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농협으로부터 한 통의 안내문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소천하시면서 작은 논을 유산으로 받았는데, 제 명의로 작은 농토가 생기면서부터 농협의 편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안내문은 한우입식 사업 희망 농가 신청 건이었습니다.
여기서 그 문장들을 다 열거할 순 없지만 몇가지만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1. 입식자격 : 신용에 결격사유 없는 조합원으로서 경종농가 우선.
2. 채권보전 : 무입보.
3. 입식철차 : 담당자 동행하여 경매우 시장에서 입식자 본인 책임하에 선택입찰, 입식자 임의 구입불가 등등
여러가지 안내문 형식의 글이 빼곡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참 기가 차더군요.
농토를 일구며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조합원들은 대개 노인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어려운 한자식 표기라면 아마도 무슨 뜻인지 몰라 읽어도 해독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차라리 뜻이라도 알아먹게 한자로만 표기해 주든, 아니면 최소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해 주었더라면 나았을 뻔했습니다.
대학에서 법을 전공한 사람 조차도 한글 일색의 한자식 서체와 어투에 적잖이 당황하게 되더라구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농협직원들의 수준이 한심했습니다.
지천명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입장이 어러할진대 6-70대 시골 어르신들의 입장이 어떠할지 불을 보듯 훤하더라구요.
좀 쉬운 말로 편지를 보낼 순 없을까요?
하도 답답해서 제가 다시 한번 써봤습니다.
농협에서 조합원님들께 알려드립니다.
농가소득 증대의 일환으로, 한우사육을 희망하는 농가에게 다음과 같이 지원사업을 시행하려 합니다.
1. 한 농가당 2마리까지 지원 가능하며, 대출기간은 2년에 무이자입니다.
2. 자격 요건은, 신용에 별다른 문제 없는 조합원으로서 현재 논밭을 경작하며 농사를 짓고 있는 분들입니다.
3. 대출 조건은, 담보물이나 보증인을 요구하지 않고 100% 신용만으로 융자해 드립니다.
4. 절차는, 농협 담당자 입회하에, 지정된 소시장에서 사육을 희망하시는 분들이 집접 새끼소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농가에서 임의대로 다른 곳에서 또는 다른 방법으로 구입하시면 안 됩니다.
5. 농민들의 소득향상과 행복을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농협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좀 쉽게 표현하면 안 될까요?
꼭 어려운 한자어를 써야만 하는 것인지, 꼭 그래야 한다면 한글, 한자 병기는 불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일제의 잔재물을 보는 듯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수 많은 법전이나 사법부 보고서도 일반 시민들이 보면 어리둥절합니다.
마치 딴 나라 얘기들 같지요.
꼭 이런 식으로 어렵게 써야만 담당자들의 지적 수준이 높게 보이는 것일까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기관이나 사람들은 앞으로는 더욱 외면받을 것이며,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종국엔 외부로부터 강력한 개혁바람이 불어닥칠 것입니다.
편지 한 통에 참 씁쓸한 뒷맛이 남았습니다.
고향에서 한평생 농사만 짓고 계신 어르신들의 깊게 파인 주름살이 그 안내문 위로 투영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시력이 약해져 글자도 잘 안 보이는 분들에게, 해석을 해드리거나 문서 중간 중간에 주석을 달아드려야 할 판입니다.
만추는 늘 아름답습니다.
살다보면 사람들의 흔적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접하게 되는데, 배려의 흔적들에선 만추보다도 더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고집스런 흔적들을 접하게 되면 영 마음이 편치 않고 답답해 지지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한 월요일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임)
立式 : 서서 뭔가를 할 수 있는 방법, 행태, 패턴, 예) 입식부엌
入植 : 뿌리를 내리게 하고 생장시키다.
立食 : 서서 식사하다.
入息 : 들여와 기르다. 번식시키다.
耕種 :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경작하다.
京種 : 서울에서 생산되는 채소 종자.
經宗 : 불가의 종파를 이름. 예)화엄종, 천태종, 법화종 등.
警鐘 : 위험을 알리고 경계하기 위해 치는 종. 예) 경종을 울리다.
같은 한글이지만, 한자로 표기하면 매우 다른 의미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몇가지를 기술해 보았지만, 찾아보면 이 보다 훨씬 더 많은 한자어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글과 한자를 병기해 주든지, 한글로만 표기하려면 좀 더 쉽게 써서 보내주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