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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묵상글 ( 연중 제4주간 월요일. - 다윗의 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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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다윗의 기도
“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있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우리는 하느님께 청하든 흠숭을 드리건 찬미를 드리건
우리가 뭘 하는 것쯤으로 기도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라면 기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면 우리가 더 잘해야 할 것은 잘 듣는 것,
곧 경청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나는 일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른과 대화할 때 어른이 말씀하시면
말은 물론 하던 모든 동작 멈추고 공손히 듣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멈춤과 경청이 부족합니다.
가끔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기들끼리 그러하듯
제 앞에서도 휴대전화로 뭘 하는데 그때 저로서는 무척 당황스럽지요.
옛날 같으면 정 급한 일이 있으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밖에 나가 용무 보고 돌아와서는 다시 경청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경청인데
오늘 다윗은 그 경청에 있어서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시므이의 저주를 하느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인간을 통하여 하시는 하느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맞듯
저주를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다 받을 수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공손히 받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경청의 자세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모든 자연 재앙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경고를 듣고,
니네베의 왕과 백성들이 단식하고 회개했듯이
지금껏 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바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위에서도 하느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의 말 안에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관련한
하느님의 음성도 듣는데 이 또한 너무도 놀랍고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 반역은 아들이 지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들을 통해 내리신 벌입니다.
아들의 죄가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의 벌이요,
하느님께서 가장 치명적인 방법으로 내리신 벌입니다.
그랬을 겁니다.
간음죄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죽은 것도 치명적인 벌이었는데
아들이 반역한 것은 틀림없이 그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가 받아야 할 벌로 받아들이고,
벌도 인간이 주는 벌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벌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공손한 기도 자세일 뿐 아니라 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한 짓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내리신 벌이라면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하겠지요?
그래서 벌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선도 내려주실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게 되고,
그래서 이런 바람과 믿음으로 다윗은 이렇게까지도 얘기합니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벌을 주시는 하느님은 선을 은총을 주실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느님이 벌도 사랑으로 주시고 선도 은총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했기에 다윗은 성인이고,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고 우리의 모범입니다.
어제는 아무리 해도 제목만 올라가고
강론 내용이 올라가지 않아
몇 분에게만 이메일로 보내드렸는데
그것이 어제 강론 댓글에 올라와 있네요.
원하시는 분은 그것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가끔 이런 일이 있는데 저도 왜 그런지 모릅니다.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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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인데,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그러나 이제 그에게서 영들의 군대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고 이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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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을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합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하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큰 복입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와(마르5,15). 새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으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 주시길 바랐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주교).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5,18).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우리도 기도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누군가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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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世上)에서 중요(重要)한 3가지‘금(金)’이 있는데 돈을 상징(象徵)하는 “황금(黃金)”과 음식(飮食)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時間)을 상징하는 “지금(只今)”이다.
어느 남편(男便)이 이 말을 듣고선 너무 의미(意味)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인(婦人)에게 문자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3가지‘금(金)’이 있는데 뭐라고 생각해?” 잠시 후 부인에게서 답장(答狀) 문자가 왔습니다. “현금, 지금, 입금.”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입을 쩍 벌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방금, 쬐금, 송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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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페이스 북에서 가끔 좋은 글을 보여 주곤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굳이 복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썩은 과일은 스스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생각하니 참 좋은 글이었습니다. 불난 곳에 기름을 부으면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마련입니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와 아내가 켜놓은 컴퓨터에서 아내의 메일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혼자서 출장 간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메일에는 누군가와 같이 출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는 사실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남편은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면서 잘 지내다가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곧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고 남편에게 돌아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저도 화를 참지 못하고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적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흥분을 멈추고 지내면 곧 해결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사람을 탓하고, 벌준다고 해결 될 일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전쟁도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과 전쟁을 해야 하는 다윗의 마음은 칼로 찌르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아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결국 아들이 죽게 될 것이고, 아들이 이기면 또 다른 가족들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아셨고,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현실에서는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활은 깨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깨어지지 않는 달걀은 결코 병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무덤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을 내보내고 성령이 함께 하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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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과 마주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단번에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럴 때 쓰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주님께 말하는데 어이없게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더러운 영이 주님을 한 번에 알아본 것은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교만의 모습은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수없이 많겠지만 그중 첫째는 겸손과 교만일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영은 선한 영이고 교만한 영은 악한 영일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선한 영은 계속해서 주님과 가까이 있으려 노력하는 반면 악한 영은 어떻게 하면 주님과 멀어질까 궁리합니다.
