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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4)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사전 답사 (합천→양산) ③ 밀양강→ 양산
2020년 11월 03일 (화요일) [바이크 라이딩 & 카니발]▶ 대원 동행
[오늘의 일정] (2)— 밀양 (밀양강)→ (낙동강) 삼랑진
* [Bike Riding] ▶ [밀양교 아래] 밀양강 둔치 (바이크 라이딩 출발)→ 삼문동 수변공원 바이크로드(밀양강 우안)→ 암각화 조각공원→ (우향) 삼문동 제방 강변로→ 용두교 도강→ 용두교 유원지→ 밀양강 좌안(左岸)→ 수변공원 바이크로드→ 예림교 도강→ (좌향)→ 밀양강 우안(右岸) 제방 길→ 긴 긴 직선의 제방길→ 상남동 평촌리→ 상감로 잠수교 도강→ 밀양강 좌안의 제방 길→ 긴 긴 직선의 바이크로드→ 밀양강 하구(河口)→ 낙동강 삼강서원→ 경전선 철교→ 삼랑진교(인도교)→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별미 ‘잔치국수’ 점심식사]
[오늘의 일정] (3)— 삼랑진→ 양산 물금→ 서울
* [Carnibal Tour] ▶ [삼랑진 국수집]→ 삼랑진 송지시장→ 송지교(미전천)→ 지하차도(경부선)→ [삼랑진역]→ 1022도로→ 안태마을→ 천태산(쉼터 가게)→ 천태산(天台山) 신불암고개→ 천태사→ 원동(면) 삼거리→ (경부선 철로-원동역 / 가야신사 조망)→ [전망대] 관광 매화농원(낙동강 조망)→ 서룡수변공원→ 화제리→ 오봉산 우회로→ (1022도로)→ 물금 황산로→ [양산 부산대병원]→ [경부고속도로 ]→ 귀경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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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강 카페에서] — 선인들의 시정(詩情)이 흐르는 곳
밀양교를 건너와 삼문동 2층 카페에 앉아서, 가을 숲에 둘러싸인 영남루를 바라본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그 장중하게 자리한 영남루! 그 위용이 우아하고 당당하다. 사실 그 높다란 다락 위에 앉으면 밀양강을 비롯하여 활연관통한 강산의 풍경을 보면 시인 묵객이 시정을 풀어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남루에 붙여진 여러 시편을 생각하니, 선인들의 풍류와 인간미가 은은히 가슴을 적신다.
15세기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이 파노라마처럼 펼친 ‘밀양십경시’(密陽十景詩)는 열 폭의 병풍 속에 담아내고, 천하의 도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도 ‘영남루’에 오른 감회를 주체할 수 없어, ‘내 평소에 참으로 시인의 흥이 있어 / 술통 앞의 비단자리 밟고서 춤을 춘다(平生儘有騷人興 猶向樽前踏綺筵)’고 했다.
17세기 숙종 때의 학자 김창흡(金昌翕, 1653~1722년)은 「밀양 영남루」에서 시 쓰던 붓을 멈추고 평소 흠모하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그리고 있다. ‘강 건너 저편에는 점필재 서원과 산소 있으니, 쓰던 붓 멈추고서 유연히 바라보네.(對岸畢齋祠墓是 却停柔翰望悠然)’ 김종직의 생가와 예림서원은 영남루 맞은 편 밀양강 서쪽에 위치해 있다.
19세기의 문신 신석균(申奭均, 1824~?)은 ‘서풍 불 때 영남루에 기대 선 사람 / 수국(水國)의 청산(靑山)은 흩어져 있어 거둘 수 없네.(西風人倚嶺南樓 水國靑山散不收)’ 라고 하여 자신의 가슴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영남루의 절경을 노래하기도 했다.
청명한 가을날, 밀양강 절벽 위에 솟은 영남루(嶺南樓)의 풍경을 바라보며, 세월의 강물 속에 흘러내려온 시정(詩情)에 젖어, 나그네의 마음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강(江)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밀양 (밀양강)→ (낙동강) 삼랑진 / 바이크 라이딩(Bike Riding)
오후 12시 30분, 밀양강 대안(對岸)에 솟아있는 영남루가 올려다 보이는 곳, 밀양교 다리 아래서 다음의 포인트인 삼랑진을 향해 바이크 라이딩(Riding)이 시작되었다. 이상배 대장을 비롯하여 이진애·김옥련 두 대원과 더불어 세련된 자전거의 은륜이 반짝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기원섭은 자신의 바이크를 나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카니발을 몰아 삼랑진으로 가기로 했다.
삼문동, 밀양강 하중도(河中島)
영남루 건너편에 있는 삼문동은 하중도(河中島)이다. 삼문동은 사방이 밀양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밀양 시가지의 동쪽 추월산 앞에서 단장천을 받아들인 밀양강은 동쪽의 내일동 앞에서 하중도(암새들)를 만들고 지나와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영남루(밀양교) 앞을 지나 내이동(남천교) 쪽으로 가는 물길과 왼쪽으로 가곡동(용두교) 쪽으로 가는 물길이다. 두 갈래 물길은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 앞에서 다시 하나로 합류한다. 그러므로 삼문동은 두 물길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바로 하중도인 것이다. 삼문동과 연결되는 다리는 네 개가 있다. 삼문동 북쪽의 영남루로 가는 밀양교와 내이동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의 단천교, 남서쪽에는 상감면-예림리와 이어지는 25번 국도의 밀주교, 남동쪽에 가곡동 밀양역으로 이어지는 용두교가 그것이다.
삼문동 수변공원길, 용두교를 건너다
삼문동 밀양강 둔치는 쾌적한 수변공원으로 정비되어 있고 잔디 공원 한 가운데로 바이크 로드가 조성되어 있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강변이다.
