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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젊은 시절,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이 기억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과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깊은 감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내게 수도회에서 좋은 배움의 기회를 주셨으니, 어서 빨리 돌아가서 이 좋으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 특별하고 대단한 성인 돈보스코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열정으로 마구 솟구쳤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마카오에서의 길고 긴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러나 저와는 달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던 고국 땅 조선의 상황은 암담하고 살벌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었기에, 입국 과정은 철저하게도 은밀했습니다. 입국 과정은 소설 몇 권을 써도 남을 정도로 처절하고 위험했습니다.
육로가 꽉 막혀있으니 바닷길을 선택하고, 조각배에 몸을 싣고 건너오다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조선 땅을 밟았지만, 언제나 사람 눈을 피해 산길로, 밤길을 쉼 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숙박을 청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노숙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끼니를 자주 건너뛰니 건강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건강한 장정도 견뎌내지 못할 여행길에 온몸은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피 흘리는 순교 이전에 이미 땀과 일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활활 한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적색 순교자들로 흘러 넘치고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백색 순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박해 시대가 지나가면서 순교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순교의 의미, 순교의 개념이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흘림 없는 순교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피흘림 없는 순교를 영적 순교, 백색 순교라고 불렀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의지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간 수도자들, 고행자들,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증거•증언하는 사람들까지 백색 순교자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종교 자유 이후 많은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순례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백색 순교로 여겼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 역시 순교입니다.”
백색 순교에 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각자 삶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증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비록 피를 흘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사람이 되며, 백색 순교자로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능력이 없다는 말은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핑계다
인간이 하느님을 도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분명 인간이 당신을 도울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게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성경에서 다윗은 작은 목동에 불과했으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골리앗 같은 거인을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다윗은 자신의 작은 물매와 돌로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이 이야기는 외형적인 강함이나 능력보다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 주며, 작고 연약해 보이는 존재가 큰일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잔 다르크는 농촌 출신의 평범한 소녀로, 군사적 훈련이나 정치적 권력이 전혀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프랑스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랑은 마중물과 같습니다. 마중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샘이 있습니다. 그 샘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려면 그에 맞는 사랑만 조금 집어넣으면 됩니다. 인간은 무한한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해 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우리를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 안에 ‘망상활동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 가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활동계는 뇌간에 있는 신경 네트워크로, 뇌와 신체 사이의 경계를 조절하고 의식, 주의력,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적으로, RAS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행장에서 쇼핑에 정신이 팔려 시계를 보니 이미 비행기 이륙시간이 지났습니다. 좌석을 배정받고 짐을 부쳤기 때문에 자기 없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주위는 자기 이름이 호명되는지에 집중됩니다.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고 이미 20분 전부터 방송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왜 그전에는 듣지 못했을까요? 망상활동계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오스카 쉰들러가 어떻게 1,100명이나 되는 유태인을 구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발동하자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중엔 자동차와 나치 금배지를 팔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 정도까지의 의지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이게 됩니다. 줄 것이 없었다면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 보다는 ‘오늘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지?’라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정해지기만 하면 능력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의지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는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위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오늘의 참된 순교 정신이란 나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랫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중에 많은 분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당하고 돌아가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짐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나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 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괜히 미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 ‘나’를 함부로 한다는 생각 등으로 미워집니다. 다시 생각하면 제게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그냥 밉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 그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멀리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좋지는 않지만, 멀리하지 않는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원망과 미움이 애정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미움이란 감정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아마 모든 사람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봉사자들의 고충을 종종 듣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하소연하시고 그래서 더 이상 봉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심리적 안녕감, 만족감, 행복감 하물며 엔도르핀이 세 배 이상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타인을 돕는 행위라고 합니다. 봉사 과정에서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도 생길 수 있지만, 봉사에 집중한다면 그런 부정적 감정을 넘어서는 큰 선물을 주님께 받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대로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삶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는 1791년의 신해 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일 만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박해자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미움의 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있었고, 구원의 선물까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사랑에 우리 역시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고, 원수를 만들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것처럼, 우리의 십자가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과거 순교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포기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알렉스 퍼거슨).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삶도 헛되다네.
살아가는 동안
금방 죽을 것만 같은
불안과 고통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그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과 용기로
다시 일어서서
부활하고
또 부활해야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순교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순교자들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를
묻게됩니다.
세상의 삶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십자가의 정체성으로
순교의 꽃을
가득 피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신앙의 새아침을
열었습니다.
순교로 우리의
신앙을 아름답게
지켜 주셨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삶의 의미를
십자가에서 찾은
사랑의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희망의 씨를 이 땅에
뿌리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삶의 의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뼛속 깊이
뼈가 부서져도
신앙을 고백한
이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통해
참된 삶의 의미를
되찾는 시간되십시오.
순교는 인내를 다시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삶이란 십자가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입니다.
기쁜 순교자 대축일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3ㄷ)
'예수님의 협조자들!'
오늘 복음(루카8,1-3)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라는 말씀입니다.
9월20일인 오늘은 본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곧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는 대축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 큰 대축일을 9.22(주일)로 경축 이동하여 거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합천본당은 이 큰 대축일을 9.22(주일)로 경축 이동하여 기념하고, 오늘은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미사'로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바쁘셨던 분이십니다.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악령과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낫게 하시느라 참으로 바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협조자들이 바로 '열두 제자들'이며, 오늘 복음에서 전해지고 있는 '여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의 활동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여자가 바로 일곱 마귀가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십자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에 큰 협조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15,17)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성실한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성실한 협조자'가 되어봅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2-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