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5
9월16일[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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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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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CoMo63x5sl8
(살레시오회 장승필 안드레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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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회심 이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 바오로 사도의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모습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더불어 이방인의 사도로서, 초대교회를 떠받치던 양대 기둥 가운데 하나요, 탁월한 지도자로 거듭난 그였지만, 평생토록 한없는 겸손의 덕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더 이상 잘난 체 하거나 허세를 떨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교계 구조 안에서 최고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공동체 내에서 끝자리에 두고 교우들을 섬겼습니다. 틈만 나면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죄인들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제 강한 비바람에 수북이 떨어진 낙엽을 쓸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당 쓰는 일은 한번 하고 끝낼 일이 아니로구나. 낙엽이 쌓일 때마다, 틈나는 대로 쓸고 또 쓸어줘야 되는구나.’
우리가 지난 시절 저지른 심각한 잘못, 그리고 일상적으로 짓는 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참회했다고, 한번 고백성사 봤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틈날 때마다, 참회하고 또 고백하는 것이 맞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러하셨습니다. 그는 기회 닿는 대로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허물과 흑역사를 솔직히 고백하셨습니다. 때로 너무 부끄럽고 참담해 감추고도 싶으셨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자신의 수치스런 지난날을 고백하며, 끝도 없이 성찰하고 참회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티모테오 1서에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티모테오 1서 1장 15~16절)
오늘 루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 폭풍우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가장 좋은 비결 역시 바오로 사도가 지니고 계셨던 한결같은 겸손의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러 유형의 죄인들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친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 속에 파묻혀 살아가지만 손톱만큼의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고백할 줄 아는 겸손한 죄인,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줄 아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죄인을 사랑하심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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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f1hvZxy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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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결과만 보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과정보다는 지극히 ‘결과’만 보려는 마음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말과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시고, 또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라고도 하십니다.
얼마 전에 청년들과 이야기하다가 한 청년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만약 누군가 신부님 설거지를 도와주려고 하다가 접시 열 장을 깬 사람이 있고 또 누군가 몰래 신부님 접시를 하나 훔치려다 한 장을 깨 먹은 사람이 있다면 신부님 생각에 누가 더 잘못한 거예요?”
이 질문은 MBTI 성격유형 검사에서 목적과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인지, 상황과 과정에 중점을 두는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저는 가차 없이 “열 장 깬 놈이 더 잘 못한 거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히 ‘TJ’라는 것입니다.
성격유형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아니라지만, 저는 어쨌거나 저의 성격을 고수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그 감정이 어떠했던지, 그 과정이 어떠했던지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어날 때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다.” 정말 짜증 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반박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외는 분명히 있을 수 있겠지만, 평생 열심히 일했다면 죽을 때 가난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욕을 먹더라도 결과에 중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핑계나 변명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핑계나 변명이 들어오면 발전이 없습니다. 저는 억지로라도 결과만을 중시하려 합니다. 성당의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결과만 봅니다.”
만약 자연재해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것도 인간 행위의 결과일까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지금 시리아에 홍수가 나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생겼습니다. 여기에 과연 인간의 잘못이 없을까요?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에 더불어 시리아가 무정부 상태로 두 세력이 싸움만 하며 민생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도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그 땅도 부정하게 되었다. 나는 그 죄 때문에 그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주민들을 토해 내었다”(레위 18,25)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땅이 인간을 버리는 것 같지만, 성경도 그 원인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나면 반드시 안 좋은 결과가 생기게 되는 원인이 존재합니다. 그 원인을 밝히기 어렵다고 결과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끝까지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핑계를 대었습니다. 결과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느님도 결과만 보십니다. 거기에는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면 무엇을 고쳐야 할지 알게 됩니다. 핑계는 고치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영화 ‘어 퓨 굿 맨’은 1992년에 개봉한 법정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미국 해병대 기지에서 일어난 한 병사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을 따릅니다. 병사 죽음의 경우는 두 명의 해병이 다른 한 명의 해병을 괴롭히는 ‘코드 레드’라는 불명예스러운 훈련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두 해병은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며, 미군 상사인 네이던 제서프 대령이 지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증명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대니얼 카피, 조앤 갤로웨이, 그리고 샘 와인버그로 이루어진 변호사팀이 이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굳이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던 카피는 처음의 적정선에서 검사 측과 합의하고 마치려 합니다. 그러나 갤로웨이의 격려와 진실을 찾으려는 의지로 인해 점차 사건에 몰입하게 됩니다. 카피와 그의 팀은 군사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카피는 다소 독특하고 위험한 전략을 세우며, 재판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서프 중사를 증인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대면을 통해 그가 ‘코드 레드’를 지시한 사실을 밝혀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서프 대령은 유명한 “당신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문장을 외치며 자기 행동이 당연하고 필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변명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습니다.
