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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목이 말라서 눈이 떠진 은오는 눈을 비비고 안경을 쓰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어? 지금 시장가세요?”
은오가 새벽 꽃시장을 가실 준비를 하시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뭐하러 일어났어. 더 자.”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문은 엄마가 밖에서 잠그고 갈 테니까 얼른 자.”
“네.”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시는 부모님을 바라보다가 문득 은오는 두 분을 불렀다.
“엄마, 아빠.”
“응?”
은오는 왜 그런지 두 분을 안아드리고 싶어서 달려가 엄마 품에 안기고, 아빠 품에도 안겼다.
“왜 이래. 징그럽게.”
“징그럽긴.. 난 좋기만 한데..”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오늘 하루도 힘 내시고요.. 오늘 밤에 봬요.”
“그래.”
“우리 딸도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고..”
“네..”
두 분을 배웅하고 은오는 몸을 돌려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컵을 꺼내며 몸을 돌리다가 싱크대에 부딪쳐 머그컵이 싱크대로 떨어지며 부서졌다.
“아.. 이런..”
그녀는 신문지를 가져와 깨진 머그컵을 정리해서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다른 컵을 꺼내 물을
마시고는 방으로 들어와 다시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는데 우진의 차
가 지나다가 멈추고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뭔가를 던지셨다. 두 손으로 봉지를 받아 든 은오는
봉지 안에 샌드위치와 초코우유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아침 안 먹었지?”
“선생님은요?”
“같은 거 먹었어. 태워줄까?”
“아니예요. 조금 이따 봬요.”
“그래.”
우진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오도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차가 출
발하는 걸 보고는 은오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샌드위치와
초코우유를 먹었다. 학교에 도착한 은오는 교실로 들어가 안나와 마희에게 인사를 했다.
“이젠 아침도 같이 먹냐?”
안나의 말에 은오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 그래? 아침도 같이 먹어?”
마희가 놀란 얼굴로 안나와 은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아침에 등교하면서 인사했거든. 둘 다.. 초코우유 냄새가 나는데..”
은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먹은 건 아니고, 같은 걸 먹었어. 학교 오는 길에 차 창문 열고 던져주시더라고.”
은오의 말에 마희가 놀란 듯 말했다.
“정말? 왜 먹을 걸 던져?”
안나가 치아를 드러내며 웃으며 말했다.
“가까이 가면 손잡고 싶어질까봐?”
“꺄악~!”
마희의 비명에 다른 아이들도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안나가 손을 들어 마희를 때렸다.
“미쳤어! 이제 얼마 안 남았구만..”
“미안..”
“하하하... 괜찮아.”
은오는 마희와 안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교내방송이 들렸다.
[3학년 12반 서은오학생. 3학년 12반 서은오 학생. 교무실로 오세요.]
“응? 널 왜 부르지?”
마희가 은오를 보며 묻자 안나가 대답했다.
“원래 은오는 1학년 때부터 잘 불렸어..”
“다녀올게.”
은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갔다. 교무실 문을 연 은오는 왠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
다. 자신을 바라보는 선생님들의 시선 속에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우진이
다가왔다.
“은오야..”
은오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나랑 병원에 가자.”
“네.”
두 사람은 교무실에서 나와 그의 차에 탔다. 은오는 뒷자리에 오르려는데 우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조수석에 태웠다.
“누가 봐요..”
“신경 안 써.”
우진은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병원으로 향했다. 기도하듯 모은 은오의 손 위로 우진이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 위로 은오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마.. 많이.. 다치신.. 거예요? 그래요..?”
은호가 눈물을 흘리며 우진에게 물었다.
“아마도..”
은오는 떨리는 숨을 조심스럽게 내쉬며 눈을 감자 우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병원에 도
착한 그들은 응급실로 향했다. 은오가 떨리는 손으로 우진의 정장재킷의 소매를 잡았다. 우진
이 손을 들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녀를 감싸듯 안았다.
“교통사고로 들어오신 중년의 남성분과 여성분..”
“아. 잠시만요.”
간호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은오를 바라보고는 의사를 부르러 갔다.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설명했다.
“가족분들이세요?”
“제가.. 딸인데요.”
“저는 이 학생 담임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워낙 내상이 심하셔서 병원으로 오는 도중에 사망하셨습니다.”
은오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진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두 분.. 다.. 말씀이십니까?”
“네.”
은오는 다음 기억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병실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마
희와 안나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걱정스런 얼굴의 우진이
보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냥 이러다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오야.. 들려..? 눈 좀 떠서 나 좀 봐. 은오야.. 내가 지켜줄게. 평생 너만 바라보고, 너만 사랑하고, 너를 지켜줄게. 은오야.. 제발.. 눈 좀 떠 봐..”
“선생님..”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우진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깼어? 내가 보여? 응?”
“선생님..”
“응. 나 여기 있어.”
우진은 손을 들어 은오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꿈을.. 꿈을 꿨는데..”
“응?”
