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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시카제라드
-서문-
몇몇 분들은 이 블로그 이전부터 차범근에차범근에 대해 많은 글을 작성했던것을 알고 있을것이다.(이번에 차범근에 대한 자료의 근거를 더더 확실히 하기 위해 검색하던중 인터넷에서 내가 차범근이라는 항목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내가내가 작성한 많은 글이 있음에 약간 놀랐고, 그 글들이 감정적인 글이였음에 두번두번 놀랐다. 아마도 게시판에서 다른 글들을 읽다가 불끈 화가나서 쓴것과 같은..그다지 다른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글이었음에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가지고 지금 타이핑을 한다.)
사실 나는 축구관련 글을 쓰면서도 주로주로 '전술과 전략' 에 관심이 많다. 어차피 선수들의 면면이나 그팀의 스탯과 같은같은 것들이야 쉽게 찾을수도 있고 일편적인것이지만 전술과 전략은 보는이들에 따라 모두 다를다를 수 있는 매우 다양화된 모습을 보여주기에 참 재미있다.
차범근에 대한 글은 비교적 예전부터 작성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는 선수시절에선수시절에 대해 쓰기 시작했는데 그저 "우리에게도 이런 영웅이 있었어" 라고 친구들과 얘기하는얘기하는 수준의 것들이였다. 하지만 98년 예선탈락이 유력해 보일만큼 최약체로 구분되던 한국팀을 이끌고이끌고 가장 빨리 월드컵 본선을 확정시키자 차범근을 영웅시하던 언론과 팬들은 월드컵 본선에서본선에서 당연히 16강에 들것을 기정사실화했었고, 그 유리조각같은 헛된꿈이 깨어지자 과거의 영광마저 잊고,잊고, 차범근을 향한 마녀사냥을 시작하면서부터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디지털 페이퍼의 풍파에풍파에 그의 성공과 신화와 우리에게 준 감격을 잊게 해 갔다.
그 당시의 , 아니 한국축구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자들은 아직도아직도 호의호식하고 있음에 최소한의 나의 영웅을 지키고자 했던 감정적 본능은, 본격적으로 나로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자료를 모으게 하고 축구에 대해 보다 공부하게 했던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얼마전 감독의 능력에 대한대한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 글은 감독으로서의 성향과 분석에 대한 단편적인 글이였고, 이번이번 글은 그가 남긴 화려한 선수시절에 대해 부족하지만 어느정도의 완성판이라고 할수 있을있을 만큼 분량이 많다.
본 칼럼은 그의 선수시절에 대한대한 경력과 더불어, 세간에 아직도 떠도는 분데스리가의 위상과 차범근의 실력이 과장되있다는 것들에것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다루려고 하며, 보다 많은 축구팬들이 나와 같은같은 생각을 하기를 바라기보다는, 우리의 잃어버린 영웅을 되찾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라고픈바라고픈 마음이다.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축구 매니아들이 있다.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너무 해외 선수의 화려함만 쫓아가는 경향이 적지 않아않아 매우 우려스럽다. 정작 축구를 사랑하면, 유럽축구뿐 아닌 국내 축구에 관심이 가장가장 많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K리그는 전혀 관심도 없이 오로지 외국 유명 선수,유명클럽선수,유명클럽
들의 그림자만 쫓는다면 진정한 축구팬이라고는 할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차라리차라리 외국선수들은 몰라도 좋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못하는 이가, 어찌어찌 남의 소중한 것을 칭찬할수 있으랴?
그래서 지금 우리의우리의 영웅을 소개하려 하고, 나는 매우 긴 글의 시작을 하려한다..
글이 다소다소 길수 있으나 도저히 짧은 내용의 글로는 그의 경력을 설명하기도 부족할뿐더러, 현대현대 빅3체제의 유럽축구판도에 익숙한 축구팬들이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자면하자면 최소한의 노력을 나 역시 해야하기에 , 글을 읽는 분들 모두가 한번에한번에 다 읽기 힘들다 해도 조금씩 천천히 읽어주기를 바라며 , 또 읽다보면읽다보면 나름대로 매우 재미있을것이라 생각해보며 글을 시작한다.
-본문-
포르투갈의 피구,
잉글랜드의 베컴,
웨일즈의 긱스,
이들의 공통점은공통점은 누구나 비슷하게 알고있다. '세계최고의 선수'이고, '윙어로써 모든 포지션의 선수중에 최고의 플레이어'였다. 플레이어'였다. 그들의 최전성기라고 불리웠던 2002년 월드컵 이전에 베켄바워는 데이비드 베컴을 '현존 최고최고 선수' 로 지목하였고, 미셸 플라티니는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를 최고의 선수로 지목하였다.지목하였다.
이렇게 뛰어난 윙플레이어들이 최고의 선수로 부각된것은 전술적 개념과개념과 같이한다. 4-4-2 전술과 같이 현대 축구가 전술적으로 더욱 빨라지면서 상대의 협력수비에서협력수비에서 비교적 허물기 쉬운 측면을 무너뜨리기 위해 더욱 부각되면서부터라고 할수 있다.
얼마전 네이버 21대 블로거로 선정되며 인터뷰한 내용을 보신분들은보신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이번 월드컵은 전술적 격차가 현저히 줄어든 대회로 설명한 바바 있다. 즉 이제는 선진축구전술 후진축구전술의 개념없을만큼 대다수 축구 전술이 비슷한 흐름으로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것은 축구시장 자체가 통합회되고 컨버젼스 되는 현상과 매우 빠른빠른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50년대부터 구가된 브라질의브라질의 4-2-4전술, 60년대에 카테나치오의 발달로 인한 인테르의 전성기, 70년대의 이른바 토탈사커의 등장은등장은 세계를 경악시킬 전술이였고 아직도 그 흐름이 기본으로 유지되고 있다. 당시 74년74년 월드컵의 네덜런드가 상대적 약체로 분류되었다가 토탈사커라는 것이 전세계에 공개되면서 팀을 준우승으로준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토탈사커의 지휘자 요한 크루이프는 영웅이자 전설이 되었다.
차후 내용에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던 것은, 그 당시당시 시대적으로 전술적 역할이 한정되어 있고 포지션의 획일화가 이루어졌던 만큼 전술의 틀이나틀이나 상식을 깬다는 것은 매우 엄청난 일이였고, 그것만으로도 상대팀에게 큰 혼란을 줄정도였다.줄정도였다.
이런면에서 차범근은 윙으로써 활약하며 측면을 무너뜨리고, 측면에서부터 중앙을중앙을 침투해 골을 터트리는 포워드의 역할과 세트플레이시에는 과감한 중앙공격수 역할까지 소화해내는등의 매우매우 뛰어나면서도 특이한 능력을 가진 Special급으로 분류되는 공격수였다. (역시 이와 관련된 당시당시 선수들과 메니저등의 코멘트를 차후에 볼 수 있다.) 차범근의 total stat을 지난지난 회에 살펴보았는데 우선 그가 뛰었던 분데스리가의 무대 재조명, 그 당시 유럽리그의유럽리그의 상황을 살펴보는것을 토대로 시작해보자.
1. 프로리그의프로리그의 시작과 각 대륙별 리그의 시작과 흥망
당시 차범근이 활약하던 시대인시대인 분데스리가의 70년대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각 리그 상황을 알아보기전에 현재 우리가 알고알고 있는 빅리그들의 시작과 흥망에 대한 근본부터 알아봐야 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도대체 어느 기간에는 어느 리그가 앞섰던 것이고 왜 현재의 3리그가 빅리그가 된것인가.된것인가. 분데스리가가 뛰어났다는데 왜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역사로 풀어보면풀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1)프리미어리그
프리미어리그의 역사는 1992년에 창설되어창설되어 그다지 길지 않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있지만 왜 그럴까? 라고 생각한생각한 이들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영국 축구는 1871년 'The Football AssociationAssociation Challenge Cup' 을 출범하고 1889년에는 디비전1의 단일리그로 최초의 리그 형태의 게임을게임을 시작하였는데 이 당시 리그를 주름잡던 팀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팀들로팀들로 주로 살펴보면, Preston North End, Accrington등이고 그 외에 강팀으로는 현재 알려진알려진 볼튼, 에버튼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무엇일까?
그것은 지역적 요건때문이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우수한 선수들이 많았는데, 스코틀랜드와 서로간에서로간에 선수 영입과 교류등을 자유롭게 할수 있던 북부 클럽, 그리고 역시 남부보다남부보다 조금 더 자유로웠던 중부클럽들이 프로리그 육성과 선수수급에 적극적이였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상대적으로상대적으로 지리적 요건이 중요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남쪽 지역의 팀들은 그러한 환경조건에서 동떨어져동떨어져 있음으로, 지역간 이동과 수급문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 자연스레 활동도 축소되었던 것이다.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남부지역의 약세는 1세기동안 지속되었고, 남부클럽들은 1세기간 16번의 우승밖에 가져오지가져오지 못할만큼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그나마 그것도 아스날이 11번)
스코틀랜드는스코틀랜드는 1960년대후반까지만해도 셀틱과 같은 강팀이 있어 절대 무시못할 전력이였으니 당연히 그 시대와시대와 환경적 요인으로 밀접한 지역이 더욱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였다.(셀틱은것이였다.(셀틱은 1967년 챔스리그 초대챔피언이다. 당시 인터밀란을 2:1로이기고 우승을 하여 영국 최초의 우승팀으로우승팀으로 남아있다.)
1892년에는 단일리그체제에서 디비전을 두개로 나누어 운영하였고, 23년에는23년에는 지역구분을 토대로한 디비전3,4가 추가되었다. 이것은 58년에 이르러 전국적 개념의 리그로 통합되면서통합되면서 현재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리그운영방식과 확대가 가져온가져온 많은 장점외에도, 영국프로축구가 뛰어나거나 대표할만한 강팀들을 배출해내지 못하고 강자가 매번 바뀌는바뀌는 형세였다.
사실상 프리미어리그가 창설되기전 영국축구의 발전을 가져온 핵심은핵심은 리버풀이였다. 보비찰튼과 조지베스트라는 설레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뛰었던 68년 벤피카를4:1로벤피카를4:1로 이기며 우승했던 기억. 하지만 그 시대가 지난 이후 , 즉 차범근이차범근이 활약하던 당시에서 영국의 핵심 팀은 리버풀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리버풀이리버풀이 대세였다. 그들은 77년 78년 연속으로 챔피언스우승컵을 거머쥐었던것이다.
물론물론 그 이후에 노팅엄이라는 비교적 약팀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당시에도 '매우 큰큰 이변' 으로 구분될만큼 실력면에서는 리버풀이나 당시 분데스리가의 강팀이나 각 대륙의 대표팀들과대표팀들과 비교하면 매우 약팀임은 분명했다.(그래서 노팅엄을 이끌던 브라이언 클라우 감독은 밥 파이슬리파이슬리 감독과 더불어, 최고의 명장으로 꼽혔다.)
이렇게 운영되던 영국리그는영국리그는 The Football League라고 불리우는 통합형 리그로 운영되었다고 볼수 있다. 이런 리그리그 형식에서 1992년에는 22개팀으로 법인을 구성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The FA PremierPremier League다. 지금도 그래서 20개의 상위팀(우리가 인식하는 1부리그 팀이라고 하는 팀들)을
제외한제외한 나머지 72개의 디비전팀들을 The Football League라고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독립리그로 나눈것을 필자는 두가지 이유로 인식하고 있다. 한가지한가지 이유는 영국에서 주장하는데로, 영국리그와 클럽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강팀들만 뽑아 그들끼리그들끼리 경쟁하도록 하자는 것이고 이것은 리버풀의 위상이 꺽어지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리그가리그가 독일과의 경쟁에서 뒤쳐지고 이태리와 스페인 리그에 맹추격및 역전 당하면서 다시 그그 판세를 바로잡고자 함에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92년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고 현 시점에시점에 와서는 분명 프리미어리그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국가대표의 성적이나 클럽팁의 성적이 챔피언스클럽대회나 유에파대회에서유에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면이다.
두번째두번째 이유로는, 축구시장의 상업화에 있다. 축구도 이윤이 나지 않으면 성장에 한계가 있는있는 엄연한 자본주의 논리가 개입된 스포츠다. 영국프로축구의 정신 'Rule-34'는 각 프로팀의 상업화를상업화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0 만들어졌는데 이 룰을 간단히 살펴보면, 축구클럽의 이사들에게이사들에게 자금이 일정이상 흘러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에 있었다.(배당은 액면가의 5% 제한,제한, 급여 없음)
그런데 1983년에 이르러 이영표의 팀으로 잘 알려진알려진 토튼햄이 이 조항의 약점을 파고들어가기 시작한다.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회사를 통해 토튼햄핫스퍼스의 100%100% 지분율을 가져오면서 주식시장에 처음으로 프로구단을 상장시켜 모든 프로축구 이사들을 경악시킨다. 그야말로그야말로 축구에서 돈벌이의 냄새를 맡아버린것이다. (물론 현재도 토튼햄은 매우 경영을 잘하는 구단으로구단으로 알려져있다.)
