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양백산맥 원문보기 글쓴이: 박희용
기자명천지일보 newscj@newscj.com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바로가기 기사스크랩하기 다른 공유 찾기본문 글씨 줄이기가본문 글씨 키우기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1820년도 청국의 판도 ⓒ천지일보 2023.03.01.
만주라는 땅
만주는 중국 동북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내몽고자치구를 포함하는 지역이나 원래 동쪽으로 러시아의 연해주와 북쪽으로 아무르주, 하바롭스크 주변지역까지 포함한다. 비옥한 평원을 가진 만주는 역사적으로 그 경계와 지배세력이 정세에 따라 크게 변동을 겪어왔다.
고대 만주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땅이었다. 만주는 한민족 5000년 역사의 3/4 기간 동안 역사무대였다. 중국 대륙에 진(秦, BC221~BC206)나라를 시작으로 전한(前漢, BC201~AD4) 및 후한(後漢, 92~220)의 통일 제국이 출현하자 동방의 고조선과 대립했으며 그 후 다시 360년간의 5호 16국(5胡 16國) 시대(220~581)라는 분열기를 거쳤다. 이 분열 기간은 만주지역에 고조선의 후예인 고구려가 동북아 최강자로서 융성했던 기간이었다.
근대 이전의 만주와 중국, 한반도
긴 분열기를 끝내고 서기 589년 중국 대륙에 수(隋)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했다. 수나라는 다시 고구려와 대립했다. 수나라는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중화 일극주의에 사로잡혀 고구려에 대해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총력 원정공격을 가해 왔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의 지략과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수나라는 30년을 채우지 못하고 618년에 스스로 멸망했다.
수나라에 이어 통일제국 당(唐)이 등장했다. 당은 신라와 손잡고 국력을 기울여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여러 차례 참담한 패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오랜 전란에 지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멸망 후 만주지역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 발해 멸망 후 만주는 거란, 여진, 만주족이 잇달아 일어나 중국 왕조들을 위협하거나 뒤엎는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즉 거란족은 만주에서 요(遼, 907~1125)를 세워 200여 년 존속했다.
그 후 여진족이 일어나 금(金, 1115~1234)을 세운 후 송(宋)나라를 양자강 이남까지 밀어내고 만주와 양자강 이북까지 차지했다. 얼마 후 몽골에서 칭기스칸이 일어나 중국 전역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유럽까지 석권하며 원(元, 1204~1332) 제국을 세웠다. 몽골제국은 128년의 단명으로 그쳤다. 양자강 이남에서 주원장(朱元璋)이 북방민의 시대를 끝내고 명(明, 1368~1644)을 세웠다.
중국 역사에는 300년 이상 체제를 유지한 왕조는 송나라 319년뿐이다. 그것도 북송과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난 남송을 합쳐서이다. 중국 왕조가 약화, 분열되면 어김없이 만주와 몽골에서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과 북방 제민족 사이에서 한반도의 통일신라, 고려, 조선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만주 제민족이 중국을 침략할 때 한반도는 그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을 침략하기 전에 먼저 고려 등 한반도의 세력을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과 거란, 금과 고려의 관계, 명과 만주족 청, 조선의 관계가 그것을 보여 준다. 이때 북방 민족은 한반도의 고려나 조선을 제압할 수 있었을 때에만 중국 내륙으로 정복의 칼끝을 돌릴 수 있었다. 거란과 고려의 관계에서처럼 고려를 정벌하지 못한 거란은 중국을 침략할 수 없었다. 이러한 중국-한반도-만주의 3자 관계 때문에 중국 당-송-명의 통일제국은 1500년간 한반도에 대해 침략할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만주 몽골 등 북방민족에 대항하여 한반도의 통일신라와 당, 고려와 송, 조선과 명의 문명적 연대관계를 유지,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으로 떨어져 나간 지역과 원래의 청국과 러시아 국경(붉은선) ⓒ천지일보 2023.03.01.