“엄마랑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꿈.. 맞죠. 제가 학교에서 기절한 거죠.. 그쵸..”
“은오야..”
우진이 그녀를 안았다. 은오가 눈물을 흘렸다.
“은오야..”
“흑.... 아.... 아.....”
은오가 오열을 했다.
부모님의 장례식을 어떻게 치뤘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억의 파편 속에 그녀는 멍하
니 서 있다가 기절하기를 반복하다 장례식장 한 켠에 마련된 작은 방에 누워 있었다. 울어서 퉁
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안나와 마희가 대신 손님들을 맞아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우진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손님들이 볼까봐, 학교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볼
까봐 자신의 양 손만 잡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우진의 차에 타서 집에 돌아와 있었다.
“간단한 짐 싸서 안나나 마희집에 가 있어. 생각 같아서는 내가 데려가고 싶지만..”
“아니에요. 정리할 것도 있고.. 그냥 집에 있을래요.”
“은오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렸으면 어떻게 해요?”
은오의 말에 우진이 화를 냈다.
“인마! 지금 그게 중요해? 사람들이 알면 어때. 앞으로는 내가 지켜 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은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우진은 손을 들어 부르트고 갈라진 은오의 입술을 살짝 만졌다.
“조심해서 가세요.”
“응.”
은오가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현관문을 잡았다. 울컥 눈물이 올라왔지
만 꾹 삼켰다. 그리고 문을 열고 텅 빈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제까지도 항상 불이 꺼진 집에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젠 두 분이 안계시다는 것만
으로도 집이 싸늘하고,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 은오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어느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우진이 앞에 서서 떨고 있는 그녀를 안았다.
“바보야.. 왜 혼자 있으려고 그래. 넌 혼자가 아니야. 안나도 있고, 마희도 있고.. 나도 있어..”
“선생님..”
“응?”
“무서워요. 무서워..요..”
은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함께 있을게. 언제나 네 옆에 있을게.”
은오가 몸을 돌려 우진의 품에 안겨 울었다. 우진이 고개를 숙여 은오의 머리에 입술을 눌렀다. 우진의 눈물이 은오의 머리위에 떨어졌다.
안나가 은오를 생각하느라 슬프고 가슴 아픈 마음으로 한 숨을 길게 내쉬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언니~!”
안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여학생이 서 있었다.
“누구..”
“며칠 전에 봤잖아요. 그것도 여기에서 재원이랑..”
채영이 한 숨을 내쉬며 말하자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왜 왔어요? 재원이.. 아직 안 왔을텐데?”
“재원이 말고 언니 만나러 온 거에요.”
“나를? 왜요?”
채영이 표정을 바꾸며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순진한 척 하지 마.”
안나가 놀란 표정으로 채영을 바라보았다.
“뭐?”
“같은 집에서 살면서 어떻게 재원이를 꼬셨는지 모르겠는데.. 훗. 그 꼴로 말이지..”
채영이 안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비웃었다.
“저기.. 날을 잘 못 골랐어. 오늘 내가 기분이 아주 안 좋거든.. 다음에 얘기 하자고..”
안나가 몸을 돌려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채영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잡았다.
“아.. 이거 안 놔?”
“재원이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네가 뭐라고.. 거지같은 게.. 가족이라고 같이 살면서 꼬셔?”
“그게 무슨 소리야! 꼬시기는 누가 누굴 꼬셔?”
안나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고 그녀의 손을 뿌리치자 채영이 바닥에 넘어졌다.
“언니가 재원이한테 꼬리쳐서.. 재원이가 나랑 헤어지려는 거잖아요!”
“네가 싫어서 헤어지는 거겠지. 그 녀석 너처럼 들러붙는 여자 질색이랬어. 그리고 내가 왜
그 녀석한테 꼬리를 쳐? 말이 돼? 너도 드라마나 소설이나 만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그게
드라마니까 아름답지.. 사실이면 가정이 유지가 되겠니? 그리고 난 연하는 질색이야. 이게 어
디서..”
채영이 울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 너.. 여자라서 봐 준 줄 알아. 그리고 내가 그 녀석한테 지금 일을 말 하
면.. 퍽이자 잘했다고 하겠다. 그렇게 재원이를 잡고 싶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
“네..”
“그리고 또 이러면 그 때는 여자고 뭐고.. 죽을 줄 알아.”
“네..”
“얼른 안가?”
채영이 눈물을 글썽이며 바닥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뛰어갔다. 안나는 한 숨을 내쉬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재원을 보고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추었다.
“야..”
재원이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냐? 들었으면 좀 말려주지? 쯧.. 아프고만..”
안나가 아픈 두피를 문지르며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연하는 싫어?”
안나는 재원의 말에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많은 말 중에.. 그게 제일 궁금해? 야! 나 너 때문에 머리카락 잡혔거든? 미안하다. 괜찮냐.. 그 말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싫어?”
“야!”
재원이 몸을 돌렸다.
“틀린 말 아니야.”
