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희의 이사가 끝났다. 정리가 거의 다 되었을 때 아빠랑 엄마가 이사떡을 접시에 담고 계셨다. 마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엄마, 아빠.. 요즘 누가 이사떡을 돌려요?”
“뭐 어때..”
“아빠가 떡 돌리시면서 누가 사는지 보려고 하시는 것 같아.”
“못 살아.. 겨우 2년 사는 걸..”
“같이 갈래?”
“됐어요. 다녀오세요.”
아빠랑 엄마랑 나가시자 마희가 떡상자를 바라보았다.
“안나 좋아하는 떡이네.. 좀 담아 놓을까?”
마희는 주방으로 가서 빈 그릇을 갖고 와서 비닐장갑을 손에 끼고 떡을 담기 시작했다. 한 참 후에 집에 돌아오신 부모님의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아빠는 심각해보였고, 엄마는 밝으셨다.
“왜요?”
“짐 풀지 마. 다시 이사하자.”
“아빠~.”
“여보~. 잘 생기고 멋진 청년이던데.. 왜 그러세요.”
“응?”
“아래층에 멋진 청년이 살더라. 위층은 없네? 아빠가 젊은 남자가 같이 사는 게 걱정되시나봐.”
“무슨 일 생기면 얼른 집으로 와. 알았지?”
“알았어요.”
잠시 후 마희가 부모님을 집으로 배웅했다. 저녁이 되자 마희는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안나는 금요일이라 유치원에서 바로 택시를 탔다. 마희가 이사한 건물 앞에서 내린 안나가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보았다.
“역시~. 럭셔리하구만..”
택시 문을 닫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1층 경비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안나는 한 숨을 내쉬었다. 1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
에 누가 타고 있었다. 안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5층 버
튼을 눌렀다. 안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엄마. 네? 안 가요. 아니 일이 있어서 못가요. 그 녀석이 아픈데 제가 왜 가요.. 병원에 가라고 하세요... 죄송해요. 엄마.. 지금 엘리베이터라서.. 네.. 네..”
전화를 끊은 안나가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내렸다. 안나가 한 숨을 내쉬며 눈을 떴을 때에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던 석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저 여자는 뭐지? 나를 기억 못하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저 여자가 여길 왜 왔지? 5층이면.. 새로 이사온 사람이랑 아는 사이인가? 설마.. 형.. 그 분은 아니겠지..”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는 곧 안나를 떠올리며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은오는 꽃집 문을 일찍 닫으려고 밖으로 나와 셔터를 내렸다. 마희 집들이 선물로 주려고 갖고 나온 금전수 화분을 바닥에 내려놓고 열쇠로 잠갔다. 누군가 그녀의 모습을 사진 찍었다. 은오는 화분을 들어 가슴에 안고 차로 향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은오가 화분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서 있었다. 엘리베리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금전수 사이로 안을 바라본 은오는 누군가 내리는 것이 보여 옆으로 비켜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5층 버튼을 눌렀다.
동수와 석찬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화분에 가려 있는 여자를 보았다.
“위층 이사 왔더라. 5층 사는 사람 부모님이 이사떡 들고 오셨었어.”
“이사 온 여자는 못 봤어?”
“응. 왜?”
“아니야..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여자를 본 것 같거든..”
동수가 석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여자가 다 있어?”
“그래.. 꿈에 볼까 무섭다..”
동수는 웃으며 석찬과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은오가 벨을 누르자 안나가 나왔다.
“그냥 오지.. 화분 엄청 큰데. 힘들었겠다.”
“예쁘다~. 누구처럼 빈손으로 안 왔네? 역시 은오~.”
“야~. 필요한 거 말하라니까 됐다고 했으면서!”
안나가 화분을 받으며 말했다.
“아무거나라도 사왔어야지~.”
“알았어. 오늘 와서 보니까 예쁜 커피머신 필요하겠더라. 그거 내가 쏘마.”
“좋아~. 얼른 들어와.”
은오가 들어오자 안나가 문을 잠갔다.
“야. 아까 올라오다 보니까 아래층에 남자사는 것 같더라?”
“응. 우리 부모님이 떡 돌리시면서 확인하셨는데 2층에는 할아버지랑 할머니 사시고, 위층은 없었댔어. 그리고 아래층에는 키도 크고 멋진 남자가 산다던데?”
