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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년(1725 영조1)에 내가 적소(謫所)에 있다가 조정으로 돌아와서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때 성상께서는 경연에서 막 《논어》를 강론하였다.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의 일에 이르자, 내가 아뢰기를,
“장저와 걸닉은 진실로 고사(高士)들이나, 은둔하고 돌아오지 않아서 군신간의 인륜을 폐하고 끊었으니 끝내 이단(異端)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합니다. 오직 공자(孔子)만이 때가 도(道)를 행할 만하면 행하고 그칠 만하면 그치시어 더없이 합당하고 지극히 공정하셔서 만세의 법이 되십니다.” 라고 하니, 성상이 말씀하기를,
“장저와 걸닉은 현인인데, 어찌 이단이라고 배척한단 말인가. 연신(筵臣)의 말이 잘못되었다.” 라고 하셨다. 내가 아뢰기를,
“이른바 이단이란 것은 흉악하고 간사한 소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인품이 유속(流俗)에서 우뚝이 빼어나다 하더라도 만약 그의 행한 바가 성인의 도에 위배되면 자연히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여 이단이라 하셨는데, 양주와 묵적은 바로 인(仁)과 의(義)를 배우다가 잘못된 자들이니, 이들의 인품이 어찌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들이 배운 바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배척하셨으니, 이단이라는 칭호가 원래 나쁜 칭호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으나, 성상은 여전히 내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다.
이때 한 옥당관(玉堂官)이 나아가 아뢰기를,
“공자와 장저ㆍ걸닉은 모두 착(鑿.어질다는 뜻의 방언)한 사람입니다. 결코 우열과 시비를 말할 수가 없으니,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라고 하였다.
성상이 마침내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옥당관의 말이 매우 옳다.” 라고 하셨다.
다른 날에 또 들어가서 모셨는데, 성상께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의 잘못을 많이 지적하시므로, 내가 강력히 그렇지 않음을 분별하고 또 아뢰기를,
“주자가 《집주》를 지으실 적에 일생(一生)의 마음과 힘을 다 쓰셔서 재량(裁量)과 취사(取捨)에 있어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하였습니다. 한 글자, 한 구(句)가 모두 의의(意義)가 있으니, 옮기거나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성상께서 《논어혹문(論語或問)》을 보신다면 주자의 주설(註說)이 십분 적당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한 옥당관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잘못 아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자가 일찍이 《대학혹문(大學或問)》은 지었어도 《논어혹문》은 지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옥당관은 필시 아직 《논어혹문》을 보지 못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갑자기 다른 말을 하였기 때문에 내 말을 마치지 못하였다.
내가 조정에서 물러 나와서 아무개에게 이것을 이야기해 주고 웃으면서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이 《논어》에 혹문(或問)이 있는 것은 전혀 모르면서 유독 《대학》에 혹문이 있음을 아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라고 하니, 아무개가 말하기를,
“공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십니까? 근래에 감시(監試)의 종장(終塲) 공부를 준비하는 유생(儒生)들이 문자를 수집하기 위하여 《대학혹문》을 많이 보고, 《논어혹문》은 과거 공부에 긴요하지 않다 하여 버리고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논어혹문》은 모르고 《대학혹문》이 있는 것만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옳다. 참으로 옳다.” 라고 하였다.
두 옥당관의 말이 참으로 서로 딱 들어맞는 대구(對句)이니, 한가로운 가운데 심심파적의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이것을 기록한다.
● 《맹자》의 ‘문문왕작흥(聞文王作興)’을 언해(諺解)에서는 ‘작흥(作興)’에서 구를 떼었으나, 이는 옳지 않은 듯하다. 《집주》를 상고해보면 “‘작(作)’과 ‘흥(興)’은 모두 ‘기(起)’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작흥(作興)’을 한 구로 삼았다면 의당 “‘작흥’은 ‘기(起)’이다.”라고만 해야 하고 ‘개(皆)’ 자를 놓아서는 안 되는데 지금 ‘개기(皆起)’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작(作)’에 구를 떼어서 이를 ‘문왕(文王)’에 붙이고 ‘흥(興)’을 구로 삼아서 백이(伯夷)에 속하게 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 언해를 정할 때에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중국본 《맹자》는 모두 ‘작(作)’ 자 아래에 작은 권점을 찍었으니, 마땅히 ‘작(作)’에서 구를 떼어야 함을 더욱 알 수 있다.
