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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묵상글 ( 연중 제4주일. - 주님의 영적 권위에 승복하는 영적인 우리. 등 )
*** 09:59,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공유. 10:40, 키엣 대주교님 묵상글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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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영적 권위에 승복하는 영적인 우리
# 2024.01.28. 04:58. 매체에 제목만 올라오고 내용은 아직 올라오지
아니하는 오류?가 계속되는 상태임 (05:15)
-- 아래 글은 작은형제회 홈페이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옮겨옴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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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은형제회 김찬선 신부인데 오늘 첫 미사를 봉헌하는 새 사제의 수련장이었던 인연으로 오늘 첫 미사 강론을 기쁘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우리 비오 사제를 저희 수도회에 보내주시고,
지금까지 기도해주시고 사제가 되기까지 온갖 도움을 주시고,
첫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신 본당 신부님과 모든 신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첫 미사 강론을 준비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주님을 등에 태웠던 어린 나귀입니다.
주님께서는 입성 준비를 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저는 비오 사제가 바로 이 어린 나귀처럼 끌려온 것 같습니다.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비오 사제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주님을 등에 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는 아무도 그리고 한 번도 태운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아직 나약하고 허약하여 자기 한 몸 제대로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왜 굳이 경험도 없고 힘도 없는 어린 나귀를 택하셨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수난의 현장으로 들어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의 임금이 되시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면 준마를 택하셨겠지만 죽으러 가시는 데는 준마가 어울리지 않고 어린 나귀가 제격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 준마였다면 입성 때 사람들이 주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찬양할 때 말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환호하는 줄 알고 날뛰거나
착각이 아니라면 주님을 등에 업고 날뛰었을 겁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제가 주님을 등에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등에 업고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날뛰고 주님께 가야 할 환호를 자기가 가로채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의 주님도 주님의 사람 예언자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새 사제가 이럴까 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새 사제는 진정 주님의 어린 나귀입니다.
덩치는 커도 어린 나귀처럼 약하고 이리 떼 가운데로 가는 양처럼 양순합니다.
새 사제가 수련받을 때 안동댐서부터 부산까지 낙동강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 4대강 개발이 한창일 때라 생태 교육 차원과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힘든 길을 함께 가는 교육과 체험 차원에서 걸었지요. 가깝고 쉬운 길은 혼자 갈 수 있고 혼자 가는 것이 편하지만 멀고 힘든 길은 혼자선 엄두도 못 내고 엄두를 내더라도 중간에 포기하기 쉽기에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는 힘든 길은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런 교육 차원이었지요.
그런데 7월 말 8월 초 한여름에 낙동강을 걸으려고 하니 수련자들 가운데 홀쭉이와 뚱뚱이 두 형제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먹고는 배낭에다가 10kg 정도 되는 책을 넣고는 묵주 기도를 하며 한 시간 정도 운동장을 돌았는데 덕분에 저도 같이 돌았습니다.
새 사제는 사제가 되고도 이럴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신이 약할 때 강해지는 사제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르도록 더없이 기쁘게 약점을 자랑하는 사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오늘 주님처럼 힘과 권위를 지니게 되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율법 학자들과 다른 권위라고 하면 어떤 권위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권위가 아니라 사랑의 권위이고, 법으로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권위이며, 무엇보다도 악령이나 더러운 영까지 말씀 한마디로 제압하는 성령의 권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주님께서는 세례 때 성령을 받으셨고,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 악령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마침내는 악령을 이겨내셨지요.
그때 주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고픈 유혹이나 세상의 임금이 되고픈 고작 그런 하찮은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식욕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은 우리가 당하는 유혹이고, 주님께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고픈 것이 유혹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사탄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리 해봐라 저리 해봐라 했던 거지요.
