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제5복: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慈悲’는. ‘상대방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상대방의 마음과 통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평생 구원 활동을 하신 동기도 자비심 때문이다’라고 차동엽 신부는 좋은 예로 자비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암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갈수록 성격이 난폭 해졌다. 가족은 물론 병원의 전문 상담가들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아는 동네 꼬마가 병문안을 왔다. 병실에 들어간 꼬마는 30분 뒤에 나왔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할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꼬마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니?’
꼬마가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우시기에 따라서 같이 울었을 뿐이에요.’ 그게 바로 아이가 건넨 자비였다.”
신영복 서화집에서 보았던 문구가 생각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왜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게 되는가?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늘에서 더 큰 자비가 쏟아진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처럼, 자비는 선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자비가 영적으로 발휘되면 죄에 대한 용서가 되고,
물질적으로 발휘되면 자선이 된다.“
그러니까 자비를 일상 생활 속에 실천하려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이런 일화 하나가 기억난다.
”나는 학교에서 몸담고 있어 자선을 베풀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운전을 할 때라도 자선을 하자는 생각으로 계속 양보 운전을 한다.“
생각해 보면, 일상 생활 속에서 자선은 간단하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한 강연을 통해 종교의 자비로움을 끌어내고 실천해야 한다면서
“자비로운 마음은 스스로 돌아보아 개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준 고통을 발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같은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종교적 명상과 신앙심이 이러한 곳까지 이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