《시경》 〈생민(生民)〉의 ‘이제무민흠유개유지(履帝武敏歆攸介攸止)’를 언해에서는 ‘민(敏)’에서 구를 떼고 ‘흠(歆)’을 아래의 구에 붙였으나, 중국본에는 ‘흠(歆)’ 자 아래에 권점을 붙였으니, 이것 또한 마땅히 중국본을 따라야 할 듯하다.
● 요(堯)ㆍ순(舜), 우(禹)ㆍ탕(湯)과 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은 지위를 얻으셨고 공자와 맹자는 지위를 얻지 못하셨으니, 당(唐.堯)ㆍ우(虞.舜)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의 정사는 《서경》의 여러 편에서 상고할 수 있고, 공자와 맹자의 큰 경륜(經綸)은 〈애공문정장(哀公問政章)〉, 〈경계장(經界章)〉과 〈반록장(班祿章)〉 등에서 모두 상상해 볼 수 있다.
● 주자께서 《대학》의 〈보망(補亡)〉 장을 지었는데, 이 장의 문장은 순전히 송(宋)나라 당시의 문체여서 상고 시대의 문장과는 똑같지 않으니, 이는 문장이 후대로 내려옴에 비록 주자 같은 아성(亞聖)도 억지로 노력하여 이루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고문(古文)을 모방하여 쓰고자 한다면 이 또한 진실한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보면, 후인(後人)들이 억지로 곁가지의 말을 긁어모아서 고문을 모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병이 없으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신음하는 결과가 되니, 식자(識者)들이 취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시경》 삼백 편은 모두 사람의 성정(性情)을 모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정(正)은 온화하고 느슨하며 변(變)은 격렬하고 강개하여 마음이 북받치는 감발(感發)의 단서가 있지 않음이 없는데, 변 중에도 〈절남산(節南山)〉ㆍ〈정월(正月)〉ㆍ〈시월지교(十月之交)〉 등의 편에 이르러는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에 분개하는 마음이 반복되고 가슴에 이리저리 맺혀 있어 글 뜻의 비통함이 다른 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이 시들을 읽을 적마다 일찍이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 《시경》이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다.
● 상고 시대에는 형벌과 옥사를 가장 신중하게 처리하였으니, 예컨대 《서경》 〈순전(舜典)〉의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惟刑之恤〕’라는 것과 〈강고(康誥)〉의 ‘능히 덕(德)을 밝히고 형벌을 삼가셨다.〔克明德愼罰〕’라는 것과 ‘너의 형벌을 공경히 밝혀라.〔敬明乃罰〕’라는 것과 〈주고(酒誥)〉의 ‘죽이지 말고 너는 우선 가르쳐라.〔勿用殺, 姑惟敎之.〕’라는 것과 〈소고(召誥)〉의 ‘법이 아닌 것을 지나치게 쓴다고 하여, 또한 진륙(殄戮)을 과감하게 결단해서 다스리지 마소서.〔勿以淫用非彝, 亦敢殄戮用乂.〕’라는 것과 〈다방(多方)〉의 ‘죄가 없는 자를 열어 석방함도 또한 능히 권면하는 것이다.〔開釋無辜, 亦克用勸.〕’라는 것과 〈입정(立政)〉의 ‘여러 옥사와 여러 신중히 할 형벌을 그르치지 마십시오.〔勿誤于庶獄庶愼〕’라는 것과 〈군진(君陳)〉의 ‘형벌하여 형벌을 그칠 수 있어야 이에 형벌하라.〔辟以止辟, 乃辟.〕’라는 것과, 그리고 〈여형(呂刑)〉 한 편은 모두 간곡하게 형벌을 조심하고 법을 삼가는 것을 가지고 훈계를 남긴 것이다.
형정(刑政)은 나라를 소유한 자가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한번 이것을 잘못하면 혼란과 멸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후세에는 그렇지 않아서 대부분 군주가 한때의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감정으로 형정을 사용하여 사람의 목숨을 마치 풀과 골풀을 베듯 가볍게 여기니, 옛날의 ‘떳떳한 형벌로 보여준다.〔象以典刑〕’라는 뜻에 비하면 어떠한가. 참으로 서글프다.
