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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청령포 가족 나들이
일시:2018년 3월 25일 일요일
장소:강원도 영월 청령포
* 원주역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 급수탑
원주역에는 급수탑이라는 한국근대 철도역사의 문화유산 급수탑이 오롯하게 서 있다. 지난 해에도 우리 부부는 이곳 원주역에서 태백과 영월행 기차를 타며 보았었다. 오늘은 작은아들 가족과 함께 영월행 기차를 타기 위해 와서 탐방하고 있다. 이곳 위치는 강원도 원주시 평원로 학성동이다. 원주역 내에 있는 옛 급수시설이다. 2004년 12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철도공사 소유이다. 1940년 개통된 중앙선 원주역 급수탑은 높이 18m로 매우 높다. 하얀 급수탑의 상부 지름은 하부 지름 4.5m보다 큰 원추형으로 뿔을 잘라낸 형상이다. 1930년대 이전에 건축된 석조급수탑과 구별되는 일제 강점기 후반에 건축된 철근콘크리트조 급수탑으로 1940년대 급수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급수탑이다. 1942년경 원주역을 지나는 증기기관차의 급수를 위하여 건립한 시설이다. 철근 콘크리트조 급수탑으로 1940년대 급수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선 원주역은 1940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급수탑은 1899년 서울~인천 간 경인선의 개통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가 1950년대에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제 기능을 다하고 사라졌다. 한국 철도 역사의 이해와 근대 교통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있다. 작은 며느리가 두 손녀를 낳고 세번째로 손자를 출산하여서 함께 오지 못하였다. 두 손녀와 작은아들과 남편과 함께 왔다. 오늘 여행은 영월 단종 유적지 탐방을 위한 나들이다. 기차시간이 10시 45분인데 약간의 여유가 있어서 급수탑을 둘러보았다. 급수탑 주변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손녀들이 아주 신기한 눈으로 관찰한다. 작은 돌도 많다. 손녀는 그것도 좋다고 줍는다. 흐뭇한 여정의 첫 출발이다.
* 원주역에서 영월행 기차 승차
원주역에서 영월행 기차를 탔다. 원주역은 내년 하반기에는 남원주로 이전할 예정이다. 그래서 좀 아쉬운 역이다. 오늘의 영월 탐방은 어른들에게는 단종 유적지 탐방 한 가지이지만, 6살과 4살인 두 손녀에게는 생애 처음으로 기차를 태워준다는 아주 뜻깊은 나들이다. 기차 안에서 매우 신기한 눈으로 내부를 살펴보곤 한다. 이동하는 생활을 거의 자가용으로만 하다가 처음으로 기차를 탄 것이다. 두 손녀는 눈이 커지고, 마음이 들뜨고, 볼 것도 많아 창밖으로 또는 기차 안으로 시선이 바쁘다. 좌석을 마주하여 우리 가족이 즐겁게 여행한다. 앞좌석이 비어 있어서 나와 남편은 그곳에 앉기도 했다. 그랬더니 두 손녀는 할머니를 부르며 앞뒤 좌석을 왕래하기도 하고, 의자에 올라 서서 아빠를 부르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를 부르며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도 한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 영월역 도착
영월역에 도착했다. 영월역은 작년 가을에 우리 부부가 왔던 곳이라서 낯익다. 그런데 손녀들이 평창올림픽의마스코트 수호랑 담비랑을 보며 매우 좋아한다. 또한 영월역은 기와지붕으로 잘 지어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조형의 건물로 한국전통의 향수를 자아낸다. 손녀에게도 이런 전통건축물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김삿갓 동상도 보고 한동안 머물다가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 나룻배로 건너온 청령포
청령포에 도착하여 먼저 표를 구입했다. 그 표를 가지고 먼저 나룻배를 승선한다. 강 거너 청령포로 가기 위해서다. 강을 건너는 배에 승선했는데, 손녀들이 좋아하여 사진을 찍어주려 하니 금방 하선할 시간이 되었다. 유람이 아니고 바로 강 건너편으로 이동만 한 것이다. 아쉬움으로 하선하여 강변을 걸어 청령포로 향했다.
