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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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환경과의 관계에 있어 풍수지리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나? |
인간이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는 환경이 인간의 생활을 결정한다는 환경결정론, 인간의 의지에 따라 선택과 이용이 다르다는 환경가능론, 인간 생활이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문화결정론, 인간과 자연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으므로 양자간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보는 생태학적 관점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우리 나라의 환경결정론적 사고로 대표되어지는 풍수지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상의 묘를 잘못 써 그 집안이 망했다.', '이사간 집터가 안 좋아 집안이 망했다.', '집터가 안 좋다, 묘자리가 안 좋다' 하는 말들을 우리 생활의 주변에서 많이 들어 오고 있다. 이런 말들은 우리 나라 전통적 지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풍수지리의 이해를 통해서만이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풍수지리'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풍수지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 대하여 논하여 보자.
풍수지리란 우리 민족 전통의 지리적 사고, 즉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아 생활철학 및 방식이 결정되어지는 환경결정론적인 사고로서의 경험철학을 말하며 보이지 않게 우리 생활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필자주) |
한민족에게 있어 산은 과거나 현재나 우리의 삶의 터전이다. 알맞은 평야와 낮은 구릉, 그 뒤로 펼쳐져 있는 높은 산, 그리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생활의 터전을 제공하였으며 우리의 심성 형성에도 작용하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이 뚜렷하여 춥고 더우며, 가물고 홍수가 지거나 비바람칠 때 산은 우리의 선조에게 생업의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또한, 동네 어귀에서 늘상 바라다 본 유순한 산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유순한 심성을 가져다 주었고, 거칠고 찌를 듯한 산세는 마을 사람들에게 급하고 과격한 기질을 갖게 하였다.
이렇게 산은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기에 산을 보고 마을 터를 잡거나 묘터를 잡고자 하였다. 신석기 시대로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여주 혼암리 유적을 보면 구릉지를 주위로 하여 화전을 일군 흔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과거의 사회가 농경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숲을 불질러 개간하는 화전의 개척이 항상 선행될 수 밖에 없었다.
개간이 이루어지면 길이 나고 도랑을 파게 되며, 밭을 일구게 되므로 화전의 개척 때문이라도 취락이나 묘터의 입지는 심사 숙고하여 선정되어야 하였다. 이렇게 우리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지와 산이 우리 선조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산에 대한 관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갔고, 그것이 체계화되어 마을과 묘지의 선정에 작용하는 풍수지리로 발전해 갔다.
풍수지리의 관념이 고대인의 산악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삼국유사'에 환인과 풍백 등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신단수를 정했다는 기록에서도 풍수의 기원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의 도읍이란 청동기나 철제를 독점한 종족이 후진적인 주위의 종족을 지배하기 위한 중심지였으므로, 특정 종족의 산악 숭배와 도읍 선정에 풍수지리가 작용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 후 철제 도구의 보급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종족적인 우위보다는 씨족간의 경쟁으로 사회가 변화하게 됨에 따라, 특정 씨족들이 거주한 향촌의 중심지를 선정하거나, 혹은 특정 씨족의 현조를 안장하는 묘지 선정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던 것 같다. 이 때가 대개 통일 신라 전후인 것 같다. 그 이전의 지석묘나 다양한 묘제의 왕릉도 산을 숭배한 것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정 종족의 산악 숭배는 산천 숭배의 하나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신의 종족으로 구성된 왕실의 안녕과 왕조의 안정을 기원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할 것 같으면, 신라는 제지를 마련하여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상당히 큰제사를 지낸 오악은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팔공산 등이었다. 조선조에서도 지리산, 삼각산, 송악산, 비백산 등을 악으로 정하여, 그리고 치악산, 계룡산, 죽령산, 우불산, 주흘산, 금성산, 목면산, 오관산, 우이산, 감악산, 의관령 등을 명산으로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신라의 오악(五岳)이 시대에 따라 변하여 왔는데, 조선 고종 때(1899년)는 금강산을 동악, 지리산을 남악, 삼각산을 중악, 묘향산을 서악, 백두산을 북악으로 정하여 천자로서 사전을 갖추어 제사지냈다.
