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시모음 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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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울 저편의 겨울 2
한강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산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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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울 저편의 겨울 8
한강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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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통에 대한 명상
한강
새를 잠들게 하려고
새장에 헝겊을 씌운다고 했다
검거나
짙은 회색의 헝겊을
(밤 대신 얇은 헝겊을)
밤 속에 하얀 가슴털이 자란다고 했다 솜처럼
부푼다고 했다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
기다린다고 했다
횃대에 발을 오그리고
어둠 속에서 꼿꼿이
발가락을 오그려붙이고 암전
꿈 없이
암전
기억해, 제 때 헝겊을 벗기는 걸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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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히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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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한강
거리 한가운데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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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북향 방
한강
봄부터 북향 방에서 살았다
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
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
겨울까지 익혀왔다
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
책상 위 스탠드만 켠다
차츰 동공이 열리면 눈이 부시다
약간의 광선에도
눈이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
햇빛이 돌아왔는지 끝내
잿빛인 채 저물었는지
어둠에 단어들이 녹지 않게
조금씩 사전을 읽는다
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
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
기억나지 않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빛이 변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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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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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새벽에 들은 노래
한강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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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하루가 끝나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
저녁이 식기 전에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은 서랍 안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나는 퇴근을 한다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은
아직도 따뜻하다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이 식기 전에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퇴근을 하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나는 퇴근을 한다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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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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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울의 겨울 12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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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의 겨울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날에 네가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 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 하던
강물소리,
들려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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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울의 달
한강
어느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 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 하던
강물소리,
들려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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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심장이라는 사물
한강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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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어깨뼈
한강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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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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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얼음 꽃
한강
오래 내리어 뻗어간
그들 뿌리의 몫이리라
하여 뿌리 여윈 나는 단
한 시절의 묏등도
오르지 못하였고 허깨비,
허깨비로 뒹굴다 지친 고갯마루에
무분별한 출분의 꿈만 움터놓았다
모든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꽃이라면
꽃이라면 아아
세상의 끝까지 가리라 했던
죽어, 죽어서라도
보리라 했던 저 숲 너머의 하늘
무엇이 꿈이냐 무엇이
시간이냐 푸르름이냐 빛이냐 나무여,
나무여
잠깐의 참회를 배우기 위해
그토록 많은 세월을 죄지었던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이 목마름을 건너
저 버려진 잡목숲 사이로
몸 번져야 할 일
몸 번져 오래 울어야 할 일
좋다 계절이여 오라
눈발이여
퍼부어라, 이 불타는 수액을
뒤덮어다오, 그 위에
찬란히
춤추어도 좋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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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유월
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위胃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햇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산천 山川,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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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저녁 잎사귀
한강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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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저녁의 대화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 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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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저녁의 소묘
한강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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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조용한 날들
한강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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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첫새벽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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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캄캄한 불빛의 집
한강
그날 우이동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 (同志)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 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크러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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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파란 돌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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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피 흐르는 눈
한강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증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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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피 흐르는 눈 2
한강
여덟 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제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다)
그후 깊은 밤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밖으로
육각형의 눈이 내렸지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피의 수면?
펄펄 내리는 눈 속에
두 눈을 잠그고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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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피 흐르는 눈 3
한강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하여?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끓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29》
피 흐르는 눈 4
한강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뒷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갇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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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효에게
(작가가 아들에게 쓴 편지)
한강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차오르기만 한 줄 알았나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다시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괜찮아
아직 바다는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흰 돌과 조개껍질을 더 주울 테니까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까끌거리는 모래를 털며
때로는주저앉아 더러운 손으로
눈을 훔치기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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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휠체어 댄스
한강
눈물은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게
나를 다 삼키진 않았죠
악몽도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가닥가닥 온몸의 혈관으로
타들어오는 불면의 밤도
나를 다 먹어치울 순 없어요
보세요
나는 춤을 춘답니다
타오르는 휠체어 위에서
어개를 흔들어요
오, 격렬히
어떤 마술도
비법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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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