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지나고 찾아온 '요금 폭탄' 논란
정말 고생스러웠던 무더위가 지나가자 '
전기 요금 폭탄' 주장에 세상이 시끄럽다. 무더위에
에어컨을 "좀 틀었다!"가 예상치 못했던
전기 요금이 나왔다는 주장이다.
한 방송사는 한
가정의 사례를 전하면서, 7월에 대략 300킬로와트시의
전력을 사용하여 4만7000원 정도를 냈는데 무더위에 에어컨을 사용하니 8월에는 770킬로와트시 정도의 전력 사용량에 33만 원이 넘는 전기 요금을 부담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전력 사용량은 두 배 정도인데 요금은 여덟 배 가까이 나왔으니, 이런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보도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던 모양이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까지 이를 지적하면서 당장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경향신문> 2012년 9월 7일자).
이런 '불합리한 일'의 원인으로 가정용 전기 요금의 누진제가
도마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6단계의 누진제가 시행되고 있으며 1단계와 6단계
사이의 누진율이 11.6배
차이가 난다. 이런 사실 자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지 않아서, 이번에 알게 된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듯하다. 또 여러 단계와 고율의 누진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많지 않으며,
산업용이나
일반용에는 없는 누진제가 가정용에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 누진제는 1970년대
석유 파동 후
산업용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정용 전력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서 도입되었으며, 누진 단계의 용량도 그때 결정되어 잘 살게 된 오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전력의
친절한 설명이다.
잘못된 누진제 비판을 우려한다
이런 주장들을 듣다 보면, 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누진제가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덩달아 비판의 돌멩이를 던져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아니 나는 누진제에 대한 비판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누진제의 비판과 그로부터 이어질 제도 변화 뒤에, 엇갈리게 될 계급적 이해관계와 무엇보다도
에너지 전환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전기 요금 누진제의 축소, 폐지 논의와 움직임은―상징적으로 이야기하자면―삼성의 이재용이 내고 있는 전기 요금을 깎아주고, 아마도 적은
수입으로 전기를 아껴 쓰던 대다수 서민이 부담하는 요금을 더 인상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에너지 전환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삼성의 이재용은 매달 약 3만4000킬로와트시의 전력을 사용하면서, 약 2400만 원의 전기 요금을 납부해왔다(2009년 현재). 그는 당시 전체
가구의 월평균 사용량 229킬로와트시의 150배가량의 전력을 사용했지만, 누진제의
효과로 월평균 요금 2만1090원의 1200배의 전기 요금을 냈다.
(☞관련 기사 : 전기 요금 1등 이재용 자택…월평균 2470만 원)
아마도 올
여름의 무더위와 요금 인상으로 이재용의 전기 요금은 더 늘었겠지만, 따지고 보면 부자 감세가 횡행하고 있는 지금 전기 요금 누진제만큼
사회 정의를 반영하고 있는 제도도 없었던 것이다. 누진제가 완화된다면 이재용을 비롯해, 한국의 1퍼센트 최상위 계층들이 내던 전기 요금도 대폭 줄어들게 될 것이다.
물론 이재용 같은 사람들의 전기 요금을 더 받자고 불합리한 누진제를 고수하자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식의 주장에 매달리려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누진제 축소, 폐지로 누가 혜택을 보며, 반대로 누가 더 부담을 지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 누진제 축소 논의의 핵심은
여름철 무더위로 "에어컨을 좀 틀었다가" 수십만 원의 전기 요금을 내게 된 중산층 가구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대변하는가에 있다.
에너지시민연대의
자료에 의하면, 이번 8월에 누진제 6단계인 500킬로와트시 이상의 전력을 사용한 가구 수는 16만 정도로 전체의 7.5퍼센트에 해당한다. 언론 보도에 나온 33만 원의 '요금 폭탄'을 맞은 가구(770킬로와트시 이상 사용)의 수는 이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한편, 올해 7월에 500킬로와트시 이상의 전력을 사용한 가구는 전체의 1.9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점은 소위 '요금 폭탄 논란'은 여름철, 많아야 한두 달에 해당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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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
누구의 요금을 깎고 올리자는 것인가짐작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전력 사용량의 많은 가구는
경제적 수입도 많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통계에 의하면, 월 소득 600만 원 이상 가구의 평균 전력 사용량은 391킬로와트시이다. 이들은 현행 전기
요금제로 7만2000원 정도의 요금을 부담하게 된다. 참고로 월 소득
100만 원 이하 가구의 평균 사용량은 222킬로와트시이며, 현행 요금제에서 대략 2만6000원 정도를 부담하게 된다.