오늘도 더러운 영은 주님께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돼지 떼에 들어간 영은 그대로 내달려 버립니다.
선한 영이 늘 우리와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늘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기를, 늘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에 목말라하기를 희망합니다.
선한 영께서 오늘도 우리의 하루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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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부침개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를 시킵니다.
물론 빠질 수 없는
튀김도 시킵니다.
김말이 튀김, 달걀튀김, 고추튀김, 채소튀김….
그중 저는 채소튀김을 좋아합니다.
(사실…. 모든 튀김을 좋아합니다.^^)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 채소 튀김은
일품 중의 일품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채소튀김 만들어 볼까요?
아시죠? 중요한 것은 반죽입니다.
반죽을 한 후 채소와 버무려 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부치기 직전에 빵가루로 한 번 더 버무려 부쳐주세요.
완전히 바삭하고 새로운 튀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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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에는 듣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늦은 밤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찹쌀떡~~ 메밀묵”입니다. 간단한 리듬이 담긴 이 소리를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추운 겨울, 사람이 많이 오가는 전철역 근처에서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파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길거리 음식인데도 많은 사람이 거부감없이 이를 구매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찹쌀떡, 메밀묵을 좋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찹쌀떡, 메밀묵’이라는 고유 장단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외국인에게 이 장단에 맞춰서 “찹쌀떡, 메밀묵”을 외쳐보라고 하면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6글자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만의 고유 장단이기에 따라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고유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 머무는 이는 사랑 실천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복해하며 남의 행복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고유함이 자기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실천에 주저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 실천하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고, 사람들에게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들을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먼저라서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오히려 배 아파합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고유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유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났습니다. 그 더러운 영을 아무도 휘어잡을 수가 없었지요. 그 안에는 군대라고 불릴 정도로 그 수가 많았지요. 이 마귀를 쫓아내시지요. 그런데 그 더러운 영들이 사람들이 산에서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에 들어간 것입니다. 마귀들이 들어갔던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더러운 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이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고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자기들의 손해를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또 생겨 손해를 볼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안에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고유함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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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다정함이란 진통제이자 치료제, 비타민이자 영양제이다(정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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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 천국의 온전한 삶
-하느님 중심의 정주(定住)와 믿음과 사랑-
“성공의 길은 다양하지만,
실패의 길은 포기, 하나뿐이다.
하나의 길이 막혔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 어록에 나오는 오늘 1월29일자 말씀입니다. 이래서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믿음입니다. 한쪽문이 닫혔다고 절망할 것은 아니니 한쪽문이 닫혔으면 옆문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것이니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어제 1.28일 주일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축일이자 동방교회에서는 사막의 은수자, 성 이삭의 축일을 지냅니다. 7세기 시리아 출신의 성인으로 서방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성인입니다. 어제 “지옥은 텅 비어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도 이 성인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았을 거란 인터뷰 기사를 일부 인용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지옥이 텅 비워져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씀이 회자된 적이 있고 나는 이것이 성 이삭이 다뤘던 주제라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렇다. 성 이삭은 지옥이 텅 비워져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텅 비워져 있기를 희망했다. 초기교회에는 이런 생각을 갖은 많은 교부들이 있었고 이것은 성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되는(All will be all in God)’ 종말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지옥이 영원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성 이삭은 영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특별히 흥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신적 사랑의 무한함(The immensity of divine love)’이 그의 관심사였다. 성인은 신적 사랑은 하나의 목적을 지녔으며, 창조의 목적은 분명히 인간 악에 의해 좌초되지 않는 다는 것과 신적 사랑은 마침내 어떻든 지옥을 극복할 것을 믿었다. 성 이삭의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것은 니싸의 그레고리오, 서방의 노르비치의 줄리안, 많은 신비가들의 생각이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삼 “하느님은 사랑임”을 깨닫게 하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찌보면 지옥도 하느님의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천국도 연옥도 지옥도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다는 것이고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을 잃을 때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연옥이자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치유받은 게라사의 미친 사람과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의 대조에서 우리는 귀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게라사의 미친 사람은 그대로 지옥의 사람같습니다. 흡사 주님이 지옥에서 그를 구출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아. 