군 기강이 바로 서야 나라가 지켜질 수 있고 자신은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은 살인입니다. 무엇으로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카피는 그의 거짓말과 책임 회피를 폭로함으로써 두 젊은 병사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음란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속이 건전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결과에 집중하지 못하면 그 결과를 합리화하는 수많은 핑계와 거짓말에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발전도 없고 계속 자존심만 세우게 됩니다. 속에 있는 것이 말로 드러나고 행동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그 결과를 뒤집을 아무런 핑계도 없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입시다. 그래야 고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이상한 면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마치 바퀴벌레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안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발전을 위해 먼저 자기 열매를 보고 지금 자신이 어떤 나무인지를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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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43-49: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성령을 나타낸다. 나쁜 나무는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다.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와 반대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즉 불명예스러운 욕정들이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44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포도 같은 달콤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위선자나 저속한 자들에게서 고상함을 기대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45절) 이와 반대되는 자는 자기 속에 깊이 감추어졌던 것을 내놓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가졌다 해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덕이 있는 자는 그 품위에 맞는 말을 하고 사악한 사람은 은밀한 곳에 숨겨 둔 더러운 것들을 게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삶 속에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그 행위를 보면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 그 자세가 어떤지 말씀하신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43-44절)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가짐에 따라 신앙생활도 진실한지 아닌지,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삶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하느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삶이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입으로만 헛되이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47~48절)라고 하셨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깊게 뿌리를 박고, 하느님의 말씀을 척도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말씀 위에 굳건히 서 있을 때, 어떤 풍랑과 파도도 박해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랑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랑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사랑이 드러나고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즉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체험을 원하게 되고 그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삶으로 하느님을 이 세상에 더욱 깊이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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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LA에서 교우 분들과 함께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외식보다는 집 밥이 좋다고 하시면서 음식은 모두 준비해서 갔습니다. 점심은 주로 공원에서 먹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며 식사를 하니 좋았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숙소에서 먹었습니다. 교우 분들은 저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셨고, 저는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2박 3일 여행 중에 운전은 한 자매님이 해 주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자매님은 ‘고생은요, 수고한 것은 맞네요.’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고생과 수고’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고(受苦)는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의 능동적인 의지가 동반된다고 하겠습니다. 고생(苦生)은 어렵고 힘든 일을 겪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의 능동적인 의지가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고생 앞에 ‘생이나 개’를 넣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매님은 ‘수고’했습니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여행을 위해서 운전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23년도에 LA에 3번 왔고, 앞으로 1번 더 올 예정입니다. 모두 신문 홍보를 위해입니다. 신문에는 교회의 보물이 있습니다. 교회의 보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고생이 아니라, 수고라고 생각합니다. LA에 올 때마다 잠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더욱 감사할 일입니다. 2023년도에 성지순례를 5번 다녀왔고, 앞으로 1번 더 갈 예정입니다. 성지순례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예수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5번의 순례를 통해서 150명 이상의 교우 분들을 만났습니다. 매일 잠자리를 옮겨야 하고, 늘 새로운 분들을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니 결코 고생이 아닙니다. 모두들 자발적으로 순례에 함께 하였으니 모두들 수고하였습니다. 10월에는 ‘한국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10월에 한국으로 휴가를 갈 계획이 있었는데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으니 더욱 잘 된 일입니다. 저의 수고가 열매 맺어 성지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기쁨입니다. 산모의 고통은 고생이 아닙니다. 고통을 넘어 한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에 당연히 수고입니다.
