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선이라 말하면 선이 아니다". "부처를 부처라 말하면 부처가 아니다". "따라서 순수를 순수라 말하면 순수가 아니다."
고유함은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라는 숫자를 표현하는데 "둘이 아니다" 하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라고 말을 하는 순간 둘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말로써 전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사회에 길들여져서 주어진데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것이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안정되게 살아가는 좋은 방법입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독창성과 개별성을 잃어버려서 심하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삶의 조건이 상실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인도에서 살면 모를까
그렇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든 인격들을 치워버린 사람들, 즉 깨달은자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대부분 그렇게 요란 떨면서 세상을 살지 않았습니다. 시장통에서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삶을 한걸음 떨어져서 유유 자적하게 지켜보면서 삶을 살아갔습니다.
방관자의 자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강물을 바라다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종아리 정도 잠기도록 하고 흐르는 물을 희롱하면서 세월을 보내면 좋습니다.
아무리 얕은 물이라도 물살이 거세고 가슴이 차는 곳 까지 들어가서도 그 위험을 모른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강물을 완전히 벗어나면 삶이 재미 없을테니 이 또한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합니다.
인격을 벗어버린다는 표현도 사실은 적절치 못합니다. 그것은 만약 이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류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뭔가 작위, 즉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행위를 하면 또다른 인격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즉 인격을 벗어버린다는 그 행위가 바로 다른 인격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나라 마다 그리고 문화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밥먹는 스타일 조차 각기 다릅니다. 이 식사의 예절 습관 등 조차 하나의 인격을 형성시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근원적인 문제 입니다.
옷은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외부로 부터 보호받고 유유상종의 효과를 갖고 오게 됩니다. 따라서 옷을 벗어버리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옷은 입고 있되 그 옷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가끔 이점을 착각한 각자 아닌 각자는 옷을 벗어버리니 반드시 미친놈 소리를 듣기 마련입니다.
다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옷이 자기 자신인줄 알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