삼문동 밀양교에서 출발한 우리는 수변공원에서 용두교를 건너기 위해, 조각공원이 있는 삼문동 남쪽 강안을 따라 밀주교 가까이 달려가서, 제방 도로의 바이크로드에 올랐다. 용두교로 가기 위해 강안에서 지금까지 오던 길과는 반대로 달려가 용두교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경부선 밀양역이 있는 가곡동이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우측으로 용두교유원지, 그 수변공원으로 내려가 강안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밀양강을 우측에 두고 질주하는 것이다. 바이크로드는 강안 가까이에서 뻗어나가고 왼쪽은 둔치의 너른 잔디공원이다. 밀양의 가을 하늘,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화사하다. 청랑한 바람을 가르며 직선의 길을 달린다.
가곡동 수변공원 길, 밀양강 예림교
두 갈래의 물이 합쳐지는 한 가운데, 또 하나의 작은 하중도가 보인다. 그 아래 수중보가 설치되어 있어 밀양강은 수량이 풍부하여 항상 물이 그득하다. 다행이 수질이 청정하여 맑은 물이 밀양시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수중보 앞의 수변공원을 지나 제방 길로 올라섰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이다. 가곡동과 상남면 예림리를 연결하는 예림교를 건넌다. 다리의 가장자리에 바이크로드가 조성되어 있다. 예림교는 백색으로 칠한 철제 가드레일에 갖가지 색깔의 조화(造花)를 흐드러지게 장식해 놓았다. 다리 위에 올라서니, 멀리 삼문동 아파트와 건물이 선명하게 보이고 밀양강 짙푸른 물 한 가운데 작은 하중도와 가까운 곳에 수중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 폭의 그림처럼 정겷한 풍경이다.
‘양림간 제방길’, 바이크로드
예림교는 25번 국도와 연결되어 밀양시 상남면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의 제방 길로 진입했다. 예림리 ‘양림간 제방길’로 명명된 바이크로드이다. 길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는데, 자전거길 왕복 2차로와 보도가 나란히 있어 아주 대로(大路)를 이루고 있었다. 제방 길의 양쪽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을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밀양시에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아름다운 꽃길이었다. (궁금하여, 나중에 밀양시 상남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더니, 밀양강 예림리 제방의 꽃은 ‘가우라 꽃’이라고 담당자(차경숙)가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원산지는 미국인데, 가을에만 피는 코스모스보다 7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늦가을까지 오래도록 피어 있는 꽃이라고 했다.
청정한 공기, 더없이 맑은 하늘 아래 우리의 자전거는 거침없이 질주한다. 고개를 들면, 길은 아득한 직선으로 이어진다. 좌측의 밀양강 둔치와 습지가 이어지고 오른 쪽은 들판과 예림리 마을이 있다. 거침없이 달리는, 오로지 곧게만 달리는 직선의 길이다. 그렇게 1km 남짓 내려오면 대구에서 청도를 거쳐 내려오는 중앙고속도로(대구—부산) 밀양대교를 만난다. 대교의 교각을 지난다. …
교각을 지나고 나서도 제방 길의 풍경은 변함이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이 계속되었다. 깊어가는 가을 하늘, 신선한 바람을 가르며 거침없이 질주한다. 이어지는 길은 밀양시 상남면 평촌리 제방의 길인데, 참 아득하고 멀었다. 강안은 넓은 둔치로 이루어져 있어 밀양강 강물은 멀리서 흐른다. 제방 길의 오른쪽은 넓은 들판이다. 상남면 평촌들이다. 멀고 먼 길을 달려, 다시 부산으로 이어가는 중앙고속도로 밀양대교 교각을 지났다. 그리고 1022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심상교 앞이었다. 1022번 도로는 [창녕시] 남지읍에서 [밀양시] 하남읍—삼랑진—[양산시] 물금까지 낙동강 동안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이다. 밀양의 예림교에서 심상교까지 장장 7.3km를 달려온 것이다.
심상교 옆 잠수교(밀양강) 도강
바이크로드는 1022 심상교 옆에 있는 잠수교이다. 잠수교는 글자 그대로 강물이 불어나면 잠기는 다리이다. 오후 1시 40분, 잠수교를 건너서 밀양강 좌안의 제방 길로 들어섰다. 제방 길 바이크로드는 여전히 왕복 2차로에 인도까지 갖추어진 널따란 포장도로이다. 길의 양쪽에 가로수까지 심어져 있어 풍경이 아주 그림 같다. 밀양강은 오른 쪽에서 흐르고 제방의 왼쪽은 삼랑리 들판, 온통 비닐하우스로 채워져 있었다. …
심상교(잠수교)에서 3.6km 지점에서 삼랑리 마을에서 읍내로 통하는 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밀양강이 낙동강 강안에 유입해 들어가는 길로, 길의 왼쪽은 산록의 절벽이다. 그 길로 1.3km 내려오면 낙동강 강안이다. 오늘 오전에 하남읍 상남천 오산교 앞에서 낙동강 강안을 떠나 밀양 권역의 명승고적을 살피고 난 후, 지금까지 밀양강을 따라 내려와 낙동강으로 내려온 것이다. 밀양시 삼랑진은 낙동강 본류와 밀양강이 만나는 유역에 형성된 마을이다.