재원의 말에 안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채영이가 하는 말.. 절반은 맞다고.. 하지만 넌 아니니까 그건 미안해.”
재원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그 모습을 보던 안나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제대로 내리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진짜 이것들이 도대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야지.. 새우등만 터졌네!”
우진은 누나와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왜 왔어?”
“너.. 바보지?”
“오랜만에 찾아 와서는 다짜고짜 욕하는 거야?”
“그렇게 당하고도 그 분을 몰라?”
그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누나에게 말했다.
“유언장 수정 하셨대?”
“그걸 하실 분 같으면 5년 전에.. 그렇게 하셨겠니?”
우진이 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돈 주니까 물러나더라. 그 아이는 그렇게 괜찮은 아니가 아니었어. 네가 그렇게 목을 매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더라.”
우진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해.”
“단지 너의 어머니가 반대를 하니까 반발심에 더 집착했던 거.. 아니야?”
“옛날이야기 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나 바빠.”
“그 아이한테 가려고?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옛날이야기 하자고 불렀겠니? 그 아이는 돈을 준다고 물러나지 않겠지. 아직 어리고 세상이 어떤지 잘 모를테니까. 부모님.. 돌아가셨다면서. 지금.. 네가 데리고 있니?”
우진이 누나를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누나도 점점 그 분 닮아가는 거 모르지?”
“욕을 해라..”
“그러니까 뒷조사를 왜 하냐고..”
“내가 했니? 너의 어머니가 했지. 그 아이 친구들, 그 친구들의 부모님까지 벌써 다 조사 끝
났어. 친구 어머니가 SHUA 그룹 회장님과 재혼을 하셨더라?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대기업은
아니지만 탄탄한 기업이던데.. 그렇다고 흔들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 아이 뿐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까지 곤란해 질 수 있다는 거야. 너의 어머니. 너 절대 포기 안 해. 사랑 없이 나이 많
은 아버지와 너 임신해서 결혼까지 하신 분이야. 모든 걸 너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시지. 그런
데 너는 자꾸 도망가잖아. 그러니 끌어다 놓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하찮은 사랑따위로 여러
사람 다치게 하지 말고 정리해.”
“사랑이 하찮아? 누나.. 지수는.. 그래.. 지수도 사랑했었어. 하지만 은오는.. 이제 나 밖에 없어. 앞으로도 그럴거야. 제발 날 유언장에서 빼고 평범하게 선생님으로 은오와 결혼해서..”
“바보야! 정신 차려. 어떻게 너의 어머니 같은 여자한테서 너 같은 녀석이 나왔니.. 너는 안
다쳐. 그 아이가 다친다고 이 바보 멍청아. 내가 돌려서 말하니까 내 말이 우습지. 너의 어
머니.. 그 아이를 육체적으로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뜻이야. 부모님 잃어 정신적으로 힘든 아
이.. 얼마나 더 지옥으로 만들어 줄래?”
우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 단념하도록 설득시키려고 온 거 아니야. 곧 움직이실 것 같아서 미리 알려주려고 온 거라고, 이 바보야!”
누나와 헤어지고 집으로 들어온 우진은 자신의 침대에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 있는 은오를 바라보았다. 그가 턱에 힘을 주고 시선을 조금 옮기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그의 기척에 은오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선생님..”
우진이 표정을 바꾸며 미소 짓는 얼굴로 그녀 옆으로 다가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손을 들어 눈물로 얼굴에 엉켜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겨주었다.
“깼어? 더 자..”
“어디 다녀오셨어요?”
“응. 잠깐.. 내일 아침으로 뭘 해줄게 있어야지..”
우진이 눈물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은오의 볼을 감쌌다. 은오가 고개를 숙여 우진의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죄송해요..”
“한번 만 더 그 소리 하면.. 혼내 줄 거야.”
은오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우진이 한 숨을 삼키며 은오를 당겨 품에 안았다. 은오의 손과 몸이 가볍게 떨렸다. 우진이 손을 들어 은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벽에 다시 잠이 든 은오를 바라보며 우진은 밖으로 나가 아침 일찍 여는 죽집에서 전복죽을 사왔다. 짧은 잠에서 깨어난 은오가 욕실에서 씻고 밖으로 나왔다. 우진이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침 먹자.”
“네..”
은오가 식탁 차리는 것을 도와주려고 하자 우진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따뜻한 전복죽을 은오 앞에 내려놓았다.
“뜨거워.. 천천히 먹어.”
“같이 드세요.”
“응.”
우진이 자신의 전복죽도 가져와 은오 앞에 앉았다. 은오가 힘겹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거짓말은.. 맛도 모르겠지?”
은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쯤.. 괜찮아질지 모르겠어요..”
우진이 고개를 숙인 채로 눈물을 훔치는 은오를 바라보았다.
“점심은 나가서 먹자. 정원이 참 예쁜 레스토랑을 알거든.”
은오가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집도.. 정리를 해야하고..”
