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눈자위가 빨개진 예진이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는 서울에서 돌아왔습니다.
3월을 시작합니다.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니 또 감사할 뿐입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다시 시편입니다.
모든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잘 알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되게 하옵소서.
진리를 보고 기뻐하며 아버지 품속의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본문 주해)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 즉 교훈 시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런데 시편 42편과 43편은 하나의 표제어, 곧 ‘고라 자손의 시’로 묶인 하나의 시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나로 되어 있으나, 70인 역에서 두 개로 나뉘었고, 이후 두 개의 시편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라는 레위의 증손이며(민16:1),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여호와께 반역한 죄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반역에 동조하지 않아 죽음을 면하였고(민26:11)
이들은 레위 지파로 다윗 시대 때 찬양을 인도하는 자들이 된다.
이 시편의 배경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바벨론 포로’ 혹은 ‘괴로운 병상’ 등 혹독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예배와 찬양을 그리워하며 쓴 시편으로 추측된다.
1~5절 :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 하듯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1~2절--시인은 예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주님을 찾고 찾으며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3절--그때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적대적 질문을 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교만하게 묻는 것이다.
이런 상황 앞에 시인은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탄식한다. 지금 시인의 현실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요, 자신도 갈급하기 때문이다. 대답해줄 말은 없고 갈급함은 깊어만 갈 때 시인은 과거로 여행을 시작한다.
4절--“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4절, 새번역)
하나님의 집으로 앞장서서 인도하여 함께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하던 그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예배를 할 수 없으므로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막에 나갈 수 없어서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지 낙심이 되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5절--하지만 그는 낙망하는 영혼을 방치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 영혼을 책망한다. 그리고 낙망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명한다. 시인이 자기와 주고받은 이 대화는 그것을 통하여 자기 영혼을 깨우치려고 하는 자기 책망이다.
6~11절 : 6절--‘요단과 헤르몬 땅과 미살 산’은 시인 실제로 처한 장소를 의미하기보다,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장소이다.
헤르몬 산이 있는 요단 땅은 요단 강물이 시작되는 근원지로 하나님이 주신 땅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며, 미살 산은 알려지지 않은 헤르몬 지역의 어떤 산을 가리킨다. 또 ‘미살’이라는 말이 작고 보잘것없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위대한 시온산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작은 산, 곧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을 상징하는 말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따라서 지금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앞 단락의 갈급함과 연결하여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너무 멀리 있지만, 그곳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한다.
6절이 거리를 말한다면, 7절은 고난의 깊이를 말한다.
7절--폭포와 바다가 서로 부르듯이 모든 파도와 물결이 자신을 휩쓸었다는 것이다.
8절--그러나 참으로 절망스러운 가운데서도 주를 기억하니 낮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기쁨의 때(4절)와 정반대의 상황이지만 기도하는 것이다.
9~11절--그러나 시인을 조롱하는 대적자들의 태도는 그대로이다. 그들의 조롱으로 인해 시인은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는다. 다시 그의 영혼에게 외친다. 그의 외침은 찬양이 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11절, 새번역)
(나의 묵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대적들은 ‘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한다. 뭐라고 변명할 것도 없고, 달리 대책이 없는 그런 상황이지만 그때도 시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그리워하고 갈망한다는 내용이다.
2020년 코로나 사태가 생각난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성도들에게 닥쳤다.
더구나 이단들의 집회로 인해 코로나가 더욱 심하게 전염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정통이고 이단이고 간에 하나로 싸잡혀, 기독교는 세상의 질타를 받았고 욕을 아주 배부르게 먹었었다. 그야말로 ‘너거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는 야유를 많이 들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셔서, 핍박받는 교회를 통해 나타내 보여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대해 잠잠하니 그저 당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 비슷한 장면이 성경에 있다.
바로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이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39~4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무지한 인간들의 조롱 속에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을 고스란히 당하셨다.
그러나 그 죽으심으로 인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생명의 길이 열렸다.
십자가의 능력, 죽으심의 능력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성도가 당하는 고통이 크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네가 사는 모양이 왜 그 꼴이냐?’ 하는 소리를 툭하면 듣는다.
혹 이해되지 않는 상황으로 당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나 자신의 죄로 인해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모든 상황에 대해 죽은 자임을 선포하고, 자신을 살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되기만을 기도하고 갈망해야 한다.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이미 답을 다 보여주신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11절, 새번역)
때때로 성도들도 세상의 상황에 낙심되고, 또 자신에게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것과 상황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잠잠히 주님의 때와 주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주님을 찬양할 뿐이다.
시편 42편을 통해 십자가의 주님을 다시 보게 하신 성령님께 감사를 드린다.
(묵상 기도)
주님,
당장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만을 갈망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말은 쉬워도 살아내기가 쉽지 않은 이 삶을 성령님께 의탁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도우심 한가운데 있었음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보게 하신 성령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