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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말씀 ♣ 복음묵상 스크랩 2008년 5월 5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이대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8 08.05.06 08: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29-33)

 

 In the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courage,

I have conquered the world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서 선교하고 있다. 그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예수님의 세례를 다시 베푼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온전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힘을 주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신다.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받을 고통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스승님의 말씀은 확신에 가득 차 있다(복음).

 

★★★

 

 요한 복음의 주제는 ‘빛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 오셨기에 ‘어둠의 세상’은 ‘빛의 세상’으로 바뀔 수 있었다고 요한 복음은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빛뿐입니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라도 새벽이 오면 사라지고 맙니다.
어둠은 악의 요소입니다. 그리고 빛은 선의 요소입니다. 누구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악의 요소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인생에 어둠을 남깁니다. 무엇으로 몰아낼 수 있을는지요? 빛의 생활밖에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선행’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이 어둠일 수 있습니다. 자라 온 환경이 어둠일 수 있습니다. 맺고 있는 관계가 어둠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직업이나 관계를 단박에 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는지요? 복음 말씀에서 답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습니다. 빛이신 그분께 다가가면 그만큼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그분의 힘이 내 안에 머물면 그만큼 나는 밝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령관이 옷을 세탁소에 맡겼는데 옷에 달린 계급장이 분실된 것입니다. 때마침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계급장 없이 갈 수는 없었지요. 당황한 사령관은 부하를 시켜 영내에 “혹시 대장 계급장을 가진 사람은 사령관 방으로 오라.”는 방송을 했습니다. 물론 가능성을 생각하고서 방송한 것은 아니지요. 그 누구도 자신의 계급과 다른 대장 계급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소위 한 명이 대장 계급장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겠어요? 사령관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여자 친구가 너는 틀림없이 대장이 될 거라면서 미리 선물한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정말로 대장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공을 세워 자신의 이름을 딴 항공모함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입니다.

희망을 간직한다는 것. 그것보다 커다란 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희망 안에서는 가능한 것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면서 절망 속에서 쓰러져 있는 사람들. 이렇게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희망 없이 이 세상에서 잘 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세상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희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그분께서는 죽음을 이겨내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적인 차원의 희망을 넘어선 더 큰 희망으로, 즉 이제는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이어지는 가장 큰 희망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역사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한 사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를 쓴 호머와 <실락원>을 쓴 밀턴은 실명한 장님이었습니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패장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하였고, 거세당한 치욕을 참지 못하여 은퇴한 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역사서이자 문학서이기도 한 <사기(史記)>입니다. 법학가요 철학자인 한비자는 심한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논박에 대한 반론을 글로 쓸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해서 쓴 것이 그의 이름을 딴 <한비자>였습니다. 돈키호테의 작가 스페인의 문호인 세르반테스는 한 쪽 팔을 잃은 상이 군인이었고, 미국이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른아홉 살에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베토벤은 청각 장애자였고, 바그너는 피부 질환으로, 반 고호는 환청에 시달렸습니다.

주님께 대한 희망을 통해 우리들은 세상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겼으니까요.



 


주님께 대한 희망을 놓지 마세요.

 

 아는 만큼 실천하기     

-백남해 신부-

 

사건 사고만 터졌다 하면 전문가들이 방송에 나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수해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고 수많은 재산 피해가 발생한 뉴스를 보도하는 아나운서가 하는 말, “이것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입니다! 기상청의 예보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며
방재청의 늑장 대처가 천재를 인재로 만들었습니다.” 공무원들이 방송에서
하는 말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고….”
오늘은 (아이들에게만) 즐거운 ‘어린이날’입니다. 제 어릴 땐 ‘어린이날’ 즈음
여기저기 단체에서 학용품이며 과자를 가져다주면서 꼭 한 말씀 하는 중에
빠지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 ‘어린이날’이 아니라 1년 365일
모두 ‘어린이날’이 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는 복음말씀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았으나 그 믿음이 선포되기까지는
더 많은 고난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고난이 따르겠지만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민들레의 꿈

-서영남(인천 민들레 국숫집)-

 