그 사탄이 오늘도 주님에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당신 정체를 폭로할 테니 자기를 괴롭히지 말고 물러가라는 협박을 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자가 악마가 아니라 잘 알면서도 무슨 상관이 있냐며 관계를 거부하는 자가 악마이고, 구원하러 오신 분을 괴롭히기 위해 오셨다고 믿는 자가 악마입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제압하시는데 이것이 진정한 권위이고 영적인 권위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성령과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신데
이런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오늘 우리의 관건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오늘 신명기의 말씀처럼 듣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악령처럼 알기만 하고 관계나 추종은 거부하는 자가 될 것인가?
우리가 악령처럼 주님 말씀을 듣고도 추종하지 않는다면 이런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여러분 가정안에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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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이 더러운 영은 악령, 악마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더러운 영은 어디에서 오는지 어떻게 이를 바라보고 극복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영은 자체가 순수하고 깨끗한 것인데 단지 더러워지고 악해졌기에 원래 상태로 되돌려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성인과 악마 그리고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인간성을 더럽히는 것 같은 부정적인 측면과 우리를 하느님과 닮게하고 하느님을 더 갈망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찾아낼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성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유혹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무질서한 반응들입니다. 유혹의 진짜 근본원인은 우리의 내적 혼란입니다. 유혹은 우리의 욕망과 의지가 갈등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유혹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유혹이 늘 우리의 느낌들을 짓누를 지라도 유혹보다는 하느님께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직접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유혹을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의 사악한 성향들에서 기인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탄 또는 악마라고 부르는 악령의 직접적 활동에서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마에게 우리를 유혹하도록 어느 정도 허락하십니다.
신앙의 성숙은 유혹을 통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피할 수 없는 유혹이라면 하느님께 매달려 하느님이 원하시는 한 기꺼이 그것을 겪으면서 평화로이 견뎌내야 합니다. 유혹에 맞서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보다 약한 곳들을 알아내어 그것들을 강하게 만듦으로써 균형 잘 잡힌 영적 상태에 도달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어느 공동체가 만사형통한다고 모두가 선량하다고 말다툼고 없고 대립도 전혀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악마를 하나 사러 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영혼을 악하게 만드는 분노, 질투심, 사악한 의심, 불경스런 생각, 사악한 비방 이 마음안에 자립잡는 상태를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이런 때 일수록 그리스도를 옷 입어 이웃에게 사랑과 친절로 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하고 하느님 앞에서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또한 더러운 영이 마음안에 자리하면 마음에 변덕이 많고 신앙생활이 불완전하게 됩니다. 이는 통회의 정신이 결여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통회는 죄를 미워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안에 영혼을 확립하게 하여 줍니다다. 영혼이 자기의 내면의 죄악에서 완전히 정화 되었을 때에 비로소 성령은 그 속에서 자유로이 역사하십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영이 우리 안에 자리잡도록 합시다.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난 한가지 행동이 다른 일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하느님께 더 많은 영광을 드리고 교회에 더 많이 봉사한다’는 십자가의 성요한의 말을 상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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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성체 속에 나타난 지극히 성스러운 얼굴
뤼뇽군도(인도양 -1902년)
인도양에 있는 뤼뇽군도의 성 안드레아스 성당의 라콤 신부는 1904년 6월 프랑스를 방문하였을 때, 신부들과 평신도들에게 자신의 면전에서 일어난 성체의’ 기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1902년 1월 26일, 칠순주일(七句主日)이 성 안드레아스 성당에서는 항구한 예수공경축일 이었다. 라콤 신부는 아침 8시에 그 곳에 참석한 많은 교형자매들을 위해 현시된 성체 앞에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봉헌을 할 때에 그 신부는 이러한 현현을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내내 볼 수 있었다.
미사를 끝내고 그는 제의실로 돌아와서 자신이 환각을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광을 잘 살펴보도록 지시를 내려, 좀 나이가 든 복사들을 제대로 보냈다. 이들은 곧 제의실로 돌아와서 성스러운 성체에서 한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뒤늦게 들어온 한 복사 청년도 마찬가지로 이 사실을 맹세하였다. 얼마 후 몇 명의 수도원 수녀들이 성체께 조배드리기 위해 들어왔을 때 그들마저도 신부님에게 그들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을 좀 보라고 하였다.