● 《주역(周易)》이란 책은 오로지 양(陽)을 추켜세우고 음(陰)을 억누르는 것을 강령(綱領)으로 삼았다. 용(龍)은 지극한 양의 정기가 되니, 건괘(乾卦)에 맨 먼저 용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뒤의 여러 괘는 비록 모두 용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큰 뜻은 똑같으니, 어느 괘도 건괘 범위의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 《예기(禮記)》의 문장은 매우 빈틈이 없고 명백하지만 간혹 알기 어려운 구법(句法)이 있는데, 진호(陳澔)의 주(註)가 소략한 흠이 많으니, 탄식할 만하다. 내가 젊었을 적에 이 책을 읽지 못했었는데 계묘년(1723, 경종3)과 갑진년(1724) 사이에 적소에 있으면서 처음 읽어보고 몹시 기뻐하였으며 일찍 공부하지 않은 것을 깊이 한하였다.
● 《춘추(春秋)》는 성인(聖人)이 혼란을 다스려서 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책이다. 은공(隱公)에서 시작하였으니, 은공 원년은 바로 주(周)나라 평왕(平王) 49년(B.C.722)이다. 평왕이 동쪽으로 천도하여 정권을 잃은 뒤에 혼란이 여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시작을 삼았으니, 성인의 뜻이 깊다.
그 뒤에 주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을 편수할 때에도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B.C.403)에서 시작하였으니, 이는 삼진(三晉)이 강성해져서 이 일이 곧 왕실(王室)이 점점 미약해지는 단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왕(平王)이 중자(仲子)에게 봉(賵)을 보낸 것과, 위열왕이 조씨(趙氏)ㆍ위씨(魏氏)ㆍ한씨(韓氏)를 명하여 제후로 삼은 것은, 그 정사를 잘못한 것이 흡사하다. 그러므로 모두 이것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니, 성인의 필법(筆法)이 전후가 똑같은 것이다.
● 공자께서 《춘추》를 다 지으시자, 공양고(公羊高)와 곡량숙(穀梁俶)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좌구명(左丘明)이 그 일을 기재하였다. 《공양전》과 《곡량전》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가장 앞서서 나와 제일 먼저 《춘추》를 드러내었는데 반해, 《좌씨전》은 뒤에 나와서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다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후로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좌씨전》을 숭상하는 바람에 《공양전》과 《곡량전》은 미약해지고 드러나지 못하더니 지금은 더욱 《공양전》과 《곡량전》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공양전》과 《곡량전》이 비록 혹 성인의 본래 뜻에 위배되는 것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문자가 간략하고 심오하며 의리가 순정(純正)하여 《좌씨전》의 허탄하고 과장됨에 결코 견줄 바가 아닌데도, 온 세상이 《좌씨전》을 높이고 《공양전》과 《곡양전》을 버리니, 이 또한 후세의 화려함을 숭상하고 실제를 힘쓰지 않는 병통일 것이다.
● 영봉인(穎封人)이 고기를 먹지 않고 대답한 것은 짧은 말에 불과하지만 완곡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충분히 군주를 감동시켜 깨닫게 하였고, 후대의 위징(魏徵)의 헌릉(獻陵)의 대답은 이것을 모방하였으나 말이 자못 모가 드러나 있으니, 시대에 따른 인품을 분명히 볼 수 있다.
● 춘추 시대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고 간언(諫言)하고 진언(進言)한 말들은,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대체로 도리에 근거하고 실제가 없는 빈말이 아니며 분명하게 조리가 있어서 읽어보면 기뻐할 만하니, 성주(成周)의 문(文)을 숭상했던 정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이르면 그 말들이 괴이하고 허탄하고 교묘히 속이며, 남을 기만함으로써 이기기를 힘썼다. 전국 시대가 춘추 시대와 시기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데도 습속(習俗)의 변천이 마침내 여기에 이른 것은, 주(周)나라 왕실이 장차 멸망하려 함에 문(文)이 도리어 폐해를 낳아서 형세가 자연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개탄스러울 만하다.