* 영월 청령포 관음송
영월읍에서 강을 건너 선 강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고, 넓은 풀밭을 지나 소나무숲이 있다. 3월 하순 이른 봄날인데 날씨가 더운 편이다. 소나무 숲에서 쉬어가지고 의자에 앉았다. 두 손녀는 솔잎을 가지고 재미있게 논다. 조금 떨어진 곳에 단종어소가 있다. 소나무 숲 사이의 초가와 기와지붕의 두 건물이 소슬하다. 또한 소나무숲 속에는 아주 큰 관음송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여기에서 서남쪽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으로 되었다. 관음송은 영월읍 남쪽을 흐르고 있는 남한강 상류의 강 가운데에 있는 고립된 작은 섬 같은 청령포 안에서 자라고 있다. 솔밭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 정도로 보고 계산한 것이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의 크기로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와 2.95m이다. 청령포는 세조 2년(1456)에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의 제6대왕인 단종은 숙부인 세조로부터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단종은 눈물과 비애, 그리움, 외로움 속에서 처소 바로 옆에 있는 소나무에 걸터앉아 마음을 달래었다. 바로 이러한 단종의 모습과 슬픈 말소리를 보고 듣고 했다 하여 ‘관음(觀音)’이란 이름이 이 소나무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가 23.3m, 남북이 20m이며, 평균 21.7m 정도로서 지상 12.5m에서 가지가 갈라져서 학의 날개처럼 퍼졌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는 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988년 4월 30일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국가의 재난을 슬퍼하는 소나무다. 단종의 영혼이 깃든 관음송은 더 이상 보통의 소나무가 아니었다. 신령스러운 나무가 된 것이다. 관음송에는 국가에 위난이 닥칠 때마다 어떤 변화가 있어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다. 나무의 껍질이 붉으스레한 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여 그 변고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관음송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본래 관음송은 불교의 관음보살에서 유래한 관음소나무를 의미한다. 단종이 노산군이 되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에 걸터앉은 비참한 모습을 보았으며(觀),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관음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은 후대에 만들어낸 설화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중에서 키가 가장 큰 나무이며,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이 나무의 종자에서 퍼져나간 나무들이라고 본다. 크고ㅜ 작은 소나무 숲은 휴식공간으로도 참 좋다. 우리가 관음송을 본 것은 전망대로 올를 때였다. 거대한 소나무가 가슴시린 모습으로 숲 사이에 오롯하게 서 있다. 단종의 아린 족적을 보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빌었다.
* 영월 청령포 전망대
단종어소는 다음에 보기로 하고 먼저 전망대로 향했다. 여전히 소나무숲은 이어지고 관음송은 슬프도록 시린 발목으로 외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 곁에 길게 꺾어지며 늘어선 나무 계단을 따라 걸어올라간다. 큰 손녀는 나와 손잡고 오르고 작은 손녀는 아범이 안고 올랐다. 가파른 계단은 힘들지만 단종이 오르던 그날의 아픔을 공감하며 꾹꾹 참고 쉬지 않고 단숨에 올랐다. 꼭대기 오르니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로 긴 절벽이 강을 딛고 일어서서 소슬한 비경을 자아낸다. 단종의 아픔을 안다고 외치는 듯하다. 강줄기는 길게 이어지고 마을이 고즈넉하게 강변에 앉아 있다. 여기서 단종은 북쪽 떠나온 궁궐을 향해 수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아버지 문종을 그리워 하고, 자신을 낳고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무치게 목놓아 부르며 그리워했을 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동일한 그 아픔을 느껴보며 이런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이 땅에 없기를 빌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줄줄어 여기 올라오는 것이리라. 두 어린 손녀가 무엇을 알랴. 시절 좋아 천진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아가야, 우리는 그런 아픈 역사를 넘어 찬란하게 피어난 대한의 품에서 얼마나 행복하냐. 오래도록 조국이 행복하기를 우리 함께 빌자꾸나. 다시 하산하며 나뭇가지 사이로 절벽을 타고 흐르는 강을 보았다. 강물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주 고요하고 청청하다. 계단 끝부분에서 갈라지는 노산대로 향했다.