이와 더불어 맨유와 아스날, 뉴캐슬, 리버풀등의 강팀들이 독립리그독립리그 설립을 요청하며 정치권과 재계에 다양한 로비를 펼치기 시작한게 1983년부터다. 이 로비의로비의 내용에는 방송중계권료의 배분에 대한 이슈가 포함되었는데, 사실상 이것은 현재 빅클럽들의 주수익원이기도주수익원이기도 하다. 본래 Collective Selling 방식의 계약에 있어서는, 리그협회에서 방송사들과 계약후에, 돈을돈을 디비전 별로 배분하는 방식(1디비전은 50, 디비전2:25%등) 이였는데 이 방식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못하다는 취지하에 로비를 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주된 멘트는 "이런 방식으로 하게 되면되면 선수들과 클럽들의 재정난이 악화되고 결국은 강한 클럽들이 도태되고, 여러 약한 클럽들만클럽들만 생산하게 된다. 따라서 리그가 약해지고 국가가 약해진다" 라는 식의 주장이였다. 논리는논리는 그럴싸하지만 목표는 축구클럽을 통해 돈을 벌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결국결국 독립리그가 탄생하고, 그 리그에 대한 중계권료는 거의 100%의 독점형태로 20개의 클럽들이클럽들이 나눌수 있는 것이다. 무려 1억 7천만 파운드라는 계약금이 작년 프리미어의 계약금이다.계약금이다. 이 금액을 20개의 팀이 나누는것이 좋을까, 아니면 백여개의 클럽들이 나누는 것이것이 이익일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윤을 위하여, 대다수의 약한 축구클럽들을축구클럽들을 딛고 일어나 강한 클럽팀들이 더욱 강력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스포츠와 프로구단의 상업화를상업화를 가장 경계했고 아직도 프리미어리그의 정신이라고까지 칭송받는 Rule-34의 규약을 허문 것이 현대현대 축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유야 어떠하든 70년대70년대 중후반에 걸친 리버풀의 잉글랜드 리그는 매우 강했다. 하지만 리버풀 외의 특정한특정한 강팀은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볼수 있을 정도의 독주체제라는게 아쉬움이다.
2) 스페인 리그
1929년 프리메라리그가 창설되었는데, 레알과 바르셀로나의 경쟁구도속에서 전체전체 리그의 수준이 올라갔다고 평가할정도로 두팀이 주도했다. 그런데 스페인 리그에서는 역사를 알아야알아야 축구를 더 재미있게 볼수 있다. 본래 축구에서는 역사와 정치, 그리고 경제까지를경제까지를 뗄레야 뗄수 없는데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리그가 바로 스페인스페인 리그다.
레알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외하고라도각 클럽들의 라이벌 의식은 에스파냐, 카탈루냐,카탈루냐, 바스크족등의 내전 역사가 이어지기 때문인데, 특히 에스파냐와 카탈루냐의 경쟁은 대단하다. 이들이들 모두 단독 축구협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할정도니 그들의 민족적 의식과 투쟁이 얼마나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반면 그들 대표팀이 왜 성과를 못올리지는지 단적으로단적으로 보여주는 면이기도 하다.
카탈루야 소속의 팀으로는 빌라카, 비야돌리드, 에스파뇰등이 있고,있고, 헤타페 아틀레티코, 누만시아
등은 마드리드소속이라고 볼수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피구가 레알마드리드로 옮겨갔을때 바르셀로나의 팬들의 거친 욕과 괴성을 기억할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라이벌 팀으로 옮겨도 그렇지 라며 생각했지만, 실상은 또또 이러하다. 바르셀로나는 카탈루야 지역의 바르셀로나를 연고지를 하고 레알마드리드는 수도를 연고지로 하고하고 있는데, 스페인은 60여년간 독재(프랑크 총독시절)를 당한 독재주의 국가였다. 당시 바라하, 세비야,세비야, 발렌시야, 등이 독재체제였는데 카탈루야 지역은 정부군과 끝까지 투쟁했다. 이들은 1859년 마니아마니아 총독이 스페인내전을통해 독재정권을 몰아세우기전까지 매우 큰 핍박을 당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바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라이벌구도를 만들게 되었다.
왜 그들이 필사적일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대목이다.
스페인 리그가 뛰어난 리그로 평가받고 현재도 1위1위 2위를 다투는 최고의 리그가 된것은 그들이 매우 뛰어난 남미스타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고영입하고 공격 축구를 오랜 기간 지향발전함과 동시에 라이벌 구도를 매우 적절히 이용하면서이용하면서 이것을 '공격적인 축구' 로 뿌리내렸기 때문으로 평가하고 싶다.
3)3) 세리에리그
세리에리그는 리그가 '전술에 가장 민감한 리그' 라고 불리울만큼 단순히 재미있는재미있는 경기를 떠나서 매우 고급축구를 구사하는 원산지이도 하다. 그리고 축구프로리그 자체에 고유명사처럼고유명사처럼 붙여진 멋들어져보이는 타이틀 이름들이 많은데(사실 각리그마다 존재하긴 하지만) 이것을 마케팅해 세계적으로세계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이면 그들의 대표적 타이틀 이름을 다 알고 있을 정도다.정도다. 그 예로, 리그타이틀획득자에게 주어지는 스쿠데토, 우승팀 구분이나 유럽클럽대항전 자격과 같은 사안이사안이 걸린 경우에 붙여지는 스파레지오등이 그 예이다.
세리에의 역사를역사를 찾아보자.
1898년 Campionato Nazionale란 이름의 챔피언쉽 이후에 완벽한 의미의 전국 프로리그는프로리그는 Lega Calcio라고 불리우며 출범하는데 이때가 1929년이며 시즌은 1929/1930 이다. Ambrosiana-Inter(현 인터밀란의인터밀란의 전신)가 우승하며 시작된 세리에는 하지만 세계대전으로 44-45년동안 중단되었다.
리그타이틀을 획득하면 'Scudetto''Scudetto' 를 획득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세계대전이후에 우승클럽에게는 다음 시즌 유니폼에 방패모양이방패모양이 생긴 이탈리아 국기모양을 삽입할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대단한 영광이다.영광이다.
이탈리아 리그는 최고레벨인 세리에 A를 기반으로 세리에 B, 세리에세리에 C1, 세리에 C2, 그리고 세리에 D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리에 C1 부터는부터는 지역적인 구분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보면 그다지 큰 리그는 아니구나 라고라고 생각할수 있는데, 사실 C1의 경우에는 그룹이 두개로, C2는 세개로, D는 9개의9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피라미드형식의 기반을 바탕으로 세리에A까지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탈리아 축구의 최고라면 누가 뭐래도 유벤투스를 꼽는다. 세리에에서는 리그 10번의 우승팀에게우승팀에게 클럽문장위에 Gold Star를 붙이도록 하는데, 유벤투스는 유일하게 두개의 별을 부착하고 있다.있다.
4)네덜런드 리그
네덜런드 리그가 가장 강했던 시점은 언제인가라고언제인가라고 묻는다면, 아약스가 가장 강했던시절을 찾아봐라고 대답한다. 95년? 이라고 묻는 이들이 많을것이다.많을것이다. 물론 95년 아약스는 매우 강했지만 그렇다고 리그 전체까지 강하게 만들만큼의 지속력은지속력은 없었다.
반면, 크루이프가 17살에 아약스의 주전이 되던 64년부터 아약스가 재도약 하던시점부터,하던시점부터, 드디어 70-71 챔피언스 리그우승을 하면서부터는 명실상부 최고의 팀중 하나가 되었고 그로부터그로부터 3년간을 주름잡게 된다.
또한 이때 네덜런드 특유의 토탈사커가토탈사커가 미겔스로부터 구사되기도 했던 시점이기도 한데 이 모든 시너지효과로 인해 아약스는 파나티나이코스,인터밀란,유벤투스등을파나티나이코스,인터밀란,유벤투스등을 연속으로 꺽으며 3연속 UEFA 챔피언스를 거머쥔 명실상부 최고의 팀으로 인정받았던 팀이되었고,팀이되었고,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로 떠나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바로 엊그제 베르캄프의베르캄프의 은퇴경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크루이프. 그 당시 그의 모습은 상대팀 선수에게는선수에게는 경악의 대상이였다. 마라도나와 동급이라고까지 평가받는 크루이프, 그는 어떤 선수인가?
당시 독일과 네덜런드의 결승전 이전의 준결승전에서 네덜런드는 브라질과의 경기를 했는데, 당시당시 리벨리노라는 유명한 선수가 있었다. 모든 이들이 사실상 브라질과 독일이 가장 강력한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쳤었고 네덜런드의 예상은 2라운드 진출정도로 예상했지만 이들이 준결승에서 만났던 것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였고 그 중심에 크루이프와 토탈사커가 있었다.경기 후 브라질의 일간지일간지 [져널 더 타르데]에서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가슴을 편 채, 지시를 내리는내리는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최선의 방법을 가리키고 있다. 핏치의 중앙에서 게임메이킹을 하는하는 것 뿐만아니라 골대 앞에서 득점을 노린다. 그는 팀의 두뇌이자, 언제 터질지터질지 모르는 냉정한 폭탄이다. 그리고, 그 냉정함에 리벨리노는 졌다." (밑에 기술하겠지만 리벨리노는리벨리노는 펠레가 지목한 브라질 최고의 선수였고 선수시절의 위상은 지코, 소크라테스급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네덜런드가 아약스를 선두로 70년대 초반 강한 위력을 보였지만보였지만 전체 리그나 팀에 대한 우수성이 당시의 우루과이(우루과이는 WM전술채택후 대단히 강한 전력.)전력.) 보다도 낮게 평가되던 시기 이기도 했는데 당시 언론을 보면 잘 드러난다.드러난다.
데텔레그라프 '네덜란드, 2차리그 진격! 그 진격은 어디까지인가?' 라며 기사화했고, 결승에결승에 진출하자네덜란드 결승진출!! 이거 정말인가? 기적이다!! 라고 그야말로 대문짝만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사실사실 월드컵이전부터 네덜런드는 2차리그진출정도가 가장 적절하다고 하는 도박사들의 예측들도 반증하듯, 이런 부분들은부분들은 비록 아약스와 네덜런드가 강한 팀이긴 했지만, 국제적인 지명도에서 브라질, 서독,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에게는 조금씩 떨어졌던 것들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후이후 PSV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히딩크가 87-88시즌 트리플크라운(리그챔피언, KNVB즉, 네덜런드네덜런드 축구협회컵우승, 챔피언스컵)을 달성하고 95년에 아약스가 트리플 크라운은 아니지만, 챔피언스리그컵, 리그챔피언, 도요다컵,도요다컵, 유럽수퍼컵, 네덜런드 수퍼컵을 얻어내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 하였다.( 그 당시는 유망주였던유망주였던 선수들이지만 지금 이름으로보면 다비즈, 라이카르트,시도르프, 클루이베르트,반데사르, 오베르마스, 카누, 리트만넨,라이지거, 로날드 데데 부어, 프랑크 데 부어등)
어찌되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와크루이프와 아약스등이 당시 최고의 스타였기에 네덜런드 리그도 아약스를 바탕으로 위상을 떨쳤지만 역시역시 한두팀의 잉글랜드와 더불어 리그 전체가 강하다는 평은 받지 못했다.
5)분데스리가
독일은 방식이 사못 다르다. 그들은 연방국가여서 처음부터 지역리그를 병행하고,병행하고, 여기서 우승한 클럽이 모여'Championship' 대회를 통해 최종 챔피언이 나왔다.그 이후 1963년1963년 8월 24일, 독일 축구의 전력 상승을 위한 전략으로, 서독의 3개 지역지역 대표 클럽을16개 팀으로 승인하고 분데스리가가 시작되었다.1972년 유럽컵을 거머쥐고 1974년 월드컵까지 거머쥔거머쥔 독일이 당시 세계 최강의 리그로 자리잡은 것은 어떤 전문가들도 토를 달지달지 않는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동독의 북부리그를북부리그를 합쳐 4개 지역으로 늘어났다. 통일 전 동독에는 오베르리가(Oberliga)가 있었으나, 통일 후후 대부분의 유명한 클럽들이 우수 선수들을 서독의 구단들에게 빼앗기고 자본주의 경영에 대한대한 경험부족으로 여러 클럽이 해체되기도 하였다. 현재 FC 한자 로스토크, FC 에네르기에네르기 콧부스만, FC 디나모 드레스덴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고 있다.
3. 차붐이차붐이 활약하기 시작할때의 유럽 리그의 랭킹은?
차범근이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은퇴할때까지의 시점은시점은 재밌게도, 북유럽축구의 전성기이면서 몰락과 같이했다.60년대중후반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축구전문가들은 북유럽의 전성시대라고 말한다.말한다. 이 전성기가 세리에의 시대로 이어지기전까지는 지속되었는데,이때부터 약 10년간 세리에의 전성시대가 도래된다.도래된다. 구지 다른 시대의 평가지수까지 자세히 말하자면 안그래도 긴 글이 더욱 길어지니길어지니 간단히 얘기하자면, 70년대 초중반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분데스리가는 유럽리그 랭킹에서 대부분 1위를1위를 지속시켰다. 이 부분은 한준희 위원의 칼럼에서도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의 축구전문가들이라면축구전문가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혹자는 당시 잉글랜드가 챔스컵을 6번이나 (77-84)(77-84) 가져왔던 것을 들먹이며 그들이 최고였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클럽 하나가하나가 리그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닌, 클럽내의 모든 팀들이 유럽간, 대륙간 경기에서경기에서 획득하는 포인트를 합산하는 공식적인 계산법에서 분데스리가는 크게 앞서있다. 이러한 현상이 불과불과 한시즌뿐 아니라 여러시즌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분데스리가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10여년간 증명했던증명했던 것이다.