곧바로 이 진기한 기적의 소식은 사방으로 널리 퍼지게 되어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성당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들 주 예수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지만 예수님의 현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순진무구한 어린이들과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처음에 성체의 기적을 목격할 수 있도록 우대를 받았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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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우리는 연중 4 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예언자가 오실 것을 예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예언자”(요한 1,21), 곧 메시아를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갈림이 없이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히신 뒤에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고,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후,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행한신 첫 번째 행적인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을 들려줍니다. 곧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다음, 그 “하늘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악마의 추방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혀로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말씀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인간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혀로 하와를 속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며,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에덴으로의 회복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 ‘첫 번째 행적’은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사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르치는 이라 하여 누구나 다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단어는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죽이거나 제거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언제든지 또 다시 침범하고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전한 문제 해결을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물러가게 할 뿐입니다. 마귀는 또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이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당신의 권능에 의탁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늘 당신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과의 관계맺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악령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있기보다, 그분과 친교와 유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빛이신 당신의 권능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영은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내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늘 빛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우리 주님의 빛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른 한편, 마르코복음에서는 ‘선포하다’와 ‘가르치다’라는 용어가 구분되어 사용되는데,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는 예수님은 물론, 세례자 요한과 제자들이고, 나아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까지도 될 수 있는데 반해, 가르치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만 유보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 자신을 점검해 봅니다.
‘나는 선포하는 사람인가? 가르치는 사람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사오니,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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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권위는 언행일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 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권위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형 ‘엑수시아’(exousia)는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 곧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일으키는 살아있는 힘입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성장시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신 권위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라고 주신 것이지 망가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2코린 10,8).하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마귀를 몰아내셨습니다. 이렇듯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가르침과 행동의 일치입니다. 언행일치의 가르침과 삶,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권위, 악한 영을 복종시킬 수 있는 하느님에게서 나온 권위였습니다. 이 권위를 교회, 오늘 우리에게도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령에게 ‘조용히 하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의 이름으로 호령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존경에서 따라오는 권위보다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리누르려 합니다. 나, 누군데... 의원인데... 용산에 있는데..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권력을 가지고 콧대를 세우려 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가식적으로 드러난 ‘권위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마음 안에서 나오는 권위를 지녀야지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악령에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악령 들린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들이 금배지를 답니다. 왜 금배지를 답니까? 그만큼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민을 위한 대변자로 그들을 뽑아놓았더니 자기 잇속 챙기는 것에는, 발 빠르고 힘든 국민은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금배지 달 자격이 없습니다. 밥그릇 싸움에 민생은 항상 뒷전입니다. 여야가 다투다가도 자기 세비를 올리는 데에는 아무 이견 없이, 소리소문없이 올립니다.
경찰이나 소방대 고위직의 모자를 보면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금테를 두르는 것은 그처럼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수위실의 수위도 금테를 두르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충실히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금테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금테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봉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올바른 권위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희생, 봉사, 섬김, 말하는 바와 행동의 일치를 통해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가정에는 가장의 권위, 부모의 권위가, 학교는 선생님의 권위, 병원에는 의료진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하고,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성직자는 성직자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위를 지키기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심이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행동, 이런 말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지도층인 율법 학자들은 배운 것도 많고 권력, 재력을 다 갖췄지만 속은 비어있고 겉모양을 중시하여 율법의 의미를 까다롭게 따지는데 급급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마태23,3이하). 그들의 말은 죽어 있고 공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더러운 영이 알아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일종의 아부 혹은 타협의 제안입니다. ‘당신이 고수라는 것을 인정하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예수님은 타협을 단호하게 거부 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더러운 놈은 떠나갈 때에도 발악을 하며 떠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인정하면서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하며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더러운 영의 특징입니다(손희송주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소에 하느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15,6).는 말씀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잘린 가지처럼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따로국밥” 신앙인입니다. 국 따로, 밥 따로이듯, ‘신앙 따로, 생활 따로’여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멸망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더러운 영을 멸망시키는 것이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파멸시키는 악을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함으로써 그를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죄악의 올가미에서 풀어주러 오셨습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할 때 ‘이 말씀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망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받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분명 손해를 봐야 하고, 바보가 되어야 하며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길 원하고 나에게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실천한다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하고 모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하고 물으셨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말씀, 희생이나 고통을 감당해야 할 말씀을 들었을 때 순명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우리를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고 치유해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유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도록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10,10)고 선언하셨습니다.