수원지 앞을 지나면 경전선 철교 아래를 지난다. 왼쪽으로 산굽이를 돌아 어수선한 마을로 들어간다. 이 상부마을 산록에 삼강서원(三江書院)이 있다. 거기에 아름다운 5형제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삼랑진 삼강서원(三江書院)
삼강서원은 낙동강가 삼랑리 상부마을 산록, 여흥 민씨 오우정(五友亭) 안에 있는 서원(書院)이다. 연산군~중종 때 학자인 민구령(閔九齡),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 등 5형제를 배향하였다. 삼강서원(三江書院)은 조선 연산군·중종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민구령(閔九齡)이 1510년(중종 5)경에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정자 하나를 짓고, 아우인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와 더불어 5형제가 함께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여 형제간의 우애(友愛)가 출천(出天)하여 향도에 그 평판이 자자하였다. 1547년(명종 2)에 당시의 경상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그 명성을 듣고 이곳을 찾아와 사실을 확인한 다음, 조정에 벼슬을 천거하는 한편 오우정(五友亭)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그 뒤 1563년(명종 18)에 이곳 향중의 사림들이 민씨 5형제의 우애와 덕행을 추모하고 정자 안에 ‘오우사(五友祠)’를 지어 병향(幷享)하였으며 경내에 오우사 내력을 밝히는 ‘기사비(紀事碑)’까지 세웠다. 후에 오우사는 ‘삼강사(三江祠)’로 바뀌었고 다시 ‘삼강서원(三江書院)’으로 승격하여 조두(俎豆, 사당)의 위의(威儀)‘를 더욱 갖추었다. 그런데 정자와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자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고,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흥폐를 거듭해 오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897년(고종 34)에 후손인 민영지(閔泳智), 민영하(閔泳夏) 등이 문중의 의논을 주도하여 사당에 있던 자리에 큰 집을 새로 짓고 ’五友亭‘ 현판을 걸어 보존하였다. 1904년에 일부를 중건하였으며, 1979년에 14세손 민병태(閔丙兌)의 주선으로 후손들이 협력하여 정자의 규모를 확충하고 사당을 다시 지어 유림들의 공의로 ‘三江書院’의 현판을 걸고, 사림의 주관으로 서원 향사를 받들고 있다.
삼랑진, 삼랑진철교, 삼랑진교
삼랑진의 옛 나루터는 삼랑리의 자연부락인 하부마을에 위치한다. ‘낙동 나루터’ 혹은 ‘삼랑진 나루터’라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낙동 나루’는 김해와 마주보며 경상 좌도의 영남대로와 연결되는 수운(水運)의 요충지였다. 영조 41년인 1765년에는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다. 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 등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가 삼랑리로 모였고 마을은 물자의 최대 집산지로 성장했다.
나루터에서 오른쪽 하늘과 강물 사이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낙동강 철교’가 놓여 있다. 하부마을의 왼편 끄트머리에서 김해 생림면의 마산포를 연결하는 다리, 1905년에 개통된 경전선 '삼랑진교'다. 저 철도가 놓이면서 ‘낙동 나루’와 조창(漕倉)은 폐쇄되었다.
삼랑진교는 1962년 말까지 사용되었고 이후부터 차도로 이용되었는데, 다리 너비가 4.3m에 불과해 차량 두 대가 몸을 사리며 겨우 비켜갈 수 있고 일정량을 넘기는 무게와 높이의 차량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지금 다리는 일명 '낙동강 인도교' 또는 '삼랑진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린다. 자동차보다는 걷는 사람, 자전거 탄 사람이 더 많은 바이크로로 이용되고 있다. 2003년 영화 '똥개'에서 주인공 철민(정우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 다리를 질주했다. … (내가 앞에서 밝힌, 창녕 학포리에서 본포교를 건너 창원시와 김해시 영역의 강변 제방 길을 경유하여 삼랑진으로 들어오는 바이크로드가 건너야 하는 바로 그 다리이다.)
옛 나루터에서 왼쪽에 보이는 철교는 '낙동강 철교'다. 1935년에 착공하여, 1962년에 준공되어 삼랑진교의 바통을 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철교의 하부는 일본인이, 상부는 미군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김해 레일바이크로 이용되고 있다. 이 다리의 동쪽이 하양마을이다. 마을에는 ‘낙동강역’이 있었다. 1906년 보통역으로 시작하여 2010년 1월에 여객열차가 중지되었으며 그해 11월에 역사가 철거되었다.
삼랑진교 오른쪽으로 강변의 좁은 벼랑길을 고개 넘듯 내려가면 2010년 새로이 놓인 경전선 철도 아래에 상부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인 후포산을 뒤기미 또는 뒷개뫼라 부르는데 그 산자락에 중종 때 1510년 여흥 민씨(驪興閔氏) 다섯 형제가 공부하며 자연을 즐겼다는 오우정(五友亭)이 있다. 1563년에는 지역 선비들이 오우사(五友祠)를 지어 그들의 우애를 기렸으나 이후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탔다. 오우사는 1702년 삼강서원(三江書院)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고 영조 때인 1775년에는 형제들의 우애와 효행을 기록한 삼강사비(三江祠碑)가 세워졌다.
삼강서원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면 경전선 삼랑진 철교(경전선)와 삼랑진교가 강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인다. 오우정 자리에는 원래 삼랑루(三浪樓)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의 승려 충지가 묘사한 누각과 강변의 모습은 더 없는 그림이다.
호수 위에 푸른 산이요, 산 위에 누각일세
아름다운 이름이 물과 함께 길이 흐르네
모래톱 주막들은 달팽이 껍질처럼 늘어섰고
물결 쫓는 배들은 익새 머리로 춤추네.
오우정 삼강서원 입구에 비석들이 즐비한데, 밀양 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後漕倉遺址碑石群이)다. 옛날 낙동강은 경상도 수운(水運)의 요지였다. 크고 작은 배들이 나루에 드나들었다. 배들은 사람을 싣고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상류의 내륙지방과 하류의 부산 해안으로 이동하는 수단이었다. 그 당시 낙동강 수운의 역사적인 의미를 간직한 유적이 바로 ‘후조창유지비석군’이다. 지방의 부자들과 돈많은 나루터 상인들이 고을에 선정을 베푼 원님을 기려 세운 공덕비들이다.
