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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6일(연중 제33주일 평신도 주일) 마태 25,14-30
헬프타의 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
받은 것은 값지게 활용!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길을 떠나면서 자기의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각각 맡겼습니다. 탈렌트는 그 시대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입니다. 한 탈렌트는 농촌 근로자 한 사람이 20년 동안 노동하여 받는 품삯에 해당하는 거액입니다. 종에게 그런 거액을 맡기는 일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현실에 없는 일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어떤 은혜로움을 살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각각 그것을 값지게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 혹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자기가 받은 것을 숨겨 두었습니다. 그는 받은 탈렌트를 활용하지 않고, 자기의 미래를 위해 안전하게 보존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돌아와서 셈을 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값지게 활용하였다고, 주인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아 그것을 숨겨둔 종은 그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불행을 당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것을 값지게 활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은 종들과 셈을 하지만, 종 에게 나누어 주었던 재산과 그 종이 벌어들인 것을 회수하지는 않습니다. 그 주인은 자기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종들에게 맡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종들이 은혜롭게 받은 것을 내어 주고 쏟아서 활용해 줄 것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값지게 활용한 종을 축복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미래만 생각하며, 받은 것을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비난과 더불어 받았던 것마저 빼앗깁니다. 하느님이 주신 은혜로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그 생명을 활용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이고, 부모의 자상한 보살핌이 있어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부모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자녀입니다. 스승이 자기를 위해 쏟은 정성을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자기가 사는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 많다는 사실과 그 사회를 위해 자기도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건전한 시민입니다. 자기가 받은 것을 전혀 감사하지 않아도, 한 인간으로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아도, 스승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도,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하지 않아도, 자기 한 몸 잘 먹고 잘 살 수는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강요된 일이 아닙니다. 장차 가야 할 지옥이 두려워서 신앙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인이 되어야 복을 받아 잘 살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사업이 더 잘 되고, 지위가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보는 사람입니다. 부모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녀는 그렇지 않은 자녀보다 조금 더 보는 자녀입니다. 스승과 사회에 대해 감사하고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조금 더 보는 제자이고 시민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베풀고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베풀어진 것이 다섯 탈렌트일 수도 있고, 한 탈렌트일 수도 있습니다. 많거나 적거나 그것은 은혜로운 축복입니다. 하느님이 베풀고 축복하신 결과로 내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자기의 삶을 은혜로운 것으로 만들어 주는 빛 하나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진 출처=commons.wikimedia.org)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저기 하늘 높은 곳에 계시고, 나는 여기 땅에 있다는 식으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 다르고, 내가 하는 일이 다르다고만 생각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내가 벌어서 만든 재산, 내가 노력하여 얻은 기술과 자격증,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으로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하느님이 베푸신 것으로 보는 마음 안에 풍요와 감사와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사람은 자비와 헌신을 실천하며 삽니다. 그와 반대로 내가 가진 것을 나의 것, 나만을 위한 것으로 보는 마음에는 불만, 욕심, 무자비 등의 어둠이 있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다.”고 요한 복음서(1,5)는 말합니다. 우리 자신만 보는 어둠 속에, 베푸심을 보게 하는 신앙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탈렌트 이야기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고, 자기의 미래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베풀었듯이, 받은 사람도 베풀어서 값지게 활용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빛이 주어졌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요한 복음서(1,5)는 말합니다. 베푸심이 있어, 내가 있고, 내 것이 있습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어둠 안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가 가진 것만 봅니다. 그러면 베푸심이라는 기원(起源)이 사라집니다. 베푸심이라는 기원이 사라지면, 우리의 생명, 재산, 지위, 자격증, 이런 것이 모두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을 보는 삶의 운동입니다. 자기만, 혹은 자기가 가진 것만, 소중히 생각하는 데에서 한 발 물러서면, 하느님의 빛이 다가옵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빌고, 바쳐서, 우리의 욕심을 성취하려는 수작이 아닙니다. 신앙은 베풀고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연장하여 우리도 이웃을 보살피고 축복하며 살자는 운동입니다.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 모두가 은혜로운 것입니다.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은혜롭게 베풀어졌습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도, 어느 날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아름다운 단풍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생명의 순리가 어떤 아름다움인지 말해 주는 계절입니다. 베풀어 주신 생명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축복을 실천하며 한껏 푸르게 살면, 그 생명은 떠나가면서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계절입니다. 우리도 베풀어진 것을 나만을 위해 숨겨 두는 어둠 안에 머물지 않고, 베푸심의 빛을 받아 한껏 푸르게 또 은혜롭게 내어 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셨습니다. 그 빛의 순리를 따라 살아서, 낙엽이 되라는 계절입니다.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마태 24,14-30)
숨은 그림 찾기
