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제62호
밤나무골 이야기
연지(臙脂) 곤지를 요즘 말로 쉽게 하면 화장(化粧)이다. [臙:연지 연, 脂:기름 지]
그런데 화장은 화장이지만 매우 색감이 짙은 색조화장을 뜻한다. 가볍게 터치하는 화장은 아닌 것이다. 결혼식 때 하는 신부화장을 연상하면 된다.
또 ‘볼연지’라는 말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화장품을 말한다. 연지 곤지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엄마나 누나를 그릴 때, 볼에다 그리곤 하는 붉은 색의 동그란 점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혼례(婚禮)에서의 연지 곤지는 신식 결혼식에서는 볼 수 없고 전통 혼인식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신식이네 전통이네를 가리지 않고, 미적 감각을 최고로 살린 아이디어가 결혼식에도 등장하는 가 보다. 분명 신식 결혼식인데 웨딩드레스가 한복을 변형한 것이고 연지 곤지도 찍고 있다.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참 새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것을 보면 혼례도 그렇지만 우리의 삶을 향유하는 데는 기존의 안정되고 고정된 것 보다 낯설지만 참신한 생각들이 얼마나 유용한지는 느낄 수 있다.
연지 곤지는 연지와 곤지로 나누어진다.
연지와 곤지는 둘 다 형태가 동그란 모습이지만 뺨에 찍는 것이 연지이다. 또 입술에 바르는 것도 연지라고 한다.
그해 반해 곤지는 이마에 찍는 것이다.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眉間) 위쪽에 찍는다.
연지 둘, 곤지 하나, 합해서 세 군데에 붉고 둥근 점을 찍는다. 우리 문화에서 연지 곤지는 그리는 것이나 바르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지 곤지는 젊고 아름다운 새색시, 세상의 고통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순결하고 순진한 처녀를 뜻한다.
연지의 기원
연지는 홍화(紅花)의 붉은 염료(染料)를 사용한 것이다. 또 광물성 염료인 주사(朱砂)를 으깨어 갈아 만들기도 하며, 요즘에는 붉은 색종이를 오려서 붙이기도 한다.
연지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고려에 침입했던 원나라, 곧 몽골인의 풍습이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원나라 이전에도 연지의 사용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중국 측의 기록만 보더라도 기원전 수백 년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연지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중국이 아니라 북방민족, 흉노(匈奴)라고 하는 몽골을 포함한 유목민족의 문화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언어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연지의 한자 표기는 다양하다. 燕脂, 臙脂, 胭脂, 烟脂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것은 흉노족의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언지(焉支)와 같은 것이다.
‘언지’는 홍화의 표기이도 하며, 이 풀을 발라 치장한 아름다운 왕후(王后)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언지는 또 흉노족의 발음을 살리면 알씨(閼氏)인데, 우리발음으로는 ‘알씨’라고 읽지만, 실은 ‘연지’와 같은 발음이다. 臙脂, 焉支, 閼氏 등은 생긴 것이 다르고 우리말 한자음으로도 다르지만, 중국 음이나 흉노의 음으로는 모두 같은 발음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閼氏를 ‘연지’라고 발음한다고 했지만 알씨는 알씨라는 것이다. 곧 閼氏는 두 가지 발음으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연지와 알씨, 이 알씨를 원래의 발음대로 읽으면 asi, 곧 ‘아씨’가 된다. 이 아씨가 우리말과 관련이 있다.
흉노족에서 ‘아씨’는 부인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말에서 하인이 양반가의 젊은 부인을 부르던 호칭과 연관이 깊어 보인다. 또 젊은 처녀를 이르는 애기씨, 아가씨라는 말이나 새댁이 시누이를 부르는 호칭과도 의미 있는 관련이 있다. 아내의 의미인 ‘아씨’와 홍화의 의미인 ‘연지’로 함께 쓰였던 閼氏[연지 또는 알씨]라는 복잡한 단어가 우리나라로 전파되어서는, 본래의 의미를 살려 혼인한 주인댁 마님을 아씨라고 부르고, 홍화의 의미도 원래대로 살려 볼에 찍는 붉은 안료를 연지라 분리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대 언어, 특히 북방 언어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큰 성취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가설은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어쩠던 흉노족의 연지가 중국 문화에 이식되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에 전래되었다는 설명이 무난해 보인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문화가 중국 문화가 아닌 북방 문화와 연결되는 측면도 강하기 때문에, 그쪽을 통해서 직접 들어왔다고 해도 무리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중국에서는 이 연지가 역대 왕조를 통해서 지속되다가, 청나라에 와서 근대적 세계가 도래하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즈음 일상의 삶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일상에서 사라진 지 채 100년이 안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어느 집이든지 입술과 볼에 동그란 점을 붙이고 너무 하얗게 분을 발라 마치 강시같이 보였던 혼레식(婚禮式)의 오래된 사진 한두 장쯤은 있을 것이다.
