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큐슈 여행기 (下)
1월11일 맑음
유휴인(湯布院)!
왠지 로맨틱한 느낌에다 매끄러운 뉘앙스의 지명이다.
학생 시절 지금의 천황이 황태자일 때 사랑의 데이트 장소였다는 ˝가루이자와(軽井沢)˚라는 지명을 책에서 읽고 막연히 동경을
했었는데 후일 가보고는 과연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북해도의 자그만한 운하가 있는 도시 ˝오타루(小樽)˚도, 고즈넉한 산책길이 일품인 아오모리의 ˝오이라세(奥入瀬)˚도 예쁜 지명
만큼이나 모두 아름답고 사랑스런 곳이었다.
‘유휴인’도 그 이름에서 연상되는 무엇인가가 있는 곳이다.
온천과 더불어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공간, 귀여운 소품가게, 민예촌, 미술관 등 문화감성을 살린 시설들이 늘어선 거리를 산보하면
우리의 인사동 골목을 걷는 것도 같았는데 찻집과 예쁜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그 중에 좋아하는 고로께집도 발견했다.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유후인 거리. 유후인의 고로케 가게.
유후인에서 여유로운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옛날 투어버스는 이동시간에 가이드가 마이크를 돌려주면 각자 자기소개도 하고 자식자랑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에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서인지 그런 거 안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도 서로 서먹하다.
유후인에서 고로께를 좀 넉넉히 사서 기사와 가이드에게, 그리고 앞뒤자리 사람들에게 하나씩 권하자 바로 분위기 바뀌어 어떤
부인은 온천계란을 내어 놓고, 급기야 사업한다는 뒷자리의 아저씨가 큰 술병을 꺼내 한잔씩 권하자 금방 친해졌다.
분위기만 타면 가진 거 다 내어 놓고 남 대접하는 거 좋아하는 게 우리 사람이다.
‘일본은 없다’를 쓴 전여옥이 KBS특파원으로 동경에 부임하자 NHK국장이 환영회를 해 준다고 해서 갔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먹고 마시고 나름 즐겁게 놀았는데 돌아갈 때 쯤에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길래 봤더니 그 날 총 회식비를 1/n로
나눈 금액이 적혀있고 그 걸 계산하고 가라 해서 아연 실색했다고 한다.
버스는 스기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지나 ‘구로가와온천(黒川温泉)’으로 향했다.
아늑한 숲속의 계곡 양쪽에 숨어있듯 20여 곳의 여관이 산재해 있다. 결코 규모도 크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아 그냥 어느 시골에
온 느낌이다. 그러나 미슐랭 온천 평가에서 별 세개를 받았다는 곳이란다.

구로가와 온천 유메린도 호텔의 봄풍경
300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이 마을도 한 때 불황에 시달리게 되자 마을 조합을 중심으로 노천온천을 오픈해 공유하고 환락적 요소를 배제하는 등 차별화를 시도해 지금은 인기 넘버원의 온천마을로 부활했다 한다.
이 날 숙소는 유메린도(夢竜胆)온천여관.
일본의 온천시스템은 보통 1박에 저녁과 아침식사 포함하여 1인당 3만엔 전후를 받는다. 4인 가족이면 쉽게 우리 돈 100만원을
넘긴다.
온천을 가면 세번은 탕에 몸을 담구는 것이 기본이다. 오후에 첵크인해서 저녁 식사하기 전에 한번, 자기 전에 한번, 그리고 아침에
한번이다.
상식이지만, 꼭 몸을 헹구고 나서 탕에 들어가야하고, 들고 들어간 작은 수건은 탕안에 담그지 말아야 한다.
실내에서 몸을 덥힌 후 밖으로 나가 노천탕도 즐길 잏이다.
이 때 하늘에서 벚꽃잎이 흩날리거나, 단풍잎이 떨어지거나, 눈이라도 흩날리는 날이면 운치는 가히 일품이다.
나올 때는 샤워로 깨끗이 다시 씻어내지 말고 효능이 있는 온천물 그대로 대충 물기만 말리고 나오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목욕할 때 작은 수건으로 대개 그 부분을 가리고 다니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지만 그게
크든 작든 당당히 내놓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잠시 관내를 산책하며 휴식을 취하고나자 온천여행의 하이라이트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갖가지 계절 야채와 산채 생선 육류가 제공되는데 구마모토의 명물은 말(馬)사시미다.
난 소고기 육회나, 후쿠오카 지방의 닭사시미는 먹지 않지만, 예전 어느 자리에선가 한 번 맛본 이 음식은 그 진홍색감과 느끼하지
않은 깨끗한 뒷맛이 인상적이었던 겋 기억한다.
일본요리는 흔히 눈으로 먹는 요리라고도 한다.
한 젓가락도 안되는 음식을 각양각색의 커다란 접시에 담고 온갖 풀과 잎사귀로 장식하느냐고 할지 모르나, 음식은 미각뿐아니라
시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할 수 있다면 당연히 즐거움은 몇 배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온천음식