조선시대의 세미와 곡물 등은 각 지역의 거점에 모아 두었는데, 이를 조창(漕倉)이라고 한다. 삼랑진(三浪津)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역이므로 배로 물자를 수송하기 아주 좋은 위치였다. 그래서 삼랑창(三浪倉)이라는 조창이 생겼고 한양이나 다른 고장으로 물자를 수송하게 되었다.
삼랑진읍(三浪津邑)
밀양시의 남부, 밀양강이 낙동강에 유입되는 하구의 동안(東岸)에 위치한 읍이다. 삼랑진은 1918년 밀양군 삼랑면으로 개칭되고, 1963년에 삼랑진읍으로 승격되었다. 송지(松旨)·용전(龍田)·미전(美田)·삼랑(三浪)·율동(栗洞)·우곡(牛谷)·검세(儉世)·안태(安台)·행곡(杏谷)·임천(林川)·숭진(崇眞)·청학(靑鶴)·용성(龍星) 등 13개 리와 5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읍의 소재지는 송지리(松旨里)인데, 읍의 서쪽에서 밀양강을 받아들인 낙동강과 만어산 용전리 산곡에서 내려오는 미전천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삼랑진역에서 송지리-[송지시장]로 가려면, 경전선 철도의 지하차도를 지나 송지교(미전천)을 건너야 한다.
지역의 대부분이 산지로서, 북쪽은 만어산(萬魚山)이 자리하고 있고, 동쪽엔 천태산(天台山, 632m), 금오산(金烏山, 766m)이 양산시와 경계지역에 솟아 있다.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르는데, 읍의 서부에서 밀양강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삼랑리 부근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경전선(慶全線)은 전라도 광주와 경상도 삼랑진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말한다. 진주나 마산에서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려면 경전선을 타고 온 사람들이 종점인 삼랑진역에서 내려 환승을 해야 했다. 그래서 삼랑진은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은 진주에서 이어지는 경전선이나 고속철도는 삼랑진역을 경유하지 않고 송지리에서 미전천을 건너 바로 밀양역으로 이어져 있다.
삼랑진의 도로는 양산·밀양으로 이어지는 1022번 지방도로와 김해로 연결되는 58번 국도가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구—부산) 중앙고속도로가 삼랑진(I.C)를 경유하여 낙동강을 건너 김해국제공항이나 그리고 부산까지 이어진다. 옛날에는 밀양강과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이 발달했으나 철도가 개통된 이후 쇠퇴해졌다.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 오늘 우리는 삼랑리 삼강서원 입구인 상부마을에서 라이딩을 계속해 나갔다. 상부마을은 낙동강을 건너온 경전선이 삼랑진역으로 향하는 철교 아래에 있다. 그 철교 아래 상부마을회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삼랑진교(인도교)가 있고,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이 붙은 ‘옛 삼랑진철교’를 지난다. 우리의 바이크 행렬은 자동차가가 다니는 도로를 피해 하부마을의 뒷길을 이용하여, 오늘의 포인트인 삼랑진의 ‘음식점’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밀양에서부터 카니발을 몰고 미리 와 있는 기원섭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배 대장이 기원섭과 미리 약속을 한 장소였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우리는 밀양에서 이곳 삼랑진까지 20km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것이다. 밀양의 영남루 앞 밀양교에서 시작하여 밀양강 우안(예림리, 평촌리)과 좌안(삼랑리)의 제방 길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약 1시간 30분이 걸렸다. 강변의 풍경을 보느라 서다 가다를 반복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삼랑진에서 김해로 가는 58번 국도의 삼랑진교로 올라가는 큰길 옆에 있는, 외양이 아주 허름한 ‘국수집’이었다. 언뜻 보아도 아주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가건물인데 그 앞면은 비닐천막을 쳐서 가름해 놓았다. 그리고 낮은 지붕 위에 서툰 글씨로 ‘국수 전문’이라고 간판을 올려놓고, 또 가건물에 붙여 세운 장대에 ‘태극기’를 게양해 놓았다. 그리고 비닐 문 옆에 ‘태극기가 펄럭입니다’라는 작은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오직 잔치국수 한 가지만 파는 집인데, 인근 사람들이나 바이커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맛집이라고 했다. … 이 국수집의 기둥에는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주문한 국수가 나왔다. 우선 큰 대접에 담긴 국수의 양이 많았다. 맑은 육수에 부추와 애호박을 채 썰어놓고 그 위에 김을 뿌려 내놓았다.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육수라고 했다. 그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매끄러운 국수의 질감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도 부드러운데 거기에 후루룩 마시는 은은한 국물 맛이 참으로 절묘했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내 평소 국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맛이 있었다. 늦은 점심으로 좀 시장하기고 했지만 여행 중에 맛보는 참국수의 맛, 거기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 낙동강 1300리를 종주하는 내 배낭에도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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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정] (3)— 삼랑진→ 양산 물금
* [Carnibal Tour] ▶ [삼랑진 국수집]→ 삼랑진 송지시장→ 송지교(미전천)→ 지하차도(경부선)→ [삼랑진역]→ 1022도로→ 안태마을→ 천태산(쉼터 가게)→ 천태산(天台山) 신불암고개→ 천태사→ 원동(면) 삼거리→ (경부선 철로-원동역 / 가야신사 조망)→ [전망대] 관광 매화농원(낙동강 조망)→ 서룡수변공원→ 화제리→ 오봉산→ (1022도로)→ 물금 황산로→ [양산 부산대병원]
삼랑진역
오후 3시, 별미 잔치국수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가을 햇살이 화창하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다. 이제부터는 카니발 투어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타고 온 미니벨로는 접어서 차의 트렁크에 싣고, 우리 대원들은 카니발에 합승하여 양산시 물금을 향하여 출발했다. 핸들은 변함없이 기원섭이 잡았다. 양산시 물금은 오늘 여정의 마지막 포인트(목적지)이다. … 김해 쪽에서 삼랑진교(낙동강)을 건너온 58번 도로를 타고, 중앙고속도로 낙동대교 교각 아래를 지나 (58국도 1022번 지방도로 겹치는 구간이다) 송지시장을 경유, 송지교(미전천)와 지하차도(경부선 철도)을 지나면 삼랑진역이다. 삼랑진역은 경부선 역이기도 하지만 전라도 광주와 경상도를 잇는 경전선의 시·종점이다.
