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영조, 정조 시대에 활동하며 조선의 화풍에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청나라를 통해 익힌 것으로 보이는 서양 화법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색채의 농담과 명암으로 원근감을 드러낸 훈염기법을 도입했다.
김홍도는 언제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상당수 학습 관련 책이나 위인전에서는 김홍도가 1760년생이라고 표기할 정도로 생몰연도에 대하여 주장이 서로 다르다.
그나마 요즘은 1745년생으로 거의 일치화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삼성전자에서 나눠주던 한국화 관련 달력에 나온 김홍도의 그림 설명에서는 1745년에 태어나 1818년에 사망했다는 표기를 한 바 있다.
기록으로는 1805년에 병이 위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때 죽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체적으로 1810년 전후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또한 이전 화가들이 그리지 않았던 민중들의 삶을 그려낸 풍속화들을 많이 남겼는데 김홍도의 풍속화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서당>, <씨름> 등이 있는데 농사짓는 사람, 빨래하는 아낙 등을 그렸다. 이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김홍도의 풍속화가 정조의 개혁 정치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2013년 김홍도의 작품집으로 알려진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은 사실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학계에 나와서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만약 주장이 사실이라면 교과서부터 해서 모든 것을 갈아엎을만한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
신윤복과 마찬가지로 춘화도 꽤 많이 그린 편인데 운우도첩의 경우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춘화도첩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후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등 춘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신윤복과 함께 풍속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수박 겉 핥기 식인 평가이다.
이것은 중고등학교 미술, 국사 시간에 스쳐지나가듯 배우기 때문이다.
신윤복은 정말로 풍속화만 남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타 작품은 전무한 반면에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엄청나게 많다.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다는 것은 당대부터 엄청난 네임밸류를 쌓아왔다는 증거다.
김홍도는 한반도 전통 화단의 정수라고 평가받는데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탱화,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할 것 없이 모든 장르에서 완벽한 화풍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시서화라 하여 시, 서예, 그림 3가지를 모두 취미로 삼거나 단련하는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장르에 통달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장르 하나에 국한된 '문인 화가'들이 많았던 반면 김홍도는 '직업 화가'로서 그림에만 충실했으며 재능이 더해져 장르에 국한받지 않고 다재다능하게 소화한 조선 시대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화가다.
김홍도가 풍속화만 두고 보았을 때 서민의 생활을 주로 그렸다면 신윤복은 양반가의 생활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여성의 생활상이나 남녀가 어울려 노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 김홍도와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김홍도는 풍경을 거의 그리지 않았지만, 신윤복은 자주 그렸다.
김홍도는 왕을 상징하는 색인 빨간색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신윤복은 빨간색을 사용해 풍자했다.
기생들과 양반들이 주요 모델이였기에 신윤복의 풍속화 모음집인 <혜원전신첩>은 양반 문화와 복식 연구에 있어서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일부 사극 제작 과정 영상을 보면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며 가체의 형태 등을 참고하는 모습도 보인다.
몇몇 작품에서는 동일 인물로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기생과 젊은 남성인데 신윤복의 이웃일 가능성도 있다.
사실 신윤복이 남긴 그림 이외에 신윤복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다. 때문에 여성을 주로 그린 신윤복이 여자가 아니냐는 설이 있다.
<바람의 화원> 소설판부터 아는 사람은 아는 설이었으나 소설이 드라마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졌으며 영화까지 나오면서 일반인들에게 보편화했다.
그러나 신윤복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신윤복의 가계도와 신윤복 가문의 족보를 보면 남자로 확인되는 상황. 신윤복이 여자라는 주장은 화풍과 스타일은 여성미가 느껴진다, 섬세하다 등으로 매우 빈약하다.
'기록이 없으니 이렇게 상상해볼 수도 있지 않나' 딱 그 정도의 수준이다.
모 역사서에서 신윤복이 도화서 화원에 임명됐다가 쫓겨난 이유가 화원으로 생활하던 중 여자인게 들통나서라고 하는 설도 있는데 만약 신윤복이 여자고 그 상태에서 화원 생활하다가 들통났다면 단순히 화원에서 쫓겨난 것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모든 관직에 대한 최종 인사권을 가진 임금을 기만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단순히 화원 하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떠나서 나라가 발칵 뒤집힐 대사건이다.
김홍도는 타고난 그림 실력을 바탕으로 연풍 현감까지 지냈으나, 사람들의 평가는 별로였다.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사람들이 그를 신선 같다고 할 정도였으나, 가정에 대한 책임감은 약했다.
신윤복은 순전히 그림을 그려 삶을 꾸렸던 순수 화가이기에 정치력을 논할 수 없다.
인품을 논할 만큼 역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평가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