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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역사반란(1)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북한만이 쓸 수 있는 책
1980년대의 청년들 치고, 황석영 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일명 ‘넘어 넘어’)를 읽지 않은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 책 내용을 사실로 믿지 않는 사람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5.18바이블’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0년 12월부터 이 책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2010년 12월호 신동아 표지에는 “문화권력 황석영에 묻는다”라는 큰 글씨가 쓰였습니다. 128쪽에는 황석영의 어두운 구석들 몇 개가 적나라하게 나열돼 있었습니다. ‘강남몽’의 제4장에서는 아예 신동아 조성식 기자가 낸 책의 본질을 그대로 끌어다가 조립하여 도색한 것이라 했고, 1980년 베스트 1위로 쓰나미를 일으켰던 “어둠의 자식들”은 전 국회의원 이철용씨가 쓴 것을, 이철용이 도망 다니는 틈을 이용하여 황석영 이름으로 내서 돈과 명성을 얻었다 했고, ‘황석영 삼국지’는 먼저 출간된 엔벤인민대 중문학부 교수 5명이 5년에 걸쳐 베이징 인민문학출판사본을 번역한 ‘삼국연의’를 조립 각색한 것으로 21곳에 이르는 오류까지 그대로 베껴서 썼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2009년 5월 19일자에, 5.18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고, 책속의 상황지도도 남이 그린 것이며, 책의 내용을 보면 황석영이 쓴 책이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서 2010년 신동아 12월호의 148쪽 중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와는 결이 다른 지만원(68)씨도 8월 출간한 ‘솔론몬 앞에 선 5.18’이라는 책에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북한 작가가 서술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광주의 분노’에서 사실관계가 비슷한 대목 여럿을 제시하면서 황작가 저작과 관련해 의혹을 제기했다” 신동아가 추적한 바로는 “넘어 넘어.”(1985 )= 광주백서"(1982) = “광주의 분노"(1985) =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1982)라는 등식이었습니다. 남한 책 2개, 북한 책 두 개가 한 사람이 쓴 ‘5.18기록’을 여러 사람이 윤문-가필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동아와 황석영 사이에 많은 시비가 있었습니다. 결국 황석영이 이실직고 하는 것을 끝으로 표절시비는 종결되었습니다. ‘넘어넘어’는 자기가 쓰지 않았고, 누가 썼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황석영이라는 거물의 이름으로 내야, 체포를 면할 수 있고, 많이 팔린다는 이유로 조직이 권유해서 자기 이름으로 발행하게 됐다고 2011년 신동아에 밝혔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이 책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이 책이 1985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안 읽은 사람들이 드물 정도로 많이 읽혔고,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은 분들이 책의 내용을 사실로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식인이라면 읽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돼 있어서 이 나라의 여론을 좌우하는 층에서 많이 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내년에는 이 책의 증보판이 나온다 합니다. 지난 2014년 7월 8, 광주시 시의회 기자실에서는 정상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 간행위원회”가 발족하면서 모금운동도 전개합니다. 황석영, 박석무, 원혜영, 정용화, 이부영, 유인태, 강기정, 이학영, 장휘국, 이재의, 송선태 씨 등 92명의 좌경 인물들로 구성된 이들은 회견문에서 ‘넘어넘어’가 “광주민중항쟁 10일간의 상황을 종합적이자 체계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책”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본 “5.18분석 최종보고서”는 그 뿌리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지난 12년의 연구에 두었지만, ‘넘어넘어’는 그 뿌리를 1980년의 대남공작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을 모략하는 북한의 전략에 두었습니다. 내년에는 두 가지 책 중에 어느 것이 더 많은 국민에 접근하느냐를 놓고 전쟁을 치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넘어넘어’의 내용을 일부 소개해 드립니다. 과연 이 책을 대한민국 국민이 쓸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악의적이고 악랄한 모략적 표현을 과연 대한민국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창작해 낼 수 있는 것인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군 지휘관들의 통솔 하에 집단적으로만 행동해야 했던 공수부대원이 개별적으로 풀어놓아도 저지를 수 없는 이런 야만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심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돌격 앞으로’하는 명령과 함께 공수대원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학생들 사이로 뛰어들며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 . 공수대원들의 곤봉은 철심이 박힌 살상용의 특수곤봉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살기가 돌았고, 가차 없이 머리를 후려갈겼다.”(36쪽)
“한손에는 대검을 또 다른 손에는 살상용 곤봉을 들고 눈에는 충혈이 되어 닥치는 대로 때리고 찔렀다.”(42쪽)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서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곤봉으로 쳐서 피곤죽을 만들었다.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망자의 사망진단은 각기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최초에는 타박상, 그 다음은 자상, 그리고 총상의 순서였던 것이다. 공수대원들은 피트투성이가 된 희생자가 축 늘어지면 멱살을 잡아 한 손으로 쳐들러 걸레를 던지듯 트럭 위로 던져 올렸다.”(47-48쪽)
“제7공수특전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병처럼 육성되었으며, 시내에 최초로 투입 될 때부터 살인 허가를 받은 것처럼 잔인, 냉혹하였다. 이들은 부마항쟁 때에도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부대였다. ”(48쪽)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그들은 가차 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49쪽)
“어떤 경우는 터미널 뒤편이 막다른 골목까지 달아난 학생이 드디어 잡히게되자 자지러지게 무릎을 꿇으며 살려달라고 연신 빌었다. 대문에 나와 내려 보던 할아버지가 너무도 애처로와 몸으로 가리면서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비켜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를 곤봉으로 내려쳤다.