차범근이 활약하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살펴보는 것이 당연히당연히 중요하기에 그 당시 시대를 기준으로 유에파 공식 기록을 토대로한 유럽리그 순위를순위를 살펴보면서 연대별 대륙랭킹을 합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7,80년대
1.독일 분데스리가
2.네덜란드리그,2.네덜란드리그, 영국리그
이 리그 순위는 당시 아약스라는 매우 뛰어난 클럽과 네덜런드네덜런드 선수들로 인해 네덜런드 리그 전체적으로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당시 영국리그도 매우좋은 평가를평가를 받았다. (프리미어리그라고 정식 시작한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불구 독일은 당시 최고로 평가하는데평가하는데 그 어떤 전문가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특출한 한두팀만 강했던 타대륙리그와타대륙리그와 달리 강한 클럽시스템과 풍부한 자원력을 바탕으로 가능했으며 그 수준이 타리그보다 훨씬훨씬 뛰어난 리그였음은 명백하다.
-80중후반-90년대
1.이태리 세리에A
2.영국 프리미어프리미어 리그
밀란등이 조직한 세븐시스터즈가 결성되려하고, 리그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특급스타들을 이때부터이때부터 대량으로 사기 시작한다.그리고 꾸준히 발전시킨 영국 리그도 활성화가 되기 시작하는데, 이이 당시 특히 80년대 중반에서부터는 분데스리가의 몰락이 시작된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정치적정치적 경제적 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프리메라 리그는 그 당시도 프랑스리그를 따라잡지는 못한못한 것으로 기록되있으나 서서히 격차를 따라잡고 있었다.
-90년대 중,후반
1.이태리1.이태리 세리에A
2.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90년대 말
1.스페인 프리메라 리그
2.세리에A,2.세리에A, 프리미어 리그
3.프랑스 리그
4.독일 분데스리가 (프랑스리그와 사실상 격차는 없음)없음)
-2000년대 초반
1.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2.영국프리미어리그
3.이태리 세리에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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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세리에A의 시대 이후에는 3대 빅리그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뒤서거니 하며 경쟁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사실상 유럽 전체 시장이 하나의 시장으로시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2. 챔피언스 클럽과 유에파컵을 통해통해 분석하자.
챔피언스 클럽이 현재의 위상을 갖게 된것은 92/93시즌 조별라운드의 도입과 더불어,더불어, 참가팀수를 32개팀으로 늘리며 상금의 엄청난 증가, 중계권료의 대폭증가등이 매우 큰 원인이다.원인이다. 더불어 챔피언스 클럽의 위상을 높이고자 이당시부터 유에파에서 탈락한 팀도 진출할수 있도록있도록 하는 조항을 삽입해 유에파의 독자권을 빼앗음으로부터라고 명확하게 규정할수 있다.
그 이전의 챔피언스 클럽은 현재의 챔피언스 클럽컵이라는 이름조차 없었다. 또한또한 고작 8개팀만 참가하는 대회 규모는 비록 참가팀들이 뛰어난 최고의 팀이였음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 누가 누구를 이기든 혹은 최고의 클럽팀이 지던간에 그 긴장감이나 흥행면에서 유에파를유에파를 능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현재 최고의최고의 국가대항전은 월드컵이고, 월드컵을 위해 수많은 팀들은 각축전을 벌인다. 그 이유는 대다수대다수 팀들이 참가하는 대회이면서도, 이 대회를 참가하기 위해 자신의 지역리그에서 상위권에 들어야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각 지역대회에서 우승한 팀들에게만 참가자격이 주어지는 대륙간컵은 참가팀들이참가팀들이 작다. 규모도, 중계도 모든 면에서 작아질수밖에 없다. 최소한 현재의 챔스처럼은 아니더라도아니더라도 약 몇십개의 팀들이 챔스클럽컵을 위해 혈전을 벌일 예선전조차 없었고 당연히 중계권료나중계권료나 기타 관중 수입등도 경기가 별로 없으니 작을 수밖에 없다.
챔스대회는 그 시작에 있어서 유에파만큼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시작도시작도 유럽연맹에서 주최한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스포츠 일간지인 '레퀴프'와 당시 편집자였던 가브리엘 아노는아노는 유럽 전역을 망라한 클럽 대항전을 구상했던 것으로 팬들이 좋아할만한 팀을 초청클럽명단으로초청클럽명단으로 작성해 각 대표자들이 만나 승인을 받은 이후에 이루어진것이, 파르티잔과 스포르팅이 붙었던붙었던 챔피언스컵1차 대회였던 것이다.
챔스대회를 많이 치루다보면서 리그1위를 기록한기록한 팀들만 모여 경기하자는 조항을 두었기 때문에 향후 유에파컵이 창시된 이후 1위팀은1위팀은 유에파컵에 참가할수 없게 되어버리지만 이러한 단점때문에 비록 최강팀들의 모임이라는 이슈와 그팀들중에그팀들중에 우승을 했다는 명예는 주어졌어도 진화된 유럽대회라고 보는 시점은 예선리그가 생기며 챔피언스컵이라고챔피언스컵이라고 정확하게 명명된 92시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92시즌 이전에는 순수한 토너먼트 대회였을 뿐이다.뿐이다. 비로서 92/93시즌에야, 3차례 토너먼트 통과한 팀들이 조별리그를 거치고 4팀씩 2개조로 나뉘며나뉘며 다시 홈앤 어웨이 경기를 치루는 등의 룰을 가져왔으며 이 방식은 유에파에서유에파에서 가져왔다.
이에 비해 유에파컵은 본격적으로 각 리그가 활성화되기활성화되기 시작하고 현대축구의 시발점이라 볼수 있는 70년대 즉 71/72시즌부터 시작되었고, 우승팀을 제외한제외한 상위권팀들, 즉 아쉽게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최고의 팀들이라면 모두 모여서 경기하는경기하는 이른바 유럽통합리그와 같은 형식이였던 대회다.
유에파컵의 전신은 무역박람회와 같이했는데, 이는이는 당시 무역의 중요성과 각 국가들의 발전과 같이 대회 규모도 챔스클럽컵의 전신과는전신과는 달리 나날히 발달했다. 유러피언 챔피언 클럽스 컵이 창설된 55년 4월 18일18일 바로 2주뒤에 창설되었는데, 이 대회이름은 인터시티즈 페어스컵이였다. 유러피언 챔피언 클럽컵이 출전팀에출전팀에 조항이 걸려있는등 그다지 크게 발전하지 못한 반면 인터시티즈 페어스컵은 매우 활발한활발한 발전과정을 가져왔다. 58-60시즌에는 16개 클럽이 참여했고, 대회를 매년 개최하였으며, 62년에는 참가팀이참가팀이 32개팀으로 늘었다. 명실상부 전 유럽을 통털어 최고의 대회였던 이 대회는 71/72시즌에71/72시즌에 'UEFA컵'으로 정식개칭하고, 이전의 관리자였던 무역박람회와의 고리를 끊고 유럽의 독자 대회가 되었다.되었다.
즉 그 당시 유럽의 권위을 가지고 정식으로정식으로 예선부터 치열한 과정을 거치는 최고의 명예와 이윤까지 남는 대회는 유에파컵이였던 것이다.것이다. 이렇게 유에파컵이 창설되고 유럽의 전통대회로 규정된 시점이 매우 묘하게도 분데스리가의 전성기와전성기와 똑같다. 잉글랜드 클럽의 전성기는 쇠퇴하고 68년부터 84년 사이에 남유럽팀의 우승은 단단 한번밖에 없을정도로 독일과 네덜런드의 전성시대가 도래되었다.
이렇게 살펴본살펴본 유에파컵의 전통성은 챔피언스클럽컵보다 훨씬 깊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클럽팀들은독일클럽팀들은 챔피언스클럽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음을 다음 자료에서 살펴보자.
다음은 역대역대 챔스리그 우승팀이다.
2003 AC 밀란 0-0(pk) 유벤투스
2002 레알 마드리드마드리드 2-1 레버쿠젠
2001 바이에른 뮌헨 1-1(pk) 발렌시아
2000 레알레알 마드리드 3-0 발렌시아
1999 맨체스터 Utd. 2-1 바이에른 뮌헨
1998 레알 마드리드 1-0 유벤투스
1997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3-1 유벤투스유벤투스
1996 유벤투스 1-1(pk) 아약스
1995 아약스 1-0 AC 밀란밀란
1994 AC 밀란 4-0 FC 바르셀로나
1993 올림피크 마르세이유마르세이유 1-0 AC 밀란
1992 FC 바르셀로나 1-0 삼프도리아
19911991 크르베나 0-0(pk) 올림피크 마르세이유
1990 AC 밀란 1-0 SL 벤피카벤피카
1989 AC 밀란 4-0 부쿠레스티
1988 PSV 0-0(pk) SLSL 벤피카
1987 FC 포르투 2-1 바이에른 뮌헨
1986 부쿠레스티부쿠레스티 0-0(pk) FC 바르셀로나
1985 유벤투스 1-0 리버풀
1984 리버풀리버풀 1-1(pk) AS 로마
1983 함부르크 SV 1-0 유벤투스
19821982 아스톤 빌라 1-0 바이에른 뮌헨
1981 리버풀 1-0 레알 마드리드마드리드
1980 노팅엄 포레스트 1-0 함부르크 SV
1979 노팅엄 포레스트포레스트 1-0 말뫼 FF
1978 리버풀 1-0 클럽 브뤼게 KV
1977 리버풀 3-1 뮌헨글라트바흐
1976 바이에른 뮌헨 1-0 AS 생테티엔느생테티엔느
1975 바이에른 뮌헨 2-0 리즈 Utd.
1974 바이에른 뮌헨뮌헨 1-0 AT 마드리드
1973 아약스 1-0 유벤투스
1972 아약스아약스 2-0 인터 밀란
1971 아약스 2-0 파나시나이코스
1970 폐예노르트폐예노르트 2-1 셀틱
1969 AC 밀란 4-1 아약스
1968 맨체스터맨체스터 Utd. 4-1 SL 벤피카
1967 셀틱 2-1 인터 밀란
1966 레알 마드리드 2-1 FK 파르티잔
1965 인터 밀란 1-01-0 SL 벤피카
1964 인터 밀란 3-1 레알 마드리드
19631963 AC 밀란 2-1 SL 벤피카
1962 SL 벤피카 5-3 레알레알 마드리드
1961 SL 벤피카 3-2 FC 바르셀로나
1960 레알레알 마드리드 7-3 프랑크푸르트
1959 레알 마드리드 2-0 스타데 데 렝렝
1958 레알 마드리드 3-2 AC 밀란
1957 레알 마드리드마드리드 2-0 피오렌티나
1956 레알 마드리드 4-3 스타데 데 렝
위의 결과를 살펴보면 필자가 상기에서 설명한 리그상황과 정황이 어느정도 드러남을 알알 수 있을 것이다.또한, 총 대략 분데스리가팀은 12번에 결승에 올랐는데, 약 4년에4년에 한번골로 결승에 올라간 것으로, 차범근이 뛰었던 당시의 챔스리그를 통해 보면, 세리에나세리에나 라리가 등의 유명한 클럽등은 보기 힘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그만큼 당시의 최고 클럽의 대열에는 세리에는 끼기 어려웠고,
최고의 리그로는 분데스리가, 그그 바로 밑 혹은 비슷한 리그는 잉글랜드리그였으며, 네덜런드리그 역시 수준급이였던 것이다. 자자 주목해 볼만한 것은 74년부터 84년까지 분데스리가팀은 결승에 7번 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유럽클럽컵은 92/93이전에는 출전규모도, 방식도 모두 현재의 방식이방식이 아닌 토너먼트였고 참가팀도 적었기에 그들 팀이 모여서 하는 이벤트성 대회 혹은혹은 명성을 쌓기 위한 대회 그 이상의 실력을 평가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며,따르며, 보다 정확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전체 유럽의
대륙팀들중 얼마나 많은 자기자기 소속의 리그 팀들이 각 상대 대륙과의 공신력있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내고 포인트를 획득하느냐가 중요한 잣대가 될수 있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유에파컵이 가장 공신력공신력 있는 대회가 되는 것이다.
당시 성적에 대한 것을 세리에와세리에와 비교하여 구체적 자료로 입증해보면 (RSSSF자료 인용)
UEFA컵 최종성적.
