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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몽고의 별~ 6~
말을 하면서도 편지를 머리 위로 치켜들며 황송해 어쩔 줄 몰라했다. 포석약은 이번만은 꼼짝없이 죽었구나
했는데 무관이 완안열에 대해 쩔쩔매는 꼴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완안열이 편지를 되돌려 받
았다.
[네 부하들의 군기가 말이 아니구나.]
[소관 돌아가 엄한 벌을 내리겠나이다.]
[우리가 지금 말 한 필이 부족하구나.]
그 무관은 급히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끌어냈다.
[부인께서는 소관의 이 말을 타십시오.]
포석약은 자기를 부인이라 부르는 말을 듣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지고, 완안열은 싱글벙글, 고개를 끄덕
끄덕, 말고삐를 받아 쥐었다.
[돌아가거든 한승상께 인사 올리거라. 내 다른 일이 있어 인사하지 못한다고.]
[네, 네, 잘 알겠나이다.]
무관은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완안열은 더 거들떠보지 않고 포석약을 부축하여 말에 태우고 북쪽을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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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보를 가다가 포석약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그 무관은 군사를 길 양 옆에 세운 채 공손히 배웅을 하
고 있었다. 포석약이 의심스러워 물어 보려 하니 완안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탁주(韓托鑄)도 나를 보면 무서워하는데 제깐놈의 무관이 나를 어쩔 테야?]
[그럼 내 대신 원수를 갚기는 아주 쉽겠군요.]
[그건 좀 다릅니다. 지금 우리의 행적이 벌써 드러났으나 관병 놈들이 준비를 했을게고, 지금 가서 원수를 갚
으려 하다가는 일만 망치고 오히려 우리가 개죽음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완안열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부인,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포석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선 북쪽으로 가서 사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내려와 원수를 갚도록 합시다. 부군의 원수는
제가 꼭 갚아 드리고야 말겠습니다.]
포석약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죽고 집안은 망해 버린 데다 친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약
한 여자의 몸으로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 사람은 친척도 아니요 친구도 아닌데 어떻게 젊은 남자와 동행한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앞일이 막막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제 생각이 마땅치 않으시거든 다른 분부라도 내리세요. 무슨 일이든지 부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포석약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알아서 해 주세요.]
[부인의 은혜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습니다. 부인······.]
[앞으론 그런 말 다시 하지 마세요.]
[네! 그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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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길을 재촉했다. 뒤서거니 앞서거니 어떤 때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면서 때는 바야흐로 강남에 봄빛이
무르익는 계절, 길가 수양버들은 파릇파릇 새잎이 돋아나고, 꽃 향기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완안열은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포석약은 아직까지 이렇게 잘생기고 학식이 풍
부하며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 사람을 만난 일이 없었다.
3일째 되던 날 점심때 그들은 가흥(嘉興)에 도착했다. 이곳은 비단과 쌀의 집산지로서 예로부터 번화한 곳
이었는데 송나라가 남으로 내려온 뒤 서울과 멀지 않은 탓으로 더욱 번창해진 곳이다.
[여인숙을 찾아 쉬기로 합시다.]
완안열이 쉬어 갈 것을 권하자 포석약은 대답했다.
[날이 저물려면 아직 멀었는데 더 가보지요.]
[이곳의 상점들은 대부분이 큽니다. 부인의 의복이 낡았으니 새것으로 사 입도록 합시다.]
[아니 지금 입은 것도 사 주신 지 얼마 안되는 새옷인데 낡았다뇨?]
[길에 먼지가 많아서 의복은 하루 이틀만 입어도 더러워지는 것이에요. 또 부인 같은 미인이 좋은 옷을 입으면
좀 어떻습니까?]
포석약은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기분이 괜찮았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상중인걸요....]
[그야 저도 잘 아는 일 아닙니까?]
포석약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완안열은 길을 물어 그곳에서 제일 크다는 수수(秀水) 여인숙을 찾아들었
다. 세수를 끝내고 요기를 했다.