“조심해..”
“그렇지 않아도 아빠가 다시 이사가자고 하시더라.”
“그러셨어?”
“그래~. 조심하면 돼. 저녁 먹어야지? 앉아.”
“손 씻고 올게.”
은오가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지 않고 손을 씻으며 말했다.
“건물도 좋고, 엘리베이터도 좋고, 욕실도 좋네?”
“그래. 럭셔리 하더라.”
“자주 놀러와. 자고 가면 더 좋고~.”
“그래야겠다. 앞으로 모임은 우리 꽃집보다 넓은 마희네 집에서 해야겠다.”
“그래도 네가 늦게 끝나는 날에는 꽃집으로 갈 거야. 저녁 사들고..”
마희가 말하자 은오가 배시시 웃었다.
세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테라스에 나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나.. 너희들한테 할 말 있어..”
“응?”
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10년 전에..”
마희와 은오가 조용히 안나의 말을 기다렸다.
“재원이가 좋아한다고 했었어.”
안나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동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대하고 있는 그녀들을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놀라지 않네?”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은오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도 알고 있었는데?”
마희가 말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당연히 난 싫다고 했었지. 우리 졸업하는 날.. 그 녀석도 내가 자기 타입이 아니라고 하더라. 그래서 마음을 접은 줄 알았어. 10년 동안은 그런 줄 알고 지냈었어.”
“거짓말..”
은오가 말했다. 안나가 힘겹게 숨을 삼키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너도 알고 있었어. 재원이가 마음을 접지 못하고 네 옆에 서 있는 걸.. 지난 10년 동안 재원이.. 어떤 여자도 안 만났어. 이유가 뭔지.. 그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마희도 알고 있는데..”
“그래.. 재원이한테 지난 10년 동안 아무도 사귀자고 안 했을 것 같아? 능력 있고, 멋지고, 자상한 녀석인걸?”
“아마 네가 불편할까봐 안 그런 척 하면서 지냈겠지. 그런데 새삼 그게 왜 문제가 된 거야?”
“지난 주에 소개팅 했어.”
“정말?” “누구랑? 어디에서?”
“**호텔에서 우리 유치원에 다니는 윤슬, 윤지 삼촌이라는 사람이랑.. 그 사람 어머니의 소개로..”
“정말? 그렇게 소개가 들어오기도 하는 구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내가 마음에 드셨나봐. 아마 그 쌍둥이한테 엄마가 안 계신데 내가 좀 잘해주고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야.”
“그랬구나.. 그런데?”
“그런데는 뭐가 그런데겠냐? 재원이가 알았구나? 너 소개팅하는 거.”
은오가 물었다.
“응.”
은오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 말래?”
안나가 마른 침을 삼켰다.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살면.. 그 녀석도 내 옆에서 그렇게 산다고..”
“정말?”
“야~. 그건 거의 프로포즈 아니야?”
“그래서.. 뭐라고 했어?”
“누나, 동생으로 있자고..”
은오와 마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소개팅 자리에 나갔더니 그 상대 남자가 누군지 알아? 유쌤 비서..”
은오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마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맞다.. 난 기억 못하지..”
“그.. 그래서..?”
“난 기억을 못했는데 그 쪽은 기억을 하고 있더라고.. 유치하게 뜨거운 커피를 마시게 하는
장난이나 치고.. 기분이 안 좋아서 집에 오는데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어. 마음을 정리하지
않으면 다시는 안 본다고 했어.”
안나가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왔는데.. 비를 많이 맞았는지 열이 많이 난대. 엄마가 전화를 하셨는데.. 어떻게 가.. 내가 아프게 했는데..”
마희와 은오가 다가와 안나를 양 쪽에서 안았다.
“안나야..” “야..”
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갖기 싫고, 남주기는 싫고.. 그런 건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 녀석 옆에 있고 싶어. 태어나 처음으로 옆에 있어도 싫지 않은 남자였고.. 그런데 정
말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 녀석 마음을 받아준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이 불 보듯 뻔한
데..”
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없어. 그렇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네 마음은.. 그리고 재원이 마음은.. 아무래도 괜찮아?”