삼랑진역에는 ‘급수탑’ 유물이 있다. 급수탑은 1923년에 건립된 시설물이다. 옛날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던 시절, 기차 운행에 필수적인 급수시설이었다. 낙동강 물을 끌어올려 경부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급수탑이다. 탑의 하부는 석조로 되어 있고,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이지만 석조의 무늬를 나타내기 위해 줄눈을 표시하였으며 위쪽에 철제 물통실이 있다. 삼랑진역의 급수탑은 근대의 문화유산이다. 삼랑진역에서 삼랑진역 급수탑까지는 좌측 방향으로 약 1, 2km거리에 있는데, 돌아서 가야하기 때문에 자동차로는 2분, 도보로 15분 정도 걸린다. 삼랑진 지하차도를 건너자마자 미전천 좌측 방향으로 가면 된다. 삼랑진역 급수탑 앞에 생태하천인 미전천 둘레길과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우리의 카니발이 달려가는 1022번 도로는 창녕의 남지읍에서부터 밀양시 하남읍을 경유, 낙동강 동안(東岸)을 따라 내려오는 낙동강로이다. 이 길은 삼랑진에서 우리가 가야 할 양산시 물금읍까지 계속된다. 오늘 최종 목적지가 물금(勿禁)이다.
1022번 도로 삼랑진역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만어산(670m)이 솟아있고 동쪽에는 저 신불산의 낙동정맥이 서남진하여 내려온 매봉산(755m)-금오산(766m) 줄기의 천태산(631m) 등이 솟아 있다. 그리고 서쪽 삼랑리에서는 밀양강이 유입되고, 남쪽에는 밀양강을 품에 안은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삼랑진역과 낙동강 사이에는 만어산 용전리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낙동강에 유입된 남전천이 있다.
천태산(天台山) 신불암고개를 넘다
삼랑진 시가지를 지나서 얼마 가지 않아, 만어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검세리 우곡천을 지난다. 그리고 안태 마을, 거기 마을 안쪽에는 천태산 아래 ‘안태호’(양수발전소 하부댐 담수호)가 있고 그 안태리에 삼랑진 ‘양수발전홍보관’이 있다. 요즘 안태리에는 천혜의 경관을 배경으로 산뜻한 모텔과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안태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면 본격적인 천태산 산간도로에 진입한다. 천태산 고개[신불암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그야말로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는 구절양장(九折羊腸), 거기에다 그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힘 좋은 4륜구동의 카니발이 힘차게 엔진을 가동하여 산간도로를 돌고 돌아서 오른다. 듬직한 풍채만큼이나 강력한 운전자의 탄력을 받은 카니발은 거침없이 가파른 오르막을 차고 오른다. 하늘은 높고, 가을날 오후의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차창을 연다. 청신한 산(山) 공기가 가슴을 활짝 열어준다. 산의 굽이를 돌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올해의 가을도 이미 11월에 접어들었으니 만추(晩秋)의 첩첩 산들이 곱게 물들어 가고 있다.
정상 가까운 산굽이길 가장자리에 너른 쉼터가 있고, 그 안쪽에 갖가지 과일과 농산물을 파는 가게가 있다. 삶은 계란과 오뎅을 팔기고 한다. 핸들은 잡은 기원섭의 말, “죽자고 자꾸 가기만 하면 뭐 하노? 경치도 구경하고 좀 쉬었다 가자!” 뜨겁게 달구어진 카니발의 엔진도 식힐 겸, 늘 여유가 있는 기원섭이 차를 세웠다. 모두 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들면 천태산 첩첩 산줄기가 그려내는 가을 풍경이 깊고 아름다웠다. 시야에는 산들이 그려내는 가을 수채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저 아래 쪽에서는 호수 같은 낙동강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거울처럼 번쩍인다. 진(眞)과 옥(玉) 두 대원이 ‘따끈한 국물, 구수한 부산오뎅이 맛있다’며 입맛을 보기도 했다. 맑은 공기를 쐬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천태산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
천태산(天台山)은 산의 정상 부근에 산중호수(山中湖水)가 있다. 여기 천태산에는 양수발전소가 있다. 저 경기도 청평양수발전소에 이어 2번째로 건설된 국내 최대의 순수 양수식(揚水式) 발전소이다. 산중호수 ‘천태호’는 양수발전을 하기 위해 퍼올린 물은 저장하는 호수이다. 여기 지하의 발전소에 시설용량 30만kW급 발전기 1·2호기로 총 시설용량 60만kW의 전기를 생산한다. 발전전동기 등 주요 기기는 일본 후지전기에서 제작했고, 건설공사는 현대건설과 한국중공업 등에서 담당했다. 1979년 9월 하부 댐(안태호) 기초공사를 시작으로 1985년 11월에 1호기, 12월에 2호기가 발전을 시작했으며, 1986년 4월 발전소가 준공되었다.