공부방에도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민들레의 꿈’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겨우 열네 살 된 소년이 용산역 근처에서 노숙생활을 하다가 노숙자 형들을 따라 민들레 국숫집에 밥을 먹으러 왔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어린아이들이 밥 먹으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손님 때문에 힘이 들지만, 이 아이들을 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지난해 7월 30일, 겨우 만 원을 입금한 우체국 통장으로 전세자금 이천 만 원을 목표로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11월 12일에 22,192,000원이 모였습니다. 백일 만에 전세금 마련이라는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수련 수녀님들이 보태주셨는가 하면, 공고 학생들도 동전을 모아 보냈습니다. 큰돈을 익명으로 보낸 분도 많습니다. 인터넷의 어느 게시판에 익명으로 올라온 글을 옮겨봅니다. 이분은 공부방을 도와주신 자매님입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는 편이에요. 가령 파마는 일 년에 두 번쯤 동네에서 하고, 기초화장품 정도만 사용합니다. 의류는 올해와 작년 모두 양말만 구입했네요.
올해엔 제 자신에게 매달 10만 원씩 용돈을 주기로 했어요. 스타벅스에서 비싼 커피 한 잔 마시고, 친구들과 스파게티도 사먹고…. 아무튼 마음을 먹긴 먹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다가 10월에야 생각이 났으니 그동안 백만 원이나 모인 셈입니다.
백만 원을 어떻게 써야 하나 생각하다가 며칠 전에 읽은 책이 생각나더군요. 인천에서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드리는 분 이야기였어요. 그래, 이곳에 드리자 마음먹었어요. 시부모님이 농사지어 주신 쌀로 백설기를 맞추어 지난 주말에 남편과 같이 인천에 갔어요. 찾느라 조금 고생했어요. 떡 드리고, 돈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제 자신이 얼마나 기특하던지요. 더불어 남편한테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은 정말 살 만한 것 같아요. 아무리 세상이 부패한 것 같아도 그날 국숫집에서 10분 정도 차 마시는 동안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던지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총각도 봉사하러 왔다고 앞치마 두르고 설거지하고, 좁고 초라한 공간이지만 음식 냄새도 좋았습니다. 드시는 분들도 행색은 초라했지만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식사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어요. 그냥 제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고, 이런 유치한 자랑을 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양승국신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때 마다>


한동안 우리 청소년들을 몹시도 괴롭혔던 ‘집단따돌림’, 생각만 해도 화가 납니다. 가해자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따돌림 당하는 당사자의 심정을 단 1%라도 경험해본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왕따’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끝내 극복하지 못해 유명을 달리한 청소년들, 평생 한이 맺힌 부모님들, 그분들 생각만 하면 치미는 분노를 다스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생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그분 자체가 집중적 따돌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유다 본산으로부터 집중적 견제를 당하셨습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바라사이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수난의 때가 가까워지면서 제자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나중에는 유다백성 전체로부터 왕따를 당해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게 됩니다. 의아해 하시겠지만, 마르코 복음 15장 34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희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마지막 보루인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일생을 한 마디로 역설의 진리로 엮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봐야,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아주 희미하게 그분 역설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 역설의 삶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인류구원이라는 보다 큰 선을 이끌어내기 위해 예수님의 고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육적으로는 버림을 받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변함없이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세상 안에서 육적으로 버림받음을 체험할 때, 우리는 십자가상 예수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때 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은 고통을 겪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포옹할 때 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까?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힘으로, 군사력으로, 폭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함으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감으로 세상을 끌어안으셨습니다. 결국 사랑과 겸손으로 세상을 재창조하셨습니다.

 

 

절대고독 속에 홀로 가는 인생

-김찬선신부-

 

수도자란
절대고독 속에서
무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는 존재라고
우파니샤드는 정의한다.

絶對孤獨,
오늘 복음에는 주님의 이 절대고독이
처연하고 확고하다.

지금까지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제자들마저 당신을 버릴지라도
당신은 고독하지 않고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선언하신다.

당신이 혹독한 수난을 당하시고
제자들마저 당신 때문에 고난을 당할지라도
당신은 패배하지 않았다고,
당신이 승리하였다고 선언하신다.

絶對孤獨,
이것은 相對的인 고독과 다르다.

상대적인 고독은
다른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끓는데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을 때 느끼는 고독이요,
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을 때 느끼는 고독이지만
절대고독은 아무리 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인간은 어차피 혼자라는 自意識의 고독이다.

홀로 서고,
홀로 가는 인생.

이런 인생임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인간의 짓거리나 평가가 그를 흔들지 못하고
얄궂은 운명이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오늘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다 흩어질지라도
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니 너희는 이런 나를 보고 용기를 내고
이런 내 평화 안에서 평화를 누려라.



 

 

  

-2007년 오늘의 묵상에서-

 

 19세기 미국 개신교회에 찬송가와 신앙 간증으로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린 그에게 신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찬송가를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그는 ‘목자의 노래’라는 캐럴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에 갑자기 한 남자가 뛰어나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습니다. “당신은 남북 전쟁 당시 북군에 있지 않았나요?” 그는 깜짝 놀라면서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시오?”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시 성탄절 이브 때 저는 남군의 병사로 조심스럽게 북군 진지에 접근했습니다. 달이 어찌나 밝던지 대낮처럼 환했지요. 그때 북군 보초병 하나를 발견한 나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갑자기 그 병사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부른 바로 그 ‘목자의 노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그 찬송가 소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2절을 부를 때쯤에 저는 당신을 더 이상 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살아서 꼭 돌아오기를 매일같이 기도하겠다.’고 하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동시에 저 북군 병사의 어머니도 같은 기도를 바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세상은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싸우게 하며 온갖 폭력과 전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과거의 적이 아니라 같은 신앙인으로 다시 새롭게 만난 이 두 사람처럼, 주님께서는 세상의 악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참된 만남을 주선해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에 대한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방법입니다.