[부인께서는 편안히 누워 쉬세요. 제가 나가 물건을 사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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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안열이 막 문턱을 나서려는데 길 가운데 중년쯤 되어 보이는 궁때가 흐르는
선비 하나가 신발을 질질 끌고 하품을 하면서 걸어왔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이고 의관도 바르지 못한데다가 얼굴은 10여 일 세수도 하지 않은 듯했다. 손에는 기름
때가 더덕더덕 묻은 검은 부채를 들고
있었다. 완안열은 원래 깔끔한 성미인데 이 사람은 선비 같으면서도 더럽고 지저분해 혹시 자기와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걸음을 빨리 했다.
그 사람이 갑자기 허허 웃는데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도 귀를 찔렀다. 완안열이 막 그의 옆을 지나려는 찰나 돌
연 그 사람은 부채를 들어 그의 어깨를 딱 때렸다.
완안열이 비록 무공(武功)을 익힌 사람이기는 하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화가 슬그머
니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왜 이래?]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허거리며 신발을 질질 끌며 저쪽으로 가 여인숙 심부름꾼 앞에 섰다.
[야 이 녀석아, 나으리의 모습이 꾀죄죄하다고 업신여기지 말아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어떤 녀석들은 겉
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텅텅 비었단 말이다. 하는 짓마다 속여먹기, 유부녀나 유인해 가지고 다니기, 거저 먹고
거저 잠이나 자려는 놈들을 조심해야 해. 마땅히 선불을 받고 재워 주든지 먹여 주든지 하거라.]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버렸다.
완안열이 듣자 하니 자기를 보고 빈정대는 것 같아 더 화가 치밀었다. 심부름꾼은 그 사람이 지껄이는 말을 듣
고 나서 완안열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수상한 모양이다. 그가 완안열의 앞으로 걸어와 아는 체했다.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예의를 몰라 그러는 게 아니라····.]
완안열은 코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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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돈을 우선 맡아 두거라.]
그러면서 자기 품안을 뒤져보고 깜짝 놀랐다.
원래 그의 주머니에는 4, 50냥의 은전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 보니 텅텅 빈 주머니가 아닌가. 심부름꾼은 그
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자 그러면 그렇지 하고 배를 불쑥 내밀고 어깨에 힘을 준 채 내뱉었다.
[왜? 돈이 없나?]
[좀 기다리거라. 내 방에 가서 가지고 오마.]
허둥지둥 방에서 나오느라 주머니를 잊고 왔나 해서 방으로 돌아와 보자기를 풀어 보니 텅텅 비어 있을 뿐 어디
서 돈을 잃었는지 알 길이 없다.
심부름꾼은 방문 밖에서 머리를 디밀고 기웃거리다 그가 돈을 못 내놓는 것을 보고 빈정거렸다.
[이 여자는 당신 부인이오? 만일 어디서 꾀어 가지고 데리고 왔다면 공연스레 우리까지 귀찮게 만들지 말란
말야!]
포석약은 부끄럽고 창피하여 얼굴이 붉어졌고, 완안열이 방문 밖으로 쏜살같이 내달으며 심부름꾼의 따귀를
보기 좋게 올려치자 이빨이 몇 개 부러졌다.
심부름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돈도 못 내는 주제에 사람까지 쳐!]
완안열이 발길로 놈의 엉덩이를 지르자 녀석은 떼구르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빨리 나가요.]
[무서워할 것 없소. 돈이 없으면 저놈들보고 가져오라지요.]
완안열은 의자를 들어 방문밖에 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좀 지나서 심부름꾼은 10여 명의 건달들을 데리고 몽둥
이를 휘두르며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완안열은 큰 소리로 웃었다.
[너희가 시비를 걸려 하는가?]
하더니 땅으로 뛰어내리며 단번에 몽둥이 하나를 빼앗아 휘두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네다섯 명이 쓰러졌다.
형세가 불리함을 보고 건달들은 몽둥이를 버린 채 벌떼처럼 달아나니 땅에 쓰러졌던 녀석들도 곤두박질치면서
달아나 버렸다.
