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장답게 진지 정비
- 지역콘텐츠 만들어야
결론부터 말하면, 이윤택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것도 고향인 부산에서, 연거푸 2번씩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내상(內傷)이 아릴 것이다. 지금 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흑흑거리며 게릴라 본성을 톱아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윤택이 누구던가.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연출가. 시, 평론, 드라마, 시나리오, 영화까지 넘나들며 활동해 온 전방위 예술가. 그에게 부여해야 할 호칭과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이윤택은 1990년대 초 단기필마로 서울에 입성해 서울 무대를 평정한 문화게릴라다. 상도 많이 받았다.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대상, 한국뮤지컬대상 연출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은 그의 진가를 말해준다. 세계적 연출가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 없을 거장이다. 그가 이끄는 가마골소극장은 지역연극의 신화이자 흥행 아이콘이다. 여러모로 그는 성공했다.
그런 이윤택이 최근 부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하나는, 그가 쓰고 연출한 연극 '궁리' 부산 공연이 무산된 것이다. 지난 4월 국립극단을 이끌고 서울과 수도권 공연을 성공시킨 이윤택은 7월 부산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궁리'는 부산 출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을 다룬 창작극으로, 이윤택이 10년 만에 내놓은 야심작. 그 스스로 부산의 핵심 문화콘텐츠를 만든다는 각오로 썼다고 했다. 국제신문은 '궁리'를 지역 인물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연극소설로 전환, 그에게 재집필을 의뢰해 25회를 연재했다. 하지만 연극 '궁리'는 부산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스폰서가 붙지 않았고 부산시도 주최에 난색을 표했다.
또 하나는, 부산시와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가 주최한 창작극 '부산 뮤지컬' 공모전에서 이윤택의 가마골소극장이 서울의 (주)광화문연가 팀에게 밀린 일이다. 이윤택은 부산항을 배경으로 개항기 부산 사나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바람의 아들'(가칭)을, 광화문연가 팀은 가수 심수봉의 노래에 사랑 이야기를 녹인 부산 배경의 뮤비컬(영화에서 소재를 딴 뮤지컬)을 들고 나왔다. 심사 과정에서 명분 대 상업성이 맞부딪혔다.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다. 어느 것을 선정해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결과는 흥행에서 약간 높은 점수를 얻은 광화문연가 팀이 우선협상대상자가 됐다. 지역성과 명분이 서울의 상업성에 밀린 셈이다.
지난 17일 가마골소극장 측은 부산 거제동 공연장을 폐관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1986년 광복동에서 문을 연후 부산 연극의 산실이 돼온 가마골소극장 26년 역사가 접히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이다. 가마골 측은 "더욱 좋은 공연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으나, 운영 효율성과 지역의 무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이유를 따지는 건 구차한 일일 수 있다. 이윤택으로선, 알아주지도 않는 부산에서 소외당하고 옥쇄 당하느니, 원래 성격답게 게릴라처럼 변방(밀양 또는 김해)에서 활동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전언에 따르면 그의 철수 결정은 전광석화 같았다고 한다. 기장에 새 둥지를 준비하고 있다지만, 언제 어떻게 귀환할지는 오리무중이다.
상처 입은 거장은 지금 실존적 고뇌에 빠져 있다. 고향에 대한 원초적 애증을 어떻게 눙쳐야 하는가. 한 인터뷰에서 이윤택은 "내가 명색 연극연출가인데 환갑을 맞이한 지금까지 거칠고 억센 부산 사투리를 고치지 못하고 있다"며 넌지시 부산사람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상처 입은 거장을 위로할 당장의 처방전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관점이 있다. 부산은 지금, 경쟁력 있는 콘텐츠(공연작품)를 필요로 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의전당, 소향아트센터, 벡스코 오디토리움, 곧 들어설 북항의 오페라하우스까지 1000석이 넘는 대공연장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해 줄 해결사로서 이윤택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사는 전화위복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하는 주문이다. 문화게릴라는 부산이란 진지를 포기해선 안 된다. 게릴라는 악조건 속에서 싸워 진지를 사수하고 끝내 깃발을 꽂는 전사다. 쓴잔을 단잔으로, 화를 복으로 만드는 것이 문화게릴라 아닌가. 환갑을 맞은 문화게릴라 이윤택, 그의 전투력을 다시 보고 싶다.
첫댓글 김해시라도 제 정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알곡을 거둘 수 없다면 농부가 아니듯,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문화도시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