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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6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5:21).
그러하기에 우리는 육으로 주님을 알지 않고 영으로 아는 자 곧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5:15).
이렇게 사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습니다(5:17).
하오나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한 언제나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약한 질그릇이오니 그런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 살게 하소서.
넘어질지라도 아들을 힘입어 일어나 담대하게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새 날을 주신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정욕에 이끌려 다니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46:1-11
제목 : 우리와 함께 하시니(임마누엘 하나님).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 나의 묵상
표제어에 의하면 46편의 시 역시 고라 자손이 쓴 시로서 지휘자의 인도에 따라 알라못에 맞춘 노래라고 한다.
고라 자손이 썼다는 말은 포로기 후에 성전 봉사자 곧 찬양대에 의해서 불린 노래이다.
여기서 ‘알라못’이라는 의미는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심지어’라는 뜻의 ‘알’과 ‘죽음’이라는 뜻의 ‘모트’의 합성어로 볼 수 있다.
이는 죽음의 상황에서조차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곡조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본시의 내용이나 역사적 저작 배경과 연관 지어 볼 때 가능한 해석이다.
본시는 히스기야 통치 당시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당할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받은 사건을 배경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해석을 따른다면 알라못이란 표현은 막강한 적국의 침공과 포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본 시의 주제를 잘 드러낸 것이 된다.
어찌됐든 알라못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여성 합창단에 의하여 불려진 노래로 본다.
시인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피난처와 힘으로 묘사하며 그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다.
본시는 환난과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시이다.
저작 배경에 대한 표제어나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 성읍마저 함락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구원받은 사건(왕하 18장-19장)을 배경으로 볼 수 있다.
1-3절, 환난 중에 도우시는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힘이시다. 우리가 어려울 때에 언제나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바다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바닷물이 넘실거리며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릴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였다(왕하 18:13).
이 때는 앗수르가 유다를 첫 번째 점령한 시기였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서 자기가 범죄하였으니 나에게 벌금을 지우면 그것을 감당하겠다고 하면서 앗수르 왕에게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부담시켰다.
히스기야는 성전의 문이나 왕궁에 입혀진 금을 벗겨 앗수르 왕에게 공물로 바쳤다.
그것을 받은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앗수르 왕은 이후에 또 다시 2차 침공을 감행한다(왕하 18:17).
1차 침공 때는 히스기야가 벌벌 떨면서 죄인처럼 행하였다.
하지만 2차 침공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전에 들어가 회개하며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위험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왕하 19:6)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앗수르 왕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두 아들에게 살해당한다.
(왕하 19:35-37)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5,000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산헤립의 두 아들)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렇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과 피난처로 삼을 때 생각만 해도 겁이 나는 앗수르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앗수르 군대가 얼마나 강하고 두려운지,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바다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으며 넘실대는 파도와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리는 것 같은 존재와 같다.
하지만 그들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존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을 한 순간에 넘어뜨리자 그들은 185,000명이 다 죽어 송장이 되고 만 것이다.
4-7절, 그분은 거룩한 성에 거하시는 우리의 피난처이심을 찬양한다.
지존하신 분, 가장 높으신 분이 사시는 성소인 하나님의 성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시내가 하나 있다.
하나님은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떨며 왕국들마다 흔들린다.
그분이 목소리를 높이자 땅이 녹아내린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여 소리를 높이셨더니 그 땅이 녹았다. 곧 적군들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이방 나라인 앗수르가 흔들리며 그 왕도 죽임을 당한다.
앗수르 군대를 섬멸한 여호와의 사자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일거에 죽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것이 구약 시대의 모습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원수를 죽여서 승리를 거머쥐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힘과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원수인 마귀를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창 3:15절에 나오는 원시복음을 성취하신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뱀(원수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되,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인데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 가죽옷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을 통하여 죄로 인하여 마귀를 아비로 삼고 있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원수 마귀는 멸하시는 것이다.
(요일 3:8b)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8-11절, 시인은 전쟁을 쉬게 하시는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와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라.
주께서 이 땅을 폐허가 되게 하셨다.
주는 온 땅에서 전쟁을 그치시고 활을 꺾으시며 창을 부러뜨리시고 방패를 불로 사르신다.
그러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조용하라,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나는 모든 나라들 위에 높임을 받을 것이며 온 세계에서 가장 높아질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명을 받아 영생의 약속을 담지한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렇게 죽으신 아들은 원수와의 전쟁에서 마치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아들이 황무지가 되신 것처럼 원수는 쾌재를 부른다.
하지만 실상은 아들이 황무지가 아니라 원수가 황무지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그치게 하셨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의 주 되심을 알고 주를 높이 찬양하는 일이다.
죽기까지 낮아져 복종하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빌 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나는 복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저 전쟁을 하면 예수의 힘을 이용하여 내가 반드시 승리하려는 자였다.
우리의 인생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 인생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반드시 유익을 얻고 승리하는 비결은 예수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승리 후에는 이 세상이 주는 안락과 풍요를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누리는 안전한 피난처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나의 인생 속에 그런 피난처는 없었다.
아무리 예수를 의지하여 나의 승리를 원하였지만 그런 승리도 없었다.
잠시 맛보는 승리는 있었지만 그것 또한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주님께서는 곤고와 환난이라는 고통을 주셨다.
그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나의 승리를 얻으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었다.
승리를 얻으려 했던 나에게 오히려 환난과 곤고라는 심판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께 속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 자리가 바로 무덤의 자리였으며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무덤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무덤의 자리에서 송이꿀 같은 생명의 말씀을 얻어 먹었다.
그 말씀 곧 복음이 나를 살린 것이다.
속았다고 생각했던 하나님께서 나를 끝까지 돌보시고 지켜보신 것이다.
오늘 본문에 후렴구처럼 계속되는 말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가 나의 고백이 된다.
오늘도 임마누엘로 나와 함께 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생의 약속을 담지한 사도라도 연약하여 넘어지고 자빠져 무릎이 깨지기도 합니다.
약속은 보배이지만 그 보배를 담고 있는 사도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종 역시 질그릇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떨어뜨리면 깨져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질그릇인 나를 보배를 담는 담지자로 사용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브라함도 애굽에 들어가서 실패하며 넘어진 것처럼 이 종도 이 세상이라는 애굽에서 늘 넘어져 깨지는 상처투성이입니다.
이러한 나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근원 되시는 우리 주님께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오니 그 보배 되신 주님의 소망을 붙들고 오늘도 한 걸음 내디딥니다.
나를 주의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소서.
나는 연약한 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