77/78': 피오렌티나(64강)·인터밀란(64강)·라치오(32강)·토리노(16강)피오렌티나(64강)·인터밀란(64강)·라치오(32강)·토리노(16강)
78/79': 나폴리(64강)·토리노(64강)·비젠차(64강)·AC밀란(16강)
79/80': 토리노(64강)·인터밀란(32강)·나폴리(32강)·페루자(32강)
80/81': 유벤투스(32강)·토리노(16강)
81/82': 인터밀란(32강)
82/83': 피오렌티나(64강)·나폴리(32강)·AS로마(8강)피오렌티나(64강)·나폴리(32강)·AS로마(8강)
83/84': 베로나(32강)·인터밀란(16강)
이에 대한 독일리그 팀들 성적은(79~83까지만 보더라도, 그 이상은이상은 위에 기록)
유러피안컵: 함부르크 80' 준우승, 83' 우승. 바이에른 뮌헨뮌헨 82' 준우승,
컵위너스: 뒤셀도르프 79' 준우승, 예나(Jena) 81' 준우승.
UEFA컵: 프랑크푸르트 80' 우승, 뮌헨글라드바흐 79' 우승 - 80' 준우승, 함부르크함부르크 82' 준우승.
총 5시즌을 합산하면 유러피안컵: 우승 1회 준우승준우승 2회,
UEFA컵: 우승, 준우승 각각 2회, 컵위너스컵: 준우승 2회의 놀라운놀라운 성적을 가져왔으며 이외에도 많은 분데스리가 팀들이 좋은 성적을 유지해왔던것이다.
3. 분데스리가, 그들은 왜 강했는가
분데스리가가 과거만큼의 명성을 구가하지구가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그들의 70년대초중반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의중후반까지의 전력과 기반은 전 리그중에서 최고라고 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다. 74년 네덜런드네덜런드 월드컵에서 네덜런드를 약체로 언론이나 전문가가 분류했던 이유중 하나가 "분데스리가 선수가 한명도한명도 없다"라고 하는 이유에서 보듯이 그만큼 분데스리가는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것이다.
자 그렇다면 왜 분데스리가는 강했을까?
나는나는 그 이유를 74년 월드컵의 우승, 뛰어난 경제력과 분데스리가의 합산, 타리그의 상대적상대적 혈통주의등의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74년 월드컵을월드컵을 살펴보자.
상기 자료에서 , 독일 축구는 74년부터 전성기가 꽃피웠다라고 되어있다. 그리고그리고 분데스리가가 74년을 계기로 최고로 군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74년 월드컵은 무슨무슨 대회였길래 그러한가?
74년 월드컵은 앞서 지적했듯이 역대 월드컵중 가장 큰큰 선을 그은 월드컵이다.
몇가지 특징이라면, 축구의 신 펠레의 은퇴로, 새로운 시대의시대의 서막을 알린 월드컵이였으며, 대회 운영방식이 가장 공정한 방법으로 운영되었다고 일컬어지는 리그전으로리그전으로 운영되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동안의 월드컵은 1차리그에서 리그를 벌여 8개국을 뽑아, 준준결승등부터준준결승등부터 토너먼트를 치루는 방식으로 어떻게 보면 현대의 월드컵 리그앤 토너먼트 룰보다 조금조금 더 단판승부였고 따라서 , 실력보다는 여러가지 외부요건이 크게 중요할수 있었던 것이다.것이다. 하지만 74년부터는 제대로된 실력을 평가해 최고의 팀이 우승을 할수 있도록 하자며,하자며, 우선 리그를 나누고, 상위 4개팀을을 선출해 총 8개국가를 나누는데 토너먼트가 아닌,아닌, 리그형식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4팀을 뽑으면 다시 4팀이 리그전을 펼치고, 거기서 1등을1등을 한 양국가가 결승을 치르는 방식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운영은 개최국에개최국에 수입을 올려주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각 팀들이 모두 승부에 인정할수밖에 없도록없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 제대로된 선진 축구의 묘미를 즐길수 있고, 경기보다 승부에승부에 집착해 재미를 떨어뜨리는 역행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이런 운영은 82년 스페인 대회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아직도 아쉬운 마음이 이를 데데 없다.
또 하나의 특징은, 쥴리메컵이 없어지고 새로운 '피파월드컵'이 생겨나게생겨나게 된다.
또한 세계축구의 영원한 강자 펠레가 사라지며 한 예언, '리벨리노가 있는있는 한 브라질 축구는 영원하다' 때문에 새로운 10, 리벨리노를 지켜보는 재미를 줬다.줬다. 당시 팬들은 "와 이제 새로운 펠레가 나오는구나.. 펠레가 지목한 리벨리노는 얼마나얼마나 대단할까" 라는 기대감속에 두근거렸다고 한다.
(물론 그의 전설적 예언의 실패는 여기서부터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리벨리노 대신 새로운 영웅들이 속속 나타났으니)
지금까지 말한것이말한것이 74년 월드컵 이전이나 시작부터 보여주던 흥행거리이자 특징이였다면 경기중, 그리고 후에 나타난나타난 결과도 축구의 한 획을 긋는 것들이 많았다.
즉, 전술축구의 홍수라고 불리울만큼불리울만큼 각팀들이 이색적인 전술축구를 보여줬으며, (예를 들어 우루과이의WM의 발전형, 네덜런드의 토탈사커, 독일의독일의 리베로등등) 이러한 전술축구는 현대축구의 전술이 가진 의미보다 훨씬 중요함을 보여줬다.
또한또한 각팀들마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스타들이 즐비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 경기가 재밌을수밖에재밌을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지금의 스타들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전설적인 스타들이 즐비했던 대회로, 리벨리노리벨리노 조르징요의 브라질(이 둘의 브라질은 지코의 브라질보다 강했던 것으로 평가받을만큼 대단한 팀이였다),팀이였다), 리베로를 구사해도 좋을만큼 최고의 수비수이면서 어디서든 골을 터트리던 베켄바우어와, 유럽축구 역사상역사상 최고의 골잡이로 평가받는 게르트 뮐러의 서독, 지저스 크루이프라는 별칭을 만들어낸 요한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런드,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챔피언이 된 폴란드는 라토라는 득점왕을 데리고왔으며,데리고왔으며, 이탈리아에는 2년동안 무실점 기록행진을 하던 디노 조프라는 제2의 야신이 있었다.
전통적 강자와 새롭게 치고 올라가는 팀들의 선전 모두 훌륭했고, 전술적 움직임도움직임도 매우 훌륭했던 대회였다. 바로 이 대회에서, 서독이 우승하게 되면서부터 그야말로 분데스리가의분데스리가의 10년천하가 시작된것이다.
두번째로 서독의 경제발전이다.
당시 서독은 경제의경제의 황금기,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릴만큼의 경제대국이였다. 일본이 서독을 추월한것은 70년 후반에가서일정도로 당시는당시는 세계2위의 경제 대국이였다. 그 당시 서독은 전통의 공업지역을 보유하고, 미국의 원조까지원조까지 받으며 자유시장경제를 독일에 적합하게 발전시켰던것은 물론 내수시장마저 활성화되었기에 매우 윤택했던 삶을삶을 누렸다. 거기에 특이한 것은 동독까지도 당시 경제력이 세계 9위에 랭크될만큼 뛰어난뛰어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던것도 그 당시 독일지역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서독의 경제 발전은발전은 2차대전 종전후에, 연합국이 독일을 4등분하고 베를린을 4등분, 전체 독일 지역도 4등분해4등분해 관리하였고, 동독에 해당되는 지역은 소련이 관리및 발전시킨반면 나머지 지역은 연합국 3개국,3개국, 즉 경제력과 산업기술이 발달한 국가들에 의해 관리되다 보니 더욱 탄력을 받아왔던것이라고도받아왔던것이라고도 볼수 있다. 또한 라인강의 기적으로 유명한 에르하르트가 서독 경제부흥의 정책담당을 맡으며맡으며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그가 확고하게 다진 여러가지 경제체제는 서독의 기적으로 일컬어진다.일컬어진다.
여러가지 요인덕분에, 50년대에 들어와 경제의 붐이 올라가기 시작해, 60년대에는60년대에는 산업생산이 30년대의 독일과 동시기 비교해 약 70% 성장 하였고, 실업률은 1.2%.1.2%. 임금은 불과 5년만에 80%가 상승했던 것들이 바로 50년부터 60년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일들이다.
이후에도 다양한 사회안정화 정책을 비롯해 안정과 성장촉진법과 같은 독일의독일의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법률들을 만들어 그 기틀을 확고히 했고, 이런 준비들은준비들은 73년 유가상승으로 세계가 어려움에 직면할때 경제제반상황이 악화되면서도 잘 버텨내면서 다시 76년부터76년부터 인플레비율이 떨어지고
재성장하게 되는것이다.이때 유명해진 인물이 독일의 슈미트 총리였던 것이다.것이다.
1차 기적에 의해 54년 이미 서독은 월드컵에서 우승을 일궈냈다면, 60년대60년대 후반부터 각국이 리그를 활성화하고 본격적인 현대 축구가 시작되면서 74년 월드컵을 통해통해 재2의 전성기를 일궈내는 것이다.
상대적 혈통주의란 이른바 현대축구시장에서현대축구시장에서 볼수 있는 유럽전체의 자유로운 이적조항과 달리 당시 상황이 자국의 특급 선수는선수는 자국의 리그에 유지시키고, 외국의 선수는 영입하는 것을꺼려했던 문제를 지적하는것인데, 그런면에서 독일축구는독일축구는 외국선수 영입에 그나마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리그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세계클럽팀들의세계클럽팀들의 재정상의 악화나 보수적인 리그의 태도에 반해 독일축구가 그나마 열려있던 모습에서 찾을수찾을수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세리에는 60년대 전성기를 잠깐 구가하다가 큰큰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며, 남미스타들을 방출하기 시작했고 이른바 남미스타들이 이태리를 배척하는 상황까지상황까지 이르며 몰락하게 된다. 결국 73년에 외국선수를 완전 폐쇄하고, 이는 오히려 세리에의세리에의 설자리를 잃게 만들게 되며
유명한 외국선수들 몇몇마저 방출되게 이르른다. 그뿐 아니라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와, 비리등에 연루되고 많은 클럽이 무너지면서 선수들에게 악감정까지 주고 많은많은 선수들이 스스로 외면하기까지 이르르다가 클럽에 외국인 선수가 허용된 시기는 1980년이 되서야되서야 시작이 된것이다.(향후 차범근이 세리에에 가지 않은 이유에도 나온다.)
그리고 1985년에는 악화된악화된 축구재정이 다소 풀어지며 이른바 세븐시스터즈들이 강력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라리가의 경우에는 자국리그 선수를 출입제한을 시키면서 자국리그를 보호하려고 애를 쓰는데쓰는데 그게 바로 78년이다. 거기에 레알과 바르셀로나는 불법행위를 했지만서도(이말은 자국리그의 폐쇄적 조치에조치에 비밀리에 대항하기 위해 선수계약을 했던 것을 말한다.) 외국인선수는 뛰지 못하게하는 금지조항까지금지조항까지 두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그 때이다. 매우 놀라운 폐쇄적인 시스템이었는데,
그럼에도그럼에도 분데스리가는 70년대부터 꾸준히 외국인선수 출전1인에 2인보유조항이 있어 현대적 클럽시스템을 유지하고 관리한관리한 전통있는 리그였고 당시에는 최고가 될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각 리그는 당시 세계대전으로 인한 흉흉한 민심과 국가의국가의 자국선수, 자국리그 보호 정책탓에 선수이동이 활발하지 않았고, 각국의 최고스타는 자기 나라에서나라에서 뛰도록 유도하던 시절이였으며, 영국팀은 유에파에서 68년에 첫 우승할만큼 그다지 부각받지 못하다가못하다가 리버풀이 강세를 떨치기 시작하다가 차후 사망사건이 일어나면서 90년대 들어서 세리에를 추격하며추격하며 다시 발전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고,마드리드가 과거부터 최고의 팀이였던 라리가는 스테파뇨와 푸스카스가푸스카스가 있던 마드리드시절을 황금기로 이끌었고, 덕분에 60년대 강팀으로 군림하며 77-82년 리그 5연패를5연패를 하였지만 그런 강력했던 레알보다 74-84년의 챔스리그에서 독일클럽팀들이 대부분 결승에 오르게 되는되는 걸 알수 있고(7번) 챔스리그를 제외한 유에파컵이 리그의 랭킹을 합산하는데 가장 중요한중요한 대회였다는 것으로 볼때도 역시 라리가는 마드리드를 제외한 팀은 그다지 강력한 인상을인상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면서 90년초 강팀으로 급부상하며급부상하며 라이벌관계로 인해 선수를 대폭 사들이고, 이로 인해 또한번 한층 발달하게 되는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세리에의 독보적인 팀이였던 유벤투스. 그들이 첫첫 챔스리그 우승을 한 것은 역시 85년이며, 유에파 역시 77년에 한번 이후이후 무려 13년 이후인 90년에 우승을 한다. 플라티니가 이팀의 소속이였을때는 이미 세리에가세리에가 부활을 조직하며 선수를 수급하던 시기인 동시에 분데스리가가 10년의 독보적인 위치에서 몰락하던몰락하던 시기였다. 지코가 이적한 것도 역시 이 시점이였던것이고 물론 차범근도 밀란으로부터 제의를제의를 받았다.(당시 밀란이 가장 적극적이였고이러한 영입전으로 인해 차후 우승을 일군다) 하지만 그는 그는 AC밀란이 조작사건으로 강등되었다는 것등으로 인해 (1980년) 그러한 팀에 돈만 보고 이적한다는이적한다는 것은 자신의 축구 프라이드에 크게 훼손되는 것으로 생각했을게 자명하다. "나는 페널티에어리어안에서페널티에어리어안에서 반칙을 유도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하고 싶지싶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라고 너무나 당당하고 여유로운 그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없는 일이다..
