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기봉 류복기(柳復起) 공과 기도유업(岐陶遺業)
세상에 이처럼 충성스러운 백성도 있었다. 임진란에는 부자(父子)와 형제(兄弟)분이, 정유재란에는 6부자분이 창의(倡義)하여 세계적인 기록을 남긴 훌륭한 조상의 업적을 임진란 7주갑을 맞아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를 통하여 세상에 알리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다. 공의 성은 류(柳)씨이며 휘는 복기(復起),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이다. 1555년 10월 23일 출생하여 1617년 3월 22일 별세하니 향년 63세이다. 1617년 2월 「예빈시정」 교지를 받았으나 곧 별세하였으며, 손자 지(?)의 관직이 높아져서 증 좌승지 교지가 내려왔고, 임진란에 안동에서 창의하여 많은 공을 세웠음으로 1892년 임진란 5주갑을 맞아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1. 한양에서 안동 수곡으로 낙남(落南) 류씨(柳氏)의 윗대는 실전하여 확실한 기록이 없다. 고려 충숙왕<14세기 초>때에 휘 습(濕)은 다섯 아들과 하나 사위가 모두 문과에 등과하여 「완산백 (完山伯)」 이라는 전주지방제후의 작위를 받고, 부인 전주최씨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라는 부녀자 최고의 작위를 받은 후로 이 어른을 시조로 하여 관향을 전주(또는 완산)로 하였다. 2세 휘 극서(克恕)는 고려국 보문각 직제학이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3세 휘 빈(濱)은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를 역임하였고, 태종 임금과 고려조에서 동방 진사를 했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헌하였다. 돌아가신 후 세종대왕께서는 임금의 예절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라는 어명을 내려, 관군을 동원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명당을 잡아 8각형 능(陵)을 조성하였다. 이 능을 종릉(鍾陵) 또는 류릉(柳陵)이라 부른다. 4세 휘 의손(義孫)은 세종 조에 남수문(南秀文), 권채(權採)와 더불어 집현전 삼 선생이라 칭하였다, 공은 왕명을 받아 계주교서(戒酒敎書)를 지었고, 무원록과 자치통감강목훈의 서문, 승정원제명기 풍월루기 등이 동뮨선에 실려있다. 가선대부 예조참판을 역임했다. 5세 휘 계동(季潼)은 증 도승지다. 이분이 공에게는 고조이며 증조는 휘가 식(軾)이니 홍문관 전한으로 증 참판이다. 이처럼 대대로 벼슬하면서 한양 묵사동<현 서울 충무로 필동 근처>에서 살았다. 조부 휘 윤선潤善은 관직이 통례원 인의(引儀)에 올랐으나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일찍 사임하고, 영주시 평은면 오천리로 낙향하여 영남(嶺南)에 터를 잡게 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성(城)?인데 인품이 훌륭하여 의성김씨 청계공(靑溪公)(휘 璡. 증 판서)의 사위가 되면서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터를 잡아 전주류씨수곡파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고, 증 사복시정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 휘 옥정(玉貞)으로, 25세에 남편을 잃고, 석새 베옷을 입고 매월 삭망에는 성묘를 가서 보선 한 켤레씩 묻으면서 가례를 국역하여 예절을 지키면서 빈소를 떠나지 않고 극진히 집상하여 삼년상을 마치고는, 음식을 끊고 향년 28세에 순절하니, 1635년 조정에서 정절(貞節)을 기려 정려(旌閭)하였다.
2. 불운했으나 훌륭하게 성장한 소년(少年) 공은 6세가 되던 1560년에 아버지를 여이고, 9세가 되던 해 정월에 어머니께서 순절하시니, 세살 아래인 동생 복립과 함께 고아가 되었다. 열 살도 되기 전인 어린 나이였음에도 집상을 하는데 진설이나 절차를 어머니로부터 배워서 항상 명심하여 틀리는 법이 없었으며, 집상하는 태도가 극진하여 보는 사람들이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감탄하면서 장차 큰 인물이 될 재목이라고 입을 모았다. 고아가 된 공은 홀로 계신 조모 박씨의 보호를 받으면서 어렵게 살았다. 이런 모습을 딱하게 여긴 외조부 청계공(휘 璡. 증 판서)께서는 외손자의 양육과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외가로 데려가서 네째 외숙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보호와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했다. 복기(호 기봉) 복립(호 묵계) 형제는 소꿉장난을 할 때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했다. 효경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 형제는 효도를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차차 많은 책을 읽고는 "나라애(임금님께)충성을 다하여 효도를 대신 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큰 효도는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는 일(立身揚名)이라'고 생각하고는 "반드시 성취하리라.!" 하니 듣는사람들은 놀라지 않는이가 없었다. 수업은 외숙부인 학봉에게 배우고 부지런히 수련하여 충의를 스스로의 목표로 삼았다. 남들이 음식을 먹으라고 주면 극구 사양하고 받아먹지 않았으며, 잠자리는 일정하게 하니 사람들이 기이하다고 했다. 기봉 행적기(岐峯行績記)에는 「외숙 학봉(鶴峰)께서 우리 형제를 어버이처럼 극진한 사랑으로 음식이나 의복을 챙겨 주셨으며, 사람의 도리에 대하여 강조하여 가르치고 이끌어 주셨다. “너희 형제는 처지가 남들과 달라서 수신(修身)하고 면학(勉學)하는 일에 조금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모든 행동에서 경솔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학문을 넓히지 못하면 후일 남들에게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계고(戒告) 해 주셨다. 내가 성인이 되어 수곡에서 살고 있을 때에도 신곡에 가셨다가 날이 저물고 일이 아무리 바쁠지라도 꼭 우리 집에 들어오시어 안부를 묻고 제사와 농사일이나 노복을 다루는 일에까지 올바르게 가르쳐 주셨다.」 라고 기록하였고, 이어서 「우리가 조금 문자를 알고 살림살이도 보수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외숙의 힘이요 덕이니, 평생에 잊을 수 없다.」 고 썼다. 이는 기봉공의 보은정신(報恩精神)을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공의 평생 행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3. 기봉공의 초행 이야기 19세 되던 해(1574)에 영덕 정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참봉 정진(鄭晉)의 사위가 되었다. 초행을 가는 중도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어떤 노파가 “신랑은 좋다마는” 하면서 지나갔다. 상객으로 가시던 학봉께서 이 말을 듣고 괴이한 느낌이 들어 그 노파를 불러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오?” 라고 다그쳐 물었더니 “그 신부는 눈멀고 벙어리로 몸이 온전치 못하답니다.” 하는지라 깜짝 놀라 ‘내가 부모 잃은 생질을 그토록 애지중지 키웠는데 이런 변고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드는지라 새신랑인 생질을 향하여 “안 되겠다. 되돌아가는 것이 옳겠다.” 라고 하면서 발길을 돌리려 했다. 이때 기봉공은 자신의 앞길을 좌우하는 중대하고도 긴박한 시점에서 외숙부 학봉의 옷깃을 붙잡고, “외숙부님! 의리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비록 눈멀고 벙어리이고 그보다 더한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그녀는 이미 하늘이 정해준 저의 배필입니다. 아직 혼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초행길이 중도에 왔으니, 이는 절반은 이루어진 혼인입니다. 지금 제가 돌아선다면 그 신부는 망문지과(望門之寡)<문짝만 바라보는 과부>가 될 것입니다. 또 들은바와 같다면 더욱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제가 장가를 아니 가면 그 신부를 이 세상에서 영영 버리는 것이니, 다음에 누가 그녀에게 장가들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 신부 댁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학봉은 생질의 이 같은 언행에 무언가 ‘어린 너의 생각이 깊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길로 신부 댁에 당도하여 초례(醮禮)를 치르기는 했으나 마음이 놓이질 않았는데 그날 밤에 신방을 차리고 신부가 방으로 들어오는 문 앞에 부채를 펼쳐 두었다. 신부는 고운 목소리로 “문 앞의 부채를 치워 주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공은 그때서야 안심이 되었다. ‘부채를 보았으니 소경은 아니고, 부채를 치워 달라는 말을 했으니 벙어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공은 신부를 향하여 공손한 어조로 “잠시 기다려 주시오.” 양해를 구하고는, 상객이 계신 방으로 가서,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안심하셔도 됩니다. 편히 쉬십시오.” 정중히 아뢰고 다시 신방으로 들었다. 그날 중도에서 만난 노파의 말은 확실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간혼(間婚)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정부인 정 씨께서는 아들 6 형제와 딸 3자매를 길러 성가 시키고 시조모 나주박씨를 12년 간 봉양하였으며, 임진란 창의로 기봉공과 묵계공께서 싸움터로 떠나시자 동서 완산있와 함께 가정을 지접 다스렸으며, 홀로된 시 숙모 안동 권 씨를 모셔 와서 시어머니 모시듯 했다. 손자가 16이오, 증손은 44, 현손은 94로 수곡 입향 후 당대에 뚜렷한 문호를 갖추었으니 위대한 업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기봉공의 인품을 말해주는 중요한 대목으로 청소년 약관으로서 초행길의 잠깐 사이에 전해준 망언을 듣고서도 혼례의 대절을 폐하는 일이 없이 인륜의 근본을 능히 바루었으니, 그의 도량이 크고 넓음과 올바름을 좇는 성실함이 젊은 선비로서 능히 이같이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용한 평상시와 다급한 시간에 갑자기 내달은 일에는 난이(難易)가 다른 것이다. 공은 천품이 빼어나고 신중하며 남을 배려하는 성품이 두텁고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인 특출한 분임을 알 수 있다.