 

 

새벽을 열며

 

 “일전에 동창 신부가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우는 아이 때문에 모든 신자들의 시선이 거기에 쏠리게 되었다. 때를 쓰며 우는 아이와 난처한 모습에 안절부절 못하는 엄마의 모습, 주변의 신자들은 어서 유아방에 가라고 무언의 눈짓을 보내지만 그 엄마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아이가 미사 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유아방 보다는 신자들과 함께 있는 성당 안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엄마는 우는 아이를 잠시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이내 성당으로 다시 들어와 아이를 달래며 함께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였다.(중략)

존 웨스터호프는 각 개인이 신앙의 단계를 체험된 신앙부터 주체적인 신앙까지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신앙의 크기가 커지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체험된 신앙’이라고 말한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성당에 오면 ‘좋다, 거룩하다, 기쁘다, 감사하다 등등’의 체험은 나중에 주체적인 신앙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중략)

이처럼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어린이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성장할 때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한 성당의 미사 시간, 굳이 때를 쓰는 아이를 데리고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는 부모의 마음은 바로 이런 신앙을 미리 아이에게 저축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제 동창 신부가 교구의 청소년국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들을 인천교구 주보에 적은 글입니다. 이 글에 큰 공감이 갔습니다. 왜냐하면 유아방이 결코 아이들의 신앙심 형성에 도움을 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서 성당에 나왔고, 그때 시끄럽다고 유아방과 같은 구석진 곳을 쫓겨나지도 않았습니다(당시에는 유아방이 있지도 않았지요). 어머니의 작은 꾸짖음에 잠시 동안이라도 조용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교육의 반복으로 인해 이렇게 신부까지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어 지금 우리 성당을 볼 때 아이들이 너무나도 적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는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성당을 찾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어른인 자신들이 미사 참석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어린이들을 유아방으로 내쫓아내고, 성당에 가면 시끄러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아이가 크면 성당에 보내겠다면서 부모가 함께 냉담 하는 모습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종교심을 없애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에 오셔서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분이며, 세상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분을 못 만나게 하는 것.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린이가 성당에서 떠들고 장난친다고 야단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허약한 믿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김동하 신부-


 제자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약한 믿음을 꿰뚫어보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하시면서
도리어 허약한 믿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나약한 신앙을 지닌 제자들이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로
힘을 얻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굳센 신앙을 바라지만 아직까지는
입 안에서 맴돌고 마는 신앙입니다. 바라는 대로 뜨거운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안에서 신앙을 궁글려야 합니다.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도망치고 발로는 돌아서는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비겁하고 배신한 적이 있는 신앙일수록 자신의 초라함을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초라함은 오히려 그분께서 베푸시는 자비 앞에 나아가
무릎 꿇어 입 맞추게 합니다(루카 15,11-32 참조). 

 

 

 내려놓음

-김민수 신부(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에세이집 「내려놓음」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아들 동연이가 두 살 때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다. 동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쥔 채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려면 먼저 계산대에 올려놓고 계산을 해야 했다. 그러나 동연이는 울며불며 장난감을 움켜쥐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장난감이 진정한 자기 것이 되게 하려면 잠시 계산대에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지은이의 아들은 장난감을 갖기 위해 잠시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어린아이조차 비울 때 채울 수 있고, 포기할 때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렇게 체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내려놓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계획, 물질에 대한 걱정, 생명과 안전에 대한 염려, 명예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 우리를 불행으로 이끄는 요소들로 마음의 평화는 찾아볼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개인적?집단적 이기주의는 상생하는 사회와 세계를 파괴하고 전쟁과 테러, 가난과 기아, 폭력과 차별, 불의와 부정, 거짓과 위선 등은 계속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이유는 바로 세상의 평화로움을 위해서다. 그래서 '내려놓음'은 모든 사람이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조건이 아니겠는가?

 