● 《주례(周禮)》에 〈동관(冬官)〉이 빠져 있었는데, 한(漢)나라가 건국되자 천금(千金)의 현상금을 내걸고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지금 보충된 〈고공기(考工記)〉는 한나라 유자(儒者)들이 지은 것인데, 그 문장은 사람을 고무(鼓舞)시켜서 글을 읽다보면 정신이 왕성해짐을 느끼게 된다. 대저 고문(古文)은 법도(法度)가 없는 듯하면서도 절로 법도에 맞아서 도끼질과 저울질한 흔적이 없으니, 후세에서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이 훌륭하긴 하지만 문장을 얽어내고 안배(安排)한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으니, 이는 시대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 십삼경(十三經)은 첫 번째가 《주례(周禮)》이니 한(漢)나라 정현(鄭玄)이 주(註)하였고, 두 번째가 《주역(周易)》이니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하였고, 세 번째가 《모시(毛詩)》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네 번째가 《상서(尙書)》이니 한나라 공안국(孔安國)이 주하였고, 다섯 번째가 《논어》이니 위나라 하안(何晏)이 주하였고, 여섯 번째가 《맹자》이니 한나라 조기(趙岐)가 주하였고, 일곱 번째가 《춘추좌전(春秋左傳)》이니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주하였고, 여덟 번째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니 한나라 하휴(何休)가 주하였고, 아홉 번째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니 진(晉)나라 범녕(范寗)이 주하였고, 열 번째가 《예기(禮記)》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열한 번째가 《의례(儀禮)》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열두 번째가 《이아(爾雅)》이니 진나라 곽박(郭璞)이 주하였고, 열세 번째가 《효경(孝經)》이니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주하였다.
주자(朱子)가 전주(傳註)를 지은 뒤로 여러 학설이 모두 폐기되었는데,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옛 주석들이 비록 엉성하고 잘못되고 뒤섞인 것들이 많지만 고대(古代)와 시간적으로 가깝고 해석한 바가 또한 자못 경전에 근거하였으니, 요컨대 전부 폐기해서는 안 된다.
내가 경서(經書)를 읽을 때에 집에 보관하고 있는 이러한 책들을 간혹 취하여 참고하여 증험해보니, 주자의 주설(註說)이 완벽하여 깨뜨릴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게 되었고, 이들 주석서들 또한 다문(多聞)에 도움이 되어 이것들을 가지고 견해를 넓힐 수가 있었다.
● 주자의 저술(著述)은 경서의 전주(箋註)를 제외하고는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이 가장 위대한 책이다. 《소학》은 명칭만 남고 책이 없어진 지 오래였는데, 주자가 고금의 여러 책들에서 채록하고 편마다 보충하여 절목(節目)이 모두 구비되고 규모가 광대하니, 비단 초학자들이 행하고 익힐 뿐 아니라 배우는 자들이 종신토록 체행하더라도 다할 수 없다.
《근사록》은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 정자(程子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장자(張子 장재(張載))의 아름다운 말씀과 격언을 모아 분류하고 번갈아 기재하여 체(體)와 용(用)이 서로 포함되고 조리(條理)가 관통하니, 실로 사자(四子 사서(四書))의 우익(羽翼)이요 도학(道學)의 중요한 열쇠이다. 아! 주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위대한 편찬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에 일찍이 《소학》을 배우고 익혔으나 힘써 익히지 못하였고,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또 읽어보았으나, 일이 촛불을 밝히는 것〔炳燭〕과 같아 더더욱 말할 것이 없다.
《근사록》은 말년에 두세 번 읽어보았고 평상시에도 늘 보고 생각하였으나, 또한 입두처(入頭處)가 있지 않아 끝내 곤궁한 집에서 슬퍼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 《심경(心經)》은 진서산(眞西山)이 편집한 것인데, 이는 진서산이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을 적에 옛 성현들의 심학(心學)에 관한 문자를 모아 한 책을 만들어 스스로 살피면서 힘쓸 자료로 삼은 것이다. 진서산은 또 고인(古人)들이 백성을 기르고 정사를 베풀었던 일을 모아서 《정경(政經)》을 만들었다.
이 두 책은 당시에 처음부터 세상에 함께 전해졌는데, 《심경》은 이미 명(明)나라 정민정(程敏政)의 주석을 거친데 반해, 《정경》은 후세의 수령(守令)들이 고을을 다스린 행적을 넘지 못하여 그리 볼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결국 전해지지 못하고 《심경》만 전해졌으나, 또한 크게 유행되지는 못하였다.
퇴계(退溪) 선생께서 우연히 역려(逆旅.여관)에서 《심경》을 보고는, 기뻐하여 맨 먼저 이 책을 들어 표장(表章)하여 “사서(四書)와 《근사록》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근사록》과 함께 나란히 일컬어졌으니, 이것이 전후로 이 책이 유행하고 침체하였던 대략의 내용이다.
