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복음: 루카 2,36-40
인생의 방향을 알려줄 예언자를 빨리 찾아주라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은 한나 예언자가 예수님의 미래를 말합니다.
시메온과 마찬가지로 한나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위해 오신 분임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속량’은 피 흘림을 통한 죄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언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가나 축구선수의 자녀로 태어나면 그 방면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남들보다 더 빠른 성장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런 분야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필요가 없기에 또한 훌륭한 성과를 내게 됩니다.
올해 차범근 감독의 아들 차두리 씨도 감독의 길로 들어서 자신의 팀이 U18 무패 우승하여 최우수지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은 이을용 코치의 아들 이태석이었습니다.
이는 어려서부터 갈 길을 알았던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늦게서야 찾으려고 했던 사람과의 차이가 극명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도 아기 때부터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시작하여 그 길을 아기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주님께서 이 아이를 어떤 길로 이끄시려고 하는지 그 길을 빨리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속 ‘사하라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비셀 마을 원주민들은 켄 리먼(Ken Lehman)이 이 마을을 방문하기까지 한 번도 사막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막을 벗어나려고 길을 떠나도 걷다 보면 결국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더라는 게 마을 원주민들이 말한 이유였습니다.
1926년 이 마을을 찾은 영국인 켄 리먼은 이 사실을 알고 엑터라는 마을 청년에게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북극성을 따라 걷는 것이었습니다.
리먼의 가르침대로 엑터는 낮에는 쉬고 밤에는 북극성을 보고 걸으며 마을 원주민 중에서는 처음으로 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사막의 개척자가 되어 마을 한가운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상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방향만 찾으면 천천히 걸어도 방향 모르고 달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고생하면서도 훨씬 멀리 갑니다.
그러니 일찍 그 방향을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청년은 하고 싶은 일이 하도 많아서 90개나 적습니다.
모두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중생들입니다.
그렇게 살면 나이가 들어도 평생 해 놓은 것이 없어 인생을 허비했다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밑에 물이 있다는 확신을 줄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저는 다행히 늦게나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만나 저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 방향으로 나아온 것에 지금까지 후회가 없습니다.
힘이 들어도 좋은 열매가 계속 맺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늘 예수님의 미래를 말해 준 한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평생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5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여든네 살이면 엄청나게 장수한 나이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는 그 긴 세월을 혼자 성전에서 기도와 절제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한 삶이 아니라 한 길로 평생을 나아온 삶입니다.
그 정도면 하느님의 자신에 대한 뜻을 평생 따라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누군가의 삶을 예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법칙』에 멘토의 조건 네 가지가 나옵니다.
1. 해당 분야에서 성과를 이뤄낸 전문가일 것.
2. 타인의 성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것(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안 됨).
3. 평생 자신과 싸움을 하며 성장하는 사람일 것.
4. 나를 편안하게 두지 않고 한 발 내딛게 만드는 사람일 것.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자신과 싸움을 통해 자신을 이긴 사람이어야 하고 이웃의 발전에 관심이 있어 그 사람도 자신을 이기는 삶을 살아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도 저처럼 책을 통해서도, 혹은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느님께서 분명 어떤 좋은 일을 하도록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분명 우리 부모 주위에, 혹은 아이들 주위에 놓아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루카 2장 36-40절
평생소원
성경 안에는 노년기의 모델이 되는 몇몇 인물들이 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노인으로 살아가기 점점 힘들어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기에 이분들의 덕행이 더욱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한나라는 특별한 여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그러니까 20대 중반에 남편과 사별합니다.
그리고는 여든네 살이 될 때 까지 그녀는 재혼도 하지 않고, 방황도 하지 않고, 딴 곳으로 눈길 한번 두지 않고 오로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한나 예언자의 특기는 단식이었으며 취미는 기도였습니다.
그녀는 60년 세월동안 한결 같이 깨어있는 자세로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한나 예언자의 충실하고도 항구하며 열렬한 신앙에 하느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십니다.
탄생하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는 은총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복직관, 하느님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평생에 걸친 충실한 영적 생활 끝에 평생의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너나할 것 없이 희망합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좀 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꿈꿉니다.
지금은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노년기에 접어들면 좀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좀 더 많이 희생하게 되고,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순간이 다가오면 좀 더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한 걸음 크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인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웬걸!
많은 경우 삶은 우리 의도대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기도나 영적 생활은 습관이 중요한 것이어서 젊은 시절 기도에 맛들이지 않았던 사람이 나이 든다고 저절로
기도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젊어서 육적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연세 든다고 저절로 영적인 사람으로 탈바꿈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으로 살아가시는 분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가시는 분들, 끝까지 놓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분들,
그래서 정말이지 불행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들 꿈꾸실 것입니다.
영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노년기!
그렇다면 한나 예언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세상에 푹 빠져 삶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영적인 삶으로 전환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충만한 영적생활을 추구했고 그 맛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살아생전 구세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평생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복음: 루가 2,36-40 :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시므온의 뒤를 이어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므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고 한다. 복음에 그녀의 조상과 지파를 밝힘으로써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다. 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냉담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뢰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엽고 믿을 수 있는 자녀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한 생애를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현세의 큰 축복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못하다. 또 부부 중에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