오늘은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는 눈물 흘리는 이, 상처받는 이, 외로운 이, 가난한 이, 장애로 태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출발선이 다른 불공평한 세상처럼 보일 것입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고,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나무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그렇게 가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야 하는 나뭇잎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떨어지는 것을 슬퍼하기보다 떨어지기 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문에는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안에는 또 다른 물건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찾았던 그림들은 ‘주걱, 신발, 곰방대, 복주머니’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으면 보물을 찾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지혜라는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 나눔, 봉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름답고,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석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쟁과 승리를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퇴근길에 아내를 위해서 장미꽃을 사가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자녀들,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여보! 사랑해 우리 가족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오늘도 힘내세요!’라는 편지를 넣어 주는 아내는 각박한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종을 칭찬합니다. 번다는 것은 많아지고 풍성해진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고 가꾸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서 함께 봉사할 때,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께 칭찬받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늘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신 그분의 곁으로 언젠가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을 우리는 얼마나 충실히 살고 있을까요? 세상은 아침에 사라지는 이슬과 같이 덧없이 흘러갑니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
2014년 가해 연중 제33주일 복음: 마태오 25,14-30 <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몇 년 전 성녀 로사로 유명한 페루의 수도 리마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로사 성녀만큼이나 유명한 성인이 함께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녀를 위해 지어진 성당 맞은편에 예전에는 도미니코회가 운영하던 고아원으로 쓰였던 건물이 있고 그 곳에서 우리가 ‘빗자루 수사’라고 알고 있는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 성인이 살았던 것입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1579년에 태어나서 1639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도미니코 수도회의 평수사로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이발, 상처치료, 의류수선 등 뿐 아니라 남들이 꺼리는 청소 등을 좋아했기 때문에 ‘빗자루 수사’란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인은 스페인 귀족의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피부를 닮아 흑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혼혈이나 흑인은 노예 정도로 취급되어 백인들이 흑인들의 몸에는 영혼이 들어있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나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수도원장에게 찾아가 “나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나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동물과도 소통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무서운 병들을 기적적으로 낫게도 하고 기도 중 두 번이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다른 수사들이 목격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기도 하고 몸에서 빛이 나와 기도하는 방을 가득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기적으로 마르티노 수사와 함께 해 주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성인으로 대하였고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할 때 마르티노 수사의 성덕을 보고 많은 재정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빗자루를 놓지 않고 자신은 그저 불쌍한 노예일 뿐이라고 말하며 평수사로서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며 평생을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말씀을 듣습니다. 달란트는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능력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직 한 달란트만을 받은 종은 자신만 돈을 적게 준 주인을 원망하며 주인을 위해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여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알맞게 맡겨주시지만 남들을 자신보다 더 많이 주고 높여 주었다고 하며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주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의 말 안에 들어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한 달란트만 주었다고 하여 주인은 모질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하느님께 불평을 가지게 될 때는 그분을 위해 일을 해 드릴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르티노 수사는 당시 흑인 혼혈아로 태어났고 아버지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채 버려져 살아야 했던 사생아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맡겨진 허드렛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자신의 처지는 누가보아도 비참한 처지였음에도 하느님께서 태어나게 해 주신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분이 하늘에서는 성인으로 큰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의 설교에서 천국에 다녀왔다는 어떤 신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신도는 천국에서 크고 작은 집들을 많이 보았는데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집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그 집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스로는 목회를 잘 해 교회를 부흥시킨 유명한 목사의 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우리나라 한 섬의 아주 작은 교회로 그 신도를 데려가더니 젊었을 때부터 그 동네로 들어와서 몇 명 안 되는 신도들을 사랑하며 그 작은 섬에서 평생을 살았던 빗자루 질을 하는 한 나이 든 목사를 보여주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큰 집이 그 목사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천국을 본 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 내용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떠받들림을 받는 것이 가증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16,15 참조).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허드렛일을 하더라도 그 작은 일에 충실했다면 그 사람은 하늘에서 큰 사람 취급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감사한 마음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아무리 허드렛일이라도 주님께서 맡겨주셨기에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불평하지 않고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인 것입니다.
빌립보 네리는 16세기 성인이신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명성을 얻고 있는 자신이 그런 일을 요구받는 것이 불쾌했던 것입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허드렛일이 맡겨지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이 아니겠습니까?