4. 임란 때 안동에서 창의하여 크게 충성함 기봉공은 외삼촌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수학(修學)해서 문장과 덕행으로써 존경을 받았다. 꿋꿋한 기상과 굽힘 없는 절개가 있어서 일에 민첩하고 의(義)에 용기가 있었는데, 임진년 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는 가장 먼저 창의하였다. 그 당시 상황과 전과에 관련된 내용을 1592년 4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중요 사건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창의록(倡義錄)이 동국지도 한 철과 함께 수곡 종가에 보관되고 있었는데, 1986년 임하댐 건설로 세거지가 수몰되게 되자. 종가에 보관되고 있던 중요 자료와 서적을 전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하면서 우리 곁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문중의 구성원들도 각자의 살 길을 찾아 전국 각지로 흩어지는 불운을 당하였다. 다행히 2011년 창원에서 사업을 하던 종손 승우 씨가 창의록(倡義錄) 복사본을 가져오면서 그 내용을 국역하여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의병장기봉공의창의록<102x 21cm> 복사본 동국지도의 일부(一部)
4-1 기봉공의 임란창의록 국역 <원고량을 줄이기 위하여 원고에서 제외함> 4-2. 창의록에 나타난 기봉공의 중요활동 전쟁 초기 조선의 국방태세는 너무나 허술하였다. 4월 13일 부산진 첨사 정발과 4월 14일 동래부사 송상현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로 적병의 진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장렬하게 순국했다. 이후 대부분의 지방관은 정신을 잃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중앙 정부 역시 불과 보름 후에는 도성을 비우고 몽진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참된 선비들은 전투경험은 없으나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지키려는 충성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지 않았다. 유교정신의 바탕이 되는 덕목이 바로 가정에서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는 충효의 윤리를 추구하고, 이를 몸으로 실현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 아니던가? 나라가 위난(危難)을 당하면 생명도 버려야 한다.?見危授命?라는 선비정신이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기봉공은 1560년 안동 수곡에 입향(入鄕)하여 겨우 32년! 열 살도 되기 전에 조실부모하고, 단 하나 있던 동생 복립은 한양 큰댁으로 양자 가고, 일가친척도 없는 외로운 젊은 선비였지만, 충성심은 남달랐다. 1592년 6월 1일. 안동에서는 가장 먼저 떨쳐 일어나 외종제 김용(金涌)<1557~1560>과 진사 배용길(裵龍吉)<1556~1609> 세분 선비는 비장한 각오로 의병(義兵)을 일으키자고 뜻을 모았으며, 기장 나이가 많은 기봉공은 스스로 유사(有司)를 맡아 제반 일을 주선하고 추진하였다. 8월 5일 김성일의 초유문(招諭文)이 안동에 도착하자 즉시 향중의 선비들에게 여강서원에 모이도록 통문을 보냈으나 지정한 날에 공과 정조(鄭操) 두 분만 와서 기다렸고, 늦게 김윤명 김윤사 형제가 왔을 뿐이었다. 이날 새로 통문을 내어 임하 현 송정에 모이자고 했다. 9일. 송정에 모여 서로 더불어 맹세하였다. ‘임금님이 도성을 비우고 몽진(蒙塵)을 떠났고, 전국이 왜군의 비린 냄새나는 먼지로 오염 되었는데, 내 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하다 하겠는가?’ 다만 마을 어귀에 모인 군정(軍丁)을 모두 관청장부에 올리고, ‘아무런 전투경험도 없는 백면서생이 맨주먹으로 울분만 터뜨리면 어찌하겠느냐만,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패와 강약은 헤아릴 일이 아니다.’ 하고, 서로 더불어 서명하고 맹세하였다. 12일. 임하(臨河)에서 회맹하였다. 온 고을의 사우(士友)들 가운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이른 자가 백 수십 명이었다. 생원 김윤명을 추천하여 대장으로 삼고, 진사 배용길을 부장으로, 이형남을 정제장으로, 유사 류복기를 향군도감으로 삼았다. 18일. 안동향교에 모여서, 대장을 이정백(李庭栢)으로 바꾸고, 향교를 군진의 장소로 삼았다. 20일. 예안?의성?군위 사람들과 함께 회맹하였다. 일직 현에서 진영을 합쳐서 예안의 정자(正字)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삼고, 생원 이정백과 진사 배용길을 각각 좌우부장(左右副將)으로 삼고, 유학 류복기? 이형남을 정제장으로 삼아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이라고 부르고 안동을 본진으로 삼았다. ○ 당시에 적군은 북서쪽으로 진군하고 조령 이남에는 나머지 왜적이 30여 리마다 하나의 진지를 두었다. 함창의 당교<현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에 주둔한 적이 가장 강대하였지만 안동부와 예안부가 함락된 후에 의병이 일어났다는 통문을 듣고는 마침내 용궁과 예천의 경계까지 철수해 돌아갔으니 이후부터 안동 인근 고을에서는 불타고 노략질 당할 근심이 없게 되었다. 11월 5일. 순찰사가 김윤사와 류복기를 간병장(揀兵將)으로 임명하여 병사들 중에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우수한 정예병을 가려 뽑는 대단히 어려운 책임을 수행하였다. 같이 임명된 김윤사는 초기 안동의병대장 김윤명의 아우임을 미루어 볼 때 간병(揀兵)의 대상이 안동향병이었다고 사료된다. 안동향병의 작전계획은 복병과 기습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과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잠복하여 적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승산이 있을 때 기습 공격하는 유격(게릴라)전법으로, 많은 병력보다는 오히려 소수의 정병이 필요했고, 용감한 병사가 적군을 맞아 싸우는데 그중에 겁쟁이가 하나라도 끼어 있어서 도망을 친다면, 군사의 사기는 여지없이 떨어지게 되고, 그 전투는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 안동향병은 정예(精銳)의 군사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기봉 공에게 간병장의 책임을 맡겨서 정예의 군사를 가려 뽑도록 한 것이다. 