할아버지는 피를 뒤집어쓰면 고꾸라졌고 쫓기던 학생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공수대원은 가차 없이 곤봉으로 후려친 뒤에 대검으로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갔다.” (49-50쪽)
“광주일고 부근에서는 길 가던 여학생을 아무 이유 없이 붙잡아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려 구둣발로 올려차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찢어 버리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데서 ‘이 씨팔년이 데모를 해? 어디 죽어봐라’ 하면서 계속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할 때까지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했다.” (50쪽)
“공수대원 7-8명이 반항하는 청년에게 달려들어 돌아가면서 난타한 후에 ‘광주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다.’ 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안내양이 약간 반항의 기색을 보이자 ‘네 년은 뭐냐’ 면서 곤봉으로 후려갈겼고 안내양은 차 아래로 실신하여 굴러 떨어졌다.” (50쪽)
“공수대원들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눈은 술기운과 살기로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시민군에 잡힌 몇 명의 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출동하기 전에 독한 술에다 환각제를 타서 마신 상태였으며, 수통에는 빼갈을 담고 있었다.” (50쪽)
“여자라도 몇 명이 붙들려오면 여럿이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북북 찢어발기고는 아랫배나 유방을 구둣발로 차고 짓뭉개고 또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머리를 담벽에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짓찍었다. 손에 피가 묻으면 웃으면서 그 몸에다 슥 쓱 닦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육을 즐기다가 군용차량이 오면 걸레처럼 희생자들을 던져 버렸다. .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점명령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59쪽)
“수창초등학교 앞에서는 시위 군중 속에서 잡힌 청년을 발가벗기고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아놓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서 공수대원 여럿이서 곤봉으로 난타질 했다. 처음에는 비명이 들리더니 피곤죽이 되어 버린 청년은 출 늘어져 버렸다.(60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여 미터나 나가는 불길을 뿜어댔으며,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불에 타 죽었다.”(81쪽)
광주시를 뒤덮은 당시의 유언비어
위 ‘넘어넘어’의 표현과 당시 광주시에 범람했던 유언비어들은 맥을 같이 합니다. 아래 유언비어 내용들은 말 그대로 유언비어로 처음부터 남남갈등을 조장하고, 계엄군과 광주시민을 이간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구성한 표현들입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공수대원이 이화여대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3명의 팬티와 브라자까지 모두 찢어내고 구두 발로 엉덩이를 찬 후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공수대원이 광주 수창초등학교 앞 전봇대에 산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5월 18일에 40명의 시위학생이 죽어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공수대원들이 젊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개 몇 마리 잡았느냐고 농담을 한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려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가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북한의 모략 내용
북한 월간지 ‘조선여성’(1990년 3월호)에 있는 글입니다.
“항쟁용사들에게 돌과 기와장을 날라다주었다고 하여 어린 고등학교 녀학생을 칼탕쳐죽이고 빵과 물을 보장해주었다고 하여 할머니를 군견을 풀어놓아 물어뜯게 하고 부상자들에게 피를 뽑아주었다고 하여 폭도를 도와준 너도 폭도라고 하면서 불태워 죽이고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여 두 눈 알을 뽑고 심장까지 도려내어 죽이는 잔인한 학살참극이 전두환, 로태우 괴뢰도당에 의하여 가는 곳마다에서 헤아릴 수 없이 벌어졌다.” (40쪽 좌하단)
“심지어 파쑈살인마들은 환각제를 먹인 공수특전대놈들을 봉기진압에 내몰면서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젊은이들은 모조리 죽이라.>는 살인명령을 내리였으며 신경가스탄을 비롯한 유독성화학무기까지 사용하여 봉기군중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다 못해 녀학생들의 유방을 도려내여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꺼내여 참살하는 등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광주의 거리거리에는 항쟁용사들의 붉은 피가 랑자하였다.”
