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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병기 (黃秉冀. 1936~2018) ]
미궁(迷宮)에서 광화문까지... 가야금 타던 세계인 황병기
“죽으면, 잊혀지고 싶어"
“연주는 감정을 배제해야"
“새로움 없으면, 전통은 골동품 돼"
생전에 백남준 장한나 등과 지역과 나이를 초월해 교류
서울 출생으로 사업을 하던 아버지 황태문과 긍정적인 어머니 이영애 사이에서 누나와 16살 터울을 두고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음악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노래를 잘 해 초등학교 때 KBS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6.1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경기중학교에 다니면서 친구의 권유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윤, 김윤덕을 사사했다.
국악과가 없던 시절, 명료한 법 체계가 좋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대학 시절에도 국립국악원에서 궁중 음악인 정악에서부터 민속음악에 해당하는 산조에 이르기까지 익혀서 폭을 넓혔다.
정악과 속악을 엄격하게 구분하던 당시 풍토에서 그는 서로 다른 이 두 장르를 정식으로 배운 최초의 국악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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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7년 KBC주최 전국 국악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
그는 195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국립국악원에서 국악연구와 가야금, 작곡공부를 하면서, 작곡가 현제명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신설된 국악과의 강사가 되었다.
이해 그는 서양음악 오케스트라인 한국교향악단(현 KBS 교향악단)과 국악기인 가야금을 협연했는데,
이를 통해 서양음악에도 매료된 그는 클래식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서양음악을 경험하면서 국악과의 조화를 꾀했다.
2006년 백남준 선생이 별세했을 때, 황병기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고인과의 추억담을 들었다.
“삼십 대 때 뉴욕에서 만났는데 나더러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곡을 연주해보라더군.
가야금 산조를 20분간 들려줬더니,
“황 선생! 그보다 더 지루한 음악은 없소?” 그러더구먼.
넝마주이처럼 고물을 싸 들고 다니던 양반이었어.
음악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갔던, 그런 천재가 없었지.”
1968년 뉴욕 타운홀에서 백남준·샬럿 무어만과 함께한 ‘재판 기금 모금 퍼포먼스’에서 그들은 함께 공연했다.
그의 예술 세계를 추억해 줄 동시대인의 거인이 누구일까 생각에 잠겼다.
백남준이 뉴욕에 살며 우주를 사유하는 한국인이었다면, 황병기는 한국에 살던 세계인이었다.
벨기에의 한 음반 가게에서 3가지 다른 유럽 언어로 된 황병기의 가야금 앨범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근사하게 낡은 가야금이 거실 곳곳에 널린 북아현동 언덕 집에서 황병기는 40년 넘게 살았다.
그의 명성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본질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음악가로서 황병기 명성의 좌표는 뉴욕이나 파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서울 북아현동 1-316번지에서부터 시작됐고 끝났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활약했던 세계인.
황병기 선생은 ‘한국적’이라는 것을 개가 짖고 새가 나는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고인의 대표작으로는 신라음악을 되살린 '침향무',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유리그릇에서 영감을 얻은 '비단길' '춘설' '밤의 소리' 등이 있다.
SBS 드라마 '여인천하'(2001)에서 사용된 가야금 독주곡 '정난정'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대표곡 '미궁(迷宮)'은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낸다.
가야금을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두드리듯 연주하며, 사람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홍신자)를 표현하는가 하면, 절규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삽입되기도 했다.
1975년 명동극장에서의 홍신자와 초연 당시, 한 여성 관객이 무섭다며 소리 지르고 공연장 밖으로 뛰어나갔고,
한동안 금지곡이 되었다가,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화이트데이'에 삽입되어 대중에게 알려졌다.
한국에 살며 우주의 소리를 꿈꾸던 세계인, 황병기 선생이 2018년 8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36세이던 196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가야금곡 ‘숲'을 발표했다
철가루로 그린 산수화처럼, 황병기 선생의 ‘미궁’은 가야금으로 전통적인 산조가 아닌 현대적인 아노미 음악을 표현했기에 시대를 초월하는 명곡이 됐다.
1936년 서울의 북촌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의 황병기]
중학교 3학년 때인 1951년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명인 김영윤, 김윤덕, 심상건을 사사했다.
1957년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해 음악계 주목을 받았다.
[1957년 kbs 전국 국악 콩쿨 1등의 황병기 선생(아래 왼쪽)과 스승 김윤덕 선생(중앙)]
[1958년 서울법대 재학시절 마로니에 광장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황병기 선생]
1968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기 시작, 1974년에 부교수가 되어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의 길로 들어섰고, 2001년 정년 퇴임까지 이 대학 한국음악과에 재직했다.