기봉공은 인품과 지혜와 용기와 충성심과 덕망이 향중에서 인정받는 분이었기 때문에 정병을 가려 뽑는 일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별이 끝나고 나서 적의 진지가 있는 함창 당교와 비교적 가까운 예천 송구로 병력을 이동하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안동향병은 곧바로 작전을 시작하여 상주 반암에서 적군의 말 두 필을 쏘아서 빼앗는 첫 번째 전과를 올렸다. 안동향병의 가장 큰 전투는 계사(1593)년 설날이었다. 설날이었기에 적군도 경계가 느슨한 점을 복병이 엿보고 본진에 보고하였다. 그날 야간을 틈타서 적의 진영 가운데로 많은 병력이 돌진해 들어가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참살하고 그들의 창검을 빼앗았다. 연달아 진천뢰(震天雷)를 쏘니 적의 온 진영이 놀라 요동쳤으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통쾌하게도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에도 같은 방법으로 10여명의 적병을 참살했다. 이로부터 4월까지 8차례에 걸쳐 송구, 당교, 반암 등지에서 적군이 이동하는 길목에 정병을 매복시켜 적의 머리 20여 급을 베었고 적장 1 명을 사로잡고 수많은 적을 사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순찰사가 전과(戰果)를 조정에 보고할 때마다 조정으로부터 상훈을 받는 공문을 받았다. 전과를 올린 장병에게 사기를 높여주고, 더욱 분발하게 하였으니, 지휘관의 책무를 성실히 하였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안동향병의 평가는 순찰사의 계문(啓聞)에서 「안동향병은 적병의 머리를 베고 귀를 잘라 바친 보고가 연이어진 실적이 본도<경상좌도> 의병의 으뜸이 됩니다.」 라 하였으며, 안집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안동 향병은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등과 더불어 그 명성과 기세가 상응하여, 적군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장차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전국의 의병 중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경상우도의 곽재우, 김면 의병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이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권응수(權應銖)는 「안동에서 창의한 후에 조령이남 10여 고을의 왜군은 머리와 꼬리가 잘려나간 모습이 되어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향병의 힘이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안동 인근 고을의 백성은 안동향병의 덕분으로 노략질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전과이며, 흐뭇하고 높은 평가인가? 이때부터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가 진행 되면서, 기호지역에서 철수하여 조령을 넘어온 적이 당교에 있던 진지를 거두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바다 근처에 설치하니 하읍(下邑)에는 적군이 가득하여 죽이고 노략질하는 환란이 전쟁초기 보다 심해졌다. 안동향병은 그들을 추격하여 밀양까지 갔다가 경주로 이동하였다.
5. 슬픔이 겹쳐도 굽히지 않는 충성 기봉공은 열 살도 되기 전에 조실부모하고 외가에서 어버이를 대신하여 알뜰히 보살피고 교육시켜 주었던 외숙부 학봉 김성일 관찰사께서 진주성 사수에 앞장서서 각처 의병을 진주성으로 모이게 하여 직접 전투를 지휘하여 10월 5일부터 7일간의 혈전에서 통쾌하게 승전하여 마침내 진주대첩을 이룩하고, 연이은 격무로 피로가 쌓인 데다, 전염병을 얻어 전쟁터에서 1593년 4월 29일 향년 56 세로 순국하여, 지리산 기슭에 가매장 했다는 소식이야 말로 기봉공에게는 어버이를 잃은 것 보다 오히려 더한 슬픔이었다. 그해(1593) 5월 19일에는 안동열읍향병 김해(金垓) 대장께서 경주에서 전쟁 수행 중에 순국(殉國)하니 향병의 사기가 떨어져서 우왕좌왕 하는지라, 정제장 기봉공은 향병들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전과를 치하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안집사와 의논하여 안동향병의 해산을 합의하고, 그들을 무사히 귀가토록 조치하였다. 단 하나의 혈육인 아우 묵계(墨溪) 복립(復立) 공은 열한 살 되던 해(1568)에 큰댁(한성부윤공 종택) 당숙 지(?)의 양자가 되어 한양으로 갔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백씨 기봉의 말씀을 좇아 가족을 안동 수곡으로 옮기고 외숙부 학봉을 보좌하여 진주성으로 가서 사천과 고성을 되찾는데 공을 세웠으며, 1592년 10월에는 진주대첩의 큰 전공을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했으나, 1593년 6월에 왜군은 진주성 패전에 대한 보복을 결심하고 진주성 초토화 작전을 전개 하였다. 아군은 관찰사 김성일의 서거로 전력이 많이 약해졌으나, 우리나라의 곡창인 호남 공격의 교두보인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관찰사 학봉 공의 유언에 따라 측근 참모장이었던 류복립은 복수장 고종후, 창의장 김천일, 병마절도사 황진 등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10일간의 혈전 끝에 29일 중과부적으로 성이 무너지자, 36세의 청년 장수로 장렬하게 순국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와 같이 슬픔이 거듭되었지만 기봉공의 구국(救國)애민(愛民)하는 충성심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1596년 3월 3일에는 전국의 의병장 회맹을 도체찰사 류성룡과 체찰사 이원익이 주관하여 팔공산에서 모였는데 전국에서 70개 고을 485명이 참석했는데 기봉공은 아들 3형제(우잠, 득잠, 지잠)를 데리고 참석했다. 또 그해 9월 15일 팔공산 상암(八公山 上庵)에서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여러 고을 의병장(義兵將) 32인의 회맹(會盟)에 동참하여 다음과 같은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지어 결의를 다짐했다.
天以東方値否運 島夷敢擾小中華 하늘은 이 나라에 나쁜 운을 내렸는가? 섬 오랑캐 감히 우리나라를 어지럽히네. 誰能爲國干城將 掃盡三都一隊倭 누가 나라 위해 간성장 능히 되어 전국에 퍼져 있는 한 무리의 왜적을 모조리 소탕할까? 忍說鸞輿西路幸 爲人臣子復?時 임금님이 서쪽으로 간 것은 차마 말 못 하겠고, 신하된 자 일어나 복수할 때 되었구나. 枕戈蹈刃無窮恨 欲決江河一洗之 창을 베고 칼을 밟는 무궁한 분한(憤恨)으로 강물이 쓸어버리듯이 한 번에 씻어내리!
달성군지에는 56인의 명단이 있고, 차남 류득잠이 동참한 기록이 있다. 그 가운데 의병장 32인은 자기의 자(字)를 넣어 회맹원호자연구(會盟員呼字聯句)를 지은 기록물이 매와실기(梅窩實記)에 남아있다.