부활 제7주간 월요일

- 홍경완 신부 -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승천대축일을 함께 지냈습니다. 원래 예수님 승천 축일은 부활 후 40일 되던 날, 그러니까 부활 6주간 목요일에 거행됩니다.  예수님께서 40일째 되던 날 승천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기준으로 전례 또한 거기에 맞추어 거행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지역이란 특수성으로 인해 그 축일을 그 다음에 오는 주일로 옮겨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가 예수님 승천대축일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승천 대축일에서 열흘 뒤인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 대축일이 됩니다. 이 성령강림 대축일은 유대교의 오순절 축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축제는 파스카 축제 후 오십일 째 되는 날에 거행했다고 해서 오순절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 이 날은 보리를 추수하고 난 다음에, 그 은혜에 감사하며 거행하는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축제입니다. 그러다가 훗날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의 상징으로 받은 십계명이 함께 더해져서 중요한 이스라엘의 축제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오순절은 이런 의미보다는 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며, 성령강림일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승천 대축일과 성령강림 대축일 사이에 오는 9일 동안 교회는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며 전통적으로 9일기도를 바치고 있지요. 성령을 잘 맞이하려는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전례 중에 요한 복음의 후반부를 듣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복음은 잡혀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눈 대화로, ‘고별대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제자들도 이젠 신앙이 성숙하여, 이제는 비유로 말씀할 필요가 없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셔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알아듣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신뢰가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읽거나 들을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말씀을 통해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더 많은 신뢰 속에서 삶의 근원적인 물음들, 우리가 오랫동안 찾아내고자 하였던 삶의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이제는 너희가 나를 믿느냐?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라고 자못 비장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곧 다가올 수난을 염두에 두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수난의 시간에 제자들은 제 살겠다고 전부다 도망가버려, 철저히 혼자 남겨진 채로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비장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장함과 버려짐 속에서도 예수님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고 그래서 괜찮다고. 그래서 마음 속에는 아버지께서만 주실 수 있는 평화가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를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제자인 너희들의 가슴 속에도 나로 인해 평화가 가득하였으면 좋겠다는 예수님의 바람이 뒤이어 나옵니다. 그 평화가 가득 차 있으면 어떤 고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평화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그게 바로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난을 목전에 두고, 당신이 받을 고난과 함께 앞으로 제자들이 받아야 하는 고난까지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고난 속에 있어 어둡고 암울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여도,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실패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여도, 좀 더 눈을 크게 떠 더 크신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보면 복음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로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2000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옳았다고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애청자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독서> :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로

-경규봉 신부-

아폴로는 에페소에서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를 만나 복음에 대해 정확히 가르침을 받은 후 수도 고린토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했다(18,26-27). 따라서 바울로가 에페소에 도착할 무렵에는 아폴로는 그곳에 없었으므로 두 사람이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에 활발히 전파되고 있었다.

에페소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인 항구도시로서 아시아의 보고로 불릴 만큼 번창한 도시였다. 그러나 반면에 각종 이방 종교들과 미신들을 섬겼고, 사회적 병폐들도 만연해 있었다. 에페소에 도착한 바울로는 몇몇 신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로는 그들에게 요한이 베푼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마음의 변화를 위해 베푼 회개의 세례였음을 가르쳤다. 회개하지 않고 성령을 받을 수 없으며, 또한 근본적으로 회개하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바울로의 가르침을 받은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였다. 마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2,4-8)과 고르넬리오의 집에 모였던 이들(10,44-46)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나타났던 표징들과 동일한 것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언어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마르 16,17)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1고린 12,4-10). 바울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다니면서 계속하여 쉬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에페소에 있던 몇몇 신도들은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요한의 세례조차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께서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루가 3,16). 그들은 단지 세례만을 받음으로써 충분한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에 바울로는 그들에게 주 예수님을 믿도록 가르쳤다. 세례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믿는 믿음이 더 중요한 것이다.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종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후 바울로로부터 안수를 받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까지 하게 되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그들은 성령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7,39). 또한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고 가르치셨다. 믿음 없이는 성령을 받을 수도 없고, 믿음 없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심을 믿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곧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심을 믿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갚으셔서 용서하셨음을 믿는 은총의 종교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고 구원된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신앙인, 구원된 신앙인이 되자..........◆


 

한 걸음만 더 나아가십시오

-양승국 신부  

“너희는 세상의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즘 밭에 자주 나가면서, 땅과 친해지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서있으면 절대 보이지 않을 작고 노란 앙증맞은 들꽃들, 작물 사이에 숨죽이고 앉아있는 새끼 청개구리들, 그 축축한 지하에서도 활발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지렁이들, 그 짧은 시간 안에 쉴 새 없는 변화를 거듭하는 갖은 생명체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감탄사와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낍니다. 삼라만상 안에 긷든 세심한 하느님의 배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좀 더 따뜻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내 인생에도 좀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겠습니다.

하찮은 풀꽃 하나하나에도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니 다시금 털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느님 자비와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이 지속되는 한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저 끈질긴 들꽃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주 실의에 빠지고 좌절을 겪는, 그래서 자주 우울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우리를 향해 용기를 주는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여러분들, 이 세상 살아가시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때로 삶은 어찌 그리 매정한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 신산한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 가혹한지 모릅니다.

삶은 때로 우리를 세상의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넣습니다. 삶은 때로 우리를 인간 한계 끝으로 몰고 갑니다. 그 오랜 노력과 몸부림이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한계 끝에 나타나십니다. 지독한 시련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우리 삶을 말끔히 정화하신 끝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이기 시작하십니다.

견디기 힘들수록, 포기하고 싶을수록, 고통이 극에 달할수록 조금만 더 나아가십시오. 바로 한 걸음만 더. 왜냐하면 바로 거기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냉혹하다 해도, 세상의 악이 아무리 모질다 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사악하다 해도 세상을 이기는 존재,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 세상을 극복하는 존재, 곧 예수님께서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멀리 가는 향기

 +너희가 이제야 믿느냐?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이미 왔다.