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를 살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권위 있는 말씀을 실행하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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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다니기 위해서 물속에 있는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은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뒤에서 수고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도록 수고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1년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서울을 신청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쟁 국가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개최 도시는 나고야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1964년에 동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미 개최하기로 했던 아시안 게임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면에서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이 강했고, 우리의 힘은 약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올림픽 유치 위원회의 위원장인 고 정주영 회장은 유치단을 이끌고 독일 바덴바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88 올림픽 개최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던 손기정 선생님도, 당시 독일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차범근 선수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함께 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 유치단은 올림픽 위원들을 만났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선진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지금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곧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의 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을 도와주십시오.” 선진국의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이 개발도상국입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 유치를 하면 이제 곧 여러분의 나라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발도상국이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올림픽 위원들에게 일본의 기술의 상징이었던 ‘소니’ 시계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올림픽 위원들의 방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당시 바덴바덴에 있는 꽃집의 꽃들을 대부분 사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은 ‘시계’로 대한민국은 ‘꽃’으로 올림픽 위원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1981년 올림픽 위원회 사마린치 위원장은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88 서울 올림픽’은 이렇게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 위에서 개최될 수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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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말’은 그 자체로 창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누가 저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믿으면 ‘사랑’이라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칭찬은 치유와 용서를 만들어 내고, 비난은 상처와 분노를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말은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것도 말이고, 서로 아파하고 서로에 대한 비난 하는 것도 말입니다.
우리들이 아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생겨나라! 하니 그대로 되었다.’라고 하는 창세기의 내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곧 주님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한 그 힘이 오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을 전해주고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을 해 주십니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악을 쫓아내는 것이 바로 주님이 사용하신 말이고, 동시에 예수님 자체입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제가 써 내려가는 이 묵상글이 여러분에게 희망을, 행복을, 위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말을 생명으로, 희망으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님처럼 우리가 하는 말이 사랑을 주고 위안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악을 멀리하는 힘이 되어주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기도가 언제나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권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숨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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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샤워기
처음 사용할 때는 뚫린 물줄기들이
직선으로 쭉쭉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사용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구멍 한두 군데가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직선으로 떨어져야 하는 물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이상한 방향으로 물을 뿜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습니다.
사고가 난 것이 분명합니다.
어디가 막히거나 틀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모습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래로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오던 내 마음이
어느 순간 이리저리 삐져나갑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물을 뿜어냅니다.
뭔가 달라졌습니다.
뭔가 이상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막히거나 틀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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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 것 같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누구는 너무나 먹음직스럽다고 말하지만, 달다고 생각되면 머리부터 아파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께서 너무 맛있다면서 한 입만 먹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것을 싫어하는 제게는 한 입 먹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맛있는 것에 어떻게 손도 대지 않는다면서, 혹시 자기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음식에 대한 선호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보니, 초콜릿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고, 계란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커피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이 커피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 선호도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지금 아파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이 써서 싫다는 아이를 존중해서 약을 주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음식의 선호도가 다른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필요하다면 선호도의 차이가 있어도 억지로 먹게 합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사랑의 선호도도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맛없어 보이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더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랑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것처럼,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최고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악을 없애고,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기 힘들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마귀와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은 항상 그럴싸합니다.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런 사랑의 선호도를 갖춰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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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상처는 물에 닿으면 아팠던 게 더 아파지거든요. 그래서 비가 오면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더 아픈거래요(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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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내 영혼 안의 더러운 영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교회라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악의 영을 쫒아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병은 죄에 기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병자의 몸에는 악마가 있기 때문에 오직 주술적인 방법만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빙의되어 있는 악의 영을 물리침으로서 그들을 악의 영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란 외형적인 용서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적 반성과 변화가 있을 때만이 진정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은 사람이 다시 사회에 통합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설교를 떠날 때 하느님의 영도 함께 하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의 약자 안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악마의 형체를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인간의 힘만으로는 더러운 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악이 있습니다.