분데스리가가 무너지던 시기만을 지적하며 결국 분데스리가에서 선수생활을선수생활을 마감해 대스타가 아니다라는 매우 비논리적인 반박을 한다면, 똑같은식의 반박도 가능하다. 펠레는펠레는 왜 미국리그에서 뛰었는가? 요한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에서 뛰다가 왜 LA로 갔을까? 그가그가 LA로 갔다고 LA가 명문팀이 되었는가? 베켄바우어는 독일에서 뛰다가 뉴욕으로 갔다. 플라티니도플라티니도 아주 오랜시간 낭스에서 뛰다가 차후에 이적을 했을뿐인데 그렇다면 낭스에서 그가 남긴남긴 기록은 무엇인가? 전술이 통하지 않는 존재라는 뮐러, 지금도 독일 최고의선수대열에 있는있는 그가 왜 독일리그에서 마감을 했을까?
에우제비오는 벤피카,뉴저지라는 팀에서 왜 선수생활을선수생활을 마감할까?
야신은 왜 모스크바에서 선수생활을 했을까?
차범근보다도 약한팀과 약한 리그에서 뛰었던 선수들을 우리가 지금 기억할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국가대표에서 보여준 능력과 당시 국가대표팀 성적이 좋았기 때문일뿐이고, 그 선수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팀 자체가 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인이 아니라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든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한국인 스스로들이라니 이해 할수 없는없는 일이다.
4. 분데스리가의 차범근 어느정도였는가?
위에서 이토록 길게 당시당시 리그상황과, 축구의 역사를 논하며 거추장스러울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당시당시 분데스리가의 위상을 말하고자 함에 있었다. 제대로만 글을 읽었다면, 적어도 70년대 초중반부터초중반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의 분데스리가는 최고였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죽어도 인정하지 못하겠다 하더라도하더라도 최소한 '최고의 리그였고, 견줄만한 리그는 지금의 빅리그처럼 별로 없었다' 라고 생각할수는생각할수는 있을것이다.
그렇다. 사실상 당시 상황은 국가대표가 강하면강하면 클럽리그도 강해진다와 더불어, 경제가 좋을수록 탄력을 받는 시스템이였다.그런면에서 최고의 경제성황을 누렸던누렸던 탄력을 이어받았던 독일과 72년 유럽컵 우승, 74년 월드컵 우승을 거머쥔 독일은독일은 명실상부 자신의 리그를 최고로 발전시키며 10여년을 최고의 무대라고 각인시키게 된다.
또한 분데스리가는 바이에른뮌헨이 강했지만 여타 다른 팀들이 대부분 강력한강력한 한 축을 가지고 있었던 것 역시 리그 자체가 강할수밖에 없던 이유를이유를 설명해준다. 82년 월드컵만해도, 주력 선수들이 쾰른, 함부르크, 카이져스, 슈트트가르트, 바이에른, 샬케등의샬케등의 다양한 팀에서 이루어질 정도였으니
대부분의 타리그에서는 강한팀 한두개에서 모인 선수들로선수들로 이루어진것에 비해 그 저변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나라의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너무나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말하면 된다. 이제 막막 경제성장을 위해 몸부림치고 허리끈 졸라맸던 시절.. 축구에서도 아시아최고는 커녕 북한,말레이시아 등과도등과도 다퉜던 시절.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던 나라였다.
현재 우리 선수들이 스폰서나 에이전트의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아 해외진출을 노림에도 큰 어려움을 겪는데, 당시에는 유망주를 발굴해 지원해줄수지원해줄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차범근은 어린나이도 아닌 26세의 나이에 프랑크푸르트에프랑크푸르트에 둥지를 틀고 단 한번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잡아챈것이다.
너무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면이다.면이다. 만약 그가 20세의 나이에 혹은 그보다 어린나이에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면 그의 기록은기록은 어떠했을것 같은가?
축구선수로는 불혹의 나이에도 팀을 이끄는 선수였던 것을것을 볼때, 그의 천재성이 폭발했던 25살이전부터 큰 무대에서 자신의 경험을 늘렸더라면 지금은지금은 우리가 이런 논쟁을 할 필요도 없는, 정말 어마어마한 상상의 존재가 되지되지 않았을까 매우 아쉽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차범근이 세계최고 리
그에서 단 한번의한번의 적응도 필요하지 않을만큼 완벽히 적응한것으로만 보아도, 그가 어렸을때 진출했더라면 최소한 골은골은 30~50% 증가했을 것이며 지금에와서 깨진 외국인 최다골은 깨어지지 않았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26세의 나이에 진출해 처음 유럽축구를 대면했음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만큼 축구에는 천재적이였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아쉽지만 일단 그가 이룬것만으로도 평가해보자.
1)차범근이 뛴 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당시 분데스리가는 그나마 타해외리그보다 선수영입에 자유로웠는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선수는 두명밖에 보유할수 없었으며 한명만 출장이 가능했다.(비유럽선수가가능했다.(비유럽선수가 아니다. 자국인이 아닌 외국선수를 말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세리아네 라리가처럼 해외선수 출입에출입에 폐쇄적이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 발전해 지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기에 분데스리가는 성장했던성장했던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이라면, 바르셀로나의 경우 에투, 호나우딩요, 데코, 마르퀘즈, 메시등의 주축선수중한명밖에주축선수중한명밖에 못나온
다는 소리이니 얼마나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조항인지 모를것이다.
현대 축구의 실례를 하나 들겠다.
테베즈는 뮌헨에서 매우 큰 관심을관심을 받았던 선수였는데 2004년 루메니게는 바이에른 뮌헨의 영입대상이던 테베즈에 대한 논평을 하면서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적절한 가격이 아니면, 그의 영입은 성사될수 없다.하지만 한가지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앞으로 남아메리아카의 스카웃활동을 줄일 것이다.
다음 시즌부터 분데스리가의분데스리가의 비유럽용병이 4명으로 제한 되고 2006년부터는 3명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남아메리카의 방대한방대한 시장은 무너질것이다." 이 말은, 4명, 3명의 비유럽선수 제도자체가 그토록 뛰어나고 풍부한풍부한 인적자원을 가진 남미의 선수들을 외면할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인해 테베즈같은테베즈같은 뛰어난 선수를 유럽에서 빨리 보기 힘들것이라는 예측을 구단의 수석인 사람이 하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 조항이 얼만큼 유럽인들에게유럽인들에게 적합한 조항인가, 혹은 해당 국가나 그 지역사람들에게 훨씬 축구하기 좋은 배경이배경이 될수 있는가를 설명해주면서 동시에 아시아권 선수들에게는 더욱 어려울수밖에 없는 큰 벽이 되는 셈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그 당시 분데스리가에 뛰는 외국인 선수들은 어떤 선수들이겠는가?
당연히 최고의 선수들이다. 지금처럼 유니폼몇장 팔려고 선수영입을 한다는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야 전세계 어디서든 티비를 통해 선수들을 보고 인기가 올라갈 수 있으니 이러한 마케팅이 발전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마케팅조차 없었다. 오로지 실력뿐이다.
그 당시의 분데스리가와 견줄만한 시장을 갖추려고 노력했던 리그라면 잉글랜드리그(네덜런드리그는 선수는 훌륭했지만 특정 클럽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다.) 였다고 할수 있었는데 당시 영국리그의 최고선수였던, 아스날 최고의 선수우드콕(이 선수는 달그리시와 더불어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중 하나로 평가받는다.)과, 유럽최우수선수상을 거머쥔 키건이라는 선수가 곧바로 분데스리가로 오게 된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함부르크 메니저는 키건과 더불어 차범근을 최고의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로 꼽았다. 이 당시를 회상하며 우드콕은 '키건의 분데스리가성공에 자극받았었다' 라고 언급했다.
당시 차범근이 활동하던 시절의 분데스리가는 선수몸값도 타리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후했다.
본 호프라는 선수는 81년 뮌헨과 계약하며 80년대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는데 이 선수는 74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으로 100DM을 제의받았다.차범근이 향후 밀란에게 제의 받은 금액은 이보다 더 많은것으로 알려졌다. 이전 펠레는 700만달러에 미국MLS에 이적하며 기록을 세웠었던것으로 볼때 당시 분데스리가의 규모를 알수 있고 타 리그와의 격차를 짐작할수 있다.그리고 키건과 우드콕등의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자신의 리그를 평정한후에 그리 큰 이적료나 몸값을 받지 않고도 분데스리가로 옮겨온것에서 그 당시 분데스리가의 선수들에 대한 생각을 알수 있는것이다.차후에, 마라도나가 바르셀로나에 이적할때도 510만달러밖에 안되는 금액으로 이적하는데 이러한 추세는, 80년중후반 분데스리가가 몰락하고 세리에리그가 급부상하면서 유명 선수를 사들여 리그의 부활을 위하여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할때 부터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던 것이다.이 예로는, 마라도나가 나폴리로 이적하면서 몸값이 오르지만(이때는 이미 84-85시즌으로 80년대 중반의 세리에 부흥과정과 선수몸값이 천정부지로뛰던 시기였다.) 다시 이 기록은 바죠의 1700만 달러에 의해 금방 깨졌던 것들이 대표적인 이야기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처럼 못사는 나라의 선수가 성공하리라는것은 커녕 주전선수가 된다는건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헛된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1978년 6월22일에 두 번째로 독일에 도착한 차범근은 입단했던 다름슈타트가, 고국에 다녀왔던 차범근이 정해진 기안내에 오지 않앗다며 계약위반을 걸고 넘어오자, 대변인이였던 여우종씨와 함께 부흐만 감독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다름슈타트 감독) 다음날에 당시 브레멘에서
테스트를 요청해 3일간 테스트를 하게 되면서 자신의 실력을 완벽히 발휘한다. 당시 브레멘 메니저였던 앗싸워는 계약을 요청해서 크레스트 호텔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데, 이 소식을 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긴급 교전을 치게 되었는데 이들은 78년 박스컵에서 차범근의 활약상을 봐왔던 슐테가 차범근의 계약을 강력히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브레멘은 테스트에서 차범근이 너무나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매우 헐값에 계약을 하려했었고, 이것을 알면서도 오로지 축구를위해 계약을 하려했던 차범근은, 슐테의 연락을 받은 이후 곧바로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연봉 25만 마르크에 계약을 하고 다름슈타트에 이적료 20만 마르크를 주는 조건의 계약을 맺게 되며 역사적이고 사실상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만해도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있었다. 비록 분데스리가 최고는 아니였음에도 그 당시 맴버는 74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 그라보스키,휄첸바인이 있었고, 그 당시 세계 최고 수비수였던 오스트리아선수 '페차이'가 있었으며, 당시 대표팀 선수 니켈과 노이베르거등을 보유했던 매우 강한 팀이였다. 그리고 차범근이 영입되면서 스위스 국가대표 선수를 방출시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팀이 독일내에서 2-3위권이 아니였음은 당시 분데스리가의 수준을 설명해주는 예이기도 하다.)
곧바로 다음해에 독일 키커지의 신년 표지모델로 장식하게 되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였다. 키커지는 독일인 선수만을 주로 다루는 유명한 독일 축구잡지였고, 비록 분데스리가 전반을 다루지만 대부분 표지모델은 독일축구의 대표적인 선수들이 자리잡게 되었지만 데뷔시즌부터 분데스
리가를 폭격한 차범근이 바로 그 다음해 신년 표지모델로 장식했던 것이다. 또한 키커지는 79년의 차범근을 외국인스타중 최고의선수로 꼽았다. (그당시 외국선수로는 이미 위에 설명해있다. 키건과 같이 유럽최우수선수상을 받은이들과 더불어 각국의 국가대표만 모인 선수들이다. 독일선수들이 포함한된것은 당시에는 최우수선수로는 독일선수만이 대상이였고, 유럽최우수선수로는 유럽인들만이 대상이였다.차후 잠깐 기술된다.)
불과 1년만에 차범근은 팀의 최고선수이자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발돋움 하게 된다. 80-81 그가 선수생명의 사형선고와 같은 척추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도 재기했던 시즌이였는데도 8골을 기록하며 비교적 고전(?) 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의 위상과 실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되면서 분데스리가 전체 연봉3위의 기록으로 가게 되는데, 차범근이 레버쿠젠으로 가서 UEFA를 처음으로 팀에 안겨주면서 명실상부한 레버쿠젠의 명문화를 이끌게 된 시발점이 된 것이다. 발락이 차범근을 존경하는 것은 그가 레버쿠젠의 선수였기에 더더욱 어렸을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레버쿠젠에 가면 레버쿠젠 팬들은 "왜 차붐이 프랑크푸르트의 레전드냐 레버쿠젠의 레전드다" 라고 주장할 정도로 그는 레버쿠젠에서 그 의미가 매우 남다르다.
비교적 많은 나이였던 85-86시즌에는 무려 17골을 터트리고 아벤트포스트의 MVP를 석권한다.