왕조에서 산천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왕도를 선정하기도 하였지만, 특정 씨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풍수지리의 관념이 특정 부족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내용으로 발전하여 갔다고 본다. 다시 말해, 왕족이나 귀족을 중심으로 유행한 풍수지리의 관념이 향촌의 호족이나 사대부에게도 널리 수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조에 와서는 풍수지리가 사대부의 교양이 된 듯하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밑바닥에 흐르는 논리는 고대인의 자연과 사회에 대한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산을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로 간주해 보아 사람에게 기운이 있는 것과 같이 지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계절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살아가고자 한 우리 선조의 생활 태도와 소박한 철학이 풍수지리의 기본 논리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자 한 소박한 염원이 풍수지리에 배어 있고, 이는 '형국론'으로 표출되어 있다. 형국론은 중국의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것과 차이점이 많은 우리 풍수지리의 고유한 면이다. 이는 이른바 '형기론'으로 불리어지는데, '이기론'과 달리 자연 현상에 빗대어서 산을 해석하고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기론의 바탕이 된 음양오행설보다는 산을 직접 의인화하고 의물화하는 것보다 손쉽기 때문에 형기론이 먼저 성립되었고, 나중에 이기론으로 체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인의 자연관과 세계관이 중국에서는 이기론으로 더욱 발전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태산 준령보다는 자그만한 들을 낀 구릉지가 많기 때문에 형기론으로 발전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산에 지기가 있고 지기가 결집하는 곳이 있다고 우리 조상은 믿어왔다. 다시 말해, 한 그루의 나무가 씨앗에서 발아한 후 성장하여 꽃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지표상의 산맥과 산도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지기가 결집된 곳에 열매가 맺힌다고 하므로 이 열매가 맺히는 곳이 곧 혈이요, 명당이다. 대개 나무의 끝가지에 열매가 달리는 것처럼 산자락 끝에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산에나 지기가 응결되지 않고 주산(혹은 만두) 아래 열매가 맺힌다고 형기론자들은 생각하였다. 여기서 주산은 먼 조산으로부터 흘러온 것이고 조산은 또다시 더욱 먼 조산으로부터 흘러온 것이다. 여기서 조산이란 높이와 무관하게 산줄기가 많이 뻗어나간 산을 말하며, 먼 정도에 따라 태조산, 중조산, 소조산이라고 이름 붙이게 된다. 태조산에서 중조산으로, 중조산에서 소조산으로 산능선이 이어지게 되는데, 소조산에서 주산까지 기복과 희룡이 심하게 이루어지다가 주산에서 멈춘 다음 입수하여 화지에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다. 주산을 중심으로 하여 보면 수백 리 혹은 수천 리나 먼 곳에 있는 산들이 명당을 에워싸게 된다. 이 때 명당을 에워싸게 되는 모든 산들이 하늘의 별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특히 북두칠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 풍수 지리에서는 사방이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그 가운데를 작은 하천이 모여 흘러 나가고, 그 입구가 남쪽으로 터져있는 곳을 명당이라고 말한다. 한양이 그 좋은 예로서, 북악산을 주산으로하여 낙산, 응봉, 인왕산, 남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청계천과 한강이 그 사이를 흐르고, 그 안에 경복궁이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산의 지기가 맺힌 열매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태조산에서 소조산에 이르는 주령을 개괄하여야 하고, 그것은 분수령을 따라 이루어진 일정 범위 안의 하계망 전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국토 상의 산들을 능선에 따라 잇고 몇 개의 하계망으로 나누어 이를 '산경표'로 만들거나, '대동여지도'와 같은 지도로 제작하였다. '산경표'에 의하면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이어주는 백두대간이라는 줄기가 있고 그 중간 능이 황토령, 낭림산, 개연산, 분수산, 속리산, 태백산, 천금산, 장안치 등에서 장백정간, 청북정맥, 정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례성남정맥, 한북정맥, 한남금북정맥, 낙동정맥, 낙남정맥, 금남호남정맥 등이 각각 분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들 산경에 의하여 청북정맥과 청남정맥 사이에는 청천강이, 청남정맥과 해서정맥 사이에는 대동강이, 한북정맥과 한남금북정맥 사이에는 한강이,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 사이에는 금강이, 백두대간과 낙남정맥 사이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들 대간, 정간 및 정맥이 작은 문화권의 경계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줄기와 수계를 따라 산을 이해하려고 한 점은 풍수지리적인 사고와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태조산, 중조산, 소조산을 거쳐 주산 아래에 매달린 혈은 산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으므로 바람을 타지 않을 것이고, 계곡물은 여러 줄기가 합수하고 역류하지 않게 되므로 물이 잘 감아돌아 지기가 결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산을 풍수지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물을 또한 잘 알게 된다는 말이다. 장풍과 득수 득파의 논리가 풍수 지리의 핵심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장풍과 득수가 잘 이루어져 산이 열매를 맺게 되면 이는 당연히 하나의 형국으로 해석되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형국의 '형'은 만물이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체형'을 말하며 '국'은 산줄기와 수계로 이루어진 크기를 뜻한다.
