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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글학회 새소식지 2014년 2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한글학회 게재> 한국역사를 지우면서 만들어간 일본역사 세종대왕이 한글을 훔쳐갔다-일본의 신대문자 곽 경, (주)아키덤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사)한국어정보학회 감사 ken301@naver.com 일본 아베총리의 극우적인 행보에 대하여, 언론인 조갑제 님은 ‘한일관계의 쟁점정리(조갑제 닷컴, 2013.4.25)’라는 14개 문항의 한일간 역사문제의 해법을 제시한 바 있는데, “영토 및 역사관”의 주제에 대하여는 “어렵다. 영토문제를 무리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무력을 쓰든지, 단교하게 된다. 역사관의 차이는 상호 이해를 통하여 합일점을 찾을 수 있으므로 시간이 걸린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필자는 위의 해결책에 대하여 상당히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바, 우리의 한일역사의 문제는 현재 당장의 문제이며, 그 심각성의 도는 일반적으로 느끼는 내용과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고 본다. 한일 고대사에 관련하여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역사적 지식과는 상당히 벗어나, 일본이라는 국가는 한민족에서 기원하였다는 내용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각은 230년전 18세기의 일본 에도시대의 고증학자인 ‘토테이칸’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에 윤영식 씨와 존 카터코벨 여사로 이어져온 연구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큰 흐름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내용의 타당성의 여부는 나중의 판단으로 남겨놓고 일단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한다. 일본의 건국과 재탄생은 한국사 지우기의 연속 고대의 일본열도는 사람이 적었고 주로 한반도에서 간헐적으로 건너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다. 3세기 무렵의 일본에는 백여개의 부족국가가 있었다고 한·중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365년 무렵 가야왕 아리사등이 일본에 진출하였고 곧이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가야계를 동쪽으로 몰아내고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가야계와 백제계는 상쟁하면서 열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660년 한반도에 있던 백제본국이 멸망한 후, 일본열도로 몰려났던 백제와 가야의 지배 계층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무려 30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서기697년, 백제 근구수왕의 후손인 문무천황이 내란을 수습하고 일본국을 수립하여 내외에 공표하였다. 이로서 300년 동안 같은 나라였던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관계가 단절되었슴을 세상에 알린 것이며 이제부터는 서로 관련이 없는 나라로 굳혀나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즉 일본열도에 남은 백제와 가야의 유민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일본에 살아왔던 원주민으로 자처하기로 결심하였고, 일본에 진출하였던 300년간의 역사만으로 새 일본국의 독자적인 역사서를 꾸미기로 결정하여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열도에서 발생했던 자기 조상들의 300년간의 역사를 삭제하였는데, 그 빈자리에는 가공의 천황 40명을 적당히 채워 넣었다. 그 천황들은 모두 백제와 가야의 왕과 왕족들인데 정체를 알듯 모를 듯 감춰놓았다. 즉 일본서기를 만들 때, 아래의 대략 300년에 걸친 일본진출의 역사를 내용에서 모두 은폐 또는 변조하여, 흔적만을 남겨놓아 자신들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첫번째의 백제영토사 삭제 366~391 (26년간) 다음번의 가야영토사 삭제 392~478 (87년간) 두번째의 백제영토사 삭제 479~660 (182년간) 서기 720년경 일본서기가 저술되고 난 다음해, 이에 대한 궁정강의가 있었고, 헤이안시대(794~1192)에는 6회의 강독이 있었다. 일본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교수의 지적처럼, 이것은 일본서기가 역사서가 아닌 것을 뻔히 알고서 한 일이고 또 유희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일본기(釋日本紀, 1274)로 집대성되면서, 일본서기에 꾸며올려진 만세일계의 황통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사실처럼 전제되어 지엽적인 기사의 훈고(訓詁)만이 실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합병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이제는 자기들 조상들이 1200 년전 일본서기에서 삭제했던 것과 똑같이, 삼국 초기의 역사를 삭제하여 조선 식민지인에게 가르쳤다. 