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Juli를 띄우자 샤이홍은 ‘맆 서비스’에 불과함을 명심하라고 했다. ㅋㅋㅋ.
내 학생 중에는 ‘맆 서비스’를 키스로 아는 사람이 있었다. 배꼽이 잡히지만, 입술로 하는 봉사이니, 나름대로 꽤 ‘영리한’ 해석임에 틀림없다.
김병국 교수의 '요상한' 발음은 우리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했다. 요약을 ‘사마리’라고 입에 달고 다녔다. 이상하게도 재윤이가 말했던 것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데, 왈: “사마리아 여인인 줄 알았네!”
아무튼 우리 서강인들은 당시 한국에서 다른 어느 대학에서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 수준의 영어를 배웠던 것이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우리들에게는 교훈처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금언이다. 도대체 무엇이 자랑스러웠던가?
최고 긍지의 항목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들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정직의 미덕일 것이다. 돈만 내면 위조지폐처럼 졸업장을 찍어주다시피 하던 한국 교육사의 암흑기에 은사님들은 “정직하게 사는 인생이 힘들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실천적인 표양으로 깨우쳐 주셨다.
덕택에 나는 한평생 ‘원칙주의자’라는 면류관과 십자가를 동시에 쓰고 지며 살았다. 진실과 정의에 호응하는 학생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반면에 허위와 불의를 팔아 사는 당국자들에게는 배척을 받았다는 말이다. 출석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학점을 주라는 그들의 부당한 강요에 나는 사표로써 맞섰다.
사활적 결단의 기로에 섰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서강인의 긍지’가 선택의 기준이었다.
더불어, 서강이 자랑스러운 부차적 이유 중의 하나는 서강에서 칼처럼 정확하게 배운 본토 영어였다.
‘도라꾸’의 수준은 겨우 면했지만 아직도 왜식 ‘쟁글리시(Janglish)’가 지배적이고 원어민 발음을 거의 들어볼 기회가 없던 당시, ‘서강식’ 영어는 영어 교육계에서 선풍이고 충격이었다.
‘영어 교사 자격 검정 시험’에 일차 합격하고 이차 면접시험 때 다른 수험생들은 꼬치꼬치 따져 이런 저런 질문을 받았지만 나는 제시받은 문장 딱 한 줄을 읽자 그 자리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
여고 강단에 섰을 당시, 다른 과목 교사들이 나 때문에 수업 진행에 차질이 생긴다고 아우성이었다. 예컨대 어떤 교사가 ‘소크라테스’ 또는 ‘르네상스’를 언급하면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일제히 ‘싸크뤄티스’ ‘뤠네장스’를 연호한다는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뉴질랜드 정부에서 ‘영어 교수법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할 영어교사 7명을 초청했다. 전국적으로 수백명이 몰린 선발시험에서 나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일년후 귀국한 다음부터는 학생들에게 영국식 영어를 가르쳤다.
회고컨대, 나는 서강 덕택에 ‘영어 교육과’는 덤으로 두군데 대학을 졸업한 셈이다. 내 강단 생활의 후반부는 전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니, 오로지 서강에서 배운 덕목과 실력만으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산 것이다.
서강의 은혜는 그야말로 ‘백골난망’인데 보답할 능력이 없으니 한스러울 따름이다.
사정이 이렇거늘, 어찌 서강이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첫댓글 영어의 달인 신사님이 64동기 총무로 지난해까지 봉사를 하셨으니 64동기의 자랑이 아닐수 없지요. 건강은 좀 나어지셨습니까?
단식후 첫날만 힘이 없었을뿐, 이틀째부터는 만사 오케이. 우정 어린 관심, 고아우이!
영어배울때, 제대후 복학 했더니 peace corp 학생?들이 대거 포진.
영어발음 시간에 sheep와 ship를 한 학생이 잘 못하니까, 얼마나 repeat시키는지!!!
한가지 더, 미국계은행에 입사한 친구가, 사무실에서 번부락신부님과 '영어로'통화,
주위에 친구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지점장이 그 실력?을 보고,
바로 동경지점으로 발령. 참으로 그땐 '서강하면 영어' 했지요.
김교수님 잘 읽었습니다.
무슨 말씀, 서강 은혜에 보답은 충분히 하셨지요.. 존경받는 영어 선생님이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