-강영구신부-

‘향원정(香遠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면 누구든 이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대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 정자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정채봉의 ‘멀리 가는 향기’라는 동화를 읽어 보셨나요?
임금님은 향감별사를 보내어 향기의 정체를 알아오게 합니다. 향감별사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정자에 머물면서 향기의 정체를 알아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임금님께 보고 합니다.
“그 향기는 화관이 크고 아름다운 꽃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멀고 귀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굳세게 살고 자기 빛을 잃지 않은 작은 풀꽃이 지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향기는 보는 이의 마음이 청정할 때만이 제대로 깃들 수 있기 때문에 좀체로 만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멀리 가는 향기’ 중에서)

스승 예수님을 떠나 온 세상으로 흩어져가는 제자들은 ‘멀리 가는 향기’처럼 예수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2고린2,13).
제자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제자들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고
제자들의 입에서 발설되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예수의 따뜻함과 자비로움을 느끼고
제자들의 삶에서 예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향기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는 나무가 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당신도 하느님께 귀의하십시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향기가 풍기듯, 당신에게서도 하느님의 향기가 풍기는 또 다른 예수가 될 것입니다.(一明)

 


 

-백성환 신부 -
 
  우리는 가끔 피정을 떠납니다. 피정은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죠. 지금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내가 얼마나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 다시 한 번 신앙인으로서 삶의 목표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꼭 피정 만이 아니더라도 일상생활 안에서 피정과 같은 시간을 매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주 월요일이 되면 주일을 경건하게 보냈던 제 마음이 현실의 삶 속에서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게 됩니다. 하루를 잘 산다는 것이 참 어렵죠. 오늘을 마감하며 끝기도를 바칠 때에 또다시 반성하게 되겠지만, 항상 예수님을 잊지 않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한 수도원에서 몇 일 동안의 개인 피정을 했을 때였습니다. 기도 중에 갑자기 한 순간의 정적을 느꼈습니다. 주변이 조용하기는 했지만 잠깐의 정적이 지난 이후에 자동차소리도, 사람의 목소리도, 일상의 소음도 그대로인데, 그때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새소리와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의 소음 속에 감추어진 소리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대하여 말씀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알고 난 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제자들 보다 예수님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지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핑계로 그 목소리를 외면하고 아예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은 현실의 소음 속에 아름다운 소리들을 듣지 못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사랑하는 내 아이와 가족의 얼굴 속에, 연인들의 아름다운 눈길 속에, 그리고 노력하는 삶의 땀방울 속에 예수님은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의 글 중에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말소리와 새소리, 오케스트라의 힘찬 선율을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못 만져보게 될 것처럼 만져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냄새와 맛을 못 느낄 것처럼 꽃향기를 마시며 매 손길마다 맛을 음미하십시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소중한 것을 간직할 줄 아는 것,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소중한 것을 잃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죠. 오늘 복음에서 나중에 닥쳐올 예수님의 죽음으로 통한해 하고 불안해할 제자들의 모습을 미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리석고 죄 많은 사람들을 위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느낍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도망칠 제자들을 알고 있었고, 홀로 남겨질 것을 아시면서도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은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목숨을 내어놓은 위대한 사랑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한결같으십니다. 사람을 용서하고, 잘못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신뢰를 보내며, 그 누구에게도 사랑이 전해지길 바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곧 하느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간직하고 아낄 줄 아는 마음, 현실 속에서 잊었던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속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내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그런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용기를 내라, 실전(實戰)이 남았다†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에 들어가기 전에 바로 앞의 구절을 먼저 읽어보자.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28절) 예수께서는 이 한마디의 문장으로 당신 자신의 원초적인 신원(身元)과 파견(派遣), 그리고 파견임무의 성취(成就)와 아버지 우편에 좌정(坐定)하실 것임을 밝히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지금은 주님께서 조금도 비유를 쓰지 않으시고 정말 명백하게 말씀하시니 따로 여쭈어 볼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말한다.(29-30절)

제자들이 주님의 모든 지식을 깨달았다니, 그래서 주님을 확실히 믿기까지 한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느닷없이 제자들의 명오(明悟)가 열린 것인가? 물론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어떤 깨달음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긴 고별사가 이제는 지루할 때도 되었을 것이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 했던가? 그렇다고 제자들을 너무 폄하하지는 말자. 이제는 그들도 깨달음을 얻을 때가 되었다. 아니 벌써 얻었다. 적어도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너희가 이제야 믿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단 한마디 말씀이 제자들의 모든 의문을 말끔히 씻어버렸다. 의문의 제거는 믿음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제자들의 응답은 이제 예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다.(30절) 이 믿음이 제자들 편에서는 확실한 믿음이라고 하지만(31절)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 아직 진리의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의 깨달음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의 믿음은 여전히 약하기 그지없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제자들의 믿음은 풍전등화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이미 왔다"(32절)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조금 후 벌어지게 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 제자들을 위한 '대사제의 기도'(17장)가 끝나면 예수께서는 당신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치는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순순히 자신을 내어줄 것이다.(18,1-11) 제자들의 믿음은 적어도 그 때까지는 유효하다.