1975년에는 가야금의 주법을 혁신적으로 변형한 대표작 <미궁>을 발표하여 다시 한 번 음악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음악관련 기관과 단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문화재전문위원, 작곡가협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아르코(ARKO) 한국창작음악제 추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85~1986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로 국악의 세계를 강의했으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1999년 대장암에 걸렸을 때에는 입원했던 서울대학병원 시계탑의 아름다움을 그린 <시계탑>이라는 곡을 작곡했고, 완쾌가 되기 전에 독일로 연주 여행을 가기도 했다.
늘 시대와 호흡하면서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힘썼던 그는 80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2017년 가곡 <광화문>을 발표했다.
1974년부터 이화여대 음악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1986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2002년 은관문화훈장, 2003년 제10회 방일영국악상 대상을 받았다.
황병기 선생은 법대에 다니면서 법학적 사고방식과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사법고시를 치르는 대신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가야금 강사로 전향했다.
여기에는 현제명 당시 서울대 음대 초대 학장의 강사직 제안이 큰 역할을 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법 하는 사람은 길에 나가면 삼태기로 담아 낼 정도로 많으니, 네가 가야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보배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너는 가야금을 해라..."
법학은 그가 음악가로 성장할 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전에 선생과 깊이 교류하던 첼리스트 장한나(고인은 장한나를 46년 연하의 음악 친구라고 즐겨 표현했다)도, 고인의 영향을 받아 하버드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생전에 고인은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로서 의미있는 화두를 많이 던졌다.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굳어진 옛것만 즐긴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이지요.”
연주할 때는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코미디언이 자긴 웃으면 안 돼요. 자기는 웃는 감정을 빼고 해야 남이 웃어요. 그것처럼 연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감정에 휘말리면 코미디언처럼 못하게 돼 있어요.”
실제로 유머 감각이 탁월했던 고인은 무표정하고 건조한 음색으로 강단에서 학생들을 배꼽 빠지게 만들곤 했다.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는 늘 “기억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나는 이제 죽겠죠. 그러면 그걸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유언에 제 무덤이나 비석이나 이런 걸 일절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한평생 엄정하고도 자유로운 음색으로 ‘현위의 인생'을 살았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다. 지난해 새 작품을 발표했다.
2001년 서정주의 시 ‘추천사’로 가곡을 발표한 후 16년 만이었다.
미당 서정주의 시 ‘광화문’(1959)에 곡을 붙인 동명의 음악이다.
‘북악과 삼각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
큰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
어느 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에 황병기는 남성 독창자, 가야금, 장구 편성의 음악을 입혔다.
앞을 보지만 더 멀리 다른 걸 바라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
황병기의 가야금 소리는 그렇게 구름 속의 뼈를 발라 내듯,
때론 천상의 완벽한 소리를 향해 하늘로 비행했고,
때론 인간의 불완전한 소리를 안고 땅으로 투항하듯 내려 앉았다.
신이 그의 가슴뼈에 12줄의 가닥을 숨겨 둔듯싶었다.
1962년 27세에 다섯 살 연상인 소설가 한말숙과 결혼해 55년을 해로했다.
서울대 언어학과에 다니던 한말숙이 국립국악원에서 고인과 함께 가야금을 배우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한말숙은 당시에 소설가로 이미 이름을 날릴 때였다.
그들은 살면서 서로의 예술 세계와 인격을 극도로 존중했다.
서정주와 그의 아내가 그랬듯, 고인도 어느 자리에서나 아내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그는 2017년 12월 뇌졸중이 발병한 후 2018년 1월 31일 폐렴 합병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가장 애독하는 책으로 <논어>를 꼽았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첫 문장을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고 밝혔다.
그는 평소 죽은 뒤에, 굳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필요가 없으니 무덤이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1959-63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1965 미국 워싱턴주립대 강사
1968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973-95 문화재전문위원
1974-01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교수
1986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1990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 참가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단장
1990 서울 90송년통일음악회 집행위원회 위원장
1994 국악의해 조직위원회 위원장
1995-99 문화재위원
1999-현재 유니세프 문화예술인클럽 회장
2000-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2010년 부회장)
2003-09 연세대학교 특별초빙교수
2004-05 국악축전 조직위원회 위원장
2005 광복60주년기념문화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6-2011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 선생과 함께... 백남준 선생의 누나가 가야금을 배우는 것을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된다. 1968년 미국 뉴욕에서 만난 후 백남준 선생의 연주회에 찬조출연하면서 교분을 쌓았다. 2006년 백남준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백남준 문화재단이 생겼고 황선생은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94년 10월 자택에서 바이얼린의 세계적 거장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1916-1999)'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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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 춘설(春雪)] "Spring Snow" by Hwang Byungki
1. 조용한 아침 /
2.평화롭게 /
3. 신비롭게 /
4. 익살스럽게 /
5. 신명나게
황병기는 서양음악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은 국악의 본질적인 요소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박자와 장단, 기동성과 농현, 화음과 유니슨, 소리와 소리의 간격, 머릿소리와 여음 등등, 서양음악과 국악의 머나먼 거리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점들이 어떤 정신적인 내용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깊이 성찰하고 있다.
