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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일(토)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yes)만 되었느니라(고후 1:19b).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경우 마음은 no 하면서 입술로는 yes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리켜 긍정의 힘이나 긍정적 마인드라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께서는 그런 이중 플레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는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담당하셨습니다.
고난이 올지라도 그것을 해결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 믿고 그대로 수용함이 믿음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위로와 소망이 있는 것임을 믿습니다.
내 안에도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소망이 넘치기를 원하여 이 하루를 믿음의 결기로 시작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에게 켜켜이 쌓여 있는 위선과 거짓 등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 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내일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경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43:1-5
제목 : 주의 빛과 진리로 나를 주의 성산으로 인도하소서.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나의 묵상
본 시는 어제 살펴본 42편과 같이 하나의 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42편은 두 개의 연으로 되어 있고 오늘 본문인 43편은 그 연장선에서 세 번째 연으로 볼 수 있다.
3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두 개의 시는 매 연의 끝부분인 후렴구가 동일하다(42:5; 11, 43:5).
오늘 본문 역시 42편의 구성과 같다.
1-2절은 대적의 압제로 인하여 당하는 비통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주님은 자신의 힘과 피난처가 되시는데 왜 자기를 버렸는지, 무슨 이유로 자기가 박해를 받아야 하는지 묻는다.
따라서 자기를 압제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 곧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나 거짓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악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변호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대적자를 가리켜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 그리고 ‘간사하고 불의한 자’로 표현한다.
여기서 ‘나라’로 표현된 히브리어는 ‘꼬이’로서 이는 민족 또는 백성을 의미한다.
앞선 42편에서 본 시를 다윗의 시이거나 아니면 포로 후기 고라 자손의 시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건대 시인의 대적을 가리키는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는 압살롬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수르나 바벨론 등 이방 민족과 그 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로서 히브리어 ‘로 하씨드’로 표현되었다.
원어 ‘로’는 부정어로서 경건하다는 의미의 하씨드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특히 이들은 42:3, 10절을 볼 때 하나님을 비웃으며 그를 섬기는 자를 조롱한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호소한다.
여기서 사용된 ‘건지소서’의 의미는 단순히 이런 악인들의 압제와 위협으로부터 건져달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이들 악한 자들의 죄에 참여하거나 그들의 죄악에 오염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특별히 1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대적자들의 불경함을 지적하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심판을 내려달라는 구체적인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런 악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을 구할 뿐이다.
42편에서도 시인은 동일하게 어떤 보복이나 복수적인 심판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는 대적자를 심판하는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 32:35a)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시인은 또한 항상 주님을 자신의 힘과 피난처로 삼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원수들의 압제로 인하여 고통과 슬픔에 젖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남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이유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참 선지자들의 경고의 메시지를 곧이듣지 않았다.
그 말을 거짓말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건물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백성들 역시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는 성전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교도들이 행하는 우상 섬김과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슴을 찢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일갈한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렘 14: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니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이로 인하여 영적인 것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그 심판은 그들을 아주 진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채찍과 막대기로 하신 징계이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오히려 자신들의 힘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말이다.
3-4절은 시온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해 달라고 한다.
그것들이 나를 주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해 주기를 간구한다.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의 제단 앞 곧 나의 기쁨이요 즐거움이신 하나님 앞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겠다고 한다.
시인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자기에게 보내셔서 주의 성산과 주님이 계시는 장막으로 인도하여 달라고 간구한다.
‘빛’은 히브리어 ‘오르’로서 하나님과 연관되어 사용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아들이 드러내신다.
그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는 일이다.
또한 참 빛은 생명을 비추는 빛으로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 1:4, 9-10)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진리’는 히브리어 ‘에메트’로서 신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며 언제나 신실하시다.
그 신실은 하나님의 언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마고 창세전에 약속하신 것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그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아들을 낳으셨다.
그리고 그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전 언약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 언약을 이루신다는 말이다.
사람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영생을 주거나 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하심이 영원히 변치 않는 신실함으로 행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러한 주님의 빛과 진리로 자신을 이끌어 주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의 제단 곧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를 것이다.
그가 이를 하나님의 제단이자 큰 기쁨의 하나님의 존전은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
그 나라를 바라보기에 비록 지금 당장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암울하며 혼돈스럽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그 나라에 소망을 두며 찬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5절에서 비록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하여 있지만 오직 주를 바라보며 소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구원자 하나님을 기꺼이 찬송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빛과 진리를 잘 알지 못하였다.
빛이라 함은 그저 눈에 보이는 햇빛이나 전등에서 비쳐지는 불빛 정도만 알 뿐이었다.
그런데 진짜 빛은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은 그 빛을 알지 못하였다.
참 빛이신 아들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당신이 지은 그 땅에 오셨지만 그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영접하는 자가 있었다.
그런 자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이처럼 말씀이신 아들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할 때 그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인자)와 진리(신실)가 충만하였다.
이런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을 어떠한 경우라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신다.
그것이 바로 인자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억울하게 당한 일을 반드시 복수하려고 한다.
그것이 공의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가는 억울함을 당했고 또한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써 감옥에 갇히는 극한 억울함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손으로 이를 보복하려 하지 않았다.
원수 갚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지나온 세월 동안 내가 당한 억울한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이 속을 끓이고 아파했던가?
이를 갚아주지 못한 것은 내가 힘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힘이 있었으면 얼마든지 되로 받은 것을 말(斗)로 갚을 자였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나는 그런 힘조차 없는 자가 되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직 주님께 맡길 뿐이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보복과 복수가 아니라 주님의 빛과 진리 안에서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가져 날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 안에 참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몰랐을 때는 나의 힘으로 보복하는 것이 공의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공의가 결코 아니다.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만이 진정한 공의인 것을 믿는다.
그리고 오늘도 주님이 행하시는 공의 안에서 나를 내려놓고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파레시아를 행할 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빛과 진리의 진정한 의미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정했던 우매한 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처럼 두 부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그것이 진짜라 믿는 부류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한 것을 바라며 참 생명으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첫 번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영으로 말씀을 깨닫고 빛과 진리이신 우리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내가 아무리 잘 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이 세상을 인도하오니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이끄심에 나를 드립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영생을 누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