매와실기의 호자연구 달성군지
6. 정유재란에는 6부자분이 창의 1597년(丁酉) 1월. 일본은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제 2차 침략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기봉(岐峯)공은 안동향병도 해체가 되었고, 곽재우나 권응수처럼 벼슬을 받은 것도 없었지만, 스스로 향중에서 사사(死士)를 모집(募集)하였다. 그러나 향중의 선비들은 아무도 동참하려하지 않았다. 더구나 임진, 계사년에 함께 창의했던 동지들 역시 이 더운 날씨에 사지(死地)를 찾아가는 일에 솔선하여 나서지 않았고, 아무도 떨쳐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상 아무런 규제도 없는데다 임진 계사 양년에 참전한 일반 선비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기봉공 역시 참전을 안 한다 해도 별다른 규제는 없었지만 계사년(1593) 6월 29일 진주성이 초토화 될 때 최후까지 목숨을바쳐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아우 복립(호 묵계) 을 생각하면 내 한 몸 보존하려고 집에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장남(長男) 우잠(友潛)<23세>과, 차남(次男) 득잠(得潛)<20세>이 가겟다고 하자 삼부자분이 출발하려고 준비할 때 삼남(三男) 지잠(知潛)<15세>과 사남(四男) 수잠(守潛)<13세>, 오남(五男) 의잠(宜潛)<10세>이 떨쳐 일어나 함께 가겠다고 하니, 공은 어린 아들의 요구를 의(義)롭게 여기고 허락하였다. 청소년인 아들 5형제를 대동하고, 유월 염천에 사지(死地)를 향하여 400 리가 넘는 머나먼 길을 걸어서 화왕산성을 찾아갔다는 것은 오늘날 발달된 교통수단으로 만 리를 가는 것 보다 몇 십 갑절이나 많은 시간과 수백 갑절의 고통을 감내하는 성스러운 걸음걸음이 아니던가!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의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는 정유(1597)년 7월 21일자 입성 인물, 방어사 곽재우를 필두로 종사관, 조방장, 조전장, 장서기, 장무관, 등의 직책과 개인별 관직, 자, 생년, 출신지역 등이 기록된 47인의 명부가 있다. 이들을 출신 지역별로 분류하면, 의령 1, 연안 1, 현풍 1, 영산 2, 창령 6, 밀양 3. 해남 1, 영천 2, 경주 1, 서울 2, 진보 1, 영덕 1, 안동 7, 예안 1, 영일 1, 청주 1, 흥양 1, 초계 1, 거주지 미상 13 이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의병이 현직관료5인을 포함하여 47인이다. 그 중에 안동출신이 7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기봉공 6 부자 분을 빼면 타 지역과 다를 바 없다. 한 집에서 2 살짜리 막내아들만 남기고 6 부자분이 오직 국가를 위한 충성심 하나로 사지를 찾아 몇 며칠을 걸어서 참전한 것이다! 현대의 병역의무도 기피하는데 비교하여 보자. 이 얼마나 장한 기록인가! 진실로 하늘도 감동할 일이며, 세계역사(世界歷史)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참으로 보석(寶石)처럼 빛나는 업적인 것이다. 대구광역시 망우공원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는 임진란당시 활동했던 영남의병 315위의 위패가 봉안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특색 있는 점은 한 집안의 7 의사 위패가 모셔졌다는 것이다. 의사(義士)류복기(柳復起), 의사(義士)류복립(柳復立), 형제분과 기봉공의 아들 의사(義士)류우잠(柳友潛), 의사(義士)류득잠(柳得潛), 의사(義士) 류지잠(柳知潛), 의사(義士)류수잠(柳守潛), 의사(義士)류의잠(柳宜潛) 이 그 주인공이다. 공은 벼슬도 권력도 없는 시골선비로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충성심 하나로 여러 군(郡) 인사들의 맹수(盟首)가 되었으며, 청소년인 아들5형제를 동행한 것은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선비정신을 실천한 아주 특별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안동인 김충국은 거(居) 안동 솔금이라 기록되었으나 그런 마을을 찾을 수 없고 기봉공 보다 12세 연장이고 안동에서 동행을 했는지? 의문이다. 화왕입성동고록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봉안된 7의사의 위패[편집한 사진]
7. 굶주린 백성의 목숨을 구한 적선(積善) 왜란 이후에 흉년이 들어 이듬해 봄에는 굶주린 백성이 길에 가득한지라. 기봉 공은 넉넉지 못한 형편이면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다가 안 되면 함께 굶어 죽더라도, 우선 곡식을 있는 대로 내어 길가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끓여 그들의 생명을 구했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았다는 기록이 공의 행장에 남아있다. 공은 이처럼 적선을 하여 당대에 그 보답을 받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자손이 번창 하고 가문이 융성한 것은 공의 적덕에서 온 것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명심보감에도 적선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지 않았던가?
8. 권문 출입을 삼가고 조상 일에 힘씀 17C 초 영의정 춘호(春湖) 류영경(柳永慶)(1550-1608)은 집안 10촌 형님인데 기봉 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불렀으나 공은 권문(權門)에 출입하는 것은 영의정인 형님에게나 아우인 저에게도 온당치 못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마침내 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기봉 공의 처사는 정도(正道)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정도(正道)를 실행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선행(善行)인 것이다. 이를 들어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말하되 “류복기는 가히 심성(心性)을 논할 만하다.”고 하였고, 식암(息庵) 황섬(黃暹)은 안동부사로 갔을 때 부내(府內)의 현사(賢士)들을 추천하는데 첫째로 공의 이름을 말하고 “화살같이 바른 고사(高士)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식암 공께서는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기봉의 행적을」 임금님께 아뢰었고, 류 문충공, 김 문정공, 이 송와 공도 각기 아뢰었다. 인품을 내세워서 그 시대 사람들이 신망하였는데, 일찍이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자기 집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담대멸명(澹臺滅明) 에다 바로 비했으니, 옛적에 높은 관직에 계시던 분들이 어찌 엿본바가 없으면서 임금님께 그런 말을 하였겠는가? 아아 !! 중국의 한나라 때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말하기를 “선비란 의(義)를 바로잡고 이(利)를 꾀하지 아니하며, 도(道)를 밝히고,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기봉공이야말로 진정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선조(先祖) 직제학(휘 克恕)공의 산소가 예안부 죽송리 범바위<虎巖>에 있었는데 오래도록 실전(失傳) 되었으나 공께서 성심으로 탐문하여 찾아서 봉분을 수축하고, 영주의 종릉도 퇴폐된 것을 수축하는데 경향각지에 있는 종친들과 함께 상의하고 계획해서 구원(久遠)한 대책을 세웠으니, 이것이 모두 남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 장기간 전란이 있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족보가 없었고, 추석에 성묘하는 문화도 없었다.
9. 참다운 선비의 모습으로 일생을 마침 곤궁하고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벗어나서는 생활의 조용함을 노래하고 스스로 좋아하는 바에 따르며, 여가로 노복을 가르쳐서 농사를 지으며 세금 내고 제사를 받들며 빈객을 맞이하고 가정을 꾸려서 문호(門戶)를 세웠다. 집의 남쪽 언덕에 서실을 짓고 「기양서당(岐陽書堂)」이라 현판을 걸고 날로 그곳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후생을 가르치면서 은거해도, 출사하지 못한 것을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학문이 깊어지고 지조와 행실이 견고해졌으니, 공의 학습은 인륜을 바르게 함을 으뜸으로 하였고, 충신(忠信)에는 아무도 비교할 자가 없었다. 자신은 정(正)으로써 엄격하게 하고 타인에게는 용서로서 대하여, 순박한 덕행을 독실하게 실천함이 일상생활의 원칙으로 나타났다. 자아의 청백함은 먹물로 염색할 수 없고, 자아의 냉철함은 어떤 열기로도 가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궁벽한 시골의 계곡과 언덕을 그의 소박한 삶의 자리로 하여 그에서 즐거움을 찾고 만족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소위 ‘강자(剛者)’가 아닐까? 성인도 또한 강자(剛者)는 보지 못했다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공이 집에서 하던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자애롭고 어질며 조밀하고 신중하며, 너무나 둥글둥글해서 옷도 이기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그의 하고자 하는 바와 그의 하지 않고자 하는 바를 생각해 보면 실로 만(萬) 마리의 소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능히 움직일 만한 무서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천부(天賦)에서 얻은 힘이 굳세고 힘차며 모나고 곧은 기력이 있었으니, 이것이 또한 스승 학봉(鶴峯)의 심법(心法)에서 연원(淵源)한 것일까? 공이 세상을 하직하자 향중(鄕中)이 울고 도내(道內)가 울었으며, 산천도 슬픔을 금하지 못했다. 창의를 같이 했던 이형남은 “만장(輓章)을 쓰는데 먹물에 눈물이 반이나 섞였다.”고 슬퍼하며, 「우리 도내(道內) 착한 사람 그 누구냐? 묻는다면 시종일관 그대를 복종할 따름이다. 젊었을 때 유관(遊觀)에서 논교(論交)했고, 왕년에는 의병으로 생사를 같이하지 않았느냐?」하며 통곡했다. 서애(西厓) 류성룡 상국의 아들 류진(柳袗)은 「그대의 덕행은 박한 풍속을 돈독(敦篤)히 했고, 그대의 재능은 이상세계를 만들었지?」라 했다. 이외에도 눈물로 애도한 만사와 제문 수십 편이 「기봉일고」에 남아있다.