상부저수지(천태호)는 해발 404.6m에 중앙차수벽식 사력(砂礫, rockfill)댐으로, 높이 88m이며, 담수량 646만 4,000㎥, 수심 27.7m로 6시간을 발전할 수 있다. 하부저수지(안태호)는 낙동강 지류인 천태천 계곡을 막아 만든 해발 71.20m인 중앙차수벽식 사력 댐으로 높이 78m이다. 지하발전소는 상부저수지에서 1.3㎞, 하부저수지에서 0.8㎞ 떨어진 지하 200m 지점에 설치되었으며, 그 크기는 너비 21.5m, 길이 92m, 높이 43m에 달한다. 지하발전소에는 펌프터빈과 발전전동기를 비롯해 변압기 등 발전에 필요한 보조기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양수발전소의 핵심공사는 터널 굴착공사로 수직 터널 2개를 비롯해 총길이 6,578m에 이르는 각종 터널을 굴착했으며, 수압철관의 축조공사 등 발전소의 건설공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험난한 공사였다. 야간에 잉여전력을 이용하여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저수지로 양수하여 저장했다가 전력소비가 많은 주간이나 야간에, 수압철관을 통해 발전전동기의 중심 높이인 EL 23.00m까지 이 물을 떨어뜨려 발전한다. 각종 기기는 자동화되어 중앙제어운전조작실에서 컴퓨터로 원격 제어한다.
댐 건설로 수몰된 기존의 저수지들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부저수지 바닥에 직경 2m의 배수관로를 설치하여 인근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이 발전소는 탈유(脫油) 전원개발과 수력자원의 적극 개발 등 에너지원의 다원화 정책에 맞춰 건설되었으며 전력계통의 효율적인 운용, 빠른 기동과 정지 능력, 높은 효율을 자랑한다.
천태산(天台山)
우리의 카니발이 천태산 정상 신불암고개를 넘었다. 천태산 줄기가 뻗어 내려온 신불암고개를 넘으면 양산시 원동면이다. 천태산은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행곡리와 양산시 원동면에 걸쳐져 있다. 해발 630.9m고지로, 낙동정맥 천성산, 영축산과 함께 양산의 3대 명산으로 꼽힌다. 중국의 천태산과 모양이 흡사하다 하여 그렇게 불려 왔다. 천태산은 영축산맥의 서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쪽에는 금오산, 수연산이 이어져 있다. 예로부터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남서쪽으로 낙동강, 북쪽으로 안태호, 천태호(삼랑진 양수발전소), 그리고 동쪽으로는 배내골이 연계되어 있어, 등산 코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본 낙동강의 낙조(落照)는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하며, 남쪽에 위치한 천태사(天台寺)에는 절경 용연폭포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은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맑고 깨끗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다. 양산팔경 중 제6경에 속한다.
천태사(天台寺)
신불암고개를 넘으면 양산시 원동면이다. 내려가는 길은 산굽이가 많지 않은 도로, 이어지는 절벽의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천태사 일주문인 ‘天台山通天第一門’(천대산통천제일문) 앞에 이른다. 거기에는 천태산 남쪽의 산곡에서 발원한 신곡천이 흘러내리는데,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 계곡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천태사(天台寺)에 이른다. 경내에 유명한 마애불(磨崖佛)과 천태석굴(天台石窟) 그리고 용연폭포(龍淵瀑布) 등 절경이 있다.
원동 매화전망대의 조망
‘천태산통천제일문’ 앞에서 다리를 건너 그 신곡천을 따라 내려오면 낙동강 강안의 마을이다. 원동(면) 용당리 당곡마을이다. (이 당곡마을에서 낙동강 강안으로 통하는 (경부선 철도) 지하차도를 지나가면 ‘가야신사’와 잘 가꾸어진 너른 수변공원이 있다.) 우리의 카니발은 원동교(원동천) 건너 1022도로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토곡산(855m) 산록의 고개로 올라간다. (이곳 원동면 삼거리에 좌측(북쪽)으로 원동천을 따라 올라가는 도로는 신불산, 가지산으로 가는 69번 지방도로이다.) 토곡산의 가파른 절벽이 낙동강에 임하는 산록의 길이다. 산길은 강안을 따라 직선으로 이어지면서 고도를 높인다. 그러므로 우측의 절벽 아래에는 낙동강에 연해 있는 원동역이 있다. 강변의 풍경이 시야에 펼쳐진다.
차를 세웠다. 원동면 관광안내도에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표시해 놓은 지점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팔각정이 있고 그 주위에 몇 그루의 우아한 거송(巨松)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라는 보는 조망의 압권은 고요하고 유장한 낙동강과 그 주변의 풍경이다. 우리 일행은 차에서 내려 가을 햇살이 빛나는 낙동강 주변의 풍경을 유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발아래에는 저 낙동강 산굽이를 돌아 나온 경부선 철길이 강안을 따라 일직선으로 뻗어있다. 그때 마침 부산에서 올라오는 KTX 열차가 긴 차체를 이끌고 질주하여 오는 광경을 포착하기도 했다. KTX는 유선형의 은빛 이마로 검푸른 낙동강 물길을 따라 시대의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고속열차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만추의 낙동강은 다시 고요한 정적에 들어갔다. 부산 하구둑 물막이로 인해 강은 조용한 호수가 되어 있었다.