* 영월 청령포 망향탑
전망대에 오를 때는 앞만 보고 가느라 못 봤는데 하산하며 보았다. 돌탑으로 이루어진 망향탑이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 뒤 층암절벽에 있다. 단종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으로 추정고 있다. 1974년 허물어졌던 탑을 복원하였다. 강변 난간에 고적하게 놓여 있다
* 청령포 노산대
전망대에서 내려와 망향탑을 지나 거의 끝부분에서 산언덕을 돌아 노산대를 향해 오른다. 갈림길에는 노산대와 전망대 두 안내 입간판이 서 있다. 전망대가 더 높아서 아득하게 보인다. 노산대로 가는 산길도 절벽을 타고 흐른다. 아래로는 강물이 푸르게 흘러 단종을 청초한 향수를 자아낸다. 야트막한 산정에 노산대라는 팻말과 함께 큰 바위병풍이 놓여있다. 청령포 단종어소에서 가까운 이곳은 단종이 자주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하여 노산대라고 불린다. 서쪽 66봉에 자상으로는 높이 80m 되는 낭떠러지가 있다. 단종은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 그가 앉아서 울었을 바위에도 걸터앉아보고, 그가 바라보며 수없이 피서린 통곡을 깔았을 절벽 아래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 아픔 산을 두고 어찌 하산할까. 아무 것도 모르는 6살, 4살 어린 두 손녀는 그저 산이 좋아라, 나무 계단이 좋아라 먼저 잘박잘박 내려간다. 나는 한동안 머물다가 남편과 아들의 어서 오라는 부름을 듣고서야 발길을 돌려 하산했다.
* 영월 청령포 단종어소
전망대에서 노산대를 지나 하산하여 다시 솔밭으로 왔다. 관음송을 보며 뽀얗게 난 산길을 따라 단종어소로 왔다. 단종어소는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어 고적하게 머물던 숙소다. 단종이 살던 집은 본채로 기와집이고, 하인들이 살던 집은 사랑채로 초가집이다. 그렇게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다. 이 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했다. 영조 때 세운 단묘유지비와 단종 유배 당시 세운 금표비도 있다. 단종이 머물던 집을 복원하여 2000년 4월 건립한 단종어가다. 2000년 4월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알현하는 선비가 있고 그 뒷방에 단종이 책상 앞에 앉아있다. 손녀는 영문도 모르고 사람의 형상으로 앉아있는 단종을 바라본다. 그가 저렇게 사람답게 산 세월이 과연 얼마나 될까. 죽음을 눈앞에 둔 그 절박한 시간을 그 당시는 몰랐다해도 단절된 세상과의 이곳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단종이 사용하던 이불이 작은 가구 위에 올려져 있고, 단종이 입던 붉은 도포가 벽에 걸려잇다. 살아서 금방이리도 달려나올 듯하다. 십대의 그 청순함이 곳곳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본채 안 마당에는 길게 누어서 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애절하다. 꼭 단종에게 엎드려 죄송함르로 사죄하는 듯한 형상이다. 무엇으로, 어떤 말로 위로해도 용서되 않는 비극 앞에서 저 소나무인들 온전하게 자랐을까. 바로 겨에는 사랑채인 초가집이 있다. 하인들의 향상이 밀랍인형으로 재현한다. 단종을 위해 바느질하는 여인과 음식을 만드는 부엌의 여인 등이 눈물겹다. 한낮의 화사한 햇살이 시리도록 눈부시다. 그날에도 저토록 고운 햇살이 내렸을까. 단종의 앞길에도 저런 화사한 길이 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단종의 시린 족적을 모두 보고 이제 단종어소를 나와 다시 나룻터 향해 걸어간다. 잘 계시오. 다시 와서 그대를 만나 또 기막힌 사연을 들으며 함께 하리다. 우리 가족은 여름에 다시 오리라 다짐하고 돌아서지지 않는 걸음을 달래서 강변으로 향했다.