[일을 크게 벌여 관가를 건드려 놓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난 관가에서 오기를 바라고 한 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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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약은 그의 저의가 무언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얼 마 뒤 한 무관이 몇 명의 포졸을 이끌고 여인숙에 나타
났다. 분명 조금 전 쫓겨 간 건달들이 불러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인솔자인 듯한 무관이 앞으로 썩 나서며 당당히 외쳤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행패를 부렸단 말이냐? 썩 나서거라.]
그러자 완안열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되려 호통을 쳤다.
[이 놈! 잔 말 말고 개운총(蓋運聰)을 불러오너라!]
개운총은 가흥부 지부(知府)의 이름이다. 포졸들은 자기 상사의 이름을 듣자 놀랍기도 하고 슬그머니 화도 났
다.
[이놈이 미쳤나! 함부로 개(蓋) 나으리의 이름을 부르게.]
완안열은 대꾸 없이 품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내던지고,
[이것을 갖다 개운총에게 보이거라. 그가 오나 안 오나 보자꾸나!]
무관은 봉투 위에 있는 글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낮은 소리
로 당부했다.
[저 녀석을 지켜 봐. 달아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말을 마치자 나는 듯 밖으로 사라졌다.
포석약은 방안에 앉은 채 마음만 조마조마,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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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나자 다시 10여 명의 포졸들이 몰려오고 두 명의 관원(官員)이 예복 차림으로 오더니 땅에 꿇어 엎드려
공손히 절을 했다.
[소직(小職) 가흥부 개운총과 수수현의 강문이 대인께 문안드리옵니다. 소직 등이 대인의 왕림을 몰라 뵈었으니
널리 용서하소서.]
완안열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약간 머리를 굽혀 보일 뿐이다.
[제가 이곳에서 약간의 돈을 잃었는데 좀 찾아 주도록 하시오.]
[네, 네]
두 명의 포졸들이 두 개의 쟁반에 은전과 금전을 가득 담아 들고나섰다.
[소직의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오니 이는 모두 소직의 허물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것이오나 우선 대인께서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완안열은 고개를 끄덕이고 개운총은 다시 그 편지를 정중하게 바쳤다.
[소직이 벌써 제 집을 청소시켜 놓았사오니 대인(大人)과 부인께서 왕림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아니 이곳이 그대로 좋소. 내 조용한 곳을 좋아하니 그대로 내버려두기 바라오.]
[네 네, 알겠습니다. 또 무엇이 필요하신지 분부만 내려 주시면 정성을 다해 모시겠나이다.]
완안열이 손을 내저으니 개,강 두 사람은 바삐 포졸을 이끌고 물러갔다.
여인숙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생명만은 구해 주시고 곤장은 얼마든지 때려 달라고 애걸했다. 완안열은 접
시에서 약간의 은전을 주워 땅에 던졌다.
[네게 상으로 주마. 얼른 물러가거라.]
심부름꾼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고 주인은 완안열의 표정에서 악의 없음을 보자 얼른 주워 넣으며 수없이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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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관리들이 보기만 하면 그렇게 쩔쩔매나요?]
포석약이 웃으며 묻자 완안열도 따라 웃었다.
[원래 이 따위 관리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등 소용없는 녀석들이오. 조광(趙壙) 아래에
는 맨 썩어빠진 놈들만 있으니 국토(國土)를 잃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조광. 그가 누군데요?]
[바로 지금의 영종 황제(寧宗皇帝)요.]
포석약은 깜짝 놀랐다.
'언제는 한승상(韓承相)의 친구라고 하더니 문관이고 무관이고 이 사람만 보면 모두 쩔쩔매는 꼴이 아무래도
황족이나 종실(宗室) 아니면 조정 대신인가.
그렇지 않고야 감히 천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만일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이 또한 큰 죄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도 모를 일이다.
<다음은 소설 영웅문>~제1부~몽고의 별~ 7
■ 출처: 김용의 소설 영웅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