연지의 쓰임
연지는 그 쓰임새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있다.
가장 기발한 것은 궁녀들의 생리 표시라는 것이다. 옛 중국의 궁녀들은 월경(月經)이 시작되면 연지를 얼굴에 발랐다고 한다. 황제나 왕의 여자들이었던 궁녀들이 생리 중인 것을 알려, 황제나 왕이 있을지도 모르는 잠자리 시중을 연중에 물리쳤다는 것이다. 황제나 왕이 연지를 바른 궁녀들을 물리쳤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억지스럽다. 연지는 화사한 색조화장인데, 무슨 죄인처럼 얼굴에 붉은 칠을 했던 궁궐의 우발적인 사태에서 연지의 유행이 생겨났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연지의 핵심은 역시 색감이 짙은 그 화장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진한 화장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특별히 연회가 베풀어지는 궁궐의 특수한 직종의 여자들이나 화류계(花柳係)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들이 연지를 바를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일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화장 가운데도 특히 짙은 색조화장을 날마다 하는 직업은 화류계나 연인들 빼고는 없지 않을까? 실제로 연지를 식물에서 추출한 것을 쓰지 않고 주사를 갈아 쓴 연지를 발라 화장독(化粧毒)에 올랐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진한 색으로 화장을 할 수 있는 날은 역시 혼례식이었다. 이때 바르는 연지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붉은 연지는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면사포(面紗布)와 같은 순결한 처녀상을 상징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연지의 상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해준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쓰임이 있다. 붉은 색은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다. 양(陽)의 상징이기 때문에 음(陰)에 속하는 귀신은 질색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연지와 곤지에는 주술적(呪術的)인 의미가 있다. 시집장가도 못 가본, 원한에 찬 총각귀신과 처녀귀신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짜투리 이야기
백일이 지난 아기에게 엄마는 어디서 배웠는지 죔죔, 도리도리, 곤지곤지 한다.
아이는 엄마의 그런 행동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데 연지는 볼에 바르지만, 곤지를 이마에 바른다는 것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대해서 기발한 이야기들이 있다. 재미 삼아 소개한다.
동양철학을 처음 배울 때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동양철학의 위대성,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전통을 목에 힘줄 서게 말할 때이다.
“야 엄마들이 애기들한테 하는 곤지곤지가 뭔 줄 알아? 니들 모르지? 바로 땅을 말하는 거야. 우리 민족의 숨겨진 비의라고 할 수 있지, 땅 곤(坤), 땅 지(地)를 이때부터 가르치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느냐? 공부를 열심히 해라, 그래야 이런 심오(深奧)한 경지(境地)를 깨닫지”
“이것만 있는 줄 아냐? 도리도리가 고개나 좌우(左右)로 흔드는, 뭔 고갯짓인 줄 알아?
바로 도리(道理)를 말하는 것이지, 아~ 이 심오한 철학을 누구라서 알까보냐!”
반쯤 장난으로 하는 이런 말들이 있다. 그런데 곤지를 미간 사이쯤에 찍는 다는 것에 어떤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기에게 하는 곤지곤지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게손가락으로 손바닥 가운데를 찍거나 파면서 한다. 무언가 중심을 향하면서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곤지를 찍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곤지를 찍는 미간은 인간의 중심이며 생명의 고갱이가 들어있는 곳이고, 영적인 중심이다. 손바닥 중심을 찍는 행위도 그와 같은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 우리가 무의식중에 그러한 비의를 전수받아서 현대식 엄마들조차도 곤지곤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이런 유에 속하는 생각들이 제법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