10.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친 공의 업적 맏아들 도헌(陶軒) 류우잠 공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말 타고 활쏘기로 단련(鍛鍊)하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거의(擧義)를 도모(圖謀)하며 시를 짓기를 時危無以報吾君 나라가 위급(危急)한데 보답(報答)할 길이 없어 學射從今?虎賁 무예(武藝)를 익혀서 호랑이처럼 날세다. 豈是書生元少膽 어찌 서생(書生)이라고 본래 담(膽)이 적을 소냐? 猶堪一箭靜胡氣 한바탕 싸워서 오랑캐의 요기(妖氣)를 잠재우리라. 하였다.
얼마 후에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는 이제 오랑캐가 되었구나!” 라고 탄식했다. 도헌은 병자호란의 피난민 중에 마을 서쪽 숲 속에서 산고(産苦)를 호소하는 부녀자를 집으로 데려와서 옥동자를 분만하여 산후조리를 잘 시켜 보냈는데 그의 남편 청풍 김씨는 수곡 류씨 불망서(不忘書)를 써 주고 간 이야기가 [가세영언]에 남아있다. 허기져서 쓰러진 스님에게 음식을 공급하여, 생명을 구하는 등 많은 적선을 하였으며, 안동 주민을 대표하여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향민의 부담을 가볍게 하였고, 영남 오현(五賢)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괭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문묘배향을 주창하는 상소를 할 때 영남유림의 소수(疏首)로 추대되어 대궐에 나아가서 이를 성사시켰다. 안동에서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할 때 편찬위원 10명중 1인으로 활동하는 등 안동선비 영수(領袖)의 위치에 있었다.
수곡 종택(宗宅)에는 기봉(岐峯)과 도헌(陶軒) 부자분의 충성심과 학문탐구와 적선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현명한 후손이 되자는 의미로 ?기도유업(岐陶遺業)?이란 액자를 걸었으며, 기양서당에 추원사(追遠祠)를 짖고 집현전 제학 회헌(휘 義孫) 선생과 기봉 선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춘추향사를 올린다. 기양 추원사 향사에는 어느 향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기양서계(岐陽誓戒)?라는 맹세의 글을 큰 소리로 읽어서 「우리 후손들은 조상의 빛나는 유훈을 본받을 것이며, 결코 조상을 욕되게 하는 못난 후손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절차가 있다.
기양 추원사 기도유업
이와 같이 기양서계를 통해서 맹세하고 또 맹세한 힘은 후손들의 행동으로 나타났으니, 빛나는 업적이 많지만 지면관계로 간단히 소개하면, (1) 무신 창의 : 공의 5대손 용와(?窩) 류승현(柳升鉉)은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창의(倡義)를 주도하여 17 고을이 참가하는 영남의병을 조직하였으며, 그 중심인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기록인 「무신창의록」이 남아있다. 영조께서는 역적 이인좌오 같은 남인이면서 난적(亂賊)을 토벌코자 영남의병을 창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재차 등용하였다. 관직이 공조참의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조참판으로 증직 되었으며, 불천위 교지를 내렸다.
(2) 을미의병 : 구한 말 안동의 을미(1895)의병은 공의 9대손 정재 류치명의 문인과 종친이 주축을 이루었다. 초대 권세연(權世淵), 2대 김도화(金道和)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문인과 문이의 자재 20여명, 그리고 60여 명의 종인이 참가했다. 을미 안동의소파록(을미안동의소파록)에는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46명의 간부 명단이 있는데, 류지호, 김흥락, 류필영, 류연박, 강황, 류정호, 김진각, 류회식, 류창식, 권옥연 등은 정재선생의 문인이며, 문중의 인물이 8명이나 배치되었다. 영양 의병장 김도현의 기록에는<< 당시 70 노령인 류지호, 김흥락, 류도발, 김도화 등 정재선새의 문인들이 안동의병을 일으키고, 조직했다.>>고 했다. (3) 특히 11대손 성남(星南) 류시연 장군은 을미 안동의병의 소모장과, 2차 김도화 대장을 도와 선봉장을 맡았다. 1906년 경주 분황사의 영남의병 지도자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삼남토벌대장인 친일파 박두일을 울진, 삼척 십이령에서 사살했다. 전 후기 17년간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 울진, 삼척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895년 ~1911년까지 17년간 전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충성스런 항일 의병활동을 펼쳤다. 이어서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李象龍), 김동삼(金東三), 안창호(安昌浩) 등과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2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몰래 귀국했다가 영주 반구 장터에서 체포되어 1914년 1월 29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의병활동은 KBS라디오 「국군의 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 의병대장 류시연」 이란 연속방송 프로그램으로 수개월간 방송되기도 했다. 장군이 활용했던 무기는 한들의 근암정 고물에 보관되었던 것을 1914년 일본 경찰이 우차로 실어갔다. 장군과 뜻을 같이했던 분들은 철저히 숨어서 활동했으며, 기록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인적사항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류덕영은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으는데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908년 1월 25일 총살되었으며, 류창호는 정찰업무를 맏았고, 교전중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복역했다. 류강호는 체포 후에 안동경찰서에서 자결하여 시신을 낙동강변에 버린 것을 자질들이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같이 일했던 류일흠은 잠적하여 김천 직지사에서 피신하고 광복 후에 도ㅓㄹ아왔다. (4) 내앞 협동(協東)학교 : 공의 12대손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최초의 고등학교인 협동학교를 1907년 임하면 내앞(川前里)에서 창설하여 수신, 국어, 한문, 영어, 수학, 과학, 역사, 지리, 체육, 음악, 미술 등. 신교육을 추진했다. 1910년 국권이 빼앗기자 학교는 문을 닫고 중심인물인 류인식, 이상룡, 김동삼, 김대락 등 100여 명은 만주로 망명하여, 왕족인 이회영의 협조를 얻어 만주군관학교를 세우고 만주독립군의 주축이 되었다. 동산 류인식 선생은 건강이 악화되어 귀향 후에도 한들로 옮긴 협동학교에 참가하면서 구국운동, 청년운동 노동 농민운동 신간회 등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한국근대사의 대표적인 선각자의 역할을 했다. 1928년 공의 서거후 장례식은 전국규모의 사회장으로 엄수되었다. 2002년에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공의 어록비가 세워졌으며, 2005년 공의 유해를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5) 한들 협동학교 : 폐교한 내앞의 협동학교를 부활하고자 정재 선생의 손자 류연박(柳淵博)은 『양파구려』를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사용하도록 무상 대여하고, 자신은 류연구(柳淵龜)와 함께 청송으로 이사하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인가! 