낙동강 서룡수변공원
그리고 우리는 다시 토곡산 다른 줄기인 낙동강휴게소(천태산모텔)이 있는 고개를 넘고, 산굽이를 돌아서 알프스산장모텔 앞을 경유하여 낙동강 가까이 이르렀다. 직선의 도로가 이어진다. 길의 오른쪽은 경부선 철로가 지나고 그 너머에 낙동강이 흐른다. 바이크로드는 경부선과 낙동강 사이에 있다. … 우리는 원동면 서룡리에서 오른쪽 경부선 철로 굴다리를 지나 서룡수변공원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마지막 포인트인 ‘물금’을 가까이에 두고, 오늘의 낙동강 여정을 마무리하고, 낙동강 종주를 인증하는 나름의 절차였다. ‘서룡수변공원’은 낙동강 종주 바이크로드의 길목으로 자전거 수리점, 자전거 임대, 바이커들을 위한 편의점(Chef Truck) 등 양산 바이크로드의 거점 공원이었다. 옷깃을 파고드는 강바람이 스산했다. 넓은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 강안 가까이 다가가서 낙동강 검푸른 물결을 바라보았다. 멀리 양산의 아래쪽에 있는 하얀 교량이 보이기도 했다. 교량은 양산과 김해를 잇는 양산낙동강교이다. 냉랭한 바람결에 일렁이는 물결이 무척 스산하게 밀려온다. 이곳 서룡수변공원은, 며칠 후, 원동의 가야신사 수변공원에 이어 내가 걸어서 지나갈 종주의 길목이다.
어제-오늘의 여정, 며칠 후 두 발로 다시 걷는다!
오늘 카니발로 우리 대원들이 함께 한 여정, 즉 오후 삼랑진에서 출발하여 1022번 도로를 타고 천태산을 넘어 물금까지 내려온 카니발 여정은, 11월 8일~9일에 도로가 아닌 수변공원 길을 ‘나의 두 발로’ 다시 걷게 될 것이다. 물론 독보고행이다. 그 일정은 대강 이렇다. 우선 11월 7일에는 합천-창녕보에서 박진고개-영아지고개를 넘어 남지읍까지 걷고, 11월 8일에는 삼랑진에서 천주교 성지인 김범우 묘소와 천년 고찰 만어사를 탐방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11월 9일에는 낙동강 바이크로드 강안을 따라 삼랑진을 출발해서 물금까지 걸어내려 오게 된다. 어제와 오늘 내가 편승한 카니발이나 바이크 여정은, ‘두 발로’ 독보하기 위한 사전 답사의 성격을 지니면서 걸어서 갈 수 없는 곳을 탐방하게 되어 여간 유익한 여정이 아니었다. 연일 운전의 노고를 아끼지 않은 기원섭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 (11월 10일에는 물금에서 시작, 부산 하구둑에 이르러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11월 11일에서 부산 몰운대, 다대포까지 나아가 바다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룡수변공원에서 잠시 머물다가 굴다리를 나왔다. 조금 내려오면 원동면 화제리, 양산 물금의 진산인 오봉산(533m) 산체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저 오봉산을 돌아나가면 그 남동쪽 아래가 바로 물금이다.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화제천 다리를 건너 이어지는 길은 오봉산의 산록의 길, 굽이굽이 돌아서 차는 달린다. 물금읍에 진입했다. 1022번 도로는 오봉산 아래, 물금의 초창기의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는 구 도로이다. 이 도로는 물금역에서 부산대 병원에 이르는 황산로와 오봉지하차도에서 합류한다.
양산시 물금
오후 4시 30분,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포인트인 양산시(梁山市) 물금읍(勿禁邑)에 도착했다. 오봉산 동남쪽 분지에 자리 잡은 물금은 최근 세계적인 항구도시 부산의 배후도시로 개발되어 최근 엄청나게 발전한 곳이다. 특히 오봉산(533m)과 금정산(801m) 사이 양산천 유역, 그 평야지대에 신도시가 집중 개발되었다. 그 한 가운데 국립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이 자리 잡았고, 그 주위에 수많은 아파트와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야말로 물금은 상전벽해의 현장이다. 특히 부산의 전철 2호선이 들어와, 양산에서 부산의 도심(부산 서면)은 물론 수영(水營)과 해운대(海雲臺)의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다.
양산, 그리운 나의 누님 오남희 여사
그런데 양산(梁山)은 내 개인적으로 특별한 연고(緣故)가 있다. 그리운 나의 누님이 사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초량에 살던 누님 오남희(吳南姬) 여사가 아들들이 미리 와 자리 잡고 사는 양산으로 와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8년 6월 24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 양산 신불산공원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작고하신 자형과 나란히 모셔져 있다.
… 나는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남희 여사는 우리 어머니 평산 신씨가 낳은 7녀 1남 중, 나의 세 번째 누님이다. 1948년 여름, 내가 태어났을 때 누님은 열네 살이었다. 내리 딸만 일곱을 낳은 우리 어머니가 마흔 셋의 나이에 극적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때 가장 기뻐하며 맨발로 뛰어나가 ‘우리 엄마, 아들 낳았다’고 소리친 바로 그 누님이다. 조선에 없는 엄마의 아들, 그 동생을 금이야 옥이야 늘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펴 준 누님이다. 내 어릴 적, 겨울이 되면 ‘얼음타기’를 고집하는 ‘막무가내’인 나를 사과상자에 포대기를 깔고 씌워서 하루 종일 얼음판을 끌고 다니기를 수도 없이 한 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두 해 전에, 누님은 경주 이씨 자형과 혼인하였는데, 그날은 비가 와서 우리집 큰마루 위에서 혼례를 올렸다. 그 광경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때 누님이 시집 간 곳은 저 산북의 첩첩산중 ‘샛골’이었다. ‘샛골’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운달산이 둘러싸인 궁벽한 마을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총명하고 부지런한 누님이라, 말없이 시부모 봉양 잘하며 논일, 밭일 등 온갖 일을 하면서 자식들을 낳아 길렀다.