교회는 며칠 전에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소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서 3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자에게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어머니에게는 이 사람이 아들입니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고생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고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튼튼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 같아서 삶의 풍랑이 다가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우리의 신앙은 주기적으로 순환을 합니다.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연중,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준으로 순환합니다. 저는 60년을 순환하였습니다. ‘기도, 희생, 단식, 나눔’의 생활을 충실히 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순환입니다. 마치 대나무는 마디를 이루면서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나이테를 이루면서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매년 순환은 하지만 헛바퀴를 도는 것처럼 살기도 합니다.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시련의 파도가 오면 곧 무너지는 신앙입니다. 원망, 불신, 근심, 분노가 자리 잡고 있어서 하느님께로 향하지 못 하게합니다. 가진 능력과 재물을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봉헌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하느님의 은총을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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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평지 설교(6,17-49 참조)의 마지막 단락에 해당합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부유한 이들의 불행을 선언하셨고(6,20-26 참조), 원수를 사랑하고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을 주문하셨으며(6,27-36 참조),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6,37-42 참조) 그리고 설교를 마무리하시는 오늘, 이 모든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시려고 비유를 하나 들어 설명하십니다.
강가에 집을 짓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서 반석을 찾고 그 위에 기초를 놓아 집을 짓습니다. 홍수로 불어난 강물이 들이닥치더라도 단단한 기초 덕분에 그 집은 끄떡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런 기초 공사 없이 맨땅에 집을 짓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완전히 무너져 버립니다. 여기서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듣지만 행동에 옮기지 않는 자를, 단단한 기초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행동에 옮기는 이를 가리킵니다.
말씀을 듣는 일은 모든 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사람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물과 같은 말씀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남이 나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하여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땅을 깊이 파서 반석을 찾고 그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아 집을 짓는 일은, 사실 대단히 번거롭고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맨땅에 지은 집과도 겉보기에 큰 차이가 없어서 우리는 이 기초 작업을 건너뛰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듭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기초 없는 집이 속절없이 무너지듯, 우리가 듣기만 한 말씀도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바위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을 기억합시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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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훈철 바오로 신부님]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을 내어놓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몇 주일전 프랑스 작가 장지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주 짧은 이 책은 40년 동안 프랑스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으로 바뀌게 한 늙은 양치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엘제아르 부피에’ 이 늙은 양치기는 해발 1200미터 의 황량한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없어서 이 땅이 죽어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땅이 누구의 소유인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두 번이나 힙 싸일 때도 그 늙은 양치기는 계속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몇 십년이 지난 어느 날 정부의 산림 감시원이 양치기의 노력을 모르고 이 고산지대에 저절로 천연 숲이 생겼다고 놀라 정부에 보고했고 정부 대표단이 시찰하러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아랑곳없이 양치기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전쟁으로 숲이 망가지는 위협도 있었고, 잘못 심은 나무들은 떼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노력에는 그 어떤 어려움도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40년이 지나 1947년 엘제아르 부피에는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그 양치기 덕분에 처음 12가구가 살던 이 마을은 이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은 글을 맺었습니다.