* 청령포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며 본 서강
영월읍 관풍헌에서 임종을 거둔 단종이 시신은 영월읍을 흐르는 동강에 버려졌다. 그 강은 작년 우리 부부가 영월여행에서 보았고, 동강대교도 건너보았다. 오늘은 청령포에 있는 바로 앞에서 흐르는 서강을 본다. 서강은 평창강과 주천강이 만나는 영월군 한반도면 옹정리 선암마을에서 시작하여부터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영월읍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영월군을 동서로 가르며 흐른다하여 동쪽을 동강, 서쪽을 서강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는 속칭일 뿐 공식적인 하천명은 평창강이다. 이 강은 평창강 하류에 해당되는데, 동강과는 달리 유속이 느리고 하천 폭이 넓으며 강변을 끼고 많은 마을들이 위치해 있다. 단종의 첫 유배지인 청령포를 감싸안으 며 영월읍 합수머리에서 동강과 만나 남한강으로 흐른다. 동강을 물길이 험한 남성적 상징의 수강이라고 한다면, 서강은 물길이 순한 여성적 상징의 암강으로 표현되며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오밀조밀한 산세와 더불어 들판을 감싸 안으며 흐르는 서강의 깊고 잔잔한 물줄기는 병풍처럼 펼쳐진 신선바위를 휘돌아 아름다운 선암마을을 지나 청령포로 흘러든다. 서강 지역에서 가장 재미있는 곳은 선암마을의 풍경인데, 이 마을은 놀랍도록 우리 나라의 지형과 닮아있다. 강을 끼고 있는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서쪽은 완만하게 수면과 맞닿은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룬다. 주변에 선암, 선돌, 청령포, 당머루, 한반도 지형, 관란정 등이 있다. 동강과 마찬가지로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신비한 모습을 자아내며, 생태계의 보고로서 각종 동식물이 서식한다. 백로·비오리·원앙·수달, 어름치·참게·쉬리·쏘가리·꺽지 등이 살고, 주변에는 호랑나비·사향제비나비·노랑나비·부전나비·베짱이·실잠자리, 금낭화·은방울꽃·가는구절초·산국·생강나무·원추리 등이 서식한다. 또한 서강 물속에는 어름치, 쉬리 등 1급수에서만 사는 민물고기가 가득하고 수달, 비오리, 원앙이 노닐고 있어 생태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 북, 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지형이다. 현재도 도선을 이용해야만 방문이 가능하다. 또한 이곳은 1457년 세조 3, 세조에 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청령포라는 지명은 1763년 영조 39년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 영조가 직접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써서 내렸고, 이것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진 오석으로 된 비신에 새겼다. 비석의 뒷면에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 청령포라고 썼다. 이로 보아 청령포라는 지명은 유래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감입곡류하던 서강이 청령포 부근에서 하천의 측방침식에 의하여 하천의 유로가 변경되어 형성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과거 서강이 우회하던 방절리 주변의 저지대에 현재는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구하도와 미앤더 핵이라 불리는 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인근에 석회암 지대에 발달하는 카르스트지형과 구하도 상에 위치한 방절리의 하안단구 등이 발달되어 있다. 유배 당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금표비와 그 뒤 영조 때 세운 단묘유적비, 2000년 4월 단종문화제 때 세운 단종어가가 있으며, 단종이 서낭당을 만들 듯이 쌓은 것이라 하는 돌탑 등이 있다. 청령포 수림지로 불리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다.