내앞 협동학교에서 활동했던 류동태는 류연갑을 2대 교장으로 추대하고 1913년 한들(大坪里)에서 재차 개교하여, 5회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1919년 챗거리 3.1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강제 폐교되었다. (6) 챗거리(鞭巷) 만세 운동 : 1919년 3.1 운동 때 임동면 챗거리 장터 만세운동은 한들의 협동학교와 류씨 문중이 임동교회와 함께 사전에 계획하여, 각 동별 로 참가자 인원 동원 책임자를 뽑아서 많은 인원이 3월 21일 챗거리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펼쳤다. 임동 주재소 일본인 순사 우치다와 순사보 권태석이 막아섰으나, 이들을 제압하여 주재소의 무기를 모조리 우물에 처넣고, 챗거리 장터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각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는데 이튼날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참가자 수는 1000명을 넘었으며 대단히 조직적이고 격렬했다. 주동자 류연성은 징역 7년, 류교희, 류동수 등 5 인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류연성, 류동혁은 옥중에서도 만세를 여러차례 불러서 무수히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여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으며, 집행유예 이상이 모두 67명이나 된다. 이는 서울의 민족지도자 33인이 3년 이하의 징역언도를 받은데 비하면 그 형량이 대단히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7) 파리장서에 서명 : 직접 서명한 137명 중 안동 사람은 5명인데 그 중 2명 (류연박, 류필영)은 기봉공의 후손이다. (8) 6.10 만세 운동 주도 : 13대손 류면희는 중앙고보 학생으로 이선호, 임종엽 등과 종로 3가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배포하고 대규모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9) 해외에서 독립운동 : 단주(旦洲) 류림(柳林)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어 대한민국건국강령 및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눈물겨운 발자취와 우뚝한 업적을 남겼다. 그 외에도 류동범(柳東範)은 만주 독립군의 3의사로 크게 활동 중에 전사했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석주유고에 「류동범 장군 행장」을 남겼다.
삼의사의 비장한 최후 2009/ 4/ 30. 흑룡강신문 - 하얼빈) =
1924년 4월 7일 저녁 11시, 할빈시, 도외 18도가에서 조선독립당 성원 3명과 일본 경관대와 중국경찰대로 이루어진 적군 200여명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밤새껏 벌어져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력사에서 이 전투를 ‘삼의사사건’이라고 한다.
삼의사란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만수(金万秀), 류기동(柳基?), 최병호(崔炳?) 세 사람을 말한다. 그중 김만수는 한국에서 출판된 ‘국사대사전’에도 이름과 사적이 오르고 있다.
김만수(1894. 11. 5-1924. 4. 7)는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 출신이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김지섭, 김재봉, 김인섭 등과 같이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1913년에 중국 동북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는 남만주에 있는 독립혁명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政署, 1919년에 조직됨. 독판에 리상룡, 군사참모장에 김동삼)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4월에 항일단체인 참의부(??府)의 일원으로 임무를 맡고 할빈에 체류하였다.
류기동(1892-1924)은 안동군 입동면 수곡동 출신이다. 1917년에 중국 동북으로 망명하여 왔다. 1922년 화전현에서 서로군정서 헌병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월초, 화전현에서 자기의 가정과 이웃 10여 세대를 데리고 할빈에서 70리 떨어진 독립운동근거지로 개척한 취원창에 집단적으로 이주해왔다. 3월초, 취원창에서 교포들의 이주문제로 할빈에 출장 나왔다가 서로군정서에서 같이 일하던 김만수를 만났다.
최병호는 강원도출신이다. 일찍 서로군정서의 헌병조직에서 김만수, 류기동과 같이 활동하던 동지이다.
세 사람은 할빈시 도외구 18도가에 있는 중국인이 꾸리는 신기려관 2층에 투숙하고 있었다. 때마침 독립군과 애국지사를 전문 체포하는 일본인 특별형사 경찰부장 구니요시 세이호(?吉精保)를 위주로 하는 특별형사반이 대련에서 파견되어 와 며칠 전 할빈에서 북로군정서(길림성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총재에 서일, 총사령관에 김좌진)의 독립투사 2명을 체포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김만수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류기동, 최병호와 같이 일본형사반을 습격하기로 합의하고 려관에서 거사계획을 토론하고 있을 때 이들의 비밀이 일본 형사경찰에 탄로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밤잠이 폭 들 때인 11시경에 일본 특별형사반 경찰,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경찰과 중국경찰 200여명이 동원되어 신기려관을 첩첩이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의 세 용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응전하였다. 적들은 조선인통역을 내세워 투항하라고 고함을 지르며 권고하였으나 용사들은 복수의 사격으로 적의 두목인 특별형사부장 구니요시 세이호를 쏘아 죽였고 계속해서 일본형사 마쯔시마(松?) 등 10여명을 사살 했다. 세 용사는 완강하게 싸웠으나 적과의 력량대비가 너무도 현저했고 탄알까지 떨어진데다가 중국경찰이 던진 폭탄이 폭발하여 모두 전사하였다. 당년 김만수는 31세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조선에서 발행되는 ‘조선일보’ 1924년 4월 16일 신문에 ‘독립당원 할빈에서 비장한 최후를 고함’이란 제목으로 사건의 경과를 보도하였다. 할빈에서 발행되는 중국신문 ‘빈강시보(?江??)에도 이 사건이 보도되어 중국인들도 삼의사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애국자 세 용사의 시체는 중국인 공동묘지에 가장(假葬)하였다가 11일날 ‘할빈조선인회’에서 주최하고 각계 유지인사들이 참가하여 남강 극락사 동쪽에 있는 조선인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한국정부에서는 세 용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김만수에게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류기동, 최병호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한국 서울 강남구 역사동에 살고 있는 김만수의사의 손자 김홍재가 자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보고 할아버지를 안장해준 할빈 조선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려는 마음에서 몇 해 전 할빈에 오려고 련락이 있었으나 할빈시 도시건설로 그 공동묘지가 황산조선인 공동묘지로 옮겨갔으므로 삼의사의 묘지를 찾을수 없었다.