“곧 정리 할 거야.. 그럴 수 있을 거야..”
“안나야..”
“재나가 있잖아.. 재나한테는 뭐라고 해? 오빠랑 언니랑.. 이게 무슨 콩가루 집안이냐? 소설처럼.. 만들지 않을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안나를 더욱 꼭 안았다.
“우리는 뭐 이러냐..?”
“그러게.. 그래도 힘 내.. 힘 내자.”
“응..”
“와인 있는데.. 딸까?”
“그래.”
마희가 일어나 와인을 꺼내며 뒤를 돌아 눈물을 닦았다.
“기지배.. 우냐?”
“아니야.. 안 울어.”
“행복하다~. 정말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안나가 뒤로 누우며 말했다. 그 옆에 은오도 누웠다.
“그러게.. 나도 행복해.. 너희들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살았을지..”
마희가 와인잔과 와인, 오프너까지 쟁반에 들고 와서 자기도 누웠다.
“나도.. 그런 김에 오늘 다들 자고 가. 알았지?”
은오와 안나가 마희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세 사람은 와인을 한 모금씩 마셨다.
“선생님은 도대체 너를 왜 안 찾아오시는 거야?”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하긴.. 그렇게 따지면 내가 제일 심해. 개똥이를 어디에서 찾냐? 우리나라에 있긴 한 건지..”
“옛날 생각난다. 찾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치..”
“그러게~.”
“맞아.. 찾아도 넘어야 할 산이 한 두 개가 아니고..”
“개똥이 만나면 어쩔거야?”
“음.. 글세~.”
“한 대 패줄까?”
안나의 말에 마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응. 그렇게 해 줘..”
안나가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나도, 너도.. 마희도.. 우리는 뭐.. 과거에서 벗어나질 못하냐.. 구질구질하게..”
“구질구질은.. 로맨틱한 거야.”
“로맨틱?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로맨틱하지. 현실은 구질구질해.”
“우리는 행복을 찾는 것 뿐인데.. 뭐가 이렇게 어렵냐..”
“그러게..”
세 사람은 천정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자주 가던 바(Bar)에서 석찬과 동수가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사왔는지 궁금한 석찬이 형인 석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쁜 시간에 전화해서 물어보는 게 고작 어떤 여자냐는 거냐?>
“궁금하잖아. 이웃인데..”
<이웃이어서 궁금한 거냐? 아니면 작업하기 전에 확인하려고 전화한 거냐?>
“형~. 귀신이네~.”
<바빠. 전화 끊어.>
석찬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이 뭐야?”
<이 녀석이.. 할 일이 그렇게 없냐?>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 줘.”
<후우~~. 이름만이야. 그리고 그 아가씨랑 또 문제 생기면 이번에는 널 내 쫓을 줄 알아. 동수도 마찬가지야. 동수한테도 그렇게 전해.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이름은?”
<우마희. 끊는다.>
“뭐?”
이미 전화가 끊어졌다. 석찬이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동수를 바라보았다.
“누가 이사왔대?”
동수가 칵테일을 마시며 석찬을 바라보았다.
“우..마희..”
동수가 멈칫했다가 웃으며 석찬을 바라보았다.
“누구?”
“우마희가 이사왔다고.. 우마희면 네가 찾는 여자 아니냐? 그럼 뭐야.. 그 우마희의 친구인건가?”
“누굴 말하는 거야?”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던.. 꿈에라도 보기 싫다던 여자 말이야..”
“마희 친구면.. 안나 아니면 은오인데?”
“잠깐.. 누구?”
“고등학교 때 친구라면 두 명있어. 조안나랑 서은오. 둘 중에 누구지? 뭐야.. 마희가 위층으로 이사를 왔어?”
동수가 미소를 지었다.
“센터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네.. 아닌가? 센터로 찾아가는 게 좋을까?”
“안나.. 그 여자 이름이 조안나. 서은오.. 어디에서 들어봤는데..”
석찬이 눈을 들어 동수를 바라보았다.
“서은오..가 네가 찾는 조마희 친구야?”
“응. 고등학교 때 엄청 셋이 붙어 다녔었어. 왜?”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너 얼굴 허옇게 됐는데..”
