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이 다루는 주제는 ‘정의(dikaiosynē)’이다. ‘정의’ 또한 익히 3권과 4권에서 다뤘던 ‘품성의 탁월성’의 종류에 속해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조금 특수하다. 일단 형태적인 측면에서 통상적인 ‘품성의 탁월성’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품성의 탁월성’은 중간적인 품성 상태라 하여 ‘중용’이란 말로 표현된다. 이 말은 즉, 2가지 반대되는 극단적인 상태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두 가지 반대되는 극단적인 품성들 사이에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는 ‘부정의’라는 대립항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서 ‘자발적 행위’를 정의할 때 그러했던 것처럼, ‘정의’에 대한 개념적 정의 또한 ‘부정의’에 대한 개념적 정의로부터 끌어낸다.
논증의 출발은 ‘부정의한 사람’에 대한 경험적 실례다. “법을 어기는 사람,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사람, 공정하지 않은 사람은 ‘부정의한 사람’으로 보인다.” 따라서 법을 지키는 사람과 공정한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즉, 이러한 맥락 위에 존재하는 행위관념들이 ‘정의’이고 ‘부정의’인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정리된 ‘정의를’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분배적 정의’와 ‘형사적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정의’ 관념을 적용할 영역을 나름 규정한 것이다. ‘분배적 정의’는 재화들을 분배하는 과정속에서 공정성을 확립하는 기준으로 ‘정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고, ‘형사적 정의’는 ‘거래’로 정의되는 모든 상호행위들(판매, 구매, 대부, 보증, 대여, 공탁, 임대, 절도, 간통, 독살, 뚜쟁이질, 사기, 모반, 살인, 폭행, 감금, 강탈, 신체 절단, 명예훼손, 모욕)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정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넓게 봤을 때, 사회 속 소유나 분배, 지급 문제를 공정하게 판단하는 기준으로 ‘정의’란 관념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장에선 ‘교환적 정의’라는 새로운 관념의 ‘정의’가 또 등장한다. 이는 피타고라스학파가 “자신이 겪은 대로 되갚는 일이 무조건적으로 정의롭다”고 여겼던 것에 대한 반박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관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나쁜 것을 나쁜 것으로 갚으려고 하고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갚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교환이라는 행위가 성립되었다.”라고 말하면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은 ‘정의’에 관해서 정의한 것이 아니라 ‘교환’의 정의를 상술한 것이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5장 말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중용’ 이론에 관해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결론을 맺는다. “정의로운 사람은 분배할 때 선택할 만한 것을 자신에게는 더 많이 분배하고, 이웃에게는 더 적게 분배하며, 해로운 것은 그 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에 따라 동등한 것을 분배한다.” ‘정의’는 분명 양 극단의 중간자적 위치에 존재하는 ‘중용’은 아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이 실행하는 분배에 있어서 너무 많이 분배하거나 너무 적게 분배하는 것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중간자적 존재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중용’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다른 방식의 중용’이라고 주장한 바에 대해 그것이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5권의 요약을 마무리한다.
<의견>
뭔가 어려운 내용이었다. ‘정의’를 정의하는 방법과 결론이 이상했던 데다가, 요약한 내용들도 뭔가 뭉뚱그려져 있고, 저자가 자기만 이해하고 대충 생략한 채 외적인 다른 이야기들만 많이 늘어놓아서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예전에 난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논증들을 늘어놓고 있는지, 그 저변의 그가 인식한 세계가 궁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도대체 모르겠다. ‘정의’를 무엇하러 이렇게 복잡하게 정의했는지 의문이다. 탁월한 품성의 범주에 ‘정의’를 반드시 끼워 넣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까? 솔직히 지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와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정의’가 같은지 다른지도 모르겠다.
실질 오늘날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옳은 것’이다. “내가 정의다.”라거나 “힘 있는 자의 논리가 정의다.”라거나 “정의의 사도” 따위가 함의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이 난 이후로, 인류는 그러한 풍조 속에 익숙하게 녹아들었다. 이젠 서로가 제시하는 정의가 제각각이라 각종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접하고도 별로 놀라거나 그러진 않는다. 소피스트적인 접근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미국이 정의라는 주장이 그러하고, 과학이 정의라는 주장이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째서 저리도 복잡스런 정의로 정의를 정의하려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 시도 자체가 어이없는 이유에 기인하진 않을 것이다. 꾸준히 있어 왔던 철학자들의 시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