단종의 시신을 버린 동강은 남한강 수계에 속하며 정선, 평창 일대 깊은 골짜기를 흘러내린 물들이 정선읍내에 이르면 조양강이라 부르고, 이 조양강에 동남천 물줄기가 합해지는 정선읍 남쪽 가수리부터 영월에 이르기까지의 51km 구간을 '동강'이라 부른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헤집고 흘러내리는 동강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사행천(巳行川)을 이루고 있으며, 전 구간에 걸쳐 깎아지른 듯한 절벽지형을 이루고 있다. 동강 유역에는 지표운동과 지하수·석회수의 용식작용 등으로 인해 많은 동굴이 형성되었는데, 2002년 현재까지 보고된 동굴만도 256개나 된다. 그 가운데 백룡동굴은 천연기념물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태계 역시 잘 보존되어 수달, 어름치·쉬리·버들치, 원앙·황조롱이·솔부엉이·소쩍새·비오리·흰꼬리독수리, 노란누에나방, 백부자·꼬리겨우살이 등 미기록종을 포함해 많은 천연기념물·희귀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동강의 백미인 어라연은 뛰어난 경치로 인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의 혼령이 영월에서 경치가 가장 뛰어난 이곳의 경치를 보고 여기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였는데 이때 물고기들이 줄을 지어 반겼으며 그 일대가 마치 고기비늘로 덮힌 연못과 같았다고 '어라연'이란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약 1km에 걸친 협곡을 따라 흐르는 동강의 중앙부에 3,000여 평의 바위섬이 위치한 어라연은 돌로 된 바위 위에 분재와 같은 소나무와 물에 잠긴 너럭바위에서 반사되는 햇살, 병풍 같은 절벽이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한다. 가끔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은한국의 그랜드 캐년으로 중국의 계림에 버금가는 명승지 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강 나룻터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며 서강의 강물을 쥐어보고, 던져보고 손녀와 함께 놀았다. 배는 자주 오고간다. 좀 더 머물다 가고 싶어서 몇 척의 배를 그냥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떠나고, 들어온다. 3월 하순의 강물은 차갑다. 발목을 적셔보니 시리다. 서강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유유히 흐른다. 청청하여서 더욱 시린 풍경이다. 단종을 한순간도 떠나보내지 못하게 하는 이곳 유적들이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나에게는 단종이 아들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나는 두 아들이 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그리고 단종이 10대 소년으로 생을 마감하여서 그렇게 가슴에 들어서는 것 같다. 시대를 초월한 오늘이라 한들 어린 아들의 비참한 죽음을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청초한 하늘과 햇살이 단종을 닮아 사위를 적신다. 모두 일서서지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오후 3시경 나룻배를 타고 청령포를 떠나왔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 이런 슬픈 역사가 다시는 없기를 빌었다.
* 나룻배로 서강을 건너와서 바라본 청령포
갈 때와 마찬가지로 금새 강을 건너서 왔다. 손녀는 좀더 배를 타고 싶다고 한다. 다음에 배를 많이 타는 곳으로 여행 가자고 달래어 하선했다. 언덕 위에 올라 청령포를 바라보니 강이 휘감은 소나무 숲과 함께 비경이다. 저 속에 단종이 서럽게 반 년 정도 머물렀는데, 오늘은 저토록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후손들에게 휴식공간으로도 아주 좋은 곳이다. 사람은 가고 없지만 그의 숨결은 살아서 후대의 자손들을 보듬어주고 있다. 고이 잠드소서. 좋은 일들만 생각하고 편히 잠드소서. 저 세상에서는 빛나는 이름으로 행복하게 사소서. 아들 하나 산속에 두고 가는 여인처럼, 나는 넋 놓아 바라보다가 서두른 남편의 부름에, 다시 오마, 약속하고 돌아서 갔다.
* 영월역 출발
영월역으로 오면서 봉래산 천마루 천문대를 보았다. 해발 800여 미터라는 높은 산정에 오롯하다. 다음에는 저곳도 가 볼 것이다. 영월역 건너편에서 칼국수로 늦은 중식을 하고 역으로 갔다. 작은 손녀가 식사 때 잠을 자서 먹지 못하여서, 식당에서 포장해온 칼국수를 역 대합실에서 먹였다. 예쁘게도 참 잘 받아 먹는다. 오후 5시 20분 원주행 기차를 타고 왔다. 손녀들과 작은 아들과 아주 보람되고, 기쁘고 흐뭇한 기차여행이었다. 세째 아기인 손자를 출산하여 오늘 함께 오지 못한 며느리와 손자에게 미안하다. 다음에는 손자도 며느리도 데리고 더 멋진 여행을 할 것이다. 청령포도 꼭 다시 갈 것이다. 이런저런 행복한 이야기들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