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해 시집 | 당신이라는 문을 열었을 때처럼 | 문학(시) | 변형국판 | 128쪽 | 2021년 4월 6일 출간
값 10,000원 | ISBN 979_11_5896_509_9 03810 | 바코드 9791158965099
[출처] 문학의전당 시인선 336, 최상해 시집 『당신이라는 문을 열었을 때처럼』|작성자 문학의전당
내일은 또 살아야겠다
2007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한 최상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당신이라는 문을 열었을 때처럼』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336으로 출간되었다. 5년 전 『그래도 맑음』이라는 시집을 들고 처음 등장했을 때 ‘참여시’가 가야 할 방향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던 최상해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는 생활 현장의 투사가 되어 돌아왔다. ‘삶이 곧 시’라는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생활 속에서, 이웃 속에서, 시장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시를 길어 올린다. 최상해의 시는 이 시대, 우리 삶의 기록이자 유산이다.
창원에 발을 들인 지 삼십여 년. 안성에서 남편 직장을 따라 이사하며 말로만 들었던 경상도, 그 생경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 같은 것이었지만, 이제 창원 사람보다 더 창원 사람이 되었다. 거친 사투리에 당황한 적 한두 번 아니지만, 점점 적응하면서 오히려 민낯 같은 그 정다움을 알아버렸다고나 할까. 가끔 찾아가는 고향 강릉이 더 낯설게 다가오는 걸 보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창원 사람이다. 그 시간 속을 건너는 동안 남편은 퇴직했고, 아들은 새살림을 차렸다. 작은 거실 한쪽 벽에 가족사진을 걸어놓고 시간을 더듬어본다. 아버지, 어머니, “따뜻해지면 창원에 한번 가마.” 하셨던 아버지는 끝내 오지 못했으며, 어머니도 뒤따라 긴 여행을 떠나셨다.
빈 의자에 앉았다
당신이 두고 내린 온기가 내게로 온다
약속처럼 버스가 정류장에 서면
의자를 끌어안는 사람들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쳇바퀴 돌듯 실려 갔다 돌아오는 길
고단한 하루가 어둠에 잠기면
의자는 마음이 먼저 따스해진다
— 「의자」 전문
지난 시간은 햇살 같다. 눈부시게 빛나다가도 화사한, 손에 받아보면 데일 것 같다가도 밝기만 한 이런 마음이 들락거리는 통로에 혼자 앉아 밤새워 일하느라 지쳐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렸던 시간, 편안하고 아늑한 시간이 필요한 지금에서야 그 시간이 소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념을 쫓아내듯 배달 오토바이가 골목을 휘젓고 지난다. 시장에서 쏟아져 나온 쓰레기를 치우느라 새벽부터 도계동 부부 시장은 쓰레기 청소차 소리로 왁자하다. 청소차가 한바탕 지나가자 상가 문을 여는 사람들로 또 소란스럽다. 출근하는 사람들, 하루 치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들, 이어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로 붐빈다. 처음 코로나가 우리 곁에 불쑥 찾아왔을 때만 해도 상가는 썰렁하다 못해 괴괴하였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발길이 흔들렸던 것도 습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자동키가 일반이 된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여유 없는 마음이 만들어낸 조급한 풍경이 내 안에 쌓여 나도 모르게 옹이가 되었듯, 우리는 모두 열리지 않는 가슴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지 모른다.
누군가 아파트 계단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기분 좋게 한잔했는지 아니면 무슨 근심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아버지 그만 들어가요. 집에 가서 이야기하세요.” “당신은 무슨 술을 그리 마시고 다닙니까. 동네 부끄럽지도 않습니꺼.” 근래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스무 살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찰서 문을 나설 때,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시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때 그 문을 다시 열 수만 있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역은 언제나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기차를 타고나면
다음 역에 대한 생각보다
지난 역에 대한 후회로
다음 역을 잊어버릴 때가 더 많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도
꽃이 피면 떨어지는 것도
어머니 어머니 가슴을 치며
아파하는 것도 다음 역이 아니라
지나간 역 때문이듯
종착역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달리는 기차에 앉아
내일이면 후회하게 될 오늘이
또, 빠르게 지나고 있다
— 「다음 역은 어디입니까」 전문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다. 그 시간이라는 기차를 타고나면 누구에게나 내릴 곳만 남기 때문이다. 내릴 때는 후회 같은 가슴 아픈 상처를 몇 개씩은 지고 뒤를 돌아보게 되는지 모른다. 혼자라면 얼마나 힘들고 안쓰러운가. 그래서 상처를 어루만지는 햇살의 손이 고맙고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잡아주는 손들이 있기에 상처는 상처가 아니라 따뜻함인지 모른다.