“아.. 잠깐.. 이게 뭐야, 이거.. 우진형이 사랑했던 여자랑 네가 찾으려고 하는 여자랑 친구라는 소리야?”
“삼촌? 여기에서 삼촌이 왜 나와? 삼촌이 사랑했던 여자가 마희 친구야? 누구? 안나? 은오?”
석찬이 입을 다물었다. 동수가 손을 뻗어 석찬의 팔을 잡았다.
“누구냐고!”
우진이 집에 들어오니 현관에 구두가 놓여 있었다.
“동수 왔냐?”
“응.”
소파에서 앉아있던 동수가 일어나 우진에게 다가왔다.
“삼촌이 사랑했던 여자가 은오였어? 서은오? 맞아?”
우진이 구두를 벗고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꺼냈다.
“서은오 맞냐고!”
우진이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석찬이가 입이 가볍구나.”
“우연히 나온 거야.”
“우연히라도.. 하면 안 되는 말이야.”
“우리 집 위층에 누가 이사 왔는지 알아? 우마희.. 마희가 이사 왔다고. 지금 내가 사는 집 바로 위층에서 집들이 하고 있어. 누구, 누구가 와 있을 것 같아?”
우진이 물병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 셔츠 첫 째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숨을 몰
아쉬었다.
“삼촌.. 어떻게 10년 동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도 한마디도 안 해줬어?”
“뭐라고 말해. 네가 좋아하는 마희 친구인 은오를.. 사랑한다고? 아무도 모르길 바랬다. 은오
와 만난 것도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아무도 모르길 바랬다고.. 하지만 내 욕심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네 할머니 귀에 들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잘 지내는지, 혼자서 아프지는 않은지 걱
정이 돼서 찾았었어. 하지만 포기했었지. 얼굴 한 번 봤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하지만 네 할
머니는 벌써 은오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하셨지. 나도 지금은.. 머리가 복잡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은오를 한 번만 보면 깨끗이 단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욕심
때문에 또 다시 그 아이를 힘들게 할까봐.. 옆에서 보호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도망을 가서
그 아이와 평생 안 보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삼촌..”
“너도 마희를 만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고 만나라. 내 꼴 나기 싫으면.. 가라. 피곤하다.”
“도망 가. 돈을 모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라고. 그럴 수 있잖아.”
우진이 동수를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그 생각은 10년 전에 했었다. 단지.. 그게 불가능할거라는 걸.. 몰랐지.”
“왜? 왜 불가능해? 내가 있잖아. 내가 도와줄게.”
“넌 아직 젊어서 좋겠다. 난 이제 도망가서 살자고 말할 만큼 젊지 않아.”
“난 마희가 날 용서해 준다면 그렇게 할 거야.”
“동수야.”
“...”
“어쩌면.. 넌 마희랑 결혼 할 수도 있겠다.”
“응?”
“마희 아버지 회사는 10대 기업은 아니지만 튼튼한 중소기업이지. 마희는 할머니나 네 엄마가 좋아할 만한 여자고.. 네가 음악만 포기한다면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 포기할래?”
“그건..”
“방법은 많아. 하지만 그 후에 따라오는 댓가도 분명히 치러야 한다. 그만한 각오는 너만 한
다고 되는 게 아니야. 날개를 꺾인 널 보며 상대방도 행복할까? 세상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 하하하.. 그 보다 마희가 널 받아줄지 장담도 못하는 상황에서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
거 아니냐?”
“삼촌..”
“와인이나 따라. 한 병.. 마시자.”
우진이 식탁 의자에 앉자 동수가 와인을 꺼냈다.
석찬이 자신의 집 소파에 누워있었다.
“뭐야.. 우진형이 사랑한 여자랑 동수가 찾는 여자랑 친구라.. 그리고 동수가 찾는 여자가 아래층으로 이사를 왔고..”
그가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며 피식 피식 웃었다가 다시 정색을 했다.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동수랑.. 우진형이랑.. 아~. 복잡해.. 뭔 사랑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냐?”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병커피를 꺼내 뚜껑을 열어 싱크대에 던졌다.
다음 날, 새벽꽃시장에 가려고 은오가 일어났다. 마희가 자고 있어서 안나가 주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아침을 차려 주었다.
“항상 챙겨주더라.. 고맙게..”