요한복음도 같은 맥락이지만 마태오복음은 "그 때에 자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마태 26,56)고 명확히 보도하고 있다. 그 때가 되면 제자들의 믿음은 즉시 불신(不信)으로 변할 것이다. 그들은 스승을 홀로 버려 둔 채 도망가고, 각자에게 유익한 위치로 몸을 감출 것이다. 제자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신뢰는 변함없다.(32절)

예수님의 한 말씀(28절)에 제자들은 예수께 대한 믿음을 확실히 하였다. 그러나 이 믿음은 학습적(學習的) 차원에 불과한 믿음이다. 믿음의 실제적(實際的) 차원은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믿음의 실제적 현장감(現場感)이 많이 부족하다. 고난(苦難)의 시간이 와야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며, 역경과 박해 속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고난의 시간을 위해 예수께서는 약해빠진 제자들을 고무(鼓舞)하신다. 예수께서 곧 당하게 될 고난 가운데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자들이 고난의 시간을 겪게 될 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용기로 삼아야 한다. 세상은 그 때 '예수를 죽였다'고 자부(自負)하겠지만, 실상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33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뼈저리게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요한 16,29-33)

  - 유 광수신부-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얼마 전 중국 비행기가 김해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유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때 어느 유가족이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다. 왜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이 울부짖움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치지 않고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속시원히 해답을 해주지 못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예 내놓고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다. 얼마나 고맙고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용기를 내어라."라는 말은 부모가 실의에 빠져있는 자식에게 하는 말이며, 스승이 시험에 실패한 제자에게 하는 말씀이며, 웃어른이 절망에 빠져있는 젊은이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여러분들은 언제 누구에게 이런 말을 들어보았는가? 정말 살기 힘든 요즈음 지나가는 말이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시는 분이 내 곁에 있다면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맙게도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 인간이면 누구나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아무리 아무 걱정이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집 같이 보여도 가까이에서 그 집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말 못할 한 두가지 고난을 갖고 있다.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모두 마찬가지이다. 고난의 종류도 하도 다양해서 불교에서는 백팔번뇌라고 했다. 즉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의 수가 108가지나 된다는 것이다. 고난을 겪고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의 현주소이다. 누구도 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헤메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고해 (苦海)라고도 하였다. 즉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이 없는 곳에 살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이다.
그럼, 인간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고통은 어디에서 왔는가? 석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왜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성서는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에게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라고 물으신 후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창 3,16) 그리고 아담에게는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창 3,17)
성서는 인간의 고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래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셨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인간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을 박차버린 것이다. 마치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집을 박차고 나갔을 때 그 때부터 고생을 하게 되듯이 에덴 동산에서 살기를 스스로 버린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집 떠나면 고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떠난 인간,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행복의 보금자리인 에덴 동산을 박차버린 인간, 그것이 모든 인간이 고통을 겪으면 살아야하는 이유이다. 집 떠난 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고난을 겪어야 하듯이, 부모의 품을 떠난 어린 자식이 부모의 품에 안기기까지에는 고난을 겪어야 하듯이, 인간의 고난은 하느님의 품에 안길 때 그리고 행복의 보금자리인 에덴 동산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누구나 이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여,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늘 불안했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가? 승리할 수 있는가?
나는 언젠가 장례예식장에 간 적이 있었다. 고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크게 고통을 겪고 있는 상주가 되는 큰 아들과 말을 나누었다. 큰 아들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는 저희들에게 산이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고인이 된 아버지의 존재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었던 가를 느낄 수 있었다. 산이신 아버지는 자녀들이  힘들 때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고, 안식처가 되고, 든든한 보호자가 되신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자식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아버지한테 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으리라. 우리에게도 산이 되어 줄 수 있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비록 삶이 고생스럽고 힘들더라도 아버지가 지켜 주시기에 다시 힘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편에서 "하느님은 나의 반석 나의 성채 내 구원자시오니, 내 주여 이 몸 숨겨 주시는 바위여 나의 방패 내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여."(시편 17,3)라고 불렀다. 산이신 아버지가 계실 때 자녀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안식처가 되었듯이 고난을 겪는 이 세상에서 나의 성채, 구원자, 반석이신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그러면 나를 받쳐주시는 든든한 산성이시오, 피난처이시며 성채이신 하느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가? 어디에서 "용기를 내어라.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해주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오늘 우리에게 든든한 산, 나를 숨겨 주시는 바위, 피난처, 산성, 성채이신 하느님은 바로 말씀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신뢰하고 의지하듯이 우리가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용기를 내어라."고 격려 해주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야훼님의 소리는 우렁차시다, 야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다. 야훼님의 소리가 삼목을 부러뜨리고, 야훼님의 소리가 레바논의 삼목을 부러뜨리고, 송아지처럼 레바논을, 들송아지처럼 사론을 뛰게하시다. ... 야훼님이 당신 백성에게 힘을 주시리라, 주께서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야훼님이."(시편 28,4-6.11) 라고 시편작가가 외치는 우렁찬 야훼님의 소리를 말씀에서 들어야 하고 그 하느님을 말씀에서 만나야 한다. 우리가 말씀에서 그 우렁찬 야훼님의 소리를 들을 때만이 "젖 떨어진 아기"(시편 130,2)와 같이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 세상을 이길 수 있으리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으리라.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 28-3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산 넘어 산이라고 고난이 없는 곳이 없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서만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이긴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난을 겪어야할 세상이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물 속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고난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승리자가 되는 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승리자이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걷는 것이다. 그 길이 승리자가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고 현명하게 그 고난을 극복하며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 그들의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그 지혜는 말씀에서 배운 것이다. 말씀이 바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이 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그 지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는 한 우리는 늘 고난 속에 파묻혀 살 것이고 고난에 짓눌려 살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고린후 4, 8-11)