“나중에.. 천천히 해. 지금은 일단 먹고, 기운부터 차려야지.”
“네..”
조금 더 죽을 먹은 은오는 설거지를 하는 우진을 도왔다. 설거지가 끝나고 우진은 한 참 동안
은오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베란다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을 바라보
았다. 우진이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대자 울고 있는 은오의 떨림이 전해졌다. 우진이 눈을 감
으며 은오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점심으로는 석준이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에 갔다.
“형..”
석준이 우진 옆에 서 있는 은오를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정식세트로 준비해 드릴께요.”
“그래.. 부탁한다.”
“네.”
석준은 은오를 환한 미소로 바라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정원 예쁘지?”
“네..”
은오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가을에는 더 예쁘대..”
“나중에.. 가을에 함께 와요..”
우진이 슬픈 미소를 숨기고 자신을 바라보는 은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열심히 할 거지?”
“하아... 잘 모르겠어요. 목표가.. 사라져서..”
은오가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네 인생은 이제 대충 살아도 된다는 소린가?”
은오가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바보같은 생각.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나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당차고, 씩씩하고, 똑똑하고..”
은오가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대신.. 선생님이 함께 해 주세요. 제 미래에는.. 선생님밖에.. 없어요.”
우진이 고개를 숙이며 “응..” 이라고 대답했다.
“부담 드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우진이 고개를 들어 슬픈 눈으로 은오를 바라보았다.
‘틀려.. 은오야.. 지금 내가 이러는 건.. 순전히 내가.. 내가 못나서..’
“은오야..”
“네?”
“여기 음식 맛있다. 많이 먹어.”
“네..”
은오가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우진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핸드폰이 울리자 우진이 받았다.
“여보세요.. 아.. 마희야..”
<선생님! 어떻게 해요! 은오가.. 은오가 없어요!>
“아.. 은오.. 지금 나랑 같이 있어.”
<진짜요?>
“그래..”
<하아~. 다행이다.. 은오.. 선생님이랑 같이 있대..>
마희가 전화기 너머로 안나에게 설명하자 안나의 큰 안도의 한 숨 소리가 들렸다.
“점심 먹고 집으로 갈 거야.”
<그럼 출발할 때 연락 주세요.>
“그래..”
전화를 끊은 우진이 은오를 바라보았다.
“혼자 아니야.. 너를 걱정하는 마희, 안나.. 그리고..”
“선생님도 계세요.”
“그래, 인마..”
“알았어요.. 기운 낼 께요.”
은오는 아침보다 조금 더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그 날 저녁 은오는 안나와 마희가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집에서 잠을 잤다.
“우리가 괜히 왔나?”
마희가 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 우리 보다는 애인이 위로가 될 것 같은데..”
은오가 피식 웃었다.
“자꾸 선생님한테 기대면 부담스러우실 것 같기도 하고.. 난 너희들이 와서 좋은걸?”
“바보.. 지금은 네 욕심 차려도 돼. 선생님한테 기대고 싶으면 기대고, 우리한테도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너무 참으면 병난다, 너..”
마희의 말에 은오가 피식 웃었다.
“고맙다~. 짐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고.. 수능이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 하고 있어. 조금 도와준다고 안 떨어져.”
“그래. 우리가 의대, 법대 들어가려는 건 아니니까..”
“너는.. 수능 볼 꺼지?”
“글세..”
“글세는.. 아깝잖아. 세상은 우리보다 너를 원할텐데..”
“맞아. 네 능력이 아까워. 수능 보자.”
은오가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그 날 밤, 우진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네..”
<설마.. 도망갈 생각은 아니겠지?>
우진이 턱에 힘을 주었다.
<이번 주에 사표 제출해. 그리고 호텔 경영하는 거야. 그러면 그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 그것이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같은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거지. 어때?>
“꼭.. 그러셔야 합니까?”
<그러기 위해서 내가 결혼 한 거야. 너, 겨우 선생이나 하라고 낳은 게 아니란 말이야. 알았
어? 이번 주까지 사표내고 그 아이 정리하지 않으면 내일 SHUA그룹이던지 중소기업이던지. 하나
는 정신없어지겠지. 알아서 해.>
“아이들.. 건드리지 마세요.”
<너 하기 달려있다니까?>
“어머니..”
<왜?>
“졸업할 때까지만.. 졸업할 때 까지만 봐주시면.. 안됩니까?”
<그 아이에게 헛된 희망을 주려고 하는구나?>
우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번 주까지야.>
어머니가 전화를 끊자 우진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태어나 처
음으로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소파에 누워 오른 팔로 눈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도 그의 왼
손에는 양주가 담긴 잔이 들려있었다.
“왜 안 취하지.. 취해야 하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떻게.. 하아..”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고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안나와 마희의 도움으로 짐을 정리했다. 울먹이는 세 사람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다시 학교에 갔을 때 아침부터 선생님들과 친구들로부터 위로의 말들을 들었다. 은오는 오히
려 그 말들에 눌려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얼른 우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를 보
고 그가 웃어주면 모든 답답함이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드디어 교실 문이 열렸다. 은오가 미
소를 지으며 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
다.