즉, 형국은 자연계 속에 살아가는 만물의 생태가 반영된 산줄기와 수계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다. 도읍, 읍치소 등과 같은 양택의 경우는 국이 크므로 체형이 잘 짜여질 수 없고 해석도 어려워, 대신에 허한 기운을 보충해주는 비보와 나쁜 기운을 막는 염승을 하였다. 북한산을 주산으로 입지한 서울이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분지한 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과, 분수산에서 분지한 한북정맥간을 국으로 하는 것과 같이 우리 나라의 중요한 읍은 대간과 정맥을 중심으로 국이 형성되어 있다.
도읍과 달리 묘터는 국이 도읍과 고을에 비하여 작으므로 잘 짜여지게 되고 그 결과, 다양한 체형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체형에는 주로 날짐승, 들짐승, 사람, 물건 등이 등장한다. 날짐승에는 또 다시 봉, 학, 제비, 기러기, 꿩 등이, 들짐승에는 소, 말, 호랑이, 사자, 쥐 등이 있다. 사람에는 선인이 있으며 여자의 경우 옥녀라고 불렀다. 선인과 옥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건에는 등, 병, 의복 등을 가지고 비유하였다. 이들 이외에 용, 꽃, 물고기 등도 있을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이 단순히 산의 모습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자연 생태계에서의 생태와 의미에 부합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산수는 낮은 구릉, 완만한 사면 및 높은 배후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수백 가지의 형국을 상상해낼 수 있다. 그 중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 우리 민족의 전통적 풍수지리사상이 배어 있는 배산 임수 촌락의 입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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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하동 악양마을 |
전남 부안군 산서면 |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도(좌)와 실제 취락의 입지 사진(우). 배산임수(背山臨水), 혹은 배산면호(背山面湖)라고 하는 촌락의 입지는 북쪽으로는 겨울의 북서풍을 막고, 남쪽으로는 용수를 얻기 쉬운 곳으로 대륙성 기후에 잘 적응한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
◀ 산세의 형국과 형국의 모양새 ▶
형국 |
형국 해설 |
비봉형 |
봉제비가 둥우리를 친 형 |
연소형 |
둥우리를 찾아가는 형 |
복호면구형 |
호랑이가 졸고 있는 개를 노려보는 형 |
노서하전형 |
생쥐가 들판의 곳간에 내려오는 형 |
연화부수형 |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 |
갈마음수형 |
목마른 말이 물을 먹고 있는 형 |
옥녀무소형 |
옥녀가 선인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형 |
금계포란형 |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 |
장군출동형 |
장군이 출동하여 말을 타는 형 |
매화낙지형 |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형 |
금의낙지형 |
비단 옷을 땅에 벗어 던진 형 |
괘등형 |
등잔불이 달려 있는 형 |
복종형 |
종이 매달려 있는 형 |
비학산천형 |
학이 산천을 날아가고 있는 형 |
비룡망해형 |
용이 바다 위로 날아 가는 형 |
복부형 |
가마솥이 걸려 있는 형 |
모란반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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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반쯤 피어있는 형 |
생물의 생태와 사물의 의미에 걸맞게 주위의 산들이 짜여져 있을지라도 그 국의 크기, 짜임새의 정도, 물이 흐르는 방향 및 전안의 배열 등에 따라 명당은 여러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형국으로 갖추어지기란 쉽지 않다. 다시 말해, 생물의 형태나 무생물의 문화적 의미에 따라 형국이 결정되므로 형기론적 풍수지리는 소박하다 못해 자연스러움이 깃들여 있다고 하겠고, 탁월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을 일관된 논리로 해석하며 판별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일생을 두고 답산하여도 오판할 수 있다. 모란꽃이 활짝 피어 있는 형국, 이른바 모란만개형은 주산에서 화지에 이르는 용이 반듯해야 하고 화심에 혈처를 정한다. 전안으로는 구경해 주는 선인이나 모란꽃의 향내를 맡고 날아오는 나비 등에 해당되는 산이 앞에 배치되어 있어야 제일의 명당으로 꼽을 수 있다. 따라서, 형기 풍수론자의 입장에서는 체계적으로 풍수지리를 설명해 주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단지 생물계의 생태와 사물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즉, 자연계의 이치를 깨달아 그것을 산에 적용하는 것을 풍수지리라고 한다.
통일 신라 원성왕 2년(768년)에 명주군왕으로 봉직되어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김주원의 묘를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의 묘는 '모란꽃이 반쯤 피어있는 형'으로 유명하다. '강릉 김씨 대동보'에 의할 것 같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