우리가 일상 생활에 힘이 들고 지쳐있을 때 산에 올라가 맑은 공기를 마시고 다시 기분 전환을 하듯이 고통 중에 있고 절망 중에 있을 때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목마를 때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로 목을 적시듯이 우리의 삶에 메마르고 건조함을 느낄 때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말씀을 마시면서 갈증을 풀어야 한다. 늘 자식을 지켜주던 아버지의 존재는 한계가 있지만 나의 피난처, 굳센 바위, 휴식처이신 하느님이신 말씀은 영원하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내가 필요로 할 때 늘 내 곁에 계셔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 있는가? 나는 어떤 말씀을 생각할 때 내 안에서 힘이 솟구치는가?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되는가?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고난이 무서워서 피하는 믿음인가 아니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믿음인가?

예수님은 오늘 또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난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여, 용기를 내어 일어납시다. 당신은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이겼고 당신은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용기 †

주님께서는 이제복음에서 제자들의 절을 받으며, 본향인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당신 자리이신 우편 보좌에 않으시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눈이 비친 주님의 모습을 너무 쓸쓸하게 보여 하루종일 마음이 허전하고 무거웠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통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그렇게 많은 사랑을 주었건만 주님께서 본향으로 가실 때, 소위말하는 보디가드 한명도 없이 승천하시는 임금님의 모습으로 보이기에 인간적인 생각기준으로 너무 쓸쓸하고 초라하고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보는 어제 하루는 나에겐 고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너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50대 형제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소위말하는 'S코스의 세상적 보증수표 길'을 걸어가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하였으며, 그의 주변에는 줄을 서는 부하들이 항상 많았답니다. 그런데 자세한 이유는 지면에다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여하튼 명태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책상을 정리해 주고 떠나는 날, 개인 사물을 정리하여 들고 나오는데, 몇사람만 지하주자창까지 와서 잘가라는 인사만 꾸벅하고, 뒤돌아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인심의 비감한 마음에 젖어,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도착하여 혼자서 짐을 끙끙거리며 옮기고 나서, 두문불출하는 생활을 했답니다. 그 형제님은 그 그룹에서는 매우 신뢰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팀(사업본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명태를 당했습니다. 그는 깊은 고통과 우울증에 빠져 생활하다가 하루는 저에게 면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나는 그 형제님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재에 꼽혀있는 송봉모 신부의 '고통 그 인간적인 것'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건네주었습니다.