“한사람의 오직 육체적, 정신적 힘만으로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선한사람은 선한마음을 내어놓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지어 홍수에도 끄떡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한 주일을 마감하는 오늘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가식적이며, 드러난 것에 예민해진 우리 자신을 잠시 돌아봤으면 합니다. 이익이 앞서는 현실을 탓하면서도 나도 그 안에서 허우적대며 앞장섰던 마음을 양치기 목동의 세상을 선한마음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다른 이의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세상을 향한 착한 마음을 이제 숨기지 말고 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모두를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시작인 'credo - 저는 믿나이다 라는 뜻은 ‘core(마음)와 dare(주다)의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말과 행위의 중심인 인간의 마음은 생각으로나 말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낼 때가 진정한 믿음을 고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 심는 양치기의 선한 노력이 세상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였듯이 우리의 작지만 선한 마음의 시작이 바로 생명을 창조하는 하느님의 손길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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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하고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삶이 아닌 구체적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사랑이란 그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사랑』, 59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공허하며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일 뿐입니다. 행동으로 보일 때, 그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느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죄인이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소하게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비판하기도 하고, 그 밖의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고 용서를 청하며, 치유의 은사를 받아 다른 이에게도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듯’ 우리는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곳간에 선한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것을 이웃과 기꺼이 나누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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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에 담아야 할 것>
말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도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일상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음 안에 좋은 것을 담아야 좋은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를 건 거르고, 삭힐 건 삭히고 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르는 행동이 선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마음보다 형식과 겉모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선할 때 선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인데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르7,21이하)
그야말로 가시나무에서는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법입니다.(루가6,44) 그러므로 닦고 가꾸어야 할 것은 말보다 먼저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고운 말도 나오고 바른 행동도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소리만 합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강아지 얘기만 합니다. 그 강아지에게 마음 쓰는 만큼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을 터인데… 동물 애호가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마음속에 강아지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 자체가 사랑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는 남 얘기만 합니다. 자기 속을 보지 않고 남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참견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온통 남의 흉, 허물로 자기 마음을 가득 채워 놓은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으라 하시는 데 남의 흉, 허물 위에 집을 짓고 있으니 그 집이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습니다’(루카6,49).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성경 말씀과,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 예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기쁘거나 위기가 닥칠 때나 어느 때이든 그분 것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키십시오”(토마스 머튼). 잠언에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4,23)라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주시리라”(잠언3,5-6). 주님을 마음에 담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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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8월 말에 휴가를 갔습니다. 우선 아버지 기일을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오랜만에 대전교구 동창 신부들도 만나고, 그다음 혼자만의 여행으로 경상도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특별히 ‘사유원’이라는 수목원을 방문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이번 혼자만의 여행 중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기대한 만큼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수목원의 이름처럼, 혼자 걸으면서 많이 생각하고 또 벤치에 앉아 쉬면서도 생각하고 또 식사하고 물 마시면서도 생각하면서 이 안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 생각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너무 덥다.’
그때 기온이 36도였습니다. 따갑게 느껴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걷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계속 쏟아지는 땀방울도 저를 힘들게 했지만, 무엇보다 제 곁을 떠나지 않는 날파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어떤 생각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자그마한 날파리 때문에, 항상 겪는 여름 날씨인데도 덥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생각의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우리가 겪는 모든 분심이라는 것도 특별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별것 아닌 것이 우리 생활 자체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모두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에게서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라고 하십니다. 좋은 나무인 주님이시기에 주님에 붙어 있는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주님께 붙어 있지 않고 다른 곳에 붙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 붙어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온갖 유혹도 주님을 통해 이겨낼 수 있으며, 고통과 시련 안에서 주님이라는 희망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붙어 있기 위해서 주님의 말을 듣고 실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더 단단하게 붙어 있게 됩니다. 강물이 들이닥치는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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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살펴야지요>
루카 6,43-49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내 말을 실행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나를 살펴야지요>
내 곁의
모든 것이
무릇
나에게서
비롯하는 것이니
내 곁의
그 무엇을
탓하기에 앞서
나를
살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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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존재적 변화>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욕을 가끔 내뱉는 저를 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문제의식을 크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욕을 입에 결코, 담지 않았고 욕설이 난무하는 군대 있을 때도 욕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전보다 더 나쁜 놈이 된 것이고, 제가 전보다 더 화가 나 있는 걸까요?
