물 포함)의 삶을 살고 있다. 도입부에서 늙은 태드는 예기치 않게 잠을 자다가 자연스럽게 숨이 끊어진다. 찰리와 톰의 반응은 흥미롭게도 침착하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허우적대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사랑, 죽음, 체념, 소멸과 탄생 등 많은 것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
근처 마을에서 개점휴업 상태인 지역 호텔의 매니저 스티브(Steve)는 대마초를 피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장례식이 끝난 후 노모 거트루드(Gertrude)를 안식처로 데려다 준다. 스티브는 처음에는 꺼려하던 찰리와 톰에게 물품(대마초)을 배달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한편 사진작가는 약 90년 전인 1916년에 일어난 거대한 산불의 피해 속에서도 사람들을 구했다는 신화적인 인물(테드)의 사진을 찍기 위해 나타난다.
소설은 우리를 예상치 못한 영역으로 인도함에 따라 결국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둡게 끝난다. 거트루드와 찰리 사이에 이루어진 교감은 서로의 눈빛을 통해서였다. 열 여섯 살 때부터 66년을 정신 병원에 갇혀 있다가 탈출한 거트루드는 호숫가 숲속의 노인 둘을 보자마자 자기 자신을 마리-데네주(Marie-Desneige)로 소개함으로써 과거와 상징적인 결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찰리와의 수줍고 떨리는 입맞춤을 통해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 제낀다. 아래는 찰리와 마리-데네주 사이의 대화를 통해 이 두 사람이 관능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게 첫 키스인가요?”
“첫 키스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낫네요.”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키스를 할 거에요, 약속해요 당신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모든 키스, 수백만 번의 키스, 수십억, 수조 개의 애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려면 아주 오래 살아야 할 거에요.”
소설 초반부에 저자는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일 것이다”라는 말로 우리의 내면을 흔든다. 이야기의 동기를 부여한 사건은 1916년 북부 온타리오의 대화재(Great Matheson Fire)이다. 테드 보이척(Ted Boychuck)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어린이였는데 결국 가족 중에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이 소설의 제목('새들이 비처럼 내린다')은 바로 이 엄청난 화염 속에서 대기를 뜨겁게 달궈 마침내 하늘을 날던 새들조차도 속절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테드는 몇년에 걸쳐 337개의 그림을 그리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한 은둔자로 남았다. 다른 등장인물들이 부둥켜 안고 있는 과거의 기억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미스터리의 단서도 이 그림들 속에 포개어져 있다. 유산으로 남겨진 그림에는 거대한 진실이 있지만, 이 진실은 그가 최근에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만든다.
소설의 핵심적인 질문은 그들이 죽을 때 남긴 유물에서 삶의 진실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이다. 우리 모두가 나이 들면서 겪는 일들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아닌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서랍 뒤에 있던 잊혀진 사진첩,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에서 발견된 누렇게 변한 신문 스크랩, 또는 길고 행복한 결혼 생활 동안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발견된 배우자에게 쓴 가슴 아픈 연애 편지까지 말이다. 이런 진실의 편린들은 멀리 떨어진 트로이의 전장이나 아서 왕의 궁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시의 거리, 작은 마을의 뒷마당, 또는 이 소설의 경우, 북부 온타리오의 외딴 숲에서 발견하게 된다.
마리-데네주와 찰리가 그림을 읽는 법을 배우듯이 그들은 또한 서로를 읽고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소설 전반에 걸쳐 처음에는 인물들이 고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점차 그들 사이의 연결 지점을 찾고야 만다. 보이척은 두 명의 어린 소녀를 찾았고 사진 작가는 그를 마침내 찾아냈다. 책의 말미에서 찰리와 마리-데네주를 사람들이 찾았지만 그들은 발견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소설의 또 다른 질문은 ‘시간의 흐름’이다. 그들의 비밀이 밝혀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불은 처음에는 파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전체 이야기는 아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서부터 생명을 재생하기 위한 불의 필요성에 이르기까지 불은 서구 문화에서 중요하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은 모두 이 화염 속에서 태어나고 소멸한다.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거울을 통해 앨리스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몇 년 동안 잠겨 있던 창고에서 라프가 발견한 테드의 유산(그림들)은 그 증거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현재로 돌아가서 호숫가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산불이 그들을 위협한다. 이렇게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결말을 교묘하게 병치시킨다.
나는 몬트리올에서 북쪽으로 700킬로 떨어진 한 광산도시에서 다시 30여 킬로를 더 가야 하는 마을 근처의 시골(숲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 적도 없고,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느낀 적도 없다. 왜냐하면 책을 읽기 때문이다. 독서는 나를 세상과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끈이다. 책은 소설가나 시인, 철학자 등 다른 사람과 내적 대화를 나누는 장소다. 이 다른 사람은 나를 내 두 발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생소하게 느껴지는 생각 속으로 데려간다. 이 사람은 나를 내가 결코 체험해보지 못할 것을 체험해본 어떤 존재에게 가장 가까이 데려간다. 또 이 사람은 내가 모르는 세계(그것이 내 이웃집 여자의 마음과 생각이든, 아니면 먼 나라의 논에서 힘들게 일하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하는 남자의 마음과 생각이든)의 내밀함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고, 그리고 동시에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그것이 바로 나의 자리라고 느꼈다.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똑같은 충동에서 비롯되는 내밀한 행위다. 책을 펼쳐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나는 내가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고 느낀다.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전혀 알 수 없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현기증이 난다. 내 안으로 들어가 발견한 그 세계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내가 가보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렇게 해서 〈새들이 비처럼 내린다〉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 고독과 노쇠, 노쇠의 동반자인 죽음, 그리고 사랑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원래 의도는 별로 거창하지 않고 단순했고 마침내 내가 이전에 쓴 소설들의 주제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사라짐’이라는 주제였다. 한 인물이 그가 버린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내버려두고 모습을 감추어버리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 나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이번에는 사라져버린 사람들 쪽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숲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숲속 깊이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사라져버리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숲의 은둔자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숲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숲을 구석구석 잘 알아야 하고, 이 지식은 점차 소멸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은둔자들은 알고 있지 못했지만 반(半) 은둔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만의 섬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남자, 주로 덫을 놓아 사냥해서 살아가는 또 다른 남자, 그리고 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식량을 들고 찾아오는 여자.〈새들이 비처럼 내린다〉를 끝낸 나는 이 작품이 성공적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나는 내가 이 작품을 그것이 가야 할 곳으로 이끌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넌 도대체 뭘 한 거야? 숲속 깊은 곳에 사는 늙은이가 쓴 소설을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너무나 놀랍게도 내가 이 작품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되었다. 이 소설은 내가 사는 캐나다 퀘백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예상치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이따금씩 나를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는 이 몹시 놀라운 성공에서 바로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해둔다. 우리 모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그의 삶의 즐거움과 고통을 얘기해줄 다른 사람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 인류는 함께 노래하며 살아가야 하고, 이 소설은 그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들이 비처럼 내린다〉에서 어떤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이 소설에서 자유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조슬린 소시에, 캐나다 클리시에서 2021년 7월 26일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