MVP라는 공식제도는 없었지만 당시에는 축구잡지들을 통해 최고의 선수를 선발하기도 했다. 가장 권위있는 키커지는 올해의 선수상을 독일인과 외국인을 나눠서 선발했는데, 외국인을 대상으로는 차범근이 뽑히기도 했다. 아벤트포스트지에서 MVP를 선정한 것은 그 당시 전체 선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였다. 혹자는 지역신문에서 한것이라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시키지만, 만약 맨유지역 최고 일간지에서 박지성선수를 MVP로 인정했다고 하자. 그것은공신력이 없어지는것인가? 아니다. 충분히 그 의미가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차범근이 지역신문에서만 다뤄진것도 아니다. 이른바 키커에서도 수도없이 주간베스트, 월간베스트를 차지했고 다만 그해의 MVP라는 것은 올해의 선수와 같은 것인데 독일인만 대상으로 하였기에 대상자체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외국인선수상을 거머쥐기도 했던것이며 다른 잡지사나 지역신문사에서 그를 전선수통틀어 최고의 선수로 선정한것이다. 그가 축구뿐 아닌 모든 종목에서 테레사와 함께 세계 상승세 4대인물로 선정된것 역시 사실이였음을 이전 차범근 칼럼1편에서 사진자료로 공개한 바 있다.)
87-88시즌은 차범근의 포지션이 공격형미드필더로 변화가 주어진다. 그러면서 4골을 기록하게 되고, 그 해에 레버쿠젠을 팀에서 처음으로 UEFA우승으로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슈팅을 기록하고 영웅으로 남게 된다.외국인선수최다 득점은 71년에서 78년 약 7년간 시몬센이 남긴 76골이였으나 차범근은 불과 6년 6개월만에 81골을 기록하는 경이적인 위력을 보이며 그 기록을 갱신했다. 그가 89년 6월 19일에 은퇴하기 전에, 분데스리가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전성기 시절과 함께했고 함께 졌기에 더욱 분데스리가의 전설로 남아있을수 있는 것이다.
차범근이 좀 더 강한팀,이른바 함부르크나 뮌휀에서 뛰었더라면 그의 기록은 훨씬 더 대단했을것이다.많은 독자들이 이미 읽어봤으리라 생각되는 쿤트네처의 자서전(당시 함부르크 메니저)에도 차범근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나있다. 그는 "나는 차범근을 택하고 싶었다. 차범근은 당시 분데스리가 공격수 중에서 어느 누구보다 강하고 우수한 선수였다.
그 때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강의 리그였다.(여기서도 분데스리가의 위상은 설명되고 차범근에 대한 위상도 설명된다.) 그러나 마음 한 부분에서 또 다른 꼬득임이 있었다.'너는 이미 유럽 챔피언 팀 매니져로서 반년이란 세월을 보냈잖아! 팀에는 국제 경험 풍부한 선수가 남아돌 정도로 많이 있고..... 그러니 젊은 선수 둘을 택해라. 베테랑 선수들이 그 젊은 녀석들을 멋지게 키워 줄 것이다.'그 때 홀스트 후루베쉬와 랄스 바스돌프등의 공격진에 차범근을 끌어드려 페릭스 마가트와 만프레도 칼츠의 패스와 센타링을 받아 주었다면 함부르크는 3번째 리그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츠펠트와 에휀 베르크 콤비로 성공을 이룬 바이에른 뮌헨과 같은 황금기를 우리도 당시에 구가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매니져로서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로지 '장래성' 하나만 보고 차범근과 같은'안전패(安全牌)'를 버렸던 것이다." 라며 그 당시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그 글의 내용에서 차범근을 케빈키건과 더불어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말했다.
실제로 역사상 독일리그에서 뛴 역대 외국인 대스타중에는 지몬센, 키건 우드콕등과 더불어 차범근이 합류해 있고 키커지에서 자체 평가한 평점에서 이들을 앞서 9위에 있다( 독일과 외국인 포함한 전 선수 랭킹인데 이 랭킹은 독일리그에서 아주 오랜기간 뛰지 않았던 루메니게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이 포함되면 랭킹은 약 13위정도로 예상되는데 하지만 상위랭커중 당시 분데스리가가 아닌 90년대이상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있기에 그들이 남긴 기록과 상대적 평가를 한다면 차범근의 평가는 다시 10위권 이내로 들어설 것이다)
이러한 분데스리가의 전성기는 잉글랜드가 계속된 견제를 하던중에 85년 리버풀vs유벤투스와의 결승전에서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영국리그가 거의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던것과 더불어 분데스리가의 선수 몸값(독일인들은 누누히 얘기하듯 정확한것을 좋아하지 부풀리는 것을 싫어했다. 지금
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당시 상황은 더 확고했다고 볼 수 있다.)이 적절했지만, 세리에A가 세븐시스터즈라는 것을 조직하고 부활을 꾀하며 정식적으로 자금이 유입되면서 분데스리가등의 유명선수들을 사들이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세리에의 작업은 8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다가 85-86들어 왕성하게 부활을 꾀하였고, 이른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부터는 세리에의 완벽한 장악을 가져오게 된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타리그의 시스템이던, 선수 규모와 깊이, 1부리그의 팀들의 수준차이와 경기 질 모든 면에서 분데스리가는 최고였던 것이다.
2)포지션과 경기수행
그는 탁월한 윙포워드였다. 혹자는 그는 탁월한 스트라이커라고 평한다. 축구전문가 프리델 라우쉬는 “차범근은 내가 경험한 선수가운데 단연 제일 강한 포워드다”라고 밝혔고 당시 바이에르 위르딩겐의 호르스트 부츠 코치는 “차범근은 지금까지 독일축구에서 보지 못했던 포워드의 역할을 몸소 실천한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라는 말로 그의 포워드나 스트라이커로써의 능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뿐 아니라, 윙으로써의 그는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된다.
왜 사람들은 그를 스트라이커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윙이라고도 할까? 그것은 당시 포지션 개념으로 돌아가 설명해야 한다. 그 당시의 축구는 74년 월드컵에서 토탈사커라는 그동안의 축구의 틀을 깬 새로운 전술이 등장하며, 그야말로 전술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현대의 포지션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라하더라도 그 전술의 역할에 따라 윙백이 되느냐 풀백이 되느냐가 달라지고, 스트라이커도 쉐도우냐, 타겟맨이냐 포워드형이냐로 구분되며, 미드필더도 수비형미드필더냐, 다시 수비형미드필더는 링커형이냐 홀딩형이냐로 나뉘는등 매우 다각화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정도로 세분화되지 않았다. 미드필더/수비수/공격수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유럽축구에서 포지션을 표현할때 이렇게만 구분(MF/FW/DF)하는 경우도 종종있다. 이 역할에서 차범근은 은퇴이전에는 공격수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시 그의 포지션은 무엇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윙포워드다. 즉, WING이라함은 4-4-2에서 풀백의 위에 위치한 양쪽 미드필더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의 임무는 투탑이나 스트라이커들에게 원활하거나 위협적인 공격이 될 수 있도록 연결시켜주며, 상대의 빈틈을 끊임없이 침투하는 '돌격대장'의 임무가 주어진다.
하지만 전형적인 윙에서 좀 더 발전된 개념의 윙포워드가 있는데 이는, 포워드의 역할까지 수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에 따라서는 스트라이커의 역할로 갔을때도 충분히 그 역할을 잘 수행할수 있을만큼의 골 결정력을 갖춘 선수들이면서도 윙의 역할까지 수행해주는 선수로, 다재다능해야 한다.
호아킨이나 키웰이 완벽한 의미의 윙어라면 피구나 긱스와 같은 존재는 윙포워드에 가까울정도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까? 그런 의미에서 차범근은 당시 경기를 뛴 사진자료와 영상자료(이전 차범근 칼럼1에서 공개하였다.)를 보면 명백하게 사이드에서 활동하는 것을 볼수 있고, 특정 상황이나 볼이 없을때는 중앙침투를 감행하고 세트플레이시에는 스트라이커처럼 그에게 볼이 많이 투입되는 등의 타겟맨으로서도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즉 신개념의 윙포워드의 역할을 창조했고 수행했다. 미드필드 싸움에서부터는 측면을 날카롭고 빠르게 돌파해 공격라인으로 치고 올라왔으며, 볼이 없을때에는 중앙으로 침투해 때에 따라 투탑의 역할까지 수행해주는 선수였다. 당연히 상대 수비로서는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고 그가 골을 많이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차범근은 그럼 어떤 스타일의 선수였는가? 그와 동시대를 뛰었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루메니게는 "모든 장점을 다 갖춘 골게터" 라고 표현했고, 얼마전 MBC다큐에서는 "분데스리가에서 정말로 특별한 존재"라고 극찬했다. 그와 상대했던 당시 감독 퍼거슨은 그를 "해결 불가능한 존재"라고 표현
했다. 찰리 퀘벨이라는 팀동료는 차범근에 대한 회상에서 "볼만 잡았다하면 골로 연결시켰다고 생각되며 그를 당해냈던 선수가 없었다."라고 못을 박았다. 독일 최고의 공격수였던 루디 푈러는 차범근은 "빠르고, 좌우 양발로 슛을 정확하게 쏘며, 헤딩에 드리볼까지 못하는게 없는 만능 선수" 라고
표현했다.
세번째 말하지만, 독일 축구는 선수를 칭찬하는 것을 영국이나 기타 국가만큼 상대에 대해 예의바르게 표현하는 편이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되 매우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위의 멘트들은 그가 당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는지 잘 설명해준다. 그런데 모든 전설적인 선수들이 말하는 면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루메니게의 '모든 장점' '해결 불가능' '볼만잡으면 골,' '당할 선수가 없었음' '빠르고,매우 정확한양발슈팅력, 헤딩, 드리볼의 만능형선수' 등은 그가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윙포워드라는 존재의 전형적인 틀을 창조시킨 선수였음을 알수 있고 나는 주장한다. 즉, 당시 축구는 수비, 공격, 미드필더로 삼등분된 축구였고 전술이였는데, 네덜런드의 토탈사커가 나오면서 그 전술의 틀이 깨어지고 그 전술의 틀이 깨어지면서 비교적 최강팀이 아니였던 네덜런드가 일약 최고의 강자로 나올수 있던만큼 전술적 면에서는 그다지 발전한 것은 아니였다고 볼수 있다. 그래서 크루이프나 베켄바우어같은 전술적 틀을 깨는 이들이 등장하면서 충격속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차범근은 미드필더로서 공격수역할까지 소화해냈던 또 하나의 틀을 깨는 만능형선수였던 것이니 그를 막는것이 그 당시의 전술적 개념과수비로 얼마나 어려웠는가 분석해 볼수 있는것이다. 실제로 그를 막기 위해 수비수들은 고의적인 반칙을 시작했고, 그것으로 인해 독일TV에서 특집 프로그램까지 준비했을 정도이니 얼만큼 차범근 하나로 인해 상대 수비들이 애를 먹었는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70년대에 이미 현대적 의미에서 볼 수 있던 완벽한 윙포워드라는 존재로 자신을 각인시켰으며 그 모습은, 득점력, 스피드, 전술이해력과 폭발력, 드리볼과같은 기술등을 의미한다.
3) 경기 기록을 통해 본 차범근
사람들은 비교를 통해 "이러이러한 선수는 이만큼을 기록했어"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수치로 비교하는 것은 정말 도움 안되는것이다. 물론 가끔가다 참고정도야 할수 있지만 기록이 축구를 말해주는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도 구지 비교를 하자면 같은 조건하에 비교를 해야 어느정도의 수치가 나온다.
같은 나이에, 같은 무대에서 비슷한 포지션에 뛰었고 스타일까지 비슷했던 선수정도라면 그 비교가 어느정도 인정될지 모르겠다. 그런면에서 그 당시에는 역할 분담이 매우 명확했던 시기. 따라서 동시대에는 차범근과 같이 역동적이고 수비력까지 갖춘 데다가 윙부터 포워드까지 겸할수 있는 선수란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왜 그를 막기가 힘들었다고 많은 명장들과 선수들이 고백하는지, 그 당시
전술적 개념과 더불어 차범근의 선수로서의 스타일을 통해 위에서 설명이 수차례 된바 있다.
그런데도 재미삼아 한번 비교를 해보자.
먼저 그를 매번 스트라이커라고 칭하면서 기록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재미삼아 스트라이커로 분류되는 이들중 대표적인 유럽형 스트라이커 쉐브첸코와의 동조건하에 비교를 해본다.
과연 그가 세계최고의 리그인 세리에 A에서 남긴 기간동안 기록한 골과 차범근이 같은 나이에 당시 최고의 리그에서 뛰었을당시의 기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혹자는 "아무리 그래도 쉐브첸코랑 비교를 하냐 상대도 안되게.."라고 말하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차범근이 진출한 나이와 같은나이로 비교하면 쉐브첸코는 00/01시즌부터 비교해야 정확한 근거가 된다. 그는 이때부터 05/06시즌 총 5년간 75골을 기록하였는데 차범근은 그와 같은나이, 같은 기간동안 63골을 기록한다. 이것은 쉐브첸코가 차범근과 데뷔한 나이와 같은나이로 비교하여 본 기록이다. 쉐브첸코는 전형적인 완벽한 스트라이커의 역할이고 차범근은 윙포워드를 주로 하면서 만들어낸 기록이며 차범근에게는 단 한골의 패널트킥도 없었음을 볼때(반면 자신이 유도한 패널트킥은 이 기간내에 약 10개이다.이 10개만 추가하더라도 73골이 된다.) 어마어마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 그렇다면 그와 비슷한 포지션의 선수들은 어떠할까? 항상 차범근과 비교 논쟁 대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피구, 베컴, 긱스다.