유메린도 온천호텔의 노천탕
지금은 집에서 모두 침대를 쓰지만 우리 어릴 때는 거의가 장판바닥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잤다.
풀을 빳빳이 먹여 다듬이질을 한 홋청을 새로 갈은 날이면 조금 차거운 듯 하면서도 서걱한 기분좋은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의 온천호텔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그 사이 종업원이 하얀시트를 갈아끼운 이부자리를 다다미 위에 깔아준다.
아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위를 한바퀴 뒹굴어 보는 재미도 있다.
1월12일 맑음
우리는 일본 3대 미인탕이라는 사가현(佐賀県) 우레시노온천(嬉野温泉)을 거쳐 후쿠오카의 太宰府天満宮에 들렀다.
입구에 아직은 피지않은 매화나무가 빽빽하다.
이 곳은 우리의 율곡이나 퇴계선생쯤 되는 머리가 좋았다는 菅原道真을 모신 신사로 대학수험생의 기원행렬로 붐볐다.
가이드에 의하면 어디서 들었는지 한국의 수험생 어머니들이 입시철이면 여기 이국땅까지 와서 치성을 드린단다.
정말 효험이 있던 없던 그 간절한 정성은 짐작이 간다.
시내에서 아내는 몇가지 쇼핑을 한다. 어묵이나 카레, 후리가케 같은 우리 아이들이 일본있을 때 즐겨 먹던 것들이다.
후쿠오카 공항을 13:50에 출발한 비행기는 17:10에 다시 영종도로 우리를 실어왔다.
지난해를 보내고 추운 정월에 짧지만 따뜻한 온천여행이었다.
한해를 보냈으니 나이 한살 더 먹는 건 불가항력이지만 꼭 더 늙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싶다.
여행은 마음을 늙지 않게 하고 온천은 몸을 늙지않게 한다고 믿고 싶다.
2011년 1월
HJ

낮에는 온천 거리를 산보하는 재미도 괜찮다.
사진의 풍경은 눈 덮힌 온천장의 찻집.
껄쭉하게 탄 抹茶(가루차) 한 잔과 단팥죽 한 그릇을 시켜 놓고 조용히 온천게곡의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적어도 그 시간은 천국이다.
저녁엔 산골짝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고 무심히 하늘의 별이라도 세어보는 그 시간도 극락이다.
첫댓글 4월29일의 제6화 큐슈여행기의 하편입니다.
몇년전의 추운 정월달 얘기라 뜬금없지만 금년 4월에 큐슈를 다녀와 생각이 나서 마저 올립니다.
큐슈는 고대 백제문화의 흔적이 많은 곳이고, 우리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고 잡혀간 곳이며, 임진/정유 조선출병의 거점이기도 해서 우리와 인연이 많다면 많은 곳입니다.
지난 여덟번째의 이야기 "신주꾸 이찌가야" 의 조회수는 2천회를 넘었어요. 검색에 접해진 경우도 있겠지만 많이 읽은 글이 되었습니다. 생활속의 작은 이야기는 작은 행복감을 줍니다.
일본사람들은 어릴때부터 1/n이 몸에 배어있습니다.전여옥이가 일본의 분빠이에 당황한 모양이지요~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는데 세계각국에 흩어져 있는 스웨덴 대사 60여 명이 한국의 어느 클럽에서 함께 식사를한 후
60 여명의 대사들이 계산대 앞에 줄을서서 개개인이 미리 정해진 1 인당 금액을 각자 출장비에서 결제하는것을
보았다는 기사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친구들과 만날때 더치페이 모임이 부담이 없어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호재님의 규슈 여행기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 얘기도 기다려집니다.
좋은 여행입니다 담에 시간되면 같이 함 가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