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문화재 전쟁] 러시아 학자가 찾은 발해, 일본과 중국은 왜 은폐했나
중앙일보 2022. 5. 20
발해 역사 지우기 100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한 지 올해로 20년이다. 그 사이에 우리에게 발해는 중국과의 역사분쟁으로만 기억된다. 하지만 발해를 둘러싼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 전쟁은 100여년간 벌어졌다.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하고, 만주와 한국은 하나의 역사라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내세우며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발해의 모든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바꾸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숨 가쁘게 진행된 역사 전쟁, 그 사이에서 발해의 실체를 밝혀온 연구자들을 살펴보자.
러 고고학자, 발해 상경성 첫 발굴
오래 잊혔던 발해의 면모 되살려
일본의 궤변 “우리가 발해 첫 연구”
“조선과 만주는 하나” 침략 정당화
중국 동북공정 “만주는 우리 역사”
발해 유적 홍보하며 관광자원화
금나라 때문에 사라진 상경성
발해 수도였던 상경성에서 출토된 돌사자 머리. 궁전 난간 장식물이다. 발해인의 기개가 엿보인다. [중앙포토]
발해를 대표하는 유적인 상경성은 755년에 발해 3대왕 대흠무(문왕)가 건설하여 상경용천부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잠시 수도를 옮긴 시간을 빼면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수도 역할을 했다. 그 덕에 상경성 성벽과 궁전터는 대표적인 발해 유적으로 꼽힌다.
상경성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시(寧安市)에 있다. ‘닝안’은 비록 행정구역은 헤이룽장성이지만 실제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옌볜(延邊) 지역과 가깝다. 지금도 옌볜조선족자치주를 제외하고 중국 내에서 조선족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심지어 옌볜자치주의 둔화(敦化) 지역보다 조선족이 많지만 정작 조선족자치주에서는 빠졌다. 발해 수도가 조선족자치주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하는 중국 당국의 게리맨더링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상경성 성터에 남아 있는 발해 시대 우물. [중앙포토]
상경성은 최근까지도 ‘동경성’이라 불렸다. 이는 여진의 금나라가 들어선 후에 새롭게 붙여진 것이다.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 유민들은 거란에 의해 사방으로 강제로 이주당했고, 이 지역에서 발해의 역사를 지우려는 여진과 거란의 지속적인 노력 탓이다. 수도마저 원래 이름을 빼앗긴 것은 지워지고 잊힌 발해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방의 파리’로 불린 하얼빈
발해 상경성(동경성)을 발굴한 러시아 동성문물연구회. [사진 강인욱]
발해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들어 다시 불붙었고, 그 중심에 하얼빈이 있었다. 하얼빈은 19세기 말 제정러시아가 동청(東淸) 철도를 세우면서 만든 도시다. ‘동양의 파리’로 불릴 만큼 국제적인 분위기였다. 또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아 한국 독립운동가에게 일종의 해방구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어로 ‘까레야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하얼빈에 모여든 러시아인들은 ‘동성문물연구회’를 조직해 발해 연구를 최초로 시작했다. 발해 이외에도 선비·여진·말갈 등 우리의 북방사를 활발하게 연구했다. 동성문물연구회에서 발해를 담당한 사람은 러시아 우랄 지역 출신이었던 V V 포노소프(1899~1975)였다.