‘빈곤이라는 악’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인간의 존엄성을 망쳐버리기도 합니다. 또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하는 ‘잔인함’, 인간의 육체를 괴롭히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병마’ 등 이세상에는 너무 많은 악이 존재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른 모습의 악마가 있습니다.
때로는 지적이며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존재합니다. 명예와 돈, 쾌락을 약속하며 유해한 음식과 마약 등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불화와 증오, 질투를 유발시겨 인간세상이 스스로 좌초되도록 하며 오만과 이기심의 길로 유인하기도 합니다. 타인을 경계하고 무시하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한적인 이기심으로 죄를 경시하고 죄의식을 망각시키기도 합니다.
악의 영을 물리치고 사회의 악을 없애는데 동참하여야 합니다. 물질과 쾌락, 아름다움의 뒷편에 숨겨진 추악한 악을 조심해야 합니다. 탐욕과 자만, 위선, 이기심 등으로 인해 불화를 일으키는 더러운 영을 쫓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만이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금식과 기도를 통해 주님의 힘을 얻고 나의 뜻과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겸손함을 가지십시오. 그래야만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의 영을 물리치고 이웃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모든 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악마의 존재를 믿습니까? 믿고 있다면 어떠한 유혹을 받고 있습니까?
2. 처음에는 좋았던 일이 나중에는 나쁜 길로 들어가는 유혹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3. 나의 영혼안에 있는 더러운 영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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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삶을 삽시다
-“찾으라, 들어라, 섬겨라”-
어제 한낮은 겨울 한복판인데도 봄빛 완연한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날이었습니다. 수도원 하늘길을 사진에 담아 다음 “봄길”이란 시와 더불어 많은 지인들과 나눴고 행복했습니다.
“한겨울
봄꿈을 꾸고 나니
봄길이
열렸어요
봄향기 맡으며
봄님과 함께
봄빛받으며
봄길을 걷습니다”-2024.1.27.
봄님이 상징하는 바 바로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온전하고 건강한 삶으로 이끄시는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이어 지인들의 반갑고 따뜻한 답글도 마음을 환히 밝혔습니다. 몇편을 나눕니다.
“신부님 시는 항상 따스하게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저의 큰 아이도 항상 이때쯤 봄냄새가 난다는 말을 해요. 사진에서도 분명 겨울인데 봄기운이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에게도 점점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향기가 풍겨나오기 시작하면 좋겠어요.”
“와아 벌써 봄빛이 느껴지네요. 아무리 어려워도 얼어붙은 겨울은 가고 따뜻한 봄기운이 돌아오네요.”
“선생님!! 시를 읽으니 벌써 봄이 온듯합니다.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하늘길도 봄준비에 들어간 것 같네요. 평화로워보이는 수도원 풍경 감사합니다!!”
“아, 너무 감동이네요. 지금 막 상담마치면서 다음 상담까지 잠시 힐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시는 희망을 갖게 하네요. 따뜻함이 있어 치유가 되고 평화가 오네요. 신부님의 연인이자 절친이신 예수님과 언제나처럼 함께 하시네요.”