“아.. 개인적인 집안 사정으로 유우진선생님이 그만 두셨습니다.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일이 생
겨서 정말 미안해 하셨어요. 대신 훌륭한 선생님이 여러분들을 마지막까지 지도해 주실겁니
다. 들어오세요.”
젊은 여자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은오의 귀는 웅웅거리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은오야..”
마희가 은오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안나가 조용히 마희의 손을 잡았다.
“이따가..”
“알았어.”
안나는 창백해진 은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학생들이 없는 벤치에 앉은 그녀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 학교 그만두신 다는 말 들었어?”
“아니. 못 들었어.”
“무슨 일이지?”
“다치셨나? 아프신 건가?”
“그런가? 그래서 전화도 없으셨던 건가?”
은오의 손이 떨리는 걸 보자 안나와 마희가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잠깐 기다려. 전화 해 보면 되잖아.”
마희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은오에게 주었다. 은오가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은오예요.”
<응. 그렇구나.>
“다치셨어요? 어디.. 아프신 거예요?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아니야. 중간에 그만 둬서 미안하구나. 다른 아이들에게 그렇게 전해주렴.>
은오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나 주세요.”
<그래. 만나야겠지. 찻집에서 저녁 8시에 보자.>
은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네.”
<그럼 수업 잘 받고, 저녁에 보자.>
그녀가 끊길 기다리지 않고 그가 먼저 끊었다.
“야.. 왜 그래. 많이 다치셨대?”
“.....”
“은오야.. 왜 울어..”
“어떻게 해..”
“응?”
“달라.. 선생님 목소리가 달라졌어..”
“그게 무슨 소리야.”
“저녁에 만나자고.. 그런데 이상해.. 불안해.. 꼭.. 헤어지자고 말할 것 같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선생님이 너랑 왜 헤어지냐?”
“그래. 선생님이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무슨 일이 생기셨나봐. 설명해 주실거야. 응?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그만 울어.. 이러다 쓰러지겠다..”
“불안해..”
은오가 안나와 마희에게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그날 저녁 마희와 안나는 주방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다.
“너희.. 뭐하니?”
이모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으셨다. 마희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이모 조용히 좀.. 우리 여기 있는 거 들키면 안 되거든요.” 라고 말했다.
“은오.. 어때?”
“쓰러질 것 같아..”
은오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들어 그가 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가 들렸다. 은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닫지
않고 열고 누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마희가 일어나려고 하자 안나가 잡아 앉혔다.
“뭐야.. 저 여자는..”
“왜 저러시지..”
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은오의 표정은 더욱 창백해졌다.
“인사 해. 이쪽은 내가 기다린다던 그 사람. 이 쪽은 내 제자.”
은오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안녕하세요. 미안하지만 부모님이 허락해 주셔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금방 나갈게.”
“응.”
우진이 그 여자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볼을 쓰다듬었다. 여자도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가게를 나갔다. 우진은 싸늘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설명해 줄 테니까 앉아.”
“왜.. 이러시는 거예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앉아. 아니면 그냥 서서 들을래?”
“선생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다시 만났어. 내가 처음 사랑하고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를 다시 만났어. 네가 그랬지? 다시
만날 때까지만 만나달라고. 부모님도 허락해 주셨어. 저 사람과 곧 결혼할 거야. 그리고 부모
님 회사도 이어 받을 거야.”
은오가 걸음을 옮겨 앉아 있는 우진을 안았다.
“이러지 마세요. 혹시 부모님이 저를 반대하셔서 그러시는 거라면.. 저는 선생님 부모님이 허
락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선생님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서 살자고 하시
면 따라 갈게요. 집도 없고, 차도 없어도 상관없어요. 저도 일 하면서 도울게요. 우리 그냥 그
렇게 살자 하시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밀어내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 선생님
밖에.. 없어요. 제 옆에 있어 준다고 약속 하셨잖아요. 날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왜..
이러시는 거에요..”
은오가 울먹이며 말을 하는데 우진이 차갑게 그녀의 팔을 떼어내며 인상을 썼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잖아. 기다리는 사람 있다고도 말 했고. 너야 말로 이러지 마. 수능
봐. 졸업도 하고, 대학도 가. 대기업에 취직도 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이건.. 필요한 곳에 써라.”
그가 테이블 위에 두툼한 하얀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수가 기다려서 가봐야겠다. 그럼. 행복해라.”
그가 그녀를 지나쳐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리없는 눈
물만 흘렀다. 마희와 안나가 주방에서 나와 바닥에 앉아 있는 은오를 안았다.
“은오야..”
“야..”
“왜.. 왜 그러시는 거지? 안나야.. 마희야.. 왜 기다려 달라고, 도망가자고 안 하시지? 난 따라갈텐데.. 왜.. 저러게 차가운 척.. 왜 그러시는 걸까?”