대표적으로 긱스를 살펴보자. 긱스는 91/92에 데뷔하였지만 차범근과 같은나이에는 99/00시즌부터다. 그로부터 6년을 비교해보자. 39골을 넣었다.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 그는 윙으로 매우 탁월한 득점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그가 넣은 많은 골은 필드골도 있지만 프리킥의 골도 많았다. 그런그라해도 맨유에서 91-04 약 13년을 뛰었음에도 90골에 지나지 않는다.
포지션은 다르지만 득점력이 탁월했던 공격형미드필더, 지네딘 지단은, 그와 동나이대로 보면 99년에 해당되는데 01/02에는 레알마드리드로 이동해 리그가 달라지므로 논외로 하고 2시즌만 비교한다해도 2시즌동안 열골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유벤투스에서 뛴 5시즌동안 32골을 기록했다.
같은 포지션으로 평가받던 피구와 베컴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같은 조건하에 비교를 하게 되면 그 기록수치가 우리가 생각하던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전체수치를 놓고 비교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될수도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차범근이 전성기를 구가할수 있던 나이대에는 해당 리그에 없었다는 점과, 리그적응력도 필요없이 데뷔시즌부터 진가를 알렸던 차범근의 기록등으로 충분히 반박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모두가 다 훌륭한 선수들이라고 규정지으면된다. 모두 스타일이 다르고 자기 나름대로 축구에서의 철학을 명확히 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구지 그중에서도 유독 모든 여건이 열악했던 상황에서의 불세출의 기록을 남긴 영웅 차범근만 비판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너무 안타깝다..
데뷔 첫해, 그것도 세계최고의 리그에 데뷔한 일개 아시아에서 형편없던 나라의 선수 하나가 남긴 기록은 분데스리가를 뒤흔들었다. 날고 긴다 하는 선수들도 분데스리가에 와서는 힘들어 하는게 당연했고, 비슷한리그에 와서도 적응을 잘못하는 유명선수들도 많은 와중에도 차범근은 맹활약했다.
그를 잘 막지 못하던 수비수들은 육탄수비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미 데뷔하고 한시즌 마칠무렵부터 숱한 고의적 반칙을 당했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매우 거친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 팀닥터가 방송에서 "차붐의 몸은 2차대전을 치룬 병사보다 더 혹독하다" 라고 하소연했을 정도다. 그러지 않으면 최소한 막는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고령의 나이에 월드컵에 출전한 차범근은 시작하자마자 3분만에 아르헨티나의 수비수에게 엘로카드를 선물한다. 경기 내내 더블팀의 압박에 시달렸다.)
견제속에서도 분데스리가에서 300여 경기를 뛰며 리그골 98골을 기록했으며, 상대에게 페널트킥 반칙을 무려 30여개 유도했고 어시스트는 정확하게 공인된 기록이 아니였던 만큼 정확한 측정이 안되고 있다. (인터넷에 돌고 있는 40여개 라고 하는 어시스트가 정확하다고 해도 대단한 것이지만) 거기에 컵대회까지 포함시, 기록된 골은 120골이 넘으며 다른 기록도 훨씬 늘어나게 된다. 그 골중에는 단 한개의 패널트킥 골도 없다. 이것또한 놀랍지만, 데뷔부터 은퇴까지 받은 경고가 단 한장이라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는 평생 경기를 뛰며, 선발에서 제외된 적이 단 한번이라는 것이다. 정말 미안한데, 마지막으로 놀라운 것은 그가 칼럼을 통해 밝힌 것으로 선수시절 단 두번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철인을 뛰어넘는 기록이 아닐수 없다.
고작 약 10년을 뛰면서 300여경기를 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일인가. 그것도 최고의 리그에서.
그런데도 그 10년간 그는 다른 선수들이 10대초반부터 이루지 못한 일들을 해냈던 것이다.
비록 그가 남긴 최다골 기록은 깨졌지만 사람들은 차범근의 기록을 높게 평가한다. 그 이유는 사퓌자나 에우베르가 남긴 기록은 분데스리가가 쇠퇴한 시기에 활약했기 때문에 차범근이 남긴 그리고 그가 수행한역할이나 포지션등에 비교했을때 가치는 차범근에게 있는것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분데스리가의 최고 전성기시절의 기록은(앞서 기술한바있다) 현재분데스리가 역사 랭킹에서 10위안에 있던 시몬센이 기록한 7년동안의 76 골이였지만 차범근은 불과 6면만에 무려 81골로 깨버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94년 월드컵 독일 대표로 나온 리들레보다, 차범근은 아직도 독일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사실 이 6년만의 기록만으로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의 전설로 남아 있을 이유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럽 스타들은 10년이상을 뛰었다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경우는 대부분 없다. 대부분의 우리가 기억하는 스타들의 중요한 이력은 5-6년을 지속했고 그러면 대스타로 분류되는게 현대축구였다.(곰곰히 되돌아 생각해보라.) 시몬센이 바로 7년간의 활약으로 여전히 분데스리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레전드임을 볼때 차범근은 6년만에 그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골들은 또한 자신이 뛰는 팀이 약하건, 상대팀이 강하건 불문하고 매우 결정적인 골들을 기록했으며, 매우 다양한 곳에서 어시스트,돌파,슈팅을 자유자재로 즐겨왔던 것을 남긴 영상등을 통해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나와 토론을 하면서 "피파에서 뽑았다는 세계축구선수 역대 랭킹에 피구보다 차붐이 위에 있는데, 이건 못믿겠다. 내가 믿는 랭킹은 월드사커지에 나온 425명의 랭킹인데 거기엔 차범근은 없다. 찾아봐라 "라며'http://www.englandfootballonline.com/TeamHons/HonsWldSocPlyrsCent.html'
라는 어이없는 인터넷폴 조사를 제시했다. 안타깝게도 해당 기사는 인터넷 폴로, 한명이 몇번씩 투표가 가능했을뿐만 아니라 이 폴의 분석을 읽어보면 대부분 영국인을 대상으로 했다고 되어 있다. 당연히 잉글랜드 사람들이 주로 올라와있다.구차하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된 월드사커에서 내놓은 세계축구스타 100인, 세계축구선수100인에는 모두 차범근이 들어가 있으며,
FIFA가 선정한 축구스타 100인에도 포함되어 있고 누구나 쉽게 찾아볼수 있다. 그럼에도 차범근 안티들이 주장하는 '인터넷 폴'이라는 것은 뭔가? 말했듯이 위의 인터넷 폴조사는 조사의 일부분일뿐이다. 인터넷 시대이므로 팬들의 투표를 얻은 기준도 심사대상이며 그것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공식발표는 전문가와 기자등이 선정한 기준이 포함되게 된다. 차범근 안티들은 그중에서 산정방식중 약 20%가량을 차지하는 폴투표 자료를 가지고 마치 전체인양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추가)
진실과 정반대에 있으면서도 마치 진실로 위장한 헛된 정보의 홍수속에 사람들은 진실도 잊고, 영웅도 놓치고 산다.
4. 문제제기등에 대한 반박및 결론
차범근에 대한 비판중 많이 들었던 비판은 '유럽챔피언스컵 우승과 유에파 우승의 차이' 에 대한 것인데 이는 위에서 충분히 반박되었으리라 생각한다.또한 분데스리가의 위상에 대한 것 역시 위의 글과 근거로 충분히 반론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차범근에 대한 실력은 위의 두가지 설명과 더불어서 본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들이며 더군다나 그가 뛴 기간에 비추어볼때 대단한 위상을 뛰어넘는것이 증명되고도 남는다.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가는 이미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에 대한 비판중 어떤것은 그는 유럽최우수선수가 된적이 없다고 하는데, 유럽베스트11은, 그당시 차범근과 같은 비유럽인은 아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일 뿐이다. 그래서 별로 신경쓰고 싶지도 않다. 유럽 올해의 선수에 비유럽권이 포함된것은 95년에 이르러서야 그 대상이 확대되는데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축구를 그 이후부터 봤다는 말밖에 되지를 않는다.(당시 70년대 기록으로 보면, 76년 베켄바우어, 77년 시몬슨, 78-79 키건 80-81 루메니게 등으로 모두 분데스리가에서 뛰게된다.) 글을 차근차근 읽어본 분은 알겠지만 77년 시몬슨이나 79키건등은 모두 분데스리가에서 뛰었고, 시몬슨은 차범근에게 당시 레벨에서 차범근이 우위에 있었으며 기록도 차범근이 무려 1년을 앞당기며 갱신했던 것으로 미뤄볼때 그가 이 선수들의 레벨에 전혀 뒤떨어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분데스리가 위상이 떨어진 80년대 중후반은 당연히 논외다.)
키커지에서 올해의 선수상에 뽑힌적이 없다는 것 역시 그당시 축구 사정을 모른다는 것을 반증하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키커지는 공식적인 올해의 선수상에는 '독일인'으로만 그 대상을 한정했다. 그리고 키커지에서 외국인 올해의 선수는 따로 선정하곤 했는데 거기에는 차범근이 뽑혀있다. 이외에도 키커지 주간베스트11에는 수도없이 장식했고, 내외국인통털어 분데스리가 MVP로 아이벤포스트지에서 선정한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또한 1980년 슈맨스타11 월드올스타와 1988년 킥아디다스 세계올스타(이것은 차범근이 거절했다.)에 뽑힌것을 현대 축구의 올스타처럼 해석하는 경향도 있는데 그 당시는 현대축구처럼 상품화되지도 않았기에 차범근의 올스타는 그야말로 실력으로 뽑힌것이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우리나라 축구의 파워가 있었던것도 아니고, 큰소리 칠 인물도 없었기에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올스타에 대륙적 배분이 좀 더 심화된 것도 사실이고 설사 약간의 이벤트성이 있었던 1988년과 같은 경우라하더라도 월드올스타(이 당시 올스타는 거절했다) 에 뽑혔다는것 자체는 (그 당시 세계올스타의 면면을 보라) 깍아내릴 이유중에 하나라도 포함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이런 이력 하나하나는 그가 남긴 정말 대단한 기록들에 비하면 큰 산을 이루고 있는 아주 작은 줄기에 불과한데 이런 것들로 '별거 아니였더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또 한번 답답해진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맹활약하고, 레버쿠젠으로 건너갔을때 레버쿠젠은 그야말로 이제 막 2부리그에서 올라와 어느정도 재건을 위해 차범근에게 엄청난 거금을 투자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는 레버쿠젠을 한순간에 중상위클럽으로 도약시켜버렸고 팀에 역사상 유일무이한 유에파컵 우승까지 일궈냈다.
레버쿠젠이 그당시는 그렇게 약했던 팀인데도 지금은 명문클럽소리를 듣는 팀이다. 그팀과 했던 선수들 면면만 봐도,발락, 제호베르투, 코바치, 크리스티안 뵈른스, 레이나, 에메르손, 브라질 최고 수비수 루시우, 현재 토튼햄으로 간 베르바토프,등등 이른바 대스타 혹은 최고급의 선수들이 함께 했던 시절에, 분명 차범근 시절의 레버쿠젠보다도 명문소리를 듣는 팀임에도, 그 당시 유에파컵과 같이 권위있는 챔스대회는 건너뛰고서라도, 권위가 추락한 유에파컵은 커녕 대외컵을 거머쥐지 못했다.
하지만 그당시에는 단 한명의 영웅, 차범근이라는 선수가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왜 그가 영웅이 되서는 안되는가? 왜 그가 전설이 될 수 없는가? 그들과 함께 했던 이들은 그를 전설로, 영웅으로 인정하는데 왜 먼 이국땅에서, 그의 플레이도 제대로 못보았던 이들이 우리의 영웅에, 아니 그들의 영웅에 "아니야" "그는 그냥 아시아의 잘하는 선수중 하나일뿐이야" 라고 고함치는가? 비판할 자격도 없는것 아닐까..
차범근이 뛰어난 선수 이전에 더욱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의 선수로서의 됨됨이다. 이미 은퇴시기에 체력측정에서 레버쿠젠의 19살의 선수들보다 뛰어난 체력을 보여줄만큼 탁월했던 자기관리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그에게는 이정도는 기본이였다.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했던 상대선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했고, 그 사건은 전 독일에 충격을 줬다. 매우 격렬하고 거칠었던 독일리그에 자성의 계기를 가져오게 한장본인이다. 현재 전세계 빅리거중에 이런 선수를 당신은 본적이 있는가?
그는 속임동작을 하는 것은 절대 있을수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만큼 정직하다. 그 격렬한 리그속에서 경고가 단 한장에,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거의 전경기를 출장했고, 척추가 부러지는 부상이후에도 보란듯이 재기해 놀라운 성적을 만들어 낸 것이 다른나라의 외계인 선수들이 한게 아니다.
우리의 차범근이라는 선수가 해낸것이다. 당신은 특급선수들의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 이런 선수를 본적이 있는가?