♥ 고통을 받아들임 ♥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프고 힘겨운 일이지만
그 눈물이 영혼의 눈 속에 끼어 있는
먼지를 깨끗이 씻어주어
하느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고통 안에서 쉴 수 있게 된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고통스런 상황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평화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고통 그 인간적인 것 (송봉모 신부)중에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이치에 적응하여 살다보면, 예기치 않았던 고통들, 나에게는 절대로 없기를 바라는 고통들이 문을 꼭 잠구어 놓았는데도 도둑같이 밀어 닥칩니다. 때로는 그 고통이란 것이 너무나 혹독하게 나를 괴롭히면서 떨러져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평생의 삶의 올가미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일반사람들이 많이 쓰는 표현이 '팔자'라고 합니다. 전생의 죄애 대한 업보라고도 합니다. 맞는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통 그 자체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의 늪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어떻게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이기는 방법, 아니 슬기롭게 넘기는 방법일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고통이 돨만한 것을 살살 피해 다니면서,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가는 방법이 세상적으로는 약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무작정 피한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평안이 아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피하는 습성으로 인해 고통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져서 아주 사소한 고통에도 걸림돌에 걸려 무너지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일예를 들면 우리가 군대시절에는 아주 구타가 심했습니다. 숙식환경도 엉망이었습니다. 면회는 엄두도 못낼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내무반에는 TV, 라디오는 커녕 매일 고참들의 잡심부름이나 하고 때로는 노래개(?) 역할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 혐오스러운(?)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특별한 사고가 있지 않는 한 장병들이 별로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특하면 군대 내에서 자살하는 사례를 봅니다. 아마 언론에 밝혀지지 않아서 그렇지 탈영도 꽤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는 바로 고통을 피하게 키워온 부모들의 책임, 고통에 면역되지 젊은이들의 책임도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학창시절은 학생생활의 고통, 군시절은 군인생활의 고통, 직장에서는 직장생활의 고통, 가정에서는 가족생활의 고통...등 어디에나 고통을 있기 마련입니다. 두올 수사는 이런 세상 속의 생활을 '광야의 생활, 광야에서 인간에게 주는 선물, 고통'이라고 말하면서, 고통은 하느님의 자녀로 단련받기 위한 신의 선물이기에 피하면 안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송봉모 신부의 글에서도 고통은 담대히 (단련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움으로 거듭태어남으로써, 그 고통들을 이겨나가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늘복음도 고통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고통을 말씀하시면서 용기라는 처방전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떠나서 허전한 마음일 제자들이 결심해야 할 가장 우선 사항은 ‘고통에 대한 수용’ ‘고통의 가치 인정’이며, 그리고 ‘고통에 대한 가치’찾아내서, 그 고통 앞에 담해해지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양재오 신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자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넘실거리는 고통의 파도 속에서도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고통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고통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고통에 대한 참된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이신 우리의 주님께서도 고통을 없애버리려고 이 세상에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통은 새로 태어남의 필수조건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가장 극심한 고통을 몸소 겪으십니다. 가장 혹독한 고통-십자가형-을 자원해서 체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적극적으로 고통을 수용하게 만듭니다. 결국 고통은 우리를 더욱 큰 그릇으로 만들려는 하느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고통도 크겠지만 내 십자가를 한번 바라 보거라. 내 고통은 더욱 크단다. 네가 고통당할 때 나도 함께 고통당하고 있단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 고통을 위해 십자가 위에 서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잠시입니다. 지나가는 고통에 너무 집착하지도 연연해하지도 마십시오. 고통을 잘 견뎌낸다는 것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고통을 잘 이겨낸다는 것은 하느님 구원사업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기꺼이 참아 내야할 이유입니다. 번민과 고통이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병고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곳은 게쎄마니 동산입니다.”(반 고호)

주님승천 이후 허한 마음에 젖어 있을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고통은 당연히 지고 가야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도 자원해서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또 다른 예수님입니다.”...그런 예수님의 삶은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과 닮은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고통에 대한 처방전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하는 용기, 이겨내는 용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이오면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분명한 비전" 입니다. 비젼은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라는 속성을 가진 실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외국 속담에「행동 없는 비전은 백일몽이고, 비전 없는 행동은 악몽이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대통령까지도 못해 먹겠다' 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도 이 비전과 행동 간의 불일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공감할 분명한 비전이 제시되지 않고 최종 목표와 중간 목표 간에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필요와 상황에 따른 지도자들의 행동」이 혼란의 원인입니다. 이 혼란을 타개하는 것은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현실에 바탕을 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예측 가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 외에는 그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하면 조금전까지만 해도 '확신하는 믿음'이라고 큰소리 떵떵치던 제자들이 곧 닥아올 작은 불란에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버리고, 믿음이란 말은 간데온데가 없게 되는 제자들의 연약한 모습을 예상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께서 곧 세상의 권력자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그 제자들이 당신을 홀로 남겨 놓고 다 흩어져 도망갈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계시면서도 그들을 여전히 신뢰하고 사랑하시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미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과 모두 흩어짐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장담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구체적으로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예상대로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을 때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다던 예수님! 그 눈빛으로 인해 마음의 죄책감을 느끼고 슬피 울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았던 눈빛은 책망하거나 비웃는 눈빛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하는 동시에 끝까지 신뢰와 사랑을 보내는 그런 따뜻한 눈빛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러한 신뢰와 사랑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과오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신뢰하고 사랑하시는 주님! 그런 주님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오늘복음의 묵상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로마 12,11-12) 라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 어려움이 오지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고난이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희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백만장자 4천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사 분석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라고 질문한 결과, 몇 가지 공통적인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첫째, 뚜렷한 목표를 가져라.
둘째, 마음에 꿈을 가져라.
셋째,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내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신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고통을 마음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단련이라고 생각하고, 장차의 축복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참고 조금씩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작은 방법으로 매일 교회에 한번씩 들려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말씀이 살아계시는 묵상공간에도 매일 한번씩 들러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영국 의학협회에서 병 치료에 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발표했습니다. 이 하이슬루프 박사는 말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치료법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말하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의 힘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신경과민을 조절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환자가 올 때마다 '기도하시오.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항상 기도하시오.'하고 기도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중요한 치료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응답을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가라 앉힙니다. 기도하는 열심만 있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금주에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묵상됩니다. 말씀을 만나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고통을 이기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용기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흩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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