즉 삼국사기에 있는 365년 이전의 삼국초기의 역사를 모두 일본서기에 맞추기 위하여 모두 잘라내었다. 자연히 그 이전의 고조선의 역사도 잘려나갔다. 기원전후~365 (약365년간) 삼국시대 초기의 역사를 삭제함 ⤏ 일본서기 기록에 맞추려고 삼국 초기의 역사를 삭제함 일본은 고대로부터 천하의 중심국 - 조선역사의 삭제와 부정 임진왜란 후, 에도 막부시절(1600~1868) 250년간 근린국과 한번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 긴 평화의 시기가 유지되어 안정적으로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 후반에 유입된 서양 문화와 조선에서 도입된 유학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 무렵, 일본의 고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고대 일본의 순수한 이상 즉 신도(神道)와 황국질서를 추구한다는 국학(國學)운동이란 것이 일어났는데, 이는 일본이 고대부터 천하의 중심으로서 한·중의 문화적 영향이 없이 독자적으로 언어와 문화가 이루어져 왔다고 하는 국수주의적인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의 국학자들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는 열도에서 자생적으로 나왔다”고 주장함으로서, 일본의 역사에서 비록 삭제는 되었지만 희미하게 남아있던 한국의 역사와 언어의 흔적을 다시 한번 부정하였다. 고대 일본은 한민족이 세웠다는 사실을 부정 ⤏ 일본은 고대에 문화의 중심이었고, 조선과 중국에 문화를 전파하였다고 주장 고대 일본의 언어는 한국어였다는 사실을 부정 ⤏ 일본의 고대어는 한국어가 아니며, ‘야마토고토바’라는 일본고유의 언어가 있었다고 날조함 <사진> ‘토테이칸’의 저서 충구발(衝口發), 1781 ‘야마토고토바’(大和言葉)라는 것은 태고적부터 일본에 존재하던 언어로서, 일본은 ‘신의 나라’이며 일본어는 신의 말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일본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는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는 없다고 하는, 국수주의적이고 독선적이며 황당한 주장이다. 여기에 대하여, 같은 시대의 고증학자인 ‘토테이칸’(藤貞幹)은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일본은 한민족이 세운 국가이며 고대의 언어는 한반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라는 반론을 제기하였으나, 국학계의 거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미친놈의 목에 칼을 씌우자” 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세종대왕이 일본 신대문자를 훔쳐갔다 태고적부터 일본의 고유 언어였다는 ‘야마토고토바’가 출현하고 난 다음, 이번에는 ‘신대문자’라는 것이 갑자기 출현하였는데, 모토오리의 제자인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는 신대문자로 된 책들을 인쇄해서 이를 보급하였다. 신대문자는 모양과 읽는 법이 한글과 거의 같은 문자로서 지금은 ‘히라타’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히라타는 일문전(日文傳)이라는 위서를 만들어 “신대문자를 보고 욕심을 낸 조선의 세종대왕이 언제 가지고 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을 토대로 훌륭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직도 신대문자설는 명맥이 살아있어 일본의 민중을 현혹하고 있으며, MBC TV에 특집으로 방송된 적이 있다. 1868년, 명치유신이 일어나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면서, 명치유신을 주도하였던 '히라타 아쓰타네'의 문하생들이 대거 등용되어 신대문자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오치아이 나오즈미(落合直澄)’는 신대문자의 보급과 계승에서 대표적 인물인데, 1874년에 신도학교인 신궁교원(神宮敎院)을 설립하여 신도학을 일반국민들에게 보급하면서, 신대문자가 조선에 들어가 중인, 하인들이 사용하는 조선 언문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글로 일본의 건국신화를 가르치는 소위 '히라타 학문'은 당시 일본에서 상당한 추종 세력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만약 일본이 이차대전에서 패망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일본 국학파의 후계자들에 의해, 한글이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고 일본의 소위 신대문자를 모방한 것으로 완전히 굳어지고 세종대왕도 역사에서 삭제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식민지시대가 계속되었다면, 일본역사에서 사라져버린 고대의 가야와 백제의 흔적을 찾아 헤매듯, 지금쯤은 일제가 삭제하여 없애버린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흔적을 찾으려 역사책을 뒤지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고대일본에 신대문자가 있었는데, 세종대왕이 이를 모방하였다고 주장 ⤏ 일본은 역사 변조·삭제의 상습범으로, 세종도 역사에서 삭제하였을 것이다. 