모두가 봄님 예수님을 찾고 기다리는 마음임을 느낍니다. 어제 카톨릭 신문의 “너무나 자비로운 하느님” 칼럼에서 교황님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만났습니다. 그 감동을 잊지 못해 그 기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지옥이 텅 비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월14일, 이탈리아에서 주일마다 방영되는 채널9TV 토크쇼 ‘케 템포 케파(Che Tempo Che Fa;날씨는 어떤가요)’에서 한 말이다. 교황의 이말에 스튜디오는 환호로 가득 찼고, 340만명에 달하는 시청자들 역시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혔다.-
얼마나 멋진 말씀에 장면인지 저도 감동했습니다. 바로 우리 하느님은,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주님은 텅 빈 지옥을 바라십니다. 오늘은 주일이면서 해외 원조 주일이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이기도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이면 생각나는 예화가 있습니다. 동료수사가 경당에서 십자가의 주님과 성인이 나눈 대화를 듣고 전한 것입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 참 말 잘했다. 무슨 상급이 좋겠니?”
“주님! 당신아닌 어떤 것도 원치 않습니다(Nothing but yourself, Lord!)”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다는 고백입니다. 이보다 더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은, 온전하고 건강한,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에게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요즘 희망이자 길이자 빛이신 주님을 잃고 방황하는 병든 이들이 참 많습니다.
거칠고 험한 생존경쟁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 각자도생의 광야여정을 살아갈 때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 되지만 잘못 세상 것들에 유혹, 중독되어 잘못 미치면 괴물도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상징하는 바, 잘못 미친 괴물이나 폐인입니다. 참으로 온전하고 건강한 전인적 삶을 위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요 그 구체적 처방을 나눕니다.
첫째, “찾아라!”
생명과 빛인, 희망이자 길이신 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찾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본능적으로 주님을 찾았으며 어둠의 더러운 영도 빛이신 주님 앞에 도저히 숨을수 없자 뛰쳐나와 자수하여 광명을 찾아 주님을 고백하지만 주님은 일언지하에 그를 쫓아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은 다음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 말씀을 통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 바람과 호수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화도 생각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사람들의 이구동성의 반응을 통해 더러운 영들의 퇴치에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그러니 주님을 찾아 만날 때,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우리 내면에 잠재해 있는 더러운 영들은 달아나고 주변의 더러운 영들 역시 감히 우리에게 범접하지 못합니다. 유비무환, 늘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함께 살 때 비로소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잘못미쳐, 더러운 영에 들려 괴물이나 폐인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둘째, “들어라!”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침묵중에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경청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영혼도 주님의 말씀을 만나야 살아납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권위있는 가르침의 말씀에 몹시 놀랐다 합니다. 제1독서 신명기는 시공을 초월한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늘 귀기울여 듣고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셋째, “섬겨라!”
혼자 살던, 부부가 함께 살던 상관없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독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일을 걱정하며 주님만을 기쁘게 하고 주님만을 섬기며 갈림없는 마음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라고 하지만, 누구든 참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부부공동체나 수도공동체도 품위를 유지하며 충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독신만이 아니라 부부 성인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1인 가구 형제자매들은 세상 안에서 교회공동체에 속한 주님의 은수자로 살고 2인 부부와 자녀들의 공동체라면 남편은 원장, 아내는 부원장, 나머지 자녀들은 수도형제들처럼 살아가면 얼마나 멋진 가정 수도공동체 같겠는지요. 혼자든 함께든 마음 갈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듯 서로 섬기며 주님 중심의 품위 있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한 서로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는,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참으로 성숙된 거룩한 무관심의 사랑이 긴요합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서로 배려하고 섬기고 존중하며 품위 있게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7,35).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더러운 영이 들린 폐인이나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세 말마디를 명심하며 한결같이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1.찾으라!
2.들어라!
3.섬겨라!
형제들과 함께 주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주님 중심의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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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연중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더러운 영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을
교묘하게 유혹했답니다
당신은 거룩하시니
더러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거룩하신 당신께서
더러운 우리와 상관하시면
당신도 더러워지는 거잖아요
당신은 거룩한 길을 가시고
우리는 더러운 길을 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께서
더러운 영을
거침없이 꾸짖었답니다
엄연히 있는 더러움에
무관심한 거룩함은
헛것이요
은밀하고 교묘한 더러움과
공존하는 거룩함은
거짓이요
기세등등한 더러움을
피해가는 거룩함은
비겁이니
더러운 영아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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