근대 이후의 만주지역
러시아가 동진하여 청국과 만나기 전까지 만주 북방 시베리아는 임자 없는 불모지였다. 청국은 러시아가 시베리아지역을 탐험,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동쪽과 남쪽으로 진출해 오자 러시아와 국경을 새롭게 획정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스타노보이산맥과 아르군강으로 국경을 확정하였다. 이때 새롭게 그어진 만주의 경계는 오늘날 러시아의 하바롭스크 변경주와 연해주를 포함하여 태평양까지 면해 있었다.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로 무장한 영국은 거대한 땅덩이와 막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을 자신들의 면제품 시장으로 삼기 위해 아편전쟁(1840~1842)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시장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자 영국은 다시 구실을 만들어(애로호 사건) 프랑스와 연합하여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을 도발하였다. 청국은 제1차에 이어 제2차 아편전쟁에서도 완패했다. 청국은 외부에서 서구와 일본의 침략, 내부에서는 만주족의 지배에 반발한 한족 민족주의의 발흥이라는 양면의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청국의 약화는 러시아에게 기회였다. ‘동방을 정복’할 야심을 가졌던 러시아는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 중에 있었던 청국을 압박하여 1858년 <아이훈 조약>을 통해 흑룡강(러시아 아무르강) 이북의 아무르주, 하바롭스크 변경주 일대를 획득했다. 2년 뒤인 1860년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 종결을 중재하면서 다시 <북경 조약>을 통해 우수리강 이동의 태평양에 면한 연해주(프리몰스키 크라이)를 손에 넣고 태평양 연안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획득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말로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60년간 세도정치의 부정부패로 인해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국경을 넘어가는 월경죄는 엄한 처벌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평안도, 함경도 주민들이 압록강 두만강 국경을 넘어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광대한 지역의 개척과 철도, 도로 부설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선인 이주민들로 조달할 수 있었다.
청국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에 대해 봉금령으로 한족을 비롯한 주변 민족의 만주 이주를 금지해 왔었으나,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될 즈음에는 청의 봉금령이 약해졌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청은 1881년에 봉금령을 폐지했다. 1883년에는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하여 간도에 적극적으로 이주를 장려했다. 만주에서는 이주 한인들에 의해 벼농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렇게 개척되기 시작한 연해주와 만주의 한인사회는 얼마 후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러시아의 남하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인도와 중국 및 홍콩에 큰 이권을 갖고 있었던 대영제국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양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한 영국은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자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적극 지원하여 산업화와 군비강화를 적극 도와 러시아를 견제하는 동반자로 삼았다. 이런 글로벌 패권구도의 변동에 조선의 불안정한 상황은 청국과 러시아라는 대륙세력과 영국과 일본, 미국의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장이 되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던 조선 왕실은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조선과 만주를 완충지대로 확보할 야심을 갖고 있었던 일본은 조선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자 10년 전 갑신정변 때 맺었던 <천진 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것이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청일전쟁은 전근대적인 청국 체제의 취약점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어 몰락을 재촉했다.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체결된 강화조약에 의해 전쟁의 배상으로 대만과 함께 요동반도를 손에 넣어 만주에 받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일본에 대해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삼국간섭). 일본은 굴욕을 감수하고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이를 기회로 러시아는 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고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여 자국의 해군함대를 두게 되었다. 이리하여 만주는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랴오둥 반도 끝 뤼순의 러시아 해군 ⓒ천지일보 2023.03.01.
만주를 침공하는 일본군 ⓒ천지일보 2023.03.01.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이 러시아를 꺾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차지했던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러시아가 부설한 하얼빈에서 대련에 이르는 남만주철도를 손에 넣었다. 일본은 자국의 이권을 경영하고 보호하기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를 설립하고, 철도를 경비하기 위해 관동군을 파견하였다. 만주는 일본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줄곧 내외의 충격에서 흔들리던 청나라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마침내 무너졌다. 손문(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은 남경이 수도였다. 만주는 청조의 붕괴와 원세개의 반혁명, 혁명파에 대한 무력탄압의 아수라장 속에서 군벌과 마적들의 천지가 되었다. 이 시기 마적질은 만주인들의 직업이 되다시피 하여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혔다.
3·1운동, 무장독립운동, 만주사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용정을 비롯한 만주의 한인들이 열렬하게 만세시위를 벌이는 한편, 독립군을 편성하여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한인 무장세력 근거지를 근절시키기 위해 두만강 국경을 넘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은 이런 일본군을 맞아 물리친 승리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해 가을과 겨울 혼춘을 중심으로 간도일대에서 대대적인 집단 학살과 방화를 자행했다.
1929년 세계경제공황이 일어났다. 일본 군부는 위기타개를 위해 만주 전역을 삼킬 계략을 짰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스스로 철도를 폭파해 놓고 중국 마적단의 소행이라고 하며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관동군은 18시간 만에 봉천(심양), 안동, 장춘, 우장 등 남만주철도 지대의 중요 지점을 장악했다. 이에 맞추어 조선 주둔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격하였다. 관동군은 이듬해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본 관동군이 조종하는 괴뢰정권이었다.
1945년 8월 9일 유럽에서 전쟁을 종식시킨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만주로 진격했다. 관동군은 주력이 남방전전으로 빠져나간 뒤라 불과 7일 만에 궤멸되고, 만주국도 붕괴되었다. 만주는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소련은 만주를 중국 국민당 정권에 인계했다. 1949년 모택동의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석권하자 중국인민공화국에 넘어갔다. 이처럼 만주는 근대 150년 동안 끊임없이 주변 세력 변화에 따라 주인이 바뀌는 불안정한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