얼마전 박지성선수가 상대선수들과 부딪히며 넘어지자 캐스터가 이런 말을 했다. "박지성 선수 반칙을 잘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차범근은 매우 강한 톤으로 이렇게 되받아 친다. "만드는게 아니에요! 당하는거지요!" 그렇다 그에게, 그의 철학에는 반칙을 만든다는 말은 용납되지 않는것이다.이렇게 한국인답게 정직하고 바른 사나이가 만들어낸 .. 그것도 홀로 외롭게 세계최고의 리그에서 당당히 최고의 선수로 오랜 기간 뛰었음에도, 후세들은 자기 들이 지금 보고 있는 진실을 포장하기 위해 역사에 당당히 섰던 진실의 영웅을 허위와 과장과 비난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런 행동은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진실조차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영웅이 만들어지고, 반복적으로 그 영웅을 죽이는 작업도 진행된다. 반복에 반복이다. 역사상 단 한번도 성공했다고 하는 대통령을 나는 들어본적이 없다. 성공한 정치인도 찾아보기 힘들다. 경제인들은 왠만하면 비리와 부조리의 대상이다. 스포츠스타건 연애스타건 그들이 영웅시될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조금의 흠이라도 발견되면, 마치 "원래 부터 쟤는 저랬어" 라고 똑같은 목소리로 크게 떠들어댄다. 외국 스타들에는 그들이 설사 마약을 했다하더라도 웃고 넘어간다. 그냥 말그대로 가십일뿐이고, "난 그의 이런 모습을 좋아했던건데 뭐" 라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작은 실수하나라도 하면 마치 대역죄인인냥 죽여야 성이 차는 모양이다. 외국 노래는 마약과 갱과 살인과 강간으로 얼룩진 가사마저 무조건 아름답게 들리고, 우리나라의 노래는 일단 기본부터 바닥으로 생각하고 듣는다. 그러면서 "노래는 노래로만 평가하면되" 라고 한다. 어떤 이는 살인과 마약, 치정으로 얼룩진 가사를 들으며 "가사가 좋아서"라고하면서 우리나라의 제대로된 시 한소절 못외우는 사람 천지다. 아무리 범죄를 저지른 자더라도 그저 해외스타면 어느정도 용서가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영웅이라도 아주 작은 실수 하나, 개인사까지 모두 지적을 넘어선 과잉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영웅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영웅을 바라볼 '눈'이 없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내 스타들은 좋은 기록을 세운다하더라도 여지없이 하나 하나 그 기록이 인정받지 못하고 외국선수들에 비해 어떤것이 떨어진다며 할머니 할아버지마냥 주구장창 떠든다. (정말 우스운 것은 수원삼성이 21세기 들어 첫 우승을 일궈냈을때도 비난했던 이들은, 수원의 여러가지 악조건과 여의치 않은 상황에 팀이 어려움속에 빠져있자, 맹렬히 차범근을 향해 목놓아 비난하면서도 브라질의 최고명문 코리안티스가 꼴지를 달리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그팀은 팀에 내분이 있어서 그래.." 라고 말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정말 이 소리를 들을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이 글을 읽고서도 혹여나 이와 같은 비교논쟁에서 벗어난 기록들을 가지고 '엘버같은 선수는 어떠고, 누구 기록은 어떠며' 라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분명하다. 다시 말하지만 처음부터 글을 다시 읽어보길 권한다.
정신차려라. 그래봐야 내 얼굴에 흠내는것뿐이다.
차범근은 최근 선수들이 같은 축구선수인 해외선수들에게 사인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발언 한 바 있다.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하더라도 나에게는 그저 도전해보고픈 상대선수일뿐이다" 라고...
무엇이 우리를 자신감없게 만들었고, 무엇이 우리를 스스로를 하염없이 깍아내리는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가르쳤는가.
경영을 하는 사람이나 마케팅을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코크의 뉴코크 개발은 우리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지적한다. 비록 첫 한모금을 마신 경우엔 코크와 펩시의 맛에 차이가 펩시에게 우월했지만 그들은 콜라를 한모금 마시는것이 콜라를 마시는 행동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임을 잊었던 일화를 기억해보라. 한순간의 맛은 펩시가 우월했지만 그 한순간의 맛을 위해 뉴코크를 만들어낸 코카콜라는 큰 실패를 경험했다.
인생은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이 순간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사는것이 아니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축구는 누가 누구를비교해서 누구보다 낫다라는것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가 정말 그 시대에 축구를 열심히 뛰었고,최고의 선수라는 것들을 내가 받아들이면, 그 자체가 축구라는 스포츠에는 전설로 남는것이고 영웅이 되는것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 당시 순간순간의 기록들과 안좋았던 모습들만 억지로 끄집어 내기 시작할때 나오는 판단은, 열정과 경험없이 나오는 오류를 생산하게 된다.
Wenn sich Du-Ri Cha am vergangenen Sonntag in Berlin nicht die Schulter lädiert hätte und er deswegen in dieser Woche ein wenig kürzer hätte treten müssen im Training, er hätte wieder Sonderschichten eingelegt. Das macht er häufig: Die Kollegen sind schon längst wieder in Richtung Kabine geschlurft, da schießt Cha immer noch aufs Tor oder er feilt an seiner Technik. Zu verb essern gibt es ja immer was, und das Tor, das er am Sonntag zum 1:0 für den Fußbal-Bundesligisten Eintracht Frankfurt erzielt hat, hätte ihn sicherlich nicht an den Überstunden gehindert. Dünkel nämlich hat der Südkoreaner nicht. Ganz bestimmt ni
cht.
Im Gegenteil: Wahrscheinlich ist Du-Ri Cha, in Frankfurt geboren, in Leverkusen groß geworden, in Seoul heimisch, der bescheidenste, h&oum l;flichste und freundlichste Spieler der Bundesliga. Als Cha einmal im Spiel gegen Borussia Dortmund im Strafraum gefoult wurde und der Verdacht aufkam, es könne sich womöglich um eine Schwalbe gehandelt haben, hat Trainer Willi Reimann gesagt, er glaube Cha, "weil er aus einem Land kommt, in dem immer die Wahrheit gesagt wird." Viele finden: Er sei sogar zu selbstlos, zu naiv, viel zu wenig egoistisch, und egoistisch müsse ein Stürmer nun mal sein. Cha ist nicht egoistisch.
Denn Du-Ri Cha, der 2002 mit der südkoreanischen Mannschaft in den Wochen des kollektiven Taumels WM-Vierter geworden war, ist nicht nur Stürmer bei der Eintracht. Du-Ri Cha ist auch der Sohn des unvergessenen Bum-Kun Cha, und entsprechend groß sind die Erwartungen an den Filius. "Wenn er ein paar Jahre mehr Erfahrung hat, wird er vielleicht besser als sein Papa", hat Bum-Kun Cha kürzlich gesgt. Auch diese Aussage hat die Aufgabe für den Filius in Frankfurt nicht leichter gemacht. Zuletzt hat sich Cha junior immer mehr zurück gezogen, man spürte förmlich, wie er seinem ersten Tor hinterherjagte, wie er versuchte, aus dem immens großen Schatte
n seines Vaters heraus zu treten. Er hat, anders als zu Beginn der Saison, keine Interviews mehr gegeben, er ist fast ein wenig scheu gew orden.
Dabei hat er die Anerkennung von Mannschaft und Trainer nie eingebüßt. Weil er sein letztes Hemd für das Team geben würde viele Kilometer während eines Spiels abspult, keinem Zweikampf aus dem Weg geht, nach hinten arbeitet und Löcher reißt, hat er seinen Stammplatz sicher. Einmal nur hat Cha, dessen Vorbild sein Vater ist, in dieser Runde gefehlt - als er auf Länderspielreise war, ansonsten war er immer dabei. Das allein zeigt die Wertschätzung für ihn. Und es ist ja auch so, dass ihm den Treffer in Berlin jeder in der Mannschaft von Herzen gegönnt hat. Womöglich ist der Knoten geplatzt, Stürmer ticken so: einmal getroffen und schon haben sie einen Lauf.
Chas Schulter, daran besteht wenig Zweifel, wird die medizinische Abteilung in Frankfurt bis Samstag zum Spiel gegen Borussia Mönchengladbach wieder hinkriegen. Cha wird sich dessen ungeachtet wieder reinknieen. Und wieder sein letztes Hemd geben für Eintracht Frankfurt.
이 글중에 있는 대목중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소개하고 마치려고 한다.
'차두리가 지난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패널티안에서 넘어졌는데, 속임동작의 진위여부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갈때 메니저는 매우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두리는 진실만을 아는 곳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선수야. 속임동작을 할리가 없다." 이 말은 그의 아버지 바로 차범근이라는 선수에 대한 믿음이고 그가남긴 분데스리가에 대한 이미지다' 인정하지 못한다면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숨을 쉬고 내 마음에 아직도 차범근에 대한 '믿지 말아야 할 자격지심' 과같은 필요없는 자존심의 껍질을 벗어버리자. 그게 멋있는거다.
엄청난 스압인데 필요하신분들 꼭 읽어보세요..ㅋ
그리고 차범근 검색해보니까 꼭 밑에 미츠하시다카시(맞나?) 이분이 딴지글 매번 올리셨는데.. 꼭 읽으시길 시간내셔서
첫댓글 이게 기스게에 갈지도 모르겠으나, 밑에 제가 스크랩해 온 글에 이에 관한 얘기가 있어서 여기에 올려봅니다.
논문수준이군요..
논문...ㄷㄷㄷ
피구나 긱스정도의 역할에서. 또 포워드의 역할까지 수행한 토탈패키지였군요
훌륭한 자료를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b
전 퍼온 역할밖에^^;;
잘봤습니다 당하는 거지요 멋있네요
왜일까요 보면서 안구에 습기가 차오릅니다
넘 길어서 언제함 시간나서 읽어 보겠씀니다..전 모든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오늘도 조코비치 호주 오픈을 봤고요 찬호도 지성이도 세리도 주봉이도 차번근 선수보단 인기 실력 해외반응 모두합쳐 제겐 부족해보여요
엄청난 자료네요. 감사합니다^^
으어....;;;;; ㅎㄷㄷㄷ 차붐이 이정도였나요.지금 온 몸에 소름 좍 돋았습니다.저 시대에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었었더라면...캡틴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캡틴박도 위상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겠군요.현재 전세계에서 본좌로 꼽히는 윙포워드 중 차붐과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어 보이네요.그나마 주포지션은 아니지만 현재 바르샤에서 윙으로 뛰고 있는 비야를 어거지로 비교하자면 비교할 수 있겠네요.비야도 전방 어디에서든 위력을 발휘하는 전천후 스타일이니....그래도 어쩌면 비야 이상....전성기 쉐바,앙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겠네요.이런 선수가 아시아에서,특히 우리나라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네요.
거봐요...대단하지요..얼마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외국인으로서 최다골을 가지고있던 사람이 바로 차붐입니다...아까 제가 쓴 댓글이 조금 잘못된 부분이 있었지만..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시는지요..
아....저는 루니가 셰바보다 위로 놓여진게 어이가 없었을 뿐입니다.차붐을 깎아내리려던게 아니라 셰바가 너무 저평가 되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었습니다 ㅎㅎㅎ;;;
차붐은 아시아선수에 대한 유럽인의 편견을 무너뜨린 선수에요.그게 실력하나로 말이죠.만27살 먹은(이당시 아시아선수 그것도 한국선수는 거의 선수생활의 황혼으로 간주했던 나이)선수가 그것도 계약 체결후 군문제로 귀국하고 6개월 후에 다시 분데스리가로 가서 그때부터 은퇴할때 까지 쭈욱 주전으로 뛴선수,중위권 팀에서 UEFA를 두번 들어올린선수가 누구란것을. 화나는게 현재까지도 별 되도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거에요. 근데 이게 80년대 부터 쭉 이랬어요. 비난의 주최가 언론에서 누리꾼들로 바뀐것 뿐이지만요.
글 너무 감사드리고 잘 읽었습니다^^ 차범근 선수를 종경하는 한 축구팬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가끔 알싸나 축구카페 같은데서 보면 차붐이 독일 귀화 제안을 받았다거나 독일 총리가 한국 방문당시 당장 차붐부터보고 싶다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딸려 나오더군요.. 이것은 제가 알기로 거짓 정보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진실을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절대 차붐을 깎아내리는 태클은 아니고 그냥 사실은 사실대로 알고 싶네요
귀화얘기는 거짓 정보라고 차붐께서 직접 언급하셨던걸로 알고 있고 총리 얘기는 잘 모르겠네요.
괜히 올타임 No.1 플레이어라 불리는 게 아니죠.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좋은자료네요 상상외로 엄청난 플레이어였네요
우리나라 특유의 영웅 만들기와 영웅 죽이기에 희생된 분이죠.독일 여행만가도 차붐의 위상을 실감합니다.인터넷 찌질이들이야 그저 남이 내세운 엉터리 글이나 믿으면서 자위하기 바쁘죠.이런 글에는 반박조차 못하면서요.물론 인터넷에 떠도는 차붐의 일화중 진실이 아닌것도 많습니다만 그것만으로 차붐이 별거 아닌 축구선수로 인식되는게 안타깝네요.분데스리가 전설중에 전설인 아시아 선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