이 성찰이 바로 그의 작곡에 고스란히 흘러들어가 있으며, 그래서 그의 곡들은 실험과 혁신이 가득하면서도 전통적이다.
쉽게 말해, 국악의 정신적인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혹은 우리나라의 정신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추구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음과 음의 관계, 연주기법 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서양 현대음악의 출발점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고심해본 음악애호가들은 황병기의 이런 성찰과 그 결과물이 놀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황병기가 작곡한 곡들 중에서 시기적으로 뒤의 것들이다.
작곡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국악에서 황병기의 작곡은 사실 작곡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간다.
정악적 요소와 민속악적 요소의 배합, 아방가르드로서의 작품, 고대세계의 상상적 복원,
산조적 작곡, 화음과 반음계의 도입, 판소리 요소의 도입 등등,
그의 곡들은 언제나 실험적이면서도 언제나 전통적이다.
실험성의 측면에서는 <미궁>을 앞설 만한 곡이 없겠으나, 전통적 음악이면서도 전통적 기법을 넘어선 강도는 음반 «춘설»에 실린 곡들이 다른 음반의 곡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서양의 현대음악처럼 낯선 실험성의 음악이 아니라 지극히 전통적이다.
전통적이라면 뭔가 퀴퀴함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황병기의 곡과 연주는 격조가 있고 단아하다.
이를 두고 조슬린 클락(Jocelyn Clark)은 “황병기와 같은 이들의 창의적인 노력을 통해 전통음악은 아픈 과거의 연상을 지워버린다”고 평한다.
[황병기 - 숲]
1악장 - 녹음(綠陰)
2악장 - 뻐꾸기
3악장 - 비
4악장 - 달빛
[황병기 - 봄]
[황병기 - 침향무(2,3장) / 숲(뻐꾸기,비)]
황병기 - 침향무(2,3장) / 숲(뻐꾸기,비)
공연을 통해 일반 대중과 국악이 만나 우리음악을 즐겁게 즐기는 고품격 국악콘서트 "국악樂락"
출연자: 황병기, 락음국악단, 바이날로그, 최진숙, 안보람, 류영희, 안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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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의미 깊은 작품 *
[황병기 - 밤의 소리 (성재수간도 聲在樹間圖)]
1악장 - 신비롭게 03:42
2악장 - 흥겹게 02:06
3악장 - 격정적으로 02:15
4악장 - 애절하게 03:33
황병기 - 밤의 소리
안중식(1861~1919)의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에서 악상을 얻어 작곡했다.
성재수간도는 숲속에 사는 어느 남자가 달빛 아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사립문 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찾아오는 이는 없고 바람만 휘몰아치면서, 그의 머리칼과 나뭇잎이 몹시 나부끼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제1장 (신비롭게) 는 고요하게 시작된 선율에서 잔잔하게 속삭이는 가락으로 이어진 후, 급속한 템포로 열기를 띠었다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으면서 끝난다.
제2악장 (흥겹게) 는 사랑스러운 중중몰이 가락으로 되었다.
제3장 (격정적으로)는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기교적인 악장인데, 후반에서 4련음과 6련음의 연속은 전혀 새롭고도 난삽한 가야금의 기교를 요한다.
제4악장 (애절하게) 는 애절한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하는 진양조 풍의 가락으로 되었다.
황병기 "오동 천년, 탄금 60년"
그림은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이 사람은 숲 속에 있는 집에서 막 나왔다.
방에 불을 켜놓고 나온 주인공은 사립문 밖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바깥세상은 온통 숲이다.
달밤에 모든 나무들은 옆으로 누워 있었다.
사람의 머리카락도 한쪽으로 쏠려 있다.
거센 바람 때문이다.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첫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인지 문득 악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쓴 것이 ‘밤의 소리’다.