게라사의 미친 사람은 바로 하느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고 공동체 에서 격리 소외되어 고립단절의 삶을 살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지옥에서의 미친 사람입니다. 고립단절의 무관(無關)한 삶이 바로 지옥입니다. 복음 서두의 장면은 그대로 지옥도(地獄圖)를 연상케 합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흡사 지옥에서 구원의 하느님을 찾아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미친이를 지옥에서 끌어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더러운 영을 제압할 수 있는 분은, 더러운 영에 들린 이를 지옥에서 끌어낼 수 있는 분은 구원자 예수님뿐입니다. 당신 앞에 꿇어 절하는 더러운 영에게 떠날 것을 명령하는 예수님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일련의 과정을 겪은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는 마귀들렸던 자의 청을 거절하시고 자기 공동체 삶의 자리로 복귀하여 복음 선포자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부마자(付魔者)에서 복음 선포자(宣布者)로 획기적 구원의 전환에 모두가 놀랐다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마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평소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새삼 지옥도 천국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을 살아갈 때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오늘 사무엘하권의 다윗의 대죄의 보속으로 겪는 고난과 시련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대로 지상에서 겪는 지옥체험입니다. 정말 미치거나 자살까지 이를 극한 상황에서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다윗의 모습이 복음의 미친자와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으며 올리브 고개를 울며 올라가는’ 피난길에 오른 장면은 그대로 비극의 절정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이 지옥과도 같은 극한 상황의 수모와 곤욕과 시련 모두를 남김없이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은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이 정말 놀라운 감동입니다. 하느님은 시종일관 이런 다윗을 눈여겨 보시며 함께 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시편 139장 말씀입니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139,7-8)
천국도 지옥도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천국도 지옥도 스스로 자초하는 선택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살 때 천국이요 하느님을 등지고 살 때 지옥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지상천국의 온전한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와 믿음과 사랑을 노래한 제 좌우명 고백시를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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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8)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마르 1,13)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더러운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깨끗한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어두운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밝은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사악한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착한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억누르는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일으키는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내치는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돌보는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빼앗는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내어주는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죽이는 영을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살리는 영을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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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9. 연중 제4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3)
모든 이를 맞아들이는 낙원
‘모든 의로운 사람이 살 만큼 낙원은 넓을까?’라는 물음을 저는 던지곤 합니다. 저는 쓰여 있지 않은 것에 관하여 물었으나, 이렇게 쓰인 말씀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귀의 군대가 살았던 이 사람에 관하여 생각해 보아라(참조 마르 5,9; 루카 8,30). 그들은 거기서 드러나지 않게 살고 있었다. 마귀의 군대는 한 사람의 영혼보다 더 섬세하고 미세했기 때문이다.’
군대 전체가 한 사람의 몸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인들이 부활할 때 그들의 몸은 백 배나 더 섬세하고 미세해질 것입니다(1코린 15,42 참조). 그 몸은 드높은 영의 모습처럼 될 것입니다. 영은 맘대로 늘어나고 커지기도 하고, 맘대로 줄어들고 작아지기도 합니다. 영은 줄어들면 한 곳에 있을 수도 있고 늘어나면 모든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수한 빛줄기를 지닌 등불이 집 한 채 안에 들어 있고, 무수한 향기가 꽃 한 송이에 담겨 있습니다, 작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잔치를 벌일 때는 더 넓은 공간에서 (서로) 만납니다.
이처럼 낙원은 영들로 가득하지만 잔치를 열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오늘 밤 나는 하느님이 끌어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무조건적으로가 아니라 안에서만 끌어내려져야 합니다. 이 하느님은 끌어내려진 어떤 하느님입니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것을 나의 책에 기록했습니다. 우리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끌어내려진 하느님, 완전히 끌어내려진 하느님이 아니라 안에서만 끌어내려진 하느님. 위에 있던 것이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그대 안에 계시게 하려면, 그대가 그대 안에서 홀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위에 계신 그분으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 자신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엑카르트에 의하면 “하느님을 끌어내리는 것”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과 같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위에 있고, 우리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있기를 바라고, 우리 한가운데 충만히 존재한다. 신성은 안에 거주한다: ‘가장 내밀한 곳”은 가장 높은 곳을 뜻한다 - 가장 내밀한 것이 숭고한 것이 된다. 그리고 가장 내밀한 것과 숭고한 것은 하나다. 설교 1에서 살펴본 대로, 안과 밖의 역학은 창조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로서 우리의 영적인 경험의 가장 깊은 단계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우리의 안과 접촉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을 바깥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엑카르트는 이 잊혀진, 하지만 신성한 곳, 즉 영혼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끊임없이 반복되는 후렴이라도 된다는 듯이 되풀이하여 말한다. 이 반복되는 가사, 곧 영혼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우리에게 거듭거듭 제시함으로써, 엑카르트는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이야말로 하느님이 창조를 수행하는 곳이며,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거나 무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11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요한 13,1-20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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