한국전력의 주장은 월 소득 600만 원 이상의 가구들보다 더 많은 수입을 가진 이들의 전기 요금을 깎아주자는 것인데, 이에 맞춰서 민주당의 조경태
의원은 누진제를 완화시키자는 법안을 냈고 <경향신문>은 사설을 쓰면서 호통을 쳤던 것이다. 한국전력의 주장 뒤에 어떤 계급적 이해관계의 변화가
예고되는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누구의 부담을 경감시켜주는가 하는 점보다 누구의 부담이 증가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사실 누진제를 완화하자는 주장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공식적인 안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세한 분석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나온 안은 6단계를 3단계로 줄이고 누진율을 줄이자는
방향만 제시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누진 구간을 어떻게 나누며 각 구간에 대한 요금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누진제 완화와 함께 저소득 계층에 대한 요금 부담을 증가시킬 조짐이 관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전력은 보도 자료(9월 7일)를 통해 월 전력량이 356킬로와트시 이하인 가구는
원가 대비 적정한 요금을 내고 있고, 그보다 많은 전력을 사용하면서 원가 이상의 요금을 내는 가구가 요금의 일부를
보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전력이 손해를 보겠다는 생각이 아니면, 원가 이상의 요금 받던 계층의 요금을 깎아 주면서 잃는 손실을 어디선가 충당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게 어떤 계층이겠는가? 전체 가구의 67퍼센트를
구성하나
판매 수입은 37퍼센트에 불과한, 300킬로와트시 이하의 전력을 사용하는 중하위 가구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우려대로라면, 현재 대략 4만2000원 이하의 전기 요금을 내는 사람들은 누진제 완화로 요금 인상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이재용의 요금을 깎아주자고, 100만 원의
연금 생활을 하고 있는 노부부—내
부모다—의 부담을 증가시키는 것을 동의할 수 있겠는가?
산업/상업용에도 누진제를 검토하자누진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수는 없다. 몇 가지 쟁점들이 남아 있다. 우선 산업용 요금과 가정용 요금과의 형평성 문제다.
한국전력은 산업용 원가
회수율이 주택용보다 높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면 아주 최근의 요금 인상으로 나타난 효과일 것이다. 오랫동안 주택용 전기 요금에서 산업용 전기 요금을 교차 보조해 왔으며, 그 '
역사적 부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장 2010년에도 낮게 책정된 산업용 전기 요금으로 산업계 전체가 2조1157억 원의 혜택을 얻었으며, 당시 주택용 전기 요금의 원가
보상율이 94퍼센트일 때 산업용은 89퍼센트에 머물러 있었다.
많은 이들이 가정용 전기 요금의 누진제에 더욱 분개하는 것은, 이것이 산업용이나 일반 (상업)용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이다. 문제의 해결 방향은 가정용 누진제의 완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산업용 전기 요금을 원가를 제대로 반영하며, 나아가 전기 사용으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에 따라
추가적으로 요금을 더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이―요금 폭탄 논란 속에서 사람들이 잊어버린 주제인―온실 기체를 감축하고 핵 발전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에너지 복지를 위해, 누진 1단계의 전기 용량을 현실화하자누진제는 1970년대의 석유 파동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구시대적인 제도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일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석유 파동과 같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한다는 맥락에서 만들어진 제도라는 점에서 이 제도는 결코 구시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시민들의 전기 사용을 억제하려고 설계되었다는 한계를 가지지만, 기후 변화 위기와 핵 발전 위험에서 벗어나는 에너지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에 오히려 새롭게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제도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정뿐만 아니라 산업과 상업 부문에
확대 적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개선해야 할 점도 있을 것이다. 특히 누진 구간이 적절한가 하는 점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즉, 최초의 누진 구간인 1단계를 계속 100킬로와트시로 묶어두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9년
가전기기 보급률을 기준으로 한 가구당 최소 필요 전력량을 가늠해 보아도 150킬로와트시에 가까우며,
기초생활수급자의 전력사용량도 200킬로와트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상황 변화를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전기 요금 누진제가 저소득층 가구에게 원가보다 낮은 요금으로 공급함으로써, 전기 사용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실현해왔다는 점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한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전기 에너지에 대해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1단계 구간을 확대하고 상대적인 요금 혜택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다.
기후 변화와 핵 위험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평소 개혁적인 학자로 알려진 분이 에너지
복지를 위해 누진제를 완화하자는 주장의
칼럼을 쓰셨다. 동감하는 바가 상당히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결론은 달랐다. 그런데 그 칼럼 중에 곱씹었던 구절이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견디기 힘든 무더위에 값비싼 에어컨을
인테리어 장식품으로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반문이었다. 무더위를 버텨낸 많은 이들 중에 무릎을 딱 치며 공감을 했을 사람이 많겠다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순간 나마저도 흔들렸다. 엄청난 선동력을 가진 글이었다.
그러나 곧 "에어컨 좀 틀었더니" 33만 원이 나왔다는 가정과 무더위의 사례가 생각났다. 확실히 인테리어가 아닌 제 역할을 했고, 아마도 무더위의 고통을 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기 요금 폭탄을 맞았고 이들의 '딱한
사정'을 언론은 대서특필했지만, 무더위에도 전기 요금을 아끼려고 에어컨을 켜지 않았고 심지어 그런 것조차 없이 여름을 보낸 많은 이들은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것은
뉴스가 아닌가. 더 나아가 그렇게 전기를 아껴서 대정전을 막는데 기여했으며, 또 온실 기체 배출을 저감하고
노후된
고리 1호기를 폐쇄시키겠다고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그들은 에어컨을 좀 켜고 살 줄 몰라서 그랬을까.
솔직히 어려운 문제다. 에어컨 이용이 인간답게 살 권리 속에 포함되는지, 에너지 복지를 위해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에도
요금 할인을 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 내 입장은 부정적이지만, 에너지 복지와
환경적 효과의 상충되는 첨예한 쟁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 선다면, 기후 변화를 막고 핵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가정용 요금을 포함하여 전기 요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나가야 한다는 녹색 전환
전략이 좌절하지 않을까 두렵다.
첫댓글 에어컨은 내가 시원해지자고이웃에 뜨거운바람을 불어넣는 이기적인 가전제품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