다섯 달란트든 한 달란트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일을 맡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에서 감자만 까다가 성녀가 된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성인 신부님이 수녀원을 지나는데 그 수녀원 지붕 위에 하얀 불꽃이 달팽이 모양으로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는 그 수녀원에 성녀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원장 수녀님에게 부탁하여 모든 수녀님들을 모이게 합니다.
그 수녀님들 중에는 박사학위가 있기도 하고 강의를 잘 하는 등의 재주를 지닌 수녀님들이 많았습니다. 신부님은 모두가 자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장 수녀님이 수녀원 뒤뜰 창고에서 평생 감자만 까는 중졸 수녀님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부님은 그 수녀님을 보더니 대뜸 “이 수녀님이 성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다른 일도 많은데 평생 감자만 까면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제 일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저는 수십 년간 감자를 까면서 예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서야 반신반의하던 다른 수녀님들도 이 수녀님이 성녀라는 말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달란트는 우리에게 맡겨진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에 따라 맡겨진 일이기도 합니다.
그 일이 작을수록 또한 그 작은 일에 더 만족할수록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다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멸의 인연
출장길에 만난 박범신 작가의 ‘소금’(한겨레 출판)에 반해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뒷전인 채 가족들 부양하느라 몸에서 소금기가 다 빠져나간 우리 아버지들의 슬픈 현실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서로의 몸에 빨대를 꽂고 경쟁하듯 빨아대는 비정한 오늘날 우리 가족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스라한 첫사랑의 추억이며 한때 보송보송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꿈속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무후무한 우리나라의 압축적 경제 성장의 결과는 참혹할 정도입니다. 물질만능주의가 은연중에 우리 가정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존경이나 사랑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저 그가 얼마나 재력이나 생산력,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가가 가장 큰 평가의 잣대입니다. 소금은 우리 사회의 참으로 비정한 현실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 우리 가족 구성원들의 의식구조를 진지하게 한번 성찰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 나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입니까? 뒷방을 차지하신지 오래인 할머니는 내게 무슨 의미입니까?
백번 깨어나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평생 장애를 안고 태어난 내 자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때로 너무 버거워 도망가고 싶은 질긴 가족이란 이 인연은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에 앞서 ‘가족’에 대한 환상을 깨는 작업이 시급한 것 같습니다.
다들 꿈꿉니다. 빌딩이며 대지며 부동산을 넉넉하게 소유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아버지, 퇴직 걱정 없고 연봉이 탄탄한 산처럼 든든한 아버지, 병원은 한평생 안가도 되는 건강한 아버지, 자신은 뒷전이고 언제나 가족들을 위해 끝까지 희생하는 아버지, 부인을 물론 자녀들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친구 같은 아버지...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도 한 나약한 인간 존재일 뿐입니다. 때로 너무 외롭고 서러워서 홀로 돌아서서 흐느끼는 측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어머니는 또 어떤 어머니입니까? 대체로 기대치가 너무 높습니다. 이왕이면 재벌가의 셋째 딸로 태어난 어머니, 지적이고 고상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 나이가 들어도 미모와 우아함을 잃지 않는 세련된 어머니, 잠언에서 칭송하는 여인처럼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 부지런한 어머니, 그러면서 자영업을 운영하며 남편보다 훨씬 연봉이 높은 어머니, 결국 신사임당을 쏙 빼닮은 어머니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쁜 또래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어머니입니다.
가족은 서로 견뎌주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냉혹한 현실에 떨고 있는 서로를 서로의 체온으로 덥혀주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입니다.
가족은 상대 안에 긷든 작은 가능성을 찾아주고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면서 성장시키라고 하느님께서 연결시킨 다리입니다.
가족은 서로의 무거운 십자가를 덜어주고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서로를 구원하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소금 말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와 불멸의 관계를 갖고 싶다면, 관계를 맺지 말게. 그 수밖에 없어. 사랑이 훼손되지 않으려면!”
참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는 참으로 제한적입니다. 모든 인연이 다 그런 것이 아니지만 그 끝이 참으로 허탈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우리의 인연을 보다 한 차원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아닐까요? 육적인 인연에서 영적인 인연으로, 세속적인 관계에서 하느님 안에서의 관계로, 필멸의 인연에서 불멸의 인연으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14.11.16. 연중 제33주일(뉴튼수도원 6일째) 잠언31,1-13.19-20.30-31 테살5,1-6 마태25,14-30
하느님을 닮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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