다블뤼 신부는 구노의 친구
병인박해 때 처형되었던 순교자이다
음악 공부를 하면서
프랑스와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흥선대원군과 구노가 만나는 상상을 한 적 있다
친구를 잃은 구노의 슬픔이
흥선대원군과 조선에 대한 분노가 되어
처연한 선율로 태어난 구노의 아베마리아
어릴 때부터 드나들었던 병원 진료실 앞에서
음악을 더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 책상 위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오던 라디오에서
나도 모르게 빠져들곤 했던,
아침 햇살과 저녁노을
밤하늘 별 무리와 한낮의 구름 떼
심지어 남편과 나의 만남처럼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운명처럼 하나로 연결되는,
이 시간에도 파도 같은 당신의 상실감이
천사가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한 말처럼
누군가의 삶을 새롭게 이끌거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는지 모른다
— 「시간을 넘어」 전문
봄비가 살풋 꽃잎을 적시자
바람이 세차게 분다
뜨거운 햇볕이 정수리에서 이글거리자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가을 하늘이 맑아서 두렵고
겨울 도시가 삭막해서 차라리 포근한
이런 날 내 마음은 어디에 있나
내일처럼 긴 기다림은
아직도 오는 중인가
바위도 마음처럼 가벼울 수 있고
파도도 잔물결처럼
마음을 가라앉게도 한다는데
어둠이 솟아오르는 바닷가에서
마주 보고 함께 가자던 날들이
쏟아지는 별처럼 허망하다
도계동 부부 시장 구석구석
문을 열고 닫는 삶의 소란함이
봄비가 되었다가
소나기가 되었다가
별처럼 허망하게 쏟아지기도 하는데
그래도, 내일은 또 살아야겠다
— 「내일은 또 살아야겠다」 전문
잠도 자지 않나 봐
밥도 먹지 않나 봐
시도 때도 없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하트를 날리는
저, 저돌성
넘쳐나는 바람기
싫어! 싫어! 손사래 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포용력
어떨 때는 나도 몰래 말을 걸어볼까도
손이라도 내밀어볼까도
여기저기 눈치 보지 않고 전화를 걸어볼까도
남몰래 살짝 만나볼까도 하다
아니지 아니지 마음 단단히 먹었던 적
한두 번 아니다
전세 대금 마련할 때
아이 대학에 들어갈 때
어머니 병원비에 어깨가 처졌을 때도
나도 몰래 불어난 카드 대금 때문에
덥석 손잡고는 얼마나 후회했던가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겁대가리 없이 덤벼들었던 지난 시간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짐을 했건만
그렇게 당하고도
첫사랑처럼 잊지 못하는
대출 씨
― 「친절한 대출 씨」 전문
전태일은 평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시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매년 다가오는 11월 13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재봉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망치 소리 요란한 공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바닥을 누비는 배달 오토바이 꽁무니에도 있고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는 컴퓨터 앞에도 있고
아이들과 하루 종일 씨름하는 어린이집에도 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병원에도 있고
이 집 저 집 시곗바늘처럼 들락거리는 학습지 교사에게도
통닭집에도 맥줏집에도 국밥집에도
아르바이트 시간 속에도
어디에든 그가 없는 곳 없는데
당신과 내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던
그의 바람을
그의 순수를
그의 절규를
그의 분노를 넘어
격렬하게 꿈꿔왔던 그의 사랑을, 그의 세상을
우상처럼 바라만 보고 있다
― 「모르고 있을 뿐이다」 전문
당신을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게
익숙함 때문이라는 이유를 찾고부터
처음처럼 당신 마음을 엿보려
은근히 기웃거리는 내가 있다
등 뒤에 있는 마음은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
앞으로만 뛰어가는 당신을 따라
잰걸음으로 뛰어간다
가면을 쓰지 않았지만
가면 뒤에 숨은 채
진실을 보이려 하지 않고
진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이 무겁다
때론 서로 마음을 어루만지며
웃음을 보이다가도
돌아서면 가슴이 허해지는 이유가
가면 때문이라 하자
아니, 익숙함 때문이라 하자
― 「익숙함 때문이라 하자」 전문
밑그림 그리다 말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림도 문장도 되지 못하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얼기설기 얽어놓은 하루는 비 오면 비에 젖고 별이 뜨면 별빛이 내려앉는, 무엇을 하든 어설픈 것이
제 모습입니다. 『그래도 맑음』 이후 지난 시간의 무게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지금이 더 문제입니다.