“여기에 한 해외동포가 친척집을 방문하기 위하여 광주에 갔다가 인간백정들의 피비린 살육만행을 목격하고 쓴 수기의 일부가 있다. <<...참으로 무섭고 끔찍한 살인 행위였다. 여자대학생으로 짐작되는 세명의 처녀들이 공수병에 의하여 옷을 벗기우고 있었다. 속옷까지 모조리 찢어낸 다음 험악하게 생긴 공수병이 처녀들의 앞가슴을 걷어차면서 성난 늑대처럼 내몰았다. 처녀들은 하나와 같이 가슴을 감싸고 길바닥에 꺼꾸러졌다. 순간 처녀들의 등에는 대검이 똑같이 박아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었다. 역전광장 앞에서도 조선대학교의 6명의 대학생들과 3명의 녀공들을 창고에 가두고 발가벗겨 희롱하다가 나중에는 광장에 끌어 내여 분수대에 매달고 유방을 도려내어 전선대에 묶어높고 칼로 가슴과 배를 찌르던 나머지 사지를 찢어죽이였다.”
“두명의 공수병이 만삭이 가까운 임신부를 끌어다놓고 <야, 이년아, 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 뭐냐?>하고 묻자 임신부는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한 공수병이 <머슴애는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 전두환총장의 분부다.>하고 소리치면서 <새끼주머니에 든것이 머슴인가 계집앤가,>고 다그쳐물었다. 이때 옆에 있던 다른 공수병이 <내가 알려주지,>라고 하면서 녀인이 반항할 짬도 없이 옷을 나꿔채자 원피스가 쭉 찢어지고 속살이 드러났다. 후비면서 찔렀는지 금방 창자가 튀여나왔다. 그들은 다시 그 녀인의 아랫배를 가르더니 태아를 끄집어내여 아직도 할딱거리며 마지막으로 숨져가는 녀인에게 던졌다.”( 39쪽 3단 중하단)
북한에서 발간된 책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악귀 같은 교형리(주:괴로군)들은 녀학생들을 그들의 부모가 보는 가운데 발가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낸 다음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죽였다. 무차별 하갈의 잔학성은 어린이나 늙은이, 임산부들에 대한 만행에서 더욱 몸서리치게 드러났는데 놈들은 광주천 기슭에 쓰러진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우는 4살짜리 어린이에게도 달려들어 ‘폭도의 종자를 멸종시키라’고 하면서 총검으로 참살하고 살인만행에 항거하였다 하여 70대의 할아버지도 하수구에 밀어넣어 죽였고,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창자가 튀어나온 배에서 태아를 꺼내 던지는 귀축같은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590쪽 하4줄-591쪽 3줄)
“광주시의 도청 지하실 한 곳에만도 얼굴을 알 수 없도록 화염방사기에 그슬리고 찢긴 475구의 시체가 쌓여져 있은 사실만 놓고 보아도 놈들의 살육만행이 . ”( 591쪽 14-16줄)
위 황석영의 표현들은 그 책에 들어 있는 “짖어진 깃폭”내용을 제외하더라도 북한의 모략내용들과 맥과 분위기와 표현수법을 같이 합니다. 이들은 주로 5월 19일의 상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증5의 검찰수사결과보고서 내용과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검찰보고서가 말하는 5월 19일 상황입니다.
31사단장 정웅은 이날 새벽 광주역에 도착한 11공수 3개 대대를 즉각 시내로 출동시켰다. 오전 8시, 전라남도 지사가 시민들에게 냉정을 찾자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전남 교육위원회는 모든 고등학교에 귀가령을 내리고 5월20일부터 휴교한다는 휴교명령을 내렸지만 사태는 극렬 쪽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 낫, 곡괭이, 도끼, 휘발유통 등 폭력의 무기도 다양해졌지만 경유를 길에 붓고 불을 지른다거나 차량과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의 행태에도 온갖 지혜가 다양하게 동원되었다. 5월 19일부터의 광주시위는 그냥 시위가 아니라 폭력의 전시장 같았다. 3-4명, 7-8명 단위로 쪼개진 공수대원들은 수백-수천 명에 둘러 싸여 매타작을 당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혈투를 벌였다. 이날부터 공수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전세는 완전히 시위대에 의해 압도됐다.
유언비어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고, 시위대는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선동했다. 계엄군이 포위되어 매타작을 당해 빈사상태에 이르고,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 무기들이 피탈됐다. 다급한 상황에 몰리게 된 계엄군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도 없이 단지 살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했고, 발포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모란봉의 꽃으로 불인 전옥주라는 여인 등 몇 명의 여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시내를 누비고 다니면서 애끓는 목소리로 시민들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방송을 했다. 이날의 유언비어는 전날보다 더 다양하고 자극적이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들에 현혹된 시민들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소규모 단위로 쪼개져서 수많은 길목들을 가로 막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위대와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고 인격적 모독을 해도 눈망울 하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들을 던지면 이리저리 피하기에 바빴고, 피를 본 병사들은 이성을 잃고 돌을 던진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타격하는 등 광주시위는 군복을 입은 젊은이와 민간복을 입은 젊은이들 사이의 무자비한 폭력 싸움으로 변질됐다.
2014.9.2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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