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경제 수석 비서관 신 동 식 박사 이야기
이종육[소 운(素 雲)]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신 동 식 박사 역시 우수한 두뇌와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과학자입니다.
이 분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부산 항에서 거대한 미국의 화물선을 보고, 우리도
저런 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서울대 조선 공학과에 입학하여 졸업을 했으나,
취직 자리가 없어 전 세계 유명한 이름을 가진 선박 회사에 편지를 보냈는데,
스웨덴 선박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거기 갔으나 견딜 수가 없어 영국으로 건너가 로이드 선급협회
검사관으로 취직이 되어 근무하던 중에, 1961년 가을에 미국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와 있던
박정희 최고 회의 의장에게 불려가 보니, "임자! 조국의 조선 발전을 위해 나 하고 함께 일해 봅시다."
그러시면서, "그냥 바로 한국으로 갑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너무 당황하여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영국 회사에서 해결할 일도 있고 하니, 며칠만 말미를
달라 해서 영국으로 돌아가 고민 끝에 조국의 지도자가 부르는데 안 갈 수도 없고, 또 1 인당 국민
소득이 70달러 밖에 안 되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가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귀국 날짜를 청와대에 보고를 하니, 도착한 날 김포 비행장으로
비서실에서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청와대 초대 경제 수석 비관이 되어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을 기안하고 조선 사업 발전
계획을 기안 하는 등.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동식 박사에게 부산에 있는 대한 조선 공사에 가서, 조선 사업을 할 수 있는지
알아 보라고 해서 내려가 보니, 배 한 척도 만들지 못하는 황무지가 되어 있더라고 합니다.
거기서 제초(除草) 작업만 실컷 하다가 그 일을 그만 두고 거제도에 옥포 조선소를 건립 하자고
건의하여 지금의 옥포 조선소를 탄생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현대 조선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옥포 대우 조선과 울산 현대 조선이라는 쌍 두 마차를 끌게 된 것입니다.
박 대통령께서는 원래는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 사업을 해보라고 권했는데 겁을
먹고 못하다가, 신동식 박사가 옥포 조선소를 만드는 걸 보고 마음이 움직인 정주영 회장이
프로젝트 하나를 울산으로 가져가 현대 조선소를 설립 했습니다.
신동식 박사는 지금도 현역입니다, 한국 해사 기술 협회장과 카본 코리아 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1965년 10월 초, 미국 존슨 대통령이 3주 후에 방한한다며 한국에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필요한 걸 요청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무엇을 요구할까를 토의하였는데, 한강에 존슨 브리지(교량)
를 세우자, 여의도에 존슨 타워를 세우자는 등 여러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때 신동식 경제 수석 비서관이 박 대통령에게 기초 과학 연구소를 세우자고 건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괴학자도 없는데 연구소를 지어서 어느 세월에 본전을 뽑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신동식 박사는 박 대통령에게
"백 년이 걸려도 연구소를 지어야 합니다. 남의 나라에 돈도 빌려 보고 기술도 도입해 봤지만,
결국은 남의 심부름꾼 밖에 못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기술로 우리 것을 만들어 팔아야 잘 살
수가 있습니다"라고 설득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은 신동식 박사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원조 금을 받아, 지금 성북구 하월곡 동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를 설립한 것입니다. 아무려면 존슨 대통령이 자기를 기념해 달라고 선물을 준다고
했겠습니까?
신동식 박사는 이렿게 말합니다,
"베토벤이 불후의 명작 운명의 교향곡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후원한 귀족들, 악보를 멋지게
연주한 음악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우리가 오늘날 과학 기술 강국이 되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 반열에 올라 선 것은 박정희라는 탁월한 혜안을 가진 지휘자가 있었고, 24시간 연구실에 불을
밝히고 있었던 과학자들이 작곡을 잘하고 이병철과 정주영 같은 사업가들이 연주를 잘해 주었기
때문이었다"라고,
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매달 월간 경제 동향 보고 회의를 주재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경제지표를 챙기니, 열심히 안 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작품을 만들어내면 교수 평가 단이 평가 하여 대통령 앞에서 강평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까다롭게 굴었던 분이 남덕우 교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박 대통령께서, 남덕우 교수를 재무장관에 기용하고 임명 장을 주면서
"남 교수! 정부 정책에 꼬장꼬장 따지더니, 한번 당해 봐라!" 하면서,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과학자들이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도, 평가 교수단에서 반드시 평가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1966년부터 1969년 KIST(한국과학연구소)가 설립되기까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
30명을 조국의 기술 발전에 동참하자고 설득하여, 1차로 귀국시켰습니다.
그 사람들은 미국에서 안전한 삶이 보장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응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태규 박사와 최형섭 박사가 발 벗고 나섰습니다, 물론 그 작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휘봉을
잡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뒤에 다시 1백 명의 과학자들이 더 귀국하여 연구소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 바다에 떠 있는 30만 톤 급 이상 배의 85%가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현대 조선과 대우 조선이 만들어낸 작품들입니다.
최근에는 대만까지 무인 운전 선박 시험 운행까지 성공하였습니다.
양철 조각 하나 만들지 못하던 나라가 불과 몇십 년 만에 세계 최고의 조선(造船) 국가라는 자리에
우뚝 선 것입니다.
신동식 박사는 2003년도에 조선 건조량, 수주량 등 분야에서, 세계 1등 국가가 되었을 때
국내외에서 받은 상장을 들고 가, 동작 동 박 대통령 묘지 앞에 올려놓고,
"대장 님! 그리도 원하시던 미래의 조선 기술이 세계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라는 보고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577년 전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다면, 50년 전에는 과학기술 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K9 자주포와 K2 전차, T50 항공기를 수출하는 방위 산업 국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닦아 놓은 과학기술 혁명의 결정 체들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출처: 초대 경제 수석 비서관 신동식 박사 이야기 (tistory.com)
*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님의
지도자 상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리워, 정쟁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현실을, 다시 한번 제자리에
돌려놓을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옮겼습니다. 또한 그런 지도자를 믿고 한 마음으로
보좌할 유능한 보필 자가 탄생하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쇠뭉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