“은오야..”
세 사람은 바닥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우진이 윤지를 그녀의 집 앞에 내려 주었다.
“진짜.. 오빠는 오랜만에 전화해서 이런 부탁이나 하고.. 찜찜하게..”
“미안하다. 예전에 너 결혼할 때 내가 도와준 거 갚은 거야.”
“설마.. 그 아이 나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지켜봐야지...”
“하여간.. 오빠는 차라리 나랑 결혼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나는 나대로, 오빠는 오빠대로 연애하면 되잖아.”
우진이 인상을 쓰며 피식 웃었다.
“그게.. 말이 되냐?”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싫다. 결국 넌 네가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 했잖아.”
“오빠도.. 힘 내요.”
“그래. 들어가라.”
“응. 운전 조심해.”
“응.”
우진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은오가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들었다기 보다는 기운이 없어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안나가 마희에게 조용히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옆에 있어. 혼자 화장실도 보내지 말고.”
“응. 어디 가는데..”
“선생님한테..”
“조심해서 다녀와.”
“응.”
안나가 은오를 슬쩍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진이 자신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해 놓고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나가 다가가 차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흠칫 놀라 바라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급히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왜 왔냐?”
“제대로 설명해 주세요. 그걸 로는 아무도 안 속아요.”
“그냥 다 지겨워졌을 뿐이야. 늦었어. 돌아가라.”
“울지 말던가.. 다 봤어요. 냉정하게 보이려고 노력하셨지만 선생님 눈에서 고통스러운 마음을 봤단 말이예요.”
“독심술 하냐? 네가 보는 게 다 맞는 건 아니야. 어른들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어. 나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구나.”
“네.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 중에는 선생님 같은 분도 계시구나.. 했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선
생님같은 사람이라면.. 저도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러니까 말씀해
주세요. 은오.. 누워있어요. 어쩌면 내일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러길 바라세요?
은오가 스스로.. 사는 걸 포기하길 바라시냐구요.”
우진이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걱정되시죠? 보고 싶으시죠? 이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은오가.. 얼마나 기다리면 허락해 주실까요?”
그가 눈을 뜨고 깊은 한 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지 않으실거야. 얼마의 시간이 걸려도 말이다.”
“그럼 같이 도망가시는 건 어때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식당에서 일하는 은
오를 보면서 나는.. 자책할 거다.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그 아이가 돈 몇 천원에 한 숨을 쉴 때
마다 불행하게 만든 내 자신을.. 용서할지 못할 거야.”
“그 만큼 사랑해 주시면 되잖아요.”
“안나야.. 내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은 아니야. 난 은오가 수능도 보고, 명문대도 들어가고, 대
기업에도 들어가고, 좋은 남자 만나 나 같은 놈은 잊고 연애도 하고, 행복하게 결혼도 했으면
좋겠다. 옆에서.. 도와주면.. 정말 고맙겠다.”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주시면 안돼요?”
우진이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전에 행동하실 것 같아서.. 은오 뿐
아니라 너, 마희. 그리고 너희 부모님, 마희 부모님.. 다 다칠 수 있어. 어른이 되었지만.. 난
무섭다. 내가 다치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워. 하지만 너희들이 나 때문에 다치는 건.. 무섭다.
다들 시험 잘 보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길 바래.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길 바란다.”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 거예요?”
“당분간 우리나라에 없을 거야. 아마 평생 안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미안하고 염치없지만.. 은오 좀.. 부탁한다.”
그가 고개를 숙여 안나에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나가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와?”
“은오야..”
안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던 은오의 눈이 커졌다.
“선생님.. 만나고 왔어?”
“귀신이다..”
안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냄새가 나서.. 뭐라셔?”
“일단 앉아.”
마희가 코코아를 타서 갖고 왔다.
“잘 들어. 선생님은 외국으로 가신대. 우리나라에 평생 안 들어 오실지도 모른대.”
은오의 눈이 커졌다.
“그 분이랑 결혼해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우리가 아는 것보다 선생님 부모님이 많이 무서우신 것 같아. 돈도 많고 힘도 세고..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결정하신 것 같아.”
“나도 같이..”
안나가 턱에 힘을 주고 은오에게 말했다.
“바보야.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뭘 할 수 있어? 너 뿐이 아니야. 나랑 내 부모
님, 마희랑 마희 부모님까지 알고 계신대.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셨대. 정신 차
려. 돌아가신 부모님이 네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남자랑 도망가서 사는 걸.. 좋아하시겠
어?”
“야~. 무슨 말을 그렇게 독하게 해..”
마희가 안나를 말렸다. 안나가 눈물이 흐르는 걸 소매로 거칠게 닦았다.
“독해질 수 밖에 없어. 수능 시험 봐. 대학도 가고, 대기업에 취직도 해. 할 수 있다면 좋은
남자 만나 결혼도 하고.. 일단은.. 제대로 서 있어. 지금 넌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잖아. 네 두
발로 제대로 서 있을 때.. 만약.. 만약에 그 때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그 땐 정말.. 도망가
서 사는 거야. 그 때는 나도 도와줄게.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안 돼.. 은오야.. 지금은.. 우리
가 힘이 너무 없어..”