포노소프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한창이던 1931년에 발해 상경성에 대한 최초의 고고학적 조사를 벌였다. 무국적자로 보호받을 수도 없는 사람이면서 비적들이 횡행하는 이 지역에 목숨을 걸고 갔던 그는 상경성의 주요 지점을 발굴하고 전체 평면도를 정밀하게 작성했다. 발해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발굴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
유적 정비를 마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 중인 상경성 전경. [사진 강인욱]
포노소프의 목숨을 건 상경성 조사 직후 반년 만에 하얼빈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일본의 관변단체인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발해 유적을 접수했다. 1900년 일어난 의화단의 난에 대한 배상금으로 세운 이 단체는 일본의 중국과 몽골 침략에 발맞춰 1925년 일본 교토대학의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와 도쿄대학의 하라다 요시히토(原田淑仁) 등이 주축이 돼서 설립했다. 그들은 군인을 앞세워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면서 사방에서 유물을 도굴에 가깝게 발굴하여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동아고고학회가 가장 먼저 발해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내선일체(한국과 일본은 하나)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만주를 차지하면서는 만주와 한국을 하나로 보는 만선사관을 내세웠다. 둘을 연결하면 곧 만주는 일본의 땅이라는 역사적인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생각에서다.
동아고고학회는 하얼빈을 접수하자마자 포노소프의 발굴 자료 일체를 건네받았고, 그에 근거해서 발굴을 준비했다. 1934~1935년에 발해 상경성을 조사하고, 보고서도 화려하게 발간했다. 이를 근거로 지금도 자신들이 발해 연구를 처음 시작했다고 널리 홍보하고 있다.
“발해서 일본 첫 동전 발견” 조작
하지만 최근 공개된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이는 실제와 전혀 달랐다. 발굴을 주도한 도쿄대 교수 하라다 요시히토가 작성한 내부 보고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러시아 및 중국학자들이 동경성(상경성)의 조사를 이미 행하고 있으니 그 선수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동아고고학회가 고의로 포노소프의 연구를 가로채고 은폐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발해 상경성 위치
일본은 심지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물을 위조하기까지 했다. 1934년 일본의 어용 고고학자들이 발해 상경성에서 일본 최초의 화폐인 ‘와도카이친(和同開珍)’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곧바로 함께 발굴한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은 일본인이 와도카이친을 가져와 파묻은 것이라 폭로했다.
일본은 반성하는 대신에 1940년에 만주국 수도인 신경(지금의 창춘)에서 ‘아스카 나라 문화 전람회’에서 이 동전을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일본인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 문화재 조작마저 서슴치 않았다. 그런데도 국내외에서 일본의 ‘침략’은 잘못이지만 일본이 발해고고학의 기틀을 세웠다는 식의 논조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러시아 학자 이름 삭제한 중국
한편 포노소프는 최후까지 남았던 하얼빈의 러시아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건국 후 12년이나 지난 1961년까지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하얼빈 러시아 학자들이 조사했던 유적에 대한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중국 학자들에게 전달했다. 40년 가까운 시간을 만주사 연구에 바쳤던 그는 62세가 돼서야 중국을 떠났다. 하지만 이미 소련 지역이 된 그의 고향 우랄 산맥 지역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호주에서 여생을 보내며 고고학 연구를 이어 갔다.
중국은 그가 남긴 자료로 지난 수십년간 하얼빈 일대의 발해는 물론 금나라와 선사시대를 조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포노소프와 러시아 고고학자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중국이 만주를 자국 역사임을 증명하는 데 열중하며 포노소프와 같은 하얼빈 러시아인들의 연구를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중국,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포노소프 이후 북한도 1963~1965년 발해 상경성 공동발굴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모든 교류를 중단했고, 지금은 쉽게 접근하기도 어려운 유적이 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미 끝났지만, 중국 지방정부는 발해 유적을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발해를 백두산과 함께 세계 사람들이 중국 동북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기억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복잡한 역사 분쟁 속에서 한국의 입장을 유일하게 옹호하는 측은 러시아였다. 지금도 러시아의 수많은 발해유적이 한국인의 손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모국으로부터도 버림받았지만 발해에 일생을 바친 하얼빈의 러시아 연구자들이야말로 국가의 이익보다 순수한 학문적인 열의로 발해를 연구한 표본이 아닐 수 없다. 황량하고 싸늘한 북방의 벌판에 버려진 우리 역사의 유적들에 젊은 나날을 바친 그들에 대한 재평가에서 발해 연구는 다시 시작돼야 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