일본어의 기원 일본어 학자인 ‘오노 스스무(大野晋)’ 교수는 1957년 발간된 “일본어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고대의 일본어 숫자와 고구려어가 같다는 아래와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 전거는 다음과 같으며 우리나라의 역사서 ‘삼국사기 지리지’를 근거로 들고 있다. (三峴縣一云密波衣, 五谷郡一云于次云忽, 七重縣一云難隱別, 十谷郡一云德頓忽) “3”은 일본어로 “미”인데, 고구려 지명 “삼현현”을 “밀파의”라고도 하며, “5”는 일본어로 “이투”인데, 고구려 지명 “오곡군”을 “우차운홀”이라고도 하며, “7”은 일본어로 “나나”인데, 고구려 지명 “칠중현”을 “난은별”이라고도 하며, 이렇게 고구려어와 고대일본어의 동일성이 밝혀지게 됨으로서, 에도시대 일본의 고증학자 ‘토테이칸’이 18세기 말에“일본의 고대 언어는 한반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라고 한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한일 민족 정체성의 조작과 국가이미지의 부정적 영향 역사의 왜곡에 있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본의 식민사학 또는 황국사관의 잔재라는 말을 떠올리지만, 그 식민사학이란 것은 일제의 식민지시절에 만들어진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일고대사의 왜곡은 이미 천년전에 이루어졌고, 근대 일본제국이 침략의 꿈을 실현하는데 근거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고대의 일본인은 우리와 동일한 한국인으로 출발하였으나, 1200년의 시간 동안 한국의 흔적을 지워왔던 것이다. ‘델리트’ 키를 계속 눌러 한국의 역사를 지워 일본과 일본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나갔으며, 새로 완성된 일본의 역사와 일본인은 원래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근대의 일제가 왜곡한 역사의 시공간은, 천년전에 이미 삭제·왜곡된 한일고대사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여 확대재생산한 것으로 일본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이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정체성도 심각하게 왜곡시켜 왔고 지금도 왜곡시키고 있다. 조갑제 님은 “한일 양국의 역사관의 차이는 상호 이해를 통하여 합일점을 찾을 수 있으므로 시간이 걸린다”라는 해답을 내놓았지만, 한일역사의 문제는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도, 상호 이해를 통한 합일점을 찾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은 양국민의 민족 정체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 1300년이 넘게 틈이 벌어져 오면서 양국 고대사의 핵심내용이 서로 상충하여 어느 한쪽의 역사는 폐기되어야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두나라의 국가 이미지와 국가의 품위 및 위신에 관계되는 문제로서 지는 한 쪽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있어왔던 일제의 역사왜곡에 대한 이해와 그 대응책은 안일함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대응은 일단 우리의 역사관이 전면적으로 변환되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 데서 다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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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당한 설이네요
<왕인박사는 가짜다>라는 저의 책의 목차를 볼 수 있읍니다.
'저의 설'이라기보다는 여러사람의 연구를 정리한 것입니다.
cafe.daum.net/alhc/3Cdg/639
일본이나, 중국이나, 과거 우리나라에 해온짓을 보면 분하고 밉지만, 어찌보면 그 시작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봅니다.
우리는 하나였고, 시작은 조금 빠르고 느렸을뿐, 원하든 원치않턴간에 섞이고 섞이었다. 지금은 합법적으로 결혼을
해서 살고있는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한.중.일 정상들이 우리의 공동체 의식을 조금만 더 생각해주신다면 유럽의
EU 보다 더 획일적이고, 막강한 공동체가 될것이라 사료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중일의 시작이 하나였다 보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더불어 EU에 러시아를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과의 통합공동체 논의는 위험부담이 크다 봅니다.
한,중,일이 공동체가 가능할까요? 3국은 문화와 풍습 자체가 아주 다릅니다. 게다가 백제의 멸망으로 일본이 갈라진게 벌써 1,400여년이나 되었죠..... 게다가 중,일과 공동체를 했다간 한국은 그리스보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망할겁니다. -_-;; 현재 대만을 보시길 바랍니다. 대만 자본이 중국으로 가버려서 대만 경제는 이미 초토화 당했습니다. 폭스콘, 아수스, msi등이 전부 대만기업이죠. 삼성, 엘지, 현대의 자본이 다 중국으로 가버린다면 -_-;; 한국 경제는 초토화 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