※ 류기동의 본명은 류동범(柳東範)이다. ※ 석주 이상룡(李象龍)은 이 사건의 주인공인 삼의사 전기문을 [三義士合傳]이란 제목으로 써서 [석주유고]에 남겼다. ※ 김만수(金万秀), 류기동(柳基?)은 안동 사람이며, 그 소속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政署 1919년에 조직됨. 독판에 리상룡, 군사참모장에 김동삼)는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서 협동학교를 운영하던 중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상실되면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친 단체이다. - 자료제공 ; 류중영 -
석농(石?) 류근(柳瑾)(1861-1921)은 1898년 남궁억 등과 대한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주필,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1905년 을사늑약 후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집필하다가 끝을 맺지 못하자, 그 후반부를 작성하여 실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대한황성신문은 폐간되었다. 1907년 복간되면서 공은 사장으로 취임하여 1910년 6월까지 대한제국의 언론인으로서 민족의식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에 노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초를 받기도 하였다. 휘문의숙의 숙장과 중앙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초?중등학생용 국사와 소학수신서 등 4종의 교과서를 저술하였으며, 역사, 지지, 신자전 등 4종의 공동저술을 하여 국민계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쏟은 교육자로서, 한국근대사의 큰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국훈장 단장 추서. 그의 아들 류연수(柳年秀)는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 만주 단동감옥에 수감되어 아버지의 임종도, 집상도 못했다. 대통령 표창 추서
독립유공 훈포장자 명부 - 전주류씨 류복기, 류복립 후손 -
나. 공적은 있으나 자료 미비로 미포상자 ? 62인 명단 - 전 후기의병 21 인 柳止鎬 柳淵永 柳淵覺 柳淵翊 柳淵七 柳璧鎬 柳孝淵 柳承洛 柳淵玉 柳晦植 柳憲鎬 柳廷鎬 柳璣鎬 柳康鎬 柳三鎬 柳淵楫, 柳丙鎬 柳淵龜 柳淵逑 柳德川 柳德永 - 협동학교 4 인 柳東泰 柳淵甲 柳周熙 柳鎭河, - 3?1운동 14 인 柳基萬 柳淵泰 柳宗稙 柳東馥 柳淵琦 柳致得 柳東蓍 柳淵和 柳敬欽 柳廣植 柳宜鎬 柳北實 柳谷蘭 柳昇鎬 - 파라장서 1 인 柳萬植 - 청년운동, 노동운동 사회 계몽 운동 12 인 柳東億 柳浚熙 柳東著 柳震杰 柳敎? 柳東英 柳基一 柳東瀷 柳基泰 柳基馥 柳俊熙 柳淵述, - 해외항일 5 인 柳廣鎬 柳東烈 柳淵德 柳萬熙 柳?羲 - 군자금 모금 3 인 柳湖福 柳樹澤 柳淵燐 - 참가분야가 불분명한사람 2인 柳根英 柳求學 ※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이 많아서 중복된 경우는 한 쪽에 넣었음. 합 계 94인
(11) 학문연구 : 무실 류씨 사는 마을엔 글 읽는 소리가 24시간 그치지 않았다. 가. 저술 ? 이학(理學), 역학(易學), 국사(國史), 주석학, 계호학, 실학, 예학, 인문사회학, 시문학 등을 적게는 3권에서 많게는 80권이 넘는 저술을 남긴 분이 130인으로 총 1,200여권이나 된다. <전주류씨 수곡파지 문헌총간(文獻叢刊)> 영남에서 으뜸가는 저술
기봉선조의 기양서당에서 출발한 학문하는 풍토는 가학(家學)을 통하여 학문 연구와 병행하여 많은 저술(著述) 활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이 저술한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考證)」은 퇴계선생의 저술을 독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참고서적으로 1998년 「退溪先生文集考證校補」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출판하였다.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이 저술한 「상변통고(常變通攷)」 대야(大?) 류건휴(柳健休)의 이학집변(異學集변) 19세기 영남학파의 종장 [ 정재 류치명의 삶과 생각] 동산 류인식의 동산문고는 국역하여 출판한 귀중한 문헌이다.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박사는 전주류씨수곡파지문헌총간 서문을 쓰면서 이르기를 “단 한 사람이 정착하여(1560) 불과 400년도 못되는 기간에 그의 자손 중에서 저술(문집)을 남긴 선비가 130인으로 저술의 양은 1,200여권이나 되니 이 많은 문헌들이 어찌 한 가문의 26촌 이내 사람들에 의하여 쓰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양적(量的)으로도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규모이고, 질적(質的)으로도 영남 퇴계학파가 이루어 낸 최고의 학문적 수준을 차지하였으니, 이런 훌륭한 가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수류지헌(水柳之獻) 전령지최(全嶺之最)<수류의 문헌은 영남에서 으뜸이다.> 라는 평가가 허언이 아니다.”고 감탄했다.
전주류씨수곡파지문헌총간
15. 저술의 중요 내용 가. 시문학(詩文學)작품 : 모든 문집에는 철학적인 정신을 담은 도학시(道學詩). 자연현상을 노래한 산수시(山水詩). 일상생활시(日常生活詩), 우국연민시(憂國憐民詩) 등 다양한 시(詩)가 수록되었다.
나. 이학(理學)에 관한 저술 : 류대시의 자양문집 주해. 류치명의 주자서 절요. 주절휘요. 류정문의 근사록집해증산. 류치구의 산와잡록. 천군실록. 류치엄의 성리진원. 인설집해. 사칠휘편. 류건휴의 이학집변 등이 있다.
다. 역학(易學)에 관한 탁월한 업적 : 류관현의 역도촬요. 류정원의 역해참고. 하락지요. 류휘문의 주역경전통편. 류형진의 독역관구. 류치덕의 독역췌언 등.
라. 예학(禮學)에 관한 탁월한 업적 : 류경휘의 가례집설. 류춘영의 예의상변 류도원의 사례편고. 류장원의 상변통고. 류병문의 대산상제례문답 류건휴의 상례비요의의. 류휘문의 가례고정, 관복고증, 사례작고, 의례보편 류치명의 가례집해. 예의총화. 류치덕의 전례고증. 류치엄의 가례집해홀기 류연구의 상변요해 등.
마. 국사(國史)와 학자에 관한 체계적 정리 : 류건휴의 국조고사. 류도원의 동헌집록. 류치익의 동헌통고. 류인식의 대동사. 대동시사
바. 경전에 대한 주석(註釋) : 류장원의 사서찬주증보. 사서소주고의. 류건휴의 동유사서해집평.
사. 퇴계학과 대산 이상정의 호학(湖學)을 크게 발전시킴 : 류건휴의 계호학적. 류도원의 퇴계선생의 문집고증. 류장원의 계훈유편. 호서유편. 류병문의 호서요훈. 류치명의 대산실기. 류치엄의 계훈집요. 호학집성.
아. 실학 및 인문사회학 : 류치덕의 임려문답 논문 20편
자. 기록문, 기행문 : 류지의 북토풍속기이(北土風俗記異). 반중기사, 동반회화록. 류경휘의 북행록, 칠보산유기, 낙산사유기. 류경시의 유금강산록 류승현의 북도풍토대략. 류휘문의 북유록 서유록 남유록 동유록 등. 류정문의 유금강록 등. 류치명의 관서유록, 지도풍토대략. 류치엄의 지도잡기, 유운문산기, 울릉도소문기 등.
배출한 인물
가. 불천위(不遷位) 5위 - 대 학자로서 영원토록 제사를 모시도록 교지가 내리거나 유림에서 추대하는 조상으로 우리 문중에 다섯 분이다. (百拙庵 柳 ?, ?窩 柳升鉉, 三山 柳正源, 好古窩 柳徽文, 定齋 柳致明)
나. 천사(薦仕) 6인 - 조정에 출사하는 길에는 가장 명예로운 길이 출중한 재주가 있는 큰 선비로 도 단위 지역 단체나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아서 뽑히는 천사(薦仕)이다. 우리 문중에는 여 섯 분이다. (蘆厓 柳道源, 柳星休, 壺谷 柳範休, 壽靜齋 柳鼎文, 好古窩 柳徽文, 東林 柳致고)
다. 대과 급제 13인 - 우리 문중에는 문과 10인 무과 3인의 급제가 있는데, 기봉 선조의 증손자 空空齋 柳廷輝께서 1652년 문과 급제를 시작으로 乖厓 柳 ?, 涵碧堂 柳敬時, ?窩 柳升鉉, 陽坡 柳觀鉉, 三山 柳正源, 柳之源, 定齋 柳致明, 孔庵 柳致好, 柳章鎬, 무과에는 柳致百, 柳星鎬, 柳 琓.
