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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법화경 수행 스크랩 민중 속의 성자 혜공스님
초월 추천 0 조회 117 09.06.01 11:53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민중 속의 성자 혜공스님


                               글 /손처사


절에 가면 나한전이 있다

이곳에는 부처님을 따르던 
큰 제자들인 아라한들이 모셔져 있다

신라시대에는 이들 아라한 뿐만 아니라
신라불교를 일으켰던 성자들도 모셨다고 한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진리를 실천한 분이라면
마땅히 중생의 공양을 받을만한 아라한이 아니겠는가

신라 서울 경주에 있던 흥륜사 금당에는
신라불교의 열분 성인이 모셔져 있다고
삼국유사에서는 전하고 있다

흥륜사 금당 동쪽 벽에는
이 절의 창건주나 다름없는 아도스님과 순교자 이차돈,

그리고 예언자로 이름난 안함스님과 
신라 화엄종의 고승 의상스님과 함께 
신라 민중 불교의 선구자 혜숙 스님이 모셔져 있었다

서쪽 벽에는 의상스님의 수제자 표훈스님과 
유명한 원효스님, 

그리고 원효스님의 도반이자 기인인 사파(사복), 
그리고 호국 불교의 고승 자장율사가 모셔져 있었으며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혜공스님의 소상도 모셨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전난으로 
그 모습을 현재 볼 수가 없지만 
여러 문헌을 통해 이분들의 발자취가 전해져 오고 있다

혜공스님 !

아도스님과 이차돈은 
오늘날 까지도 성자로 받들어지고

원효, 의상스님과 
자장율사도 성자로 보살로 떠받들어지는데

흥륜사에 모셔졌던 
신라 10성의 한 분인 이분은 

어찌 다른 고승들처럼 
역사의 재조명을 받지 못한 것일까

혜공스님은 노비 출신이었다

그는 천진공이라는 한 귀족의 집에 예속된
여종의 아들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심지어 신통한 이적을 나타내기도 했단다

그가 일곱 살 나던 해
천진공이 몸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천진공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아 있자
잠시 후에 천진공의 종기가 저절로 나아졌다고 한다

어린 혜공

그는 어릴 적부터 
남의 고통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자비로운 마음, 

남의고통을 알면 즉시 도와주고 싶어 하는 
보살의 마음이 잉태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라서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천진공의 종노릇을 이어갔으며

종노릇을 하면서도 눈치 빠르게 일을 거들기도 하고
이상스런 이적을 나타 냄에 주인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일은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

주인 천진공이 크게 감복하여
혜공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혜공에게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

노비가 노예주를 감화하여
그의 스승이 된 것이다

신라같은 엄격한 신분 질서의 질곡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진공이라는 사람이 
노비에게서 성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라가 아무리 계급사회라곤 하지만 

불교의 영향으로 노비도 능력에 따라서는 
승려가 되는 길을 통하여 
자기 신분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혜공은 출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출가는 단순한 발심의 결과라기보다
노비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자주성을 찾는 일이었다

이제 그 주인은 남이 아니라
곧 자신이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출가가
노예주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결단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그대로 빛을 드러냈다가는
명예의 노예가 될까 염려하여

그는 자신의 빛을 죽이고 먼지 속에 파묻히는 심정으로
아주 자그마한 절에 들어가 수행을 한다

그리고 훗날에는 
더더욱 철저히 낮은 데로 내려가

늘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술에 잔뜩 취해 삼태기를 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거리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부개화상(삼태기 스님이란 뜻)이라 불렀으며
진정 민중의 벗이 되었다고 한다

참된 보살은 사람들이 청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달려가 벗이 되어 주는 사람이라고 
유마거사는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혜공스님은 
밑바닥에서 억압받는 신라 민중의 벗이 되어 
그들과 함께 거리에서 어울려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그에게는 이 자체가 수행이었으며 
보살행이었다

사실 혜공스님은 
원효스님과 곧잘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하루는 두 분이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바위 위에 변을 보는데

혜공스님이 원효의 변을 가리키며
“네 똥은 내 고기야”하고 놀렸다고 한다

이 말이 인연이 되어 그곳에 절을 짓게 되는데
경북 영일의 유서 깊은 절 “오어사(吾魚寺)”이다

당시 원효스님은 귀족불교에 환멸을 느껴
민중 속의 수행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일례로 계율에 거리끼지도 않고
술 마시고 고기 먹는 일도 서슴치 않은 것을 보고

혜공은 원효스님을 깨우치고자
같이 고기를 잡아먹고 변을 보는데

혜공스님이 변을 보자 고기들이 되살아나
헤엄쳐 가는 반변에

원효스님은 변을 보았지만
그저 변으로 있음을 보고 
“네가 지금 본 변은 아까 내가 잡은 고기”
라고 놀렸다고 한다

이 말 한마디에
민중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여자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고기를 잡아먹는 모방의 삶이 
민중을 위한 것 인줄 여태껏 알아 온 자신이 

삶의 진정한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하며
원효스님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혜공스님은 전쟁과 억압에 시달려 
삶의 의욕과 희망을 잃어버린 민중에게
친근한 벗이 되어 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민중 속에 몸을 섞고 살며
스스럼없이 민중의 고민을 자신의 고민으로 알아
함께 기도하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정계의 끄나풀이나 되어
거대한 사찰에 들어 앉아 
거물급의 일신을 위해 기도나 하고

49재나 각종 천도재 등이
거금의 돈으로 흥정되는 작금의 현실

가난한 자는 49재 마저 요연하며
죽어서 하늘로 가는 길마저 
가난이란 터울 때문에 갈 수 없는 현실의 불교

일신의 명예를 위해 
번지르한 얼굴짝이 매스콤에 나오기를 확수고대하는 
작금의 일부 승려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혜공스님은 그렇게 살았다고 하여
결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효스님을 몸으로 깨우쳤을 뿐 아니라
원효스님의 여러 경전 해석을 보면서 

막힌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주기도 하였다고 하니 
실력이 대단하신 스님이었다고 보여진다

물론 노비 출신인 그로서는 
학문으로 닦여진 알음알이가 아니라
깨달음에서 나오는 반야 지혜의 실력이었을 것이며

그러한 실력 때문에
귀족 불교의 지도자들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도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사료된다


                   - 자료참조: 한국 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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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6.01 11:58

    첫댓글 _()()()_

  • 09.06.01 17:11

    _()()()_

  • 09.06.01 18:54

    _()()()_ 감사합니다

  • 09.06.02 02:04

    보살행을 가장 효율적으로 하신 분이십니다.....감사합니다..._()()()_

  • 09.06.02 11:22

    좋은 글 참으로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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