“혼자는 안 먹지?”
“귀찮기도 하고.. 잠이 더 고프기도 하고..”
“하긴.. 나도 그렇더라.”
“혼자 밥 먹기 싫거나 외로우면 언제든지 불러. 알았지?”
은오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주차장에서 두 사람은 인사를 했다.
“마희한테는 다음에 보자고 전해 줘.”
“응. 조심해서 가.”
은오의 차가 출발하는 걸 보고 안나는 다시 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마희 옆에 쓰러져 다시 잠들었다.
새벽꽃시장에서 일을 보고 꽃가게 문을 열고 있는 은오의 모습을 우진이 보고 있었다. 피곤한
지 은오가 하품을 하며 가느다란 팔로 사온 꽃들을 가게 안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걸 들고 들어가다가 문에 어깨를 부딪쳤다. 순간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하며 차에서 내
릴 뻔했다. 하지만 은오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물건을 들고 가게안으로 들어갔다. 우진은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차를 출발시켰다.
늦게 일어난 안나와 마희가 브런치를 테라스에서 즐겼다.
“야.. 추운데 분위기 있다~.”
“그치? 하지만 아직은 너무 춥다. 들어가자.”
“그래.”
두 사람은 접시와 찻잔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곤 붉어진 코를 가진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
시간이 흘러 발렌타인데이가 찾아왔다. 안나와 마희가 은오 꽃가게로 찾아갔다.
“바빠?”
“왔어? 잠깐만 앉아 있을래?”
“응.”
은오는 빠른 손놀림으로 꽃바구니와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1년 중에 제일 바쁜 달이야. 2월은 가끔 없어도 좋지 않나.. 생각이 들다가도 다른 달에는 수입이 별로 없으니까 꼭 있어야 하는 달이기도 하더라고.”
“밥은 먹었어?”
마희가 걱정스런 얼굴로 은오를 바라보았다.
“대충. 저기 보면 주스나 차 있거든? 알아서 마시고 있어.”
“바쁘면서 우리까지 신경 쓰기는.. 뭐 도와줄까? 청소라면 자신있는데..”
“됐어. 말만이라도 고맙다.”
“주스? 물?”
“난 물.”
안나가 주스와 물을 꺼내와서 마희에게 물을 건네었다. 물을 마시고 마희가 말했다.
“나 오늘 출근하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이상한 남자 만났다?”
“이상한 남자?”
“응. 아래층에서 타던데..”
마희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난 마희가 테라스에서 밖을 내다보고는 들어와 옷장에서 옷을 골랐다. 짧은 미니
스커트에 허리선에서 끝나는 호피무늬 인조모피코트를 입고 굽이 12cm인 검은색 힐을 신고
열쇠와 지갑과 핸드폰이랑 간단한 파우치가 들어있는 작은 핸드백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
다. 몸을 돌려 옆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디 이상한 곳은 없나 점검하고 있는데 아
래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그녀는 누가 타든지 신경쓰지 않고 머리모양을 만지고 있었
다. 문이 닫히고 다시 엘리베이터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고 있는 중에 그녀가 미니스커트 단
을 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너무 짧은가?”
“당연한 거 아닌가?”
낯선 남자 목소리에 흠칫 놀란 마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벽에 붙어 옆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래층 사는 사람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렇게 입으면 감기 걸려요.”
“아.. 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데 무슨 꼴을 당하려고 옷을 그렇게 입습니까?”
“그거야 제 마음이죠.”
“나쁜 일을 당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뭐라고요?”
“옛말 하나 틀린 거 없다니까.. 멋 부리다 얼어죽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마희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지하주차장에 멈추자 문이 열리기 무섭게 내려 자신의 차로 종종걸음으로 걸어 차에 올라 문을 닫고 잠갔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자기가 뭔데.. 어이없어..”
마희가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동수가 목도리를 내리고 혀를 찼다.
“쯧.. 몸매가 좋아지니까 허영심이 생긴건가.. 발목 부러지겠네..”
동수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지..”
마희가 은오랑 안나에게 설명하자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정말 웃긴 사람이네..”
“한 번 인사차 가야겠다.”
안나가 말하자 마희가 “그래줄래? 혼자는 좀.. 덩치가 크더라고..” 라고 말했다.
