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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4:1~8
<믿음이 행위로 뒤따르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채워져 갈 것입니다. 다윗과 모세와 욥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선물로 받은 힘을, 당당하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의롭다하심의 축복을 영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마음에 계속해서 속삭이는 것이 있죠. 이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마음의 소리입니다. “너의 행위를 봐 떳떳하지 못하잖아, 네가 처해있는 상황이 말해주잖아, 이런 모습으로 기도해도 될까?”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롭다하심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끊임없이 새로운 소스를 갖다 줍니다. 그 속삭임에 물들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께 당당해지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되죠. 머뭇거림으로 끝나지 않고 멀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집요한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을 통해 의롭다 하심에 대한 가르침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부여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가?= 신약시대부터 예수님의 재림의 때까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곧 그 이름을 믿을 때, 구약시대는 아브람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의로 여기심. 이것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고, 모시어 살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가 로마서 4장에 전하는 것처럼 의롭다하심은 어떤 행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곧 그 이름을 믿으면 왜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시면서, 의롭다 하시면서, 당신의 자녀라고 인정해 주실까요? 그 이유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인 것이고, 확신함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사탄 마귀가 나의 행위의 그 어떤 증거를 가지고와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해도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만약 죄의 올무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사탄 마귀가 여러분의 마음을 예수님으로부터 온전히 분리하려는 고도의 기술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그 순간 과거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하여 죄에 넘어졌던 것을 성령님께서 회개하도록 우리를 도우셔서 회개한 것은, 더 이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헤아리지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곧 그 이름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죄에서 자유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이 선물을 받은 우리가 흔들림 없이 그 선물을 사용하며 누림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신칭의의 원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이며, 모세의 율법의 완성이며, 결코 구약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의의 기초이며, 그 언약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원형이며, 아브라함역시도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본보기로 사용했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어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섭리임을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당당하게 다가가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1절에 “육신적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 무엇을 얻었다”라고 말씀합니다. 1절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민족적, 육신적, 믿음으로 유대 민족의 조상이며, 그의 위대함은 그의 의와 유업과 자손에 있죠. 그래서 바울은 이 윤곽을 따라 가면서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입증하고 있으며, 이 원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로 보편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약성경 특히 아브라함으로 증명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들에게도 구원을 확실히 깨닫게 해줍니다.
2절에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라고 말씀하죠.
유대인들이 행이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15:6절의 말씀의 내용과 일치하지도 않고, 사실과도 다르다고 바울은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있으나, 그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이유가 창15:6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공의로(쩨다카)의롭다, 공의로 의로움 뜻임) 공의란?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이 그 안에 있음을 인정해 주심.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은 그의 외적인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믿고 하나님께 순종한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원의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람에 의의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희생 제물이나, 복종 행위와 같은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에 근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순수한 신앙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네 몸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을 쳐다보고 네가 별들을 셀 수 있으면 세어보아라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아브람이 의심 없이 믿으니 그때 여호와께서 그를 의로 여기셨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 믿음의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고,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나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나를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 그 때 하나님의 기적은 내 생활에 펼쳐지는 것이라는 사실>
그 어떤 사람이든(의로운 사람이든, 극악한 죄인이든), 누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면서, 자녀의 권세를 유업(상속)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언제든지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있는 이유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그 순간 이미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았기 때문이고, 유업을 찾아 먹는 방법이 기도이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는 자가 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4절에 일하는 사람은 이 말씀은 정당한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자기 행위와 노력의 가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가 행위의 정당한 보수로 여겨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초기 유대인들의 주장이었기에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에 예수님이 필요치 않다는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초기 아브람을 선택하신 것도 그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강조**
5절에 일하지 않는 자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해 아무 덕이나 공로도 없는 자를 가리키고, 경건치 않는 사람은 종교적, 윤리적으로 불신앙, 불 경건, 부도덕한 사람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절대적인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를 “의”로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6~8절은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대하여 구약의 영웅인 다윗을 실례로 들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복을 세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받은 복<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 누구나 즉 우리들이 받는 복>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주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
첫째 불법이 용서함 받는 복(7절 상반절) = 불법이 사함을 받고
다윗의 불법은 모세의 율법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불법을 다 용서하시고 다 지워버리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둘째 죄들이 가리어짐의 복(7절 하반절)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을 받고.
여기서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원죄와 같은 근본적인 죄를 의미하며, 그 죄는 예수님을 통해 가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경우는 이런 사함의 복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께서 그 죄를 헤아리지 않는 복 8절
하나님께서 죄를 일일이 헤아리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죄를 지었던 다윗이 실제로 경험한 사실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왕위를 얻은 것보다,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더 큰 기쁨과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위는 이 땅에서 잠시 누릴 기쁨이지만,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기쁨이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풀어주신 이 세 가지의 복을 증거 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 모든 사람이 누릴 은혜라고 가르쳐줍니다. 또한 이것은 사람이 무엇을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판단과 뜻에 따라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일방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이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마귀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들어내면서 하나님께 더 이상 헤아림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의 마음으로 사로잡으려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이때 쉽게 그럴 것 같고, 지금의 형편을 보면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한 괴로움이 산적해져 갈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날 힘들게 할 때 이렇게 대응하세요. 난 하나님의 자녀야. 하나님은 날 사랑하시고, 날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거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은 나의 어떤 행위로 인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마음을 오로지 예수님께로 드립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은 그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의 것을 유업으로 주시면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도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구원 받고 연약하여 짐으로 죄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도 성도가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면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헤아리지 않으신 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연약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가려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게 하시고, 그 일을 행하는 모든 행위에, 상급으로 베풀어 주시려는 여호와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에 집중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급으로 채워주시는 그 행위의 가장 기초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행위의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이기에 저는 그 것을 하루의 삶이 시작될 때 매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의 입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어떤 처지에 있든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해주신 것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죄의 자리에서나, 삶의 형편에 도움의 구원의 손길을 필요할 때 언제나 하나님께 당당하게 청구하고, 용서를 구하고, 해결을 청구하는 기도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유업(상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언제든지 당당하게 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도 기도했습니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엄청 당당하지 않나요.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이니, 이렇게 당당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림으로 점점 강성해져가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