안나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응. 무슨 말인지.. 알아. 알 것 같아..”
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를 악 물었다.
“우리 성공하자. 힘을 갖자. 두 발로 제대로 서 있자. 힘내고 독해지는 거야.”
셋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안나는 마희와 은오를 은오네 집에 두고 집으로 왔다.
“연락도 없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현관에 들어선 그녀를 엄마가 엄한 표정으로 혼내셨다.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은 안나가 무릎을 꿇었다.
“어머.. 얘.. 뭐하는 거야..”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응?”
재원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나가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눈물이 고인 눈으로 가족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래.. 어서 일어나라니까?”
“엄마..”
“응.”
“은오.. 우리랑 같이 살면.. 안 될까요?”
“뭐?”
엄마와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보셨다. 그러다 아버지가 엄마를 그녀쪽으로 슬쩍 미셨다. 엄마가 안나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알았어. 일단 일어나..”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그냥..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같이 살게 해 주세요. 졸업하면 둘
이 집 구해서 나갈게요. 아르바이트도 하고.. 열심히 돈 벌어서 살 테니까.. 은오 좀.. 보살펴
주세요..”
“안나야..”
“그래. 그러자. 아래층에 손님 방도 있고, 너랑 같이 한 방에서 지내도 좋아. 은오 양만 좋다면 그렇게 하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방으로 들어간 안나는 마희 전화로 은오와 통화를 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바보야. 지금 자존심 세울 때야? 반대로 놓고 생각해 봐. 너 같으면.. 나 혼자 살게 할래? 그래?”
<안나야..>
“졸업할 때까지만.. 그러고 나면 어차피 나.. 집에서 나가려고 했으니까 같이 나가면 돼.. 응?”
<알았어.>
“아버지가 이삿짐센터 내일 보내신다고 하셨으니까.. 지금 나도 너희 집으로 갈게.”
<별로 짐 없어. 마희도 있는 걸.. 오늘은 쉬어. 내일 보자.>
“하지만..”
<내일부터.. 잘 부탁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고마워.. 너희들 아니었으면.. 흠.. 힘들었을 거야.>
“힘 내자고 했잖아..”
<그래. 그러자. 그럼 내일 보자.>
“응.”
안나가 전화를 끊고 팔뚝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뭐래?”
“내일 이삿짐센터에서 올 거래. 졸업할 때까지 안나네 집에서 살게 되었어.”
“다행이다.. 사실 나도 아빠한테 말할 생각이었어. 안나가 한 발 빨랐네..”
“고맙다..”
“은오야..”
마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선생님이.. 나를 만나러 오실까?”
“그러실거야. 분명히.. 너를 만나러 오실거야.”
“마희야..”
“응?”
“두려워.. 선생님이 나를 찾으러 안 오실까봐..”
“은오야..”
마희가 눈물을 흘리며 은오를 안았다.
“오실 거야. 분명히.. 그 날을 위해.. 제대로 준비하고 있자..”
“응..”
두 사람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안나가 마당에 있는 그네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우리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고개를 숙인 안나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재원이 그녀의 손을 잡아떼었다. 눈물로 범벅인 안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뭐하는 거야..”
안나가 그에게 잡힌 손을 뺐다.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밤에 와서는 은오누나랑 같이 살면 안 되냐고 하고, 잠도 안 자고 울고불고.. 뭐하는 거냐고..”
“하아... 들어가서 잠이나 자..”
안나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은오누나한테 무슨 일 생겼어?”
“생겼잖아. 몰라?”
“부모님 돌아가신 거 말고.. 유우진 선생님 그만 두신거랑 관계.. 있어?”
안나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하여간.. 거짓말도 못하고.. 뭐야.. 선생님이랑 헤어졌어?”
안나가 다시 눈물이 솟아오르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
“나 입 무거워..”
“그래.. 선생님이랑 헤어졌어.”
“왜? 갑자기 왜 헤어졌어? 그것도 은오누나가 가장 힘들 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나가 울먹이자 재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선생님 진짜.. 인간이 아니구나? 나이 어린 제자 갖고 논 거야? 그런 인간이 제일 싫어..”
안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선생님.. 그런 사람 아니야.”
“아니긴.. 이 상황에서 그 인간 두둔하고 싶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랑하는 여자가 제일 힘들 때 버리는 인간이 제대로 된 사람이냐?”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네가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부모님이 아셔서.. 그렇게 부자야?”
“내가 아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그렇지.. 부자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찢어 놓아도 돼?”
“부자라고 다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네 할머니도 첫 가족모임에서 나한테 그러시더라. 다 커서 만나 한
가족이 되었으니까 특별히 조심해 달라고.. 그 말이 무슨 뜻이겠어? 나보고 너 좋아하지 말라
는 뜻이시잖아. 아무리 그래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씀하시는 거 보
면.. 부자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비아냥거리지 마.. 그런데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래..”