“그래. 셋이 같이 한 번 인사를 하러 가자.”
“응.”
“오늘은 왜 나왔어?”
“나는 우리 반 꼬맹이들 줄 초콜릿이랑 아버지.. 그거 사러 나왔어.”
“재원이는..”
“못 주지.. 준다고 받겠냐? 병주고 약주고.. 가지가지 한다고 하겠지..”
은오와 마희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한테 연락.. 없었어?”
“응. 없었어.”
“그래..?”
은오가 눈을 들어 마희와 안나를 바라보았다.
“왜 너희들이 의기소침해져서 그래.. 나.. 괜찮아.”
“거짓말.. 너 괜찮다는 말은 전혀 안 괜찮다는 뜻인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
“하여간.. 귀신들.. 하아~. 그래.. 하나도 안 괜찮아.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고, 한 번 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음.. 보고 싶네..”
안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마희는 벌써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너무 가슴 아프잖아..”
“대신 울어줘서 고맙다. 나도 울고 싶지만 이번 달은 안 돼. 바빠서..”
은오의 말에 안나와 마희가 쿡쿡 웃었다.
안나와 마희가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오자 은오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각자 집으로 갔다. 안나는 부모님 집으로 갔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금방 가야해요.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이것만 전해드리려고요. 계세요?”
“서재에..”
엄마가 미소 지으시면서 대답해 주셨다. 안나가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아마도 그녀가 온 소리를 듣고 준비를 하신 모양이었다.
“왔어?”
“네. 발렌타인데인데.. 엄마랑 재나한테 받으셨어요?”
“응. 받았지.”
“제 것도 받아 주세요. 약소해요.”
“고맙다.”
안나가 내민 쇼핑백을 아버지가 받으셨다. 안나가 방을 나가려고 하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재원이는.. 괜찮아 진 것 같긴 한데.. 한 번 올라가 보렴.”
“..네..”
안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와 눈을 감고 한 숨을 내쉬었다. 2층 방으로 올라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안나가 문을 살짝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다시 문을 닫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왜요?”
그는 안나 엄마인 줄 알고 책에서 고개를 안 들고 말하고 있었다.
“난데..”
그가 슬쩍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왜?”
그의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핼쑥해져 있었다.
“아니.. 아버지가..”
“적당히 둘러대면 되잖아.”
“응. 미안해.”
안나는 안 사려고 했지만 그래도 준비한 초콜릿 상자를 문 옆에 있는 책장 위에 올려놓고 문을 닫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재나가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언니~.”
“잘 지내고 있어?”
“응.”
엄마가 나오셔서 그녀를 바라보셨다.
“저녁은?”
“은오랑 마희랑 먹었어요. 그럼 가 볼게요.”
“안 놀아주고?”
“내일 출근해야 해서.. 언니가 또 올게.”
“알았어.”
“그래. 조심해서 가.”
“네.”
안나는 부모님과 재나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버스를 타려고 깡충깡충 뛰어 길가로 달려갔다.
재원이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책장 위에 올려 진 상자를 보고는 눈을 감았다.
턱에 힘을 주고 천천히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갔다. 상자를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풀지도 못하고 상자를 양 손으로 감싸고 이마에 댔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집에서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아빠에게 건네자 마희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셨다.
“못 살아~. 매 해 감동하시면 어떻게 해요..”
“앞으로 얼마나 더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시면 가슴이 아프시대.”
“사랑하는 사람 생겨도 챙겨 드릴테니까 그만 우세요.”
“응..”
마희가 잠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뜨자 마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마희가 다시 물어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이 커졌다.
<나야.. 구동수..>
마희는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울릴까봐 전원을 끄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뭐야..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 아직인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단 말이야..”
마희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동수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동수의 이마 위에 병커피를 올려놓은 석찬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동수가 커피를 잡아 고개를 바로해서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석찬도 커피를 마시며 동수 맞은 편에 앉았다.
“차라리 위로 올라가서 만나라니까 전화는 왜 하냐?”
“놀랄까봐.. 후우... 10년 만이라.. 쉽지가 않다..”
“하여간 난 그렇게 복잡한 관계는 딱 질색이야. 부모님이 정해주는 여자랑 결혼하고 또 마음에 드는 여자 있으면 연애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냐? 사랑에 목을 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야.”