라. 증직(贈職) 20인 - 돌아가신 후에 본인의 업적을 인정받아 내린 벼슬과 자손의 벼슬이 높아져서 그의 부친이나 조부에게 내리는 벼슬. (柳城, 柳復起, 柳景潛, 柳希潛, 柳桓, 柳益輝, 柳啓輝, 柳相時, 柳錫龜, 柳仁文, 柳得休, 柳致億, 柳通源, 柳奎文, 柳致溫, 柳行時, 柳錫命, 柳景源, 柳華鎭, 柳道永,)
마. 음사(蔭仕) 37인 조상의 후광을 입어 관리로 등용된 벼슬. (柳?, 柳增輝, 柳鳳輝, 柳經輝, 柳穆文, 柳厚載, 柳必達, 柳謹時, 柳弘鎭, 柳致穆, 柳心鎬, 柳三鎬, 柳致潤, 柳肯鎬, 柳止鎬, 柳潤明, 柳晦時, 柳宜鎬, 柳厚源, 柳致福, 柳榮休, 柳淇源, 柳昌文, 柳翊時, 柳?德, 柳仲鎬, 柳應時, 柳奉源, 柳昌鎬, 柳駿文, 柳廷燧, 柳漸文, 柳翊欽, 柳仁鎬, 柳光宅, 柳宗烈, 柳聖欽,)
바. 목민심서에 우수사례가 실린 분 2인 (陽坡 柳觀鉉, 三山 柳正源)
사. 청백리(淸白吏) 2인 (涵碧堂 柳敬時. ?窩 柳升鉉,)
아. 생원 진사 33인 柳 ?, 柳 格, 柳振輝, 柳 ?, 柳啓輝, 柳昌時, 柳宗時, 柳慶輝, 柳憲時, 柳元鉉, 柳顯時, 柳晉鉉, 柳台齊, 柳正源, 柳元源, 柳道源, 柳長源, 柳星休, 柳川休, 柳約文, 柳廷燁, 柳範休, 柳龜休, ,柳韶休, 柳晦文, 柳覺文, 柳致球, 柳致敎, 柳致游, 柳淵博, 柳東杰, 柳元文, 柳命鉉 자. 정려 (旌閭) 5인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은 고결한 부인에게 내린 교지)
차. 안동좌수 16인 柳台齊, 柳道源, 柳浩源, 柳廷燁, 柳星休, 柳範休, 柳龜休, 柳致明, 柳致厚, 柳止鎬, 柳明休, 柳道文, 柳養源, 柳盛源, 柳弘源, 柳晉鉉, 카. 안동별감 23인 柳匡鉉, 柳宅鉉, 柳世澤, 柳斗齊, 柳奎齊, 柳時鉉, 柳顔齊, 柳必源, 柳逈源, 柳益休, 柳大源, 柳健休, 柳致喬, 柳漸文, 柳基鎬, 柳憲鎬, 柳淵學, 柳濟源, 柳致馨, 柳禎鎭, 柳致直, 柳受文, 柳師鉉 타. 독립유공 훈포장 32인 --(별표) 파. 자료미비로 훈장을 못 받은 유공자 62인 하. 문집(文集) 130인 거. 문행 (文行) 32인 너. 영남학맥(嶺南學脈)에 등재 : 6인 (三山 柳正源, 蘆厓 柳道源, 東巖 柳長源, 好古窩 柳徽文, 定齋 柳致明, 西坡 柳必永)
이와 같이 우뚝한 실적은 기봉 선조의 훌륭한 행적에서 발원(發源)한 것이며 현대에도 기도유업의 빛나는 정신은 계승되고 있다.
암행어사에게 꾸지람을 내린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定齋 柳致明(1777-1861 )이 초산부사 재직 시에 어사 심승택(沈承澤)이 초산 고을에 들어왔다. 온 고을이 놀라고 두려워했지만 정재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어사를 맞았다. 그런데 어사가 용무를 마치고 부사에게 인사를 하고 떠난 후에 이방(吏房)이 부사에게 달려와서 “영감! 큰일 났습니다. 어사를 따라온 추종자의 금품요구가 있습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보고를 받은 정재께서는 “그를 형틀에 묶으라.” 그리고 “어사가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이니, 모시고 오라.”고 명하였다. 산천초목도 벌벌 떤다는 어사의 관속(官屬)을 부사(府使)가 형틀에 잡아매는 것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 드는 일이다. 정재는 부당하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거침없이 시행 하신 것이다. 어사 심승택이 불려왔고, 부사는 어사와 함께 형틀에 묶인 추종자의 앞에 나란히 자리를 한 후에 이방의 보고내용에 대한 사실여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후에 추종자를 풀어주고는 어사를 관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어사의 행차는 고을 수령의 불법을 살펴 공직의 기강을 바르게 세워야 하지만 자신의 수족과 같은 추종자(상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야.” 라고 꾸지람을 내리셨다. 이에 어사 심승택은 솔직히 시인하고 “돌아가면 정치를 잘 하심을 포상하여 상달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영남학맥에는 장형을 치는 형벌을 가했다고 썼으나, 우리 문중 어른의 이야기에는 위의 내용과 비슷하고, 사리에도 맞는 것 같아서 영남학맥의 기사를 객관적인 자료로 제시하고, 문중 어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 하였음)
마치면서 하늘도 감동할 일이며, 세계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참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우뚝한 업적은 기봉공의 훌륭한 행적에서 발원한 것이다. 공의 정신을 계승한 후손들은 기도유업을 가훈으로 정하고, 기양서계를 통하여 맹세하고 또 맹세하였다. 그 결과 학문을 숭상하였고, 이웃을 사랑하여 적선하였으며, 국가가 위급할 때마다 창의하였고, 빼앗긴 국권회복을 위하여 목숨과 재산을 바쳐 구내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쳐 빛나느 사례와 우뚝한 공적을 이룩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우리 국민 모두가 본받아야할 '한국정신문화위 수도 안동'의 정체성을 확립할 대표적인 모범사례라 할 것이다. 이에 안동시는 천전의 안동독립운동기념관과 연계하여 임동면 수곡리에 '안동충의역사 체험공원'을 조성하여'도산서원'과 '태사묘' 그리고'한국국학진흥원'을 잇는 국민정신교육의 벨트를 만들고자 계획서를 만들어 정부에 예산을 요구했다. 정부와 국회는 기꺼이 예산을 확보하여'안동충의역사체험공원' 조성을 추진중에 있다. 후손들도 모금운동을 펼치니 전국의 뜻있는 분들 께서 호응하여 기금조성에 적극 동참하고있는 모습은 앞으로 우리 국민의 충의정신을 기르는 훌륭한 요람으로 가꾸어 질 것이라 기대된다. 나라사랑 이제 우리 차례다.
참고문헌 의병장 기봉 류 복기의 임란창의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보관 기봉 류 복기 선생 행장 - 黃昌漢 전주류씨대동보 ? 2004년 ? 전주류씨대종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안동 무실마을 -문헌의 향기로 남다.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의 독립운동사 ? 안동시(1999 ) 김희곤 기하수류 - 류희걸. 전주류씨 안동화수회 E-mail 검색
글쓴이 : 기봉 공 13대손 류 중영(柳仲榮) 주소 : 안동시 새골 2길 19-4 상일a 101동 602호 ☎ 070-8251-1558 HP 010-8588-1577 E-mail : rjy011@hanmail.net
** * 이 원고는 내 컴퓨터 [ D드라브의< 문서>]에 저장되었다. 사진과 각주를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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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reenfield 원문보기 글쓴이: 綠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