그림 속 남자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연이 아니면 그렇게 유심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워하는 이가 언제 오려나 하고 기다리다 사립문 밖 발소리를 듣고 놀라 뛰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고 바람결에 나뭇잎만 운다.
음악은 달밤에 누가 찾아올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로 시작한다.
마치 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가락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흥겹다. ‘왔다’는 착각이다.
셋째 부분은 바람만 휘몰아친다. 격동적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느리고 애절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서양음악은 대개 빠르게 시작했다가, 중간에 느린 부분을 거쳐 다시 빠른 부분으로 되돌아온다.
한국음악은 전통적으로 시작이 느리다.
빠르게 시작하면 유치한 음악으로 친다.
그리고 점점 빨라지는 게 보통인데 나는 이 곡에서 정반대되는 구성법을 썼다.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24> 안중식 '성재수간도'의 실루엣
방문에 비친 구양수(歐陽修)의 그림자를 통해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
젊은 동자의 뒷모습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아쉬움이 배가.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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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1007~1072)가 쓴 가을의 소리 - '추성부'란 글이 있었다.
[ 가을의 소리(秋聲賦 추성부) ]
- 구양수 歐陽修
歐陽子方夜讀書, 聞有聲自西南來者, 悚然而聽之, 曰 : "異哉!"
구양자방야독서, 문유성자서남래자, 송연이청지, 왈 : "이재!"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칫하여 이를 듣다가 말하길 "이상하구나!"
初淅瀝以蕭颯, 忽奔騰而澎湃 ;如波濤夜警, 風雨驟至.
초석역이소삽, 홀분등이팽배 여파도야경, 풍우취지.
처음엔 우수수 스산한 소리를 내더니
느닷없이 물결이 솟구쳐 이는 듯 하는 것이
마치 파도가 밤중에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다.
其觸於物也, 鏦鏦錚錚, 金鐵皆鳴 ; 又如赴敵之兵, 銜枚疾走,
不聞號令, 但聞人馬之行聲.
기촉어물야, 총총쟁쟁, 금철개명 ; 우여부적지병, 함매질주,
불문호령, 단문인마지행성.
물건이 부딪쳐 쟁쟁거리며 쇠붙이가 모두 우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을 향해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내달리는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予謂童子 : "此何聲也? 汝出視之.”
여위동자 : "차하성야? 여출시지."
童子曰 :"星月皎潔, 明河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
동자왈 :"성월교결, 명하재천, 사무인성, 성재수간."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네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달과 별이 환히 빛나고, 은하수는 하늘에 걸렸습니다.
사방에 사람 소리도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予曰 : "噫嘻悲哉! 此秋聲也, 胡爲而來哉?
여왈 : "희희비재! 차추성야, 호위이래재?
내가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로구나. 어이하여 왔는가?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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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성재수간(聲在樹間)이란 말을 뽑아서 단원과 심전 안중식이 그림을 그렸다.
이 '성재수간'의 앞에 가을 추(秋)가 생략돼 있는 셈이다.
안중식의 그림은 두가지 버젼이 있다.
하나는,,, 동자가 문밖을 살피는 뒷모습,
다른 하나는,,, 스케일을 넓혀 숲과 계곡 전체를 비추며 동자가 구양수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함축된,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작게 그린 성재수간도이다.
[성재수간도 - 안중식 / 동자가 문밖을 살피는 뒷모습]
"저 그림 나에게 팔 수 없습니까?"
1980년대 초, 한 방송국에서였다. 녹음기사의 방에서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는 그만 한 폭의 동양화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냥 가져가세요. 대신 대체할 화보를 하나 주시면 됩니다."
그 그림은 값비싼 원화가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황병기는 얼른 집에 있던 바닷가 풍경사진과 그림을 맞바꾼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다가 홀린 듯이 '밤의 소리'라는 곡을 쓴다.
음악의 씨앗이 된 그림 한 점
가야금 명인에게 영감을 준 문제의 그림은 심전 안중식의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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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서화협회'를 조직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심전(안중식 1861~1919)은 오원 장승업의 화풍을 이어받아 산수·인물·화조(꽃과 새)를 잘 그린 조선 후기의 화가다.
이슥한 밤. 숲 속의 집 뜰에 한 남자가 서 있다.
한복차림의 남자는 둥근 옆 얼굴선이 앳돼 보인다. 그는 지금 두 그루의 나무 너머 사립문 쪽을 살피고 있다.
바람이 세차다. 나뭇잎이 한쪽으로 쏠린다.
남자의 머리카락이며 옷자락도 바람에 나부낀다.