그런데 맏아들이 커서 중학교에 다닐 즈음, 산골 살림을 정리하여 일약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그것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한 엄청난 결단이었고 놀라운 결행이었다. 처음 부산에 내려가 초량에 살 집을 마련하고 억척스럽게 고생하시면서 슬하의 4남 2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리하여 학교를 졸업한 맏아들이 양산시청에 근무하면서 양산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 이후 그 맏이가 동생들까지 양산에 오게 하여 사업도 하게 하는 등 자리를 잡고, 살도록 하였으니, 4형제가 모두 양산을 고향으로 삼아 안착했다. 그리하여 누님 내외분도 자연스럽게 양산에 와서 살게 되었다. …
자형이 돌아가시고, 이후 아들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 어머니를 모셨다. 딸 둘은 출가하여 부산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양산의 경주 이씨 4형제 모두 훌륭하게 장성하여 유복한 가정을 꾸리고 산다. 그리고 그 아래에 또 11명의 똘똘한 내·외손이 자란다. … 그러니까 우리 누님 오남희 여사는 낙동강이 발원하는 또 하나의 지천인 문경 금천의 최상류 산골(백두대산 운달산 샛골)에서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산까지 내려왔으니 나보다 앞서 ‘인생의 낙동강을 중주 하신 분’이다. 그렇게 양산의 물금은 우리 누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 위로 누님이 네 분 계셨는데, 모두 ‘한 가락’하는 유별난 분들이었다. 그 중에서 양산의 오남희 여사는 유별(有別) 중의 ‘별’이었다. 품성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속이 깊고 정이 많았다. 특히 총명(聰明)하고 사려(思慮)가 깊었다. 기억력이 출중하여 한번 들은 것은 거의 잊지 않았다. 신명이 넘치면 노래도 잘하고 분위기 잡으면 문학적인 서정성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자비심을 덕(德)으로 삼아 그것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님은 이야기 보물창고였다. 기회 있어 마주 앉을 때마다, 나에게 우리 집안의 모든 내력이나 에피소드,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계실 적의 이야기, 착한 아버지가 노름판에 빠진 이야기, 내리 딸만 낳은 어머니의 마음고생 이야기, 이웃에, 아들만 있는 작은 집 이야기, 그리고 삼강 건너 의성군 다인의 외갓집에 다녀온 이야기 등 내가 우리 집안의 내력과 가족사를 알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의 누님 오남희 여사는 그야말로 ‘우리 가족의 살아있는 실록(實錄)’이었다. 생각건대 오남희 여사는 누님들 중에서 우리 어머니 총기와 품성 등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의 독실한 불심(佛心)까지 이어받아 평생 자비행(慈悲行)으로 살았다.
누님이 살아계실 때 나는 일 년에 두어 번씩 양산에 와서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누님을 뵙고, 밤새도록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러나 그 누님이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셨다. 아들 중에는 세계적인 산악인도 있고 자영업을 하는 불심이 강한 아들도 있고 알토란같은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도 있다. 이렇게 양산(梁山)에는 그 자식들이 자리를 잡아 모두 잘 살고 있다. 이래저래 양산은 나의 누님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니 각별(恪別)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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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上京)하는 길
양산(梁山)은 우리 이상배 대장의 집이 있는 곳이다. 히말리스트 이상배(李相培) 대장은, 2007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하여, 히말라야 초오유(8,201m), 가셔브롬2봉(8,035m), 로체(8,516m) 등 8,000m급 고봉을 등정하였다. 그리고 남미 아콩가구아, 북미 맥킨리, 아시아 에베레스트, 유럽 엘부르즈,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 세계 5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정한 베테랑 산악인으로서,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훈했으며, 현재는 한국히말라야클럽 이사이다.
특히 이상배 대장은 양산(梁山)에 ‘사단법인 영남등산문화센타’를 창설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매년 ‘양산스포츠클라이밍’, ‘등산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산행 등정기인 『히말라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2015)가 있고, 히말라야 트레킹 가이드북인 『네팔 히말라야 배낭여행』(2016)을 펴낸 바 있다. 무엇보다 이상배 대장은 청소년힐링캠프 '노란 손수건'을 운영하면서 산(山)을 통한 청소년 인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낙동강 종주도 청소년 교육 프르그램 개발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배 대장은 양산의 부산대학 병원 앞에서 차에서 내렸다. 그 동안 우리와 2박 3일 동안의 긴 여정을 함께 했다. 며칠 뒤 다음의 일정을 함께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귀가하는 것이다. … 나의 다음의 여정은 낙동강 종주를 마무리하는 단계가 될 것이다. 물론 두 발로 걷는 나의 일정은 카니발 일정과는 별개로 진행된다. 이상배 대장과 기원섭 일행은 낙동강 하구둑이나 부산의 몰운대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오후 5시, 남양산I.C에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귀경(歸京) 길에 올랐다. 경부고속도로 영천J.C에서 상주-영천고속도로를 경유, 낙동J.C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문경시 점촌에 도착했다.
기원섭의 카니발은 문경까지만 운행하기로 했다. 그 동안 합천, 의령, 창녕, 밀양, 삼랑진, 양산의 물금그리고 문경까지 장장 수백 킬로를 꼬박 3일 간 쉼 없이 운전해 왔다. 피로감이 누적되어, 서울까지 가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마침 기원섭 내외는 연전 귀향을 목적으로 문경에 장만해 놓은 집이 있으므로, 오늘 상경하지 않고 그 문경집에서 머문다고 했다. 대원들을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은 그 우정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점촌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나는 점촌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귀경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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