반대로 전에는 제가 좋은 사람이었고 별로 화가 나지 않았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 반대입니다. 다만 지금은 전보다 누르는 힘이 떨어진 면도 있고 죄의식이 약해져 덜 누르는 면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죄의식이 약해진 데는 욕쟁이 아줌마가 욕은 걸쭉하게 해대지만 마음은 따듯하고 그 욕에 오히려 정이 있듯이 욕에 미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실리지 않기 때문인 면도 있지요.
어쨌거나 말은 존재의 표현이랄까 표출입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미움이 있으면 미움이 말로 표출되기도 하고, 미움을 감추려고 말을 하지 않으면 눈으로라도 표출이 됩니다.
화가 나 있으면 그것을 풀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표출됩니다. 잠시 그 화를 누르거나 가둘 수 있지만 영원히 가둘 수 없고, 화가 쌓이면 화병이 되거나 폭발하게 됩니다.
미움과 화만이 아니라 사랑과 온유도 마찬가지이고
슬픔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이며 괴로움이나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있는 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미움은 감추고 사랑만 드러내고 싶지만 미움이 있는 한 그럴 수 없습니다. 미움을 드러내지 않을 방법은 미움이 안에 없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독설이나 상처를 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설이나 상처 주는 말은 그 존재가 악독하기에 나오는 것이고, 존재가 악독해지는 것은 악이 그 안에 오래 쌓여 독해지기 때문인데 그 악의 독이 해독되기 전에는 독설과 상처 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존재가 사랑과 선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존재가 악하면서 선의 열매 맺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위선으로 선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고 그래서 자주 인용하는 불교의 말이 있습니다. 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사음수 성독 우음수 성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이룬다. 智學 成菩提 愚學 成生死(지학 성보리 우학 성생사) 지혜로운 배움은 보리를 이루고 어리석은 배움은 생사를 이룬다.
같은 물을 먹어도 뱀은 독을 만들어내고, 아무리 우유를 먹어도 독을 만들어내니 남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젖을 만들어내려면 뱀과 같은 존재에서 소와 같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같은 이치를 가시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존재적 변화로 응답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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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목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9.1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6,46)
'살아있는 믿음!'
오늘 복음(루카6,43-49)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요지는 '그 사람의 행실을 보면 그의 믿음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드러나는 나의 행실 하나 하나가 곧 '믿음의 척도'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죽은 믿음'이 되어서는 안되고, 삶으로 이어지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1티모1,15-17)는 살아있는 믿음의 구체적인 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1,15)
오늘 독서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내가 죄인 임을 고백하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이것이 또한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완전한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먼저 실행해야 할 나의 믿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굳게 믿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봅시다!
(~ 이사 26,2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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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5t29XfsmO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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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 46)
잠자고 있던
우리의 실행을
흔들어 깨우시는
실행의
주님이십니다.
실행으로
이어지는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실행을 아는
믿음은
악한 마음을
먼저
내려놓는
선한
믿음입니다.
마음을
키우는 것은
언제나
실행입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실행으로
한걸음씩
옮겨갑니다.
실행의 진리가
신앙의 튼튼한
기초입니다.
실행의 향기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가치있게
실행하길
바라십니다.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공사도
없이 집을 지은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행하는 곳에서
좋은 열매를
맺으십니다.
실행이 갈라지면
분열이 되기에
실행이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복음적 삶입니다.
실행하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가
살아갑니다.
실행하기에
점점 소중해지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끝내
속일 수 없는
삶의 기본이며
실행의 기쁨입니다.
좋은 사람은
올바른 실행으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좋은 열매
선한 실행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가장 좋은
이 날을
기도로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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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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