벽에는 '성재수간'이라는 글귀와 심전의 낙관이 열매처럼 붉다.
'성재수간도'는 대강 이런 그림이다.
황병기는 그림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림 속의 남자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연이 아니면 그렇게 유심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리워하는 이가 언제 오려나 하고 기다리다 사립문 밖 발자국 소리를 듣고 놀라 뛰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고 바람결에 나뭇잎만 운다."
얼굴 없는 그림자 실루엣의 힘
그림 속의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러브스토리가 매력적이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성재수간(聲在樹間)'이란 '소리는 나무 사이에 있다'는 뜻으로, 구양수의 '추성부'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추성부'의 한 장면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 때 학자이자 문장가인 구양수가 밤에 독서를 하다가 서남쪽에서 나는 소리에 놀란다.
깊은 밤에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음을 괴롭힌다.
그래서 동자에게 바깥을 살펴보라고 한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에 은하수가 걸려 있는데,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상황을 전달받은 구양수는 가을의 쓸쓸함을 탄식한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그는 지금 방 안쪽에 그림자로 앉아 있다.
그림의 표면적인 중심인물은 동자이지만, 실질적인 중심인물은 방문에 비친 그림자의 주인공이다.
따라서 구양수가 느끼는 인생의 덧없음이 그림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심전은 구양수를 감추고 동자를 앞세웠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구양수의 심정을 부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지는 세월의 덧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조형적인 전략에서 동자를 캐스팅하지 않았을까?
마치 구름을 그려서 달을 보여주듯이 동자를 통해 자기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말이다.
실루엣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구양수는 그림을 '수렴청정'하는, 얼굴 없는 주연이다.
이 실루엣의 기운이 화면을 압도한다.
동자의 뒷모습에 담긴 뜻
사실 이 그림에서 동자는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다.
구양수의 지시를 받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선 수동적인 존재다.
그런 동자의 뒷모습에 주목해보자.
왜 동자의 뒷모습으로 그렸을까?
화가들은 웬만해서 뒷모습을 그리지 않는데. 인물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뒷모습을 통해 전달되는 내면적인 깊이 때문이 아닐까?
잘 잡은 뒷모습 한 컷이면, 복잡한 심사를 시시콜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긴다.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스님의 뒷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염불서승'이 감동적인 이유도 회색 가사를 입은 스님의 강파른 뒷모습 때문이다.
그런데 동자의 뒷모습은 '추성부'를 알고 보면, 맥이 빠진다.
그림의 능동적인 주인공이 아닌 탓이다.
황병기의 '창조적 오독'처럼 매력적인 그림이 되려면, 뒷모습의 동자가 능동적인 주체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스토리여야 한다.
하지만 심전은 구양수가 느낀 세월의 덧없음을 젊은 동자의 뒷모습을 통해 밀도를 더한다.
지는 세월과 앞날이 창창한 젊음이 동거하면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안타까움이 배가된다.
지금 심전(안중식)은 '복화술사'처럼 구양수(歐陽修)를 통해 자기 심정을 토로하는 중이다.
[성재수간도 - 안중식 / 스케일을 넓혀 숲과 계곡 전체를 비추며 동자가 구양수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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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 ~ 그는 사람이 진짜 기쁘면 눈물이 복받치듯
웃음 뒤의 눈물을 포착하려 했다 ...
[황병기 . 1936 ~ 2018]
황병기는 가야금의 명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국악의 영역을 넓힌 거장으로 인정받았으며,
세대와 장르와 시대를 넘어 많은 예술가와 교류하며 예술의 영역을 확대했다.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과 존 케이지, 작곡가 윤이상, 피아니스트 백건우, 현대무용가 홍신자, 첼리스트 장한나 등과의 교분은 잘 알려져 있다.
2004년 호암상, 200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8년 일맥문화대상, 2010년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에 대한 책으로 ~
평전 <황병기와의 대화> (2001, 나효신),
<황병기:한국의 전통음악과 현대 작곡가 (Hwang Byungki : Traditional Music and the Contemporary Composer in the Republic of Korea)> (2013, Andrew Killick),
<황병기 연구, 앤드류 킬릭/김희선 역>(2015)이 있다.
그는 가장 애독하는 책으로 <논어>를 꼽았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첫 문장을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고 밝혔다.
그는 평소 죽은 뒤에, "굳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필요가 없으니, 무덤이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참고 출처]
https://blog.daum.net/mujin3/14497414
https://cafe.daum.net/69sukyoung/O47K/542?q=%ED%99%A9%EB%B3%91%EA%B8%B0&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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