“복잡하기로 따지면 너만 하겠냐? 첫사랑에 목이나 매고..”
동수가 한 숨과 함께 석찬을 바라보며 말하자 석찬이 발끈했다.
“첫사랑에 누가 목을 맨다고.. 연애경험으로 보면 내가 너보다 훨씬 형님이다~.”
“그러면 뭐하냐? 그만 정리 해. 가볍기만 한 만남이 슬슬 재미없을 때가 됐잖아.”
“시끄러워. 10년 전에 그렇게 떠났다고 여자를 찾아가지도 못하는 게 사랑이라면 난 안 할란다.”
“한 번 큰 코 다쳤으면서도.. 정신이 안 차려지냐?”
석찬이 턱에 힘을 주었다가 씽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나니까..”
석찬이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자 동수가 말했다.
“가냐?”
“그럼.. 나도 좀 쉬어야겠다.”
“그래. 가라.”
“응.”
안나는 마희의 전화를 받고 마희네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1층 엘리베이터에 서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안나가 탔다. 그리고 5층 버튼을 눌렀다. 그 때
핸드폰이 울리자 안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석찬이 동수네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2층 더 올라가면 되는데 그냥 걸어갈까?”
석찬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계단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 거의 다 왔어. 지금 엘리베이터.. 4층이야. 한 층만 더 가면 돼. 조금만 기다려. 응..”
안나는 열린 문 사이로 등이 보이는 남자가 눈에 보였다. 전화를 끊은 안나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그에게 말했다.
“안 타세요?”
석찬이 몸을 돌려 안나를 바라보았다.
“탑니다.”
“네.”
안나는 예의 미소를 지으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 뒤에 섰다.
“사람 헷갈리게 하시네..”
안나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석찬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숙이며 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그에게 말했다.
“절.. 아세요?”
석찬이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알죠. 그 쪽도 나를 알 텐데.. 연기라면 아주 대단하시네요.”
“정말 모르겠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분은.. 아니신가봐요.”
“뭐요?”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안나가 내리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문이 닫히자 마희네 집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사는 사람들이 이상해. 나를 어떻게 알아?”
마희가 문을 열어주자 안나가 운동화를 벗으며 말했다.
“마희야. 다시 이사가는 건 어때? 사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 같아... 마희야..”
“안나야...”
마희가 눈물을 흘리며 안나를 안았다. 안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마희의 허리를 토닥였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누가 괴롭혀?”
마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울어~..”
마희가 포옹을 풀고 손에 들려 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전화 왔었어.. 동.. 동수한테..”
안나가 눈이 커져서 물었다.
“진짜? 언제?”
“한.. 30분 전에.. 집에 가서 아빠한테 초콜릿 드리고 오는 길에..”
안나가 마희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히며 물었다.
“뭐래?”
“몰라. 그냥 끊어버렸어.”
“에? 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나봐.. 목소리 듣는데 나도 모르게 끊어버렸어. 바로 또 전화할까봐 핸드폰 껐다가 집에 오자마자 너한테 전화한 거야."
"그 후로는 전화 없었고."
"응..."
“그랬구나. 그럴 수 있어. 만나기만 해봐라.. 하는 마음도 있지만 정말 딱 만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될것 같아. 놀랐겠다. 그런데 개똥이가 네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마희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미안했다.. 뭐 그런 말 하려고 전화했나?”
“몰라..”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 할거야?”
“글세..”
“글세는.. 네가 10년 전에 그렇게 힘들게 센터 들어간 이유가 뭐야? 당연히 만나야지..”
“후우.. 자신이 없어..”
“거울을 보세요~. 나도 사는데..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안나의 농담에 마희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왜 이사가라고 하는 거야?”
“응. 올라오다가 이상한 남자를 만났는데 나를 안대..”
“아래층 사는 남자인가?”
“아니야. 위층으로 가던데?”
“뭐야.. 아래층, 위층 다 이상한 남자들인가?”
마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사하는 것도 고려해봐. 걱정 돼서..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안다는 거지?”
“만난 적 있는 거 아니야?”
“낯이 익긴 한데.. 잘 기억이 안나. 우리 유치원 아이 가족인가?”
“또 시작이야?”