“왜 말 안했어?”
안나는 짜증이 나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어차피 너랑 나는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해..”
“뭐?”
“지난 번에 말 했잖아. 너는 아닐지 몰라도 난.. 난 너 좋아한다고..”
“하.. 하... 하하하...”
안나가 턱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재원의 인상이 구겨졌다.
“웃겨?”
“그럼 안 웃겨? 네가 누굴 좋아해? 야.. 진짜 개그프로그램보다 훨씬 웃겼어. 고맙다. 덕분에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아.”
“웃으라고 한 말 아닌데?”
“장난 치지마. 지금 네 장난 받아 줄 여유가.. 하아.. 없다.”
안나가 그네에서 일어나 그를 지나쳐 가려고 하자 재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기쪽으로 잡
아 당겼다. 그리고 안나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충격으로 눈이 커진 안나가 양 손으로 그를
밀어내고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다시
손을 들어 주먹으로 그의 팔과 어깨를 때렸다.
“미쳤어? 미친 거야? 누가 나한테 손대라고 했어? 어? 누가 키스하라고 했냐고! 죽고 싶어? 어?”
재원이 안나의 두 손을 잡았다.
“그만 해.. 이렇게 맞을 정도로 잘 못 안 했어. 그러게 왜 건드려?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 마음을 이렇게 우습게 생각해도 되는 거야?”
“누구마음대로 좋아하래?”
“그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감정이야? 나도.. 나도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너 같은 거.. 여자 같지도 않고, 사람 벌레 취급하는 너 같은 여자.. 좋아하고 싶었는줄 알아?”
“그럼 안 좋아하면 되잖아! 가족인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지금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럼 왜 했어? 키스는 또 왜 했어?”
“한 번도 키스 안 해봤지? 그게 키스냐? 뽀뽀 축에도 안 들어간다.”
“웃기시네..”
“제대로 키스 해줘? 그래야 구분을 하겠냐고..”
“미.. 미쳤어?”
“울지 마..”
“뭐?”
“울지 말라고.. 은오누나 일에 가슴 아픈 건 알겠어.. 하지만 네가 울면.. 여기가 이상해..”
그가 그녀의 손을 잡은 손으로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안나가 잠시 생각하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보았다.
“너.. 혹시 약..같은 거 하니?”
재원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털어버리듯 떼어냈다.
“진짜.. 사람이 진지하면 쫌..”
“왜 진지해야 하는데? 너랑 나랑 왜 진지해야 하냐고.. 경고하는 데.. 너 마음 빨리 접어. 난
절대로.. 절대로 연애 따위, 결혼 따위 하지 않을 거야. 만약 한다고 해도 절대로.. 절대로 죽
었다 깨어나도 연애하기, 결혼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엄마 때문에 너랑 가
족으로 얽혔지만.. 나 너 싫어.. 말 했다. 다시 한 번 더 그딴 소리 지껄이면 죽어.. 진짜로..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이르던지..”
안나가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재원이 턱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젠장.. 이렇게 고백하고 싶지 않았는데.. 손은 또 왜 이렇게 맵냐.. 하여간.. 어딜 봐도 여자같지 않다니까..”
그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가 한 숨을 내쉬고 현관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간 안나가 욕실에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잔뜩 올려 양치질을 했다.
“정신 나간 녀석.. 진짜.. 가만 안 둬.. 아 씨.. 짜증나!”
안나가 다시 양치질을 했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 우진은 한 동안 샤워부스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한 참 후에야 붉어지고 부은 얼굴로 욕실을 나온 그가 냉
장고문을 열고 맥주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고 외출준비를 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거의 끝날
시간이 다 되어 마감 준비를 하고 있는 석준의 가게였다.
“어.. 형.”
석준이 놀란 표정으로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 우진을 바라보았다. 직원들을 보내고 석준이 술과 안주를 우진이 앉은 자리에 내려놓았다. 우진은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을이 되면 같이 오자고 했는데.. 그 약속.. 못 지킨다..”
“형.. 지난번에 같이 왔던 그 아가씨랑 무슨 일 있었어?”
우진이 석준을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진이 술잔을 들어 한 입에 마셨다.
“형.. 천천히 들어요.”
우진은 대답대신 양주병을 들자 석준이 대신 병을 잡아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우진이 다시 한 입에 마셨다.
“형.. 무슨 일 있었는데요? 이런 모습 처음 보는데..”
우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석준아.. 내가.. 하아.. 내가 싫다.”
“형..”
다시 고개를 들어 정원을 바라보는 우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자 석준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첫댓글 재미있게보고가용
내일도 기대해 주세요.. ^^
안나에게 무슨 아픔이 있는건지..궁금하네요 재밌게 잘 보고있어요~
끝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잘 보구가요~ㅎ
ㅎㅎ 감사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