오늘도 기차는 쉬지 않고 다음 역을 향해 달립니다. 어디서 내려야 할지 나 자신이 점점 궁금해지는 시간입니다.
2021년 4월
최상해
한 여자, 한 아내, 한 어머니가 생의 골목을 돌며 작고 남루하고 스러져 가는 것들을 애틋하게 어루만진다. 그녀는 시를 엮어 담장에 걸어놓기도 하고 골목길에 낙엽처럼 뿌려놓기도 한다. 세파가 버리고 간 과거들을 일별하고, 숨죽여 반추하며 엄마를 보내고 아버지를 부르며 남편의 뒷모습을 쓰다듬는다. 건널목을 스쳐가는 하나의 그녀, 하나의 이웃, 하나의 동무 그리고 하나의 시인. 다정하고 따스하고 애달프다. 이 삭막한 도시에서 누군가 앉았다가 일어선 버스 좌석의 온기 같은 글들 속에서 그녀는 쉼 없이 말을 건다. 피리 부는 소년 같은 뒷모습을 하고 초라하고 소외된 작은 것들, 투쟁 현장에 버려진 신발짝 같은 쓸쓸한 것들에게 스렁스렁 갈바람 같은 선율로 위로를 보낸다. 어느 거리에서 휘청이는 걸음 만나거든 잠시 곁을 주시라. 그녀의 다정한 노래가 의자를 내어줄 것이다. 그녀는 어떤 미래의 실타래를 또 풀고 있을까. 그 가슴에서 흘러나올 내일의 노래가 더욱 기대된다.
— 박덕선(시인)
최상해 시인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2007년 『사람의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래도 맑음』이 있으며,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과 〈객토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1부
의자 13
익숙함 때문이라 하자 14
동거 16
마른장마 17
비밀시대 18
영진이네 칼국수 20
꿈자리 21
내일은 또 살아야겠다 22
아버지는 살아계시다 24
봄의 길목에서 25
불면 26
착한 길 28
스무 살 30
충동구매 31
지구를 떠나라 32
생일 33
당신이 시인입니다 34
제2부
고맙다 37
두절된 사랑 38
친절한 대출 씨 40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인다 42
정리해고 43
쩐쩐쩐 44
지렁이의 힘 46
행렬 48
입덧 50
말글 51
폰 아바타 52
줄 54
전태일의 눈 56
모르고 있을 뿐이다 58
오케스트라 60
1950년 8월 11일 62
증언 64
제3부
겨울 벚나무 앞에서 67
시간을 넘어 68
창원 사람 70
살아있는 거울 71
궁금한 여자가 되었다 72
상가 74
가장 소중한 것은 76
안민고개에서 78
안부를 묻는다 80
도계 교차로 81
가장 82
달칵 84
태복산을 오르며 86
당신과 나 사이에 88
입춘대길 90
창원 두대마을 92
제4부
그믐 97
휘게(Hygge) 98
나는 여전히 손님이다 100
가족사진 102
어머니의 실루엣 103
네 이웃을 사랑하라 104
그때는 왜 몰랐을까 106
천둥산 박달재 107
주문을 건다 108
창원에서 강릉까지는 너무 멀다 110
수건 밟기 111
꽃잔디 112
커튼 114
다음 역은 어디입니까 115
생긴 대로 살자 116
삼복(三伏) 118
시인의 에스프리
시간의 기차를 타고 119
[출처] 문학의전당 시인선 336, 최상해 시집 『당신이라는 문을 열었을 때처럼』|작성자 문학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