“그런가? 아니 뭐.. 계속 볼 사이도 아닌데 꼭 기억을 해야 하나?”
“못 말려..”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은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별로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나봐. 그래도 그렇지.. 나보고 연기하냐고 하던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러니까.. 이사를 신중히 고민 좀 해 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알았어..”
안나와 마희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석찬은 집에 들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혼잣말을 했다.
“뭐야.. 그게 얼마나 됐다고.. 날 기억 못해? 그 큰 눈탱이로 이렇게 노려보면서 말한 게 겨우
두 달도 안 됐고, 한 달 전에는 둘이 소개팅도 하고.. 겨우 2주 전에 집들이할 때 엘리베이터
에서 만났으면서.. 성격이 쌈닭이라서 그런가.. 기억력도 닭인가?”
석찬은 “에이~.” 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찡그린 눈을 감았다.
마지막 꽃바구니를 판 은오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돌돌 말아
정수리에 고정시킨 머리핀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 주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 덧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은오는 하품을 하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아~~함.. 졸리다. 청소하고 집으로 가자..”
은오는 “아이고..”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그 때 가게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닫았는데요.”
술에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꽃다발 주세요.”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손님. 꽃이 없어요.”
“꽃집에.. 꽃이 없어?”
“네. 오늘은 없고, 내일 있어요. 필요하시면 내일 찾아 주세요.”
“싫어. 꽃 줘. 붉은 색 장미로 꽃다발 만들어 달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꽃이 있으면 해 드리죠. 하지만 정말 없어서 그래요.”
“손님이 해 달라는 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술에 취한 남자가 입구에 놓인 화분을 하나 들어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큰 소리가 나며 바닥
에 화분이 깨지고 흙이랑 화초가 바당에 뒹굴었다. 은오가 달려가 맨 손으로 화초를 가져오려
고 바닥에 쪼그려 앉자 남자가 손을 들어 은오의 머리채를 잡았다.
“꽃다발 만들어 달란 말이야!”
“아악!”
“만들어 줘!”
남자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다 놓자 은오가 저만치 쓰러졌다. 은오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없어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를거에요.”
“불러~. 부르라고~!”
그가 화분을 하나 더 들더니 그녀를 향해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자 은오는 가만히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바들바들 떨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날아 올 거라고 생각했던 화분이 날아오
는 대신 뭔가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은오가 눈을 뜨고 바라본 것은 누군가 그 남자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우진이 들어와 화분을 제자리에 내려놓
았다. 은오는 떨리는 몸으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화초를 들어 비어 있는 화분에 넣고 흙과 깨
진 화분을 손으로 모아 옆에 놓인 비닐봉지에 넣었다. 우진이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일
으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은오가 우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정리해야 해요.”
“사람 불렀어. 그 사람들이 할 거야.”
“내 가게에 다른 사람 안 들여요.”
우진이 걸음을 멈추고 자꾸 버티는 은오를 바라보았다. 은오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떨고 있으면서 무슨 힘으로?”
“할 수.. 있어요.”
은오가 몸을 돌려 가게로 돌아가려고 하자 우진이 힘주어 팔을 잡아 당겼다. 은오의 몸이 빙
글 돌아 우진 바로 앞에 섰다.
“선생님..”
“제발.. 제발.. 내 말대로 해주면.. 안 될까...?”
“선생님이 잠깐 기다리시면 안돼요?”
“은오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은오가 눈을 감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은오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잠깐이면 돼요. 정말이에요.”
“그럼. 가만히 있어. 내가 할 테니까.”
우진이 그녀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은오를 앉혔다. 그리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바닥을 쓸어 쓰레기봉지에 잘 담았다. 그 모습을 은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 끝났어. 문 잠가.”
“네.”
은오가 앞치마를 벗고 코트와 가방을 들고 전등불을 껐다.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그자 우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제 차..”
“집 앞에 갖다 놓으라고 할게.”
“네.”
은오는 우진에게 잡힌 손에 이끌려 그의 차에 올랐다. 예전에 그가 고등학교 선생님 시절에
몰았던 검정색 SUV보다는 조금 더 고급스러운 승용차였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를 앉
히고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후 자신도 차에 올랐다. 그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은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진이 은오를 바라보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