이 책이 비록 늦게 나왔으나 심학공부(心學工夫)에 있어서 매우 요긴하니, 배우는 자가 어찌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은 바로 인(仁)과 의(義)를 배우다가 잘못된 자들이니 반드시 자신이 이단(異端)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로 인한 유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에 이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께서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계책을 세워서 온힘을 다하여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정자(程子)가 “양주와 묵적은 본래 인의(仁義)를 배웠는데 후세 사람들은 인의를 배우지 않으니, 후세에 배우는 자들은 또 양주와 묵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양주와 묵적의 잘못은 맹자의 지적을 받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잘못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옳다.
후세에 학문을 하면서 문로(門路)가 잘못되고 편벽된 자를 또한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
● 사마공(司馬公)의 기국과 도량은 범문정(范文正)과 한위공(韓魏公)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남의 말을 수용하는 도량은 또한 이들만큼 컸다.
정자(程子)가 범요부(范堯夫)와 말씀하게 되면 열 건 중에 다만 서너 건만을 의논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사마공과 말씀하게 되면 번번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군실(君實 사마광의 자)은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일 줄 알아 귀에 거슬려하지 않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온공(溫公)은 성실하여 자신과 남과의 간격이 없었으므로 능히 이와 같았으니, 요부는 참으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규모는 비록 좁았으나 요부 또한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였다.
옛 장수가 막 별세하였는데, 요부가 새로 부임하여 풍악을 울리고 장교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정자가 이 일의 불가함을 지적하여 말씀하자, 요부는 곧바로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러한 말씀을 듣겠습니까?”
하였다. 이 일이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실려 있으니, 요부와 같은 사람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 “지금의 감사(監司)들은 대부분 주(州)ㆍ현(縣)과 일체가 되지 않고 오로지 수령들의 잘못을 사찰(伺察)하려고만 하는데, 이는 자신의 성심(誠心)을 다 바쳐서 수령들과 함께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 수령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가르칠 만한 것은 가르치고 독려할 만한 것은 독려하되, 명령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이 가운데 심한 자 한두 명을 가려 제거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정자의 말씀이다. 나는 항상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전후로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한결같이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지금의 감사가 된 자들은 오로지 수령을 사찰하는 것을 능사로 여겨 돌아가며 서로 본받아서 곧바로 한 시대의 습속을 이루었으니, 저들은 아마도 정자의 말씀을 따를 수 없다고 여겨서 그런가보다.
● 이천(伊川)이 인종(仁宗)에게 올린 글의 한 단락에 과거(科擧)를 논하면서 말씀하기를,
“국가에서 선비를 선발함에 비록 여러 과(科)가 있으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에서는 1년에 한 두 사람을 뽑을 뿐이고, 또 여기에서 얻은 사람들은 문견이 넓고 기억을 잘하는 선비에 불과합니다. 명경과(明經科)와 같은 등속은 오로지 읽고 암송만 하여 의리(義理)는 깨닫지 못하니, 더더욱 쓸 만한 자가 없습니다. 가장 많이 선발하는 과목은 진사과(進士科)인데 사부(詞賦)와 성률(聲律)을 제일로 삼고 있으나, 사부 가운데에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방도가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사부를 배워서 과거에 급제하고 세월이 지나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니, 제왕의 도리와 교화의 근본을 저들이 일찍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서 그러한 사업을 책임지게 한다면, 저들은 일찍이 그러한 것을 배운 적이 없어, 마치 북쪽 오랑캐 사람이 배를 조종하고 남쪽 월나라 나그네가 말을 모는 것과 같으니, 이들이 잘하기를 바라나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논한 과거의 병폐가 우리 과거의 병폐와 서로 흡사하다.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별과(別科)가 없고 다만 대비 식년과(大比式年科)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세월이 오래된 뒤에는 또한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식년과(式年科)는 으레 경서를 강하게 하고 제술을 겸하였으니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말류(末流)에는 오로지 암송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선비들이 대부분 글 뜻을 연구하지 않고 다만 입으로 읽는 것만 일삼고, 제술은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면서도 이것을 숨기지 않으며 사람들 또한 일상적인 일로 보아 넘겼다.
이 때문에 명경과에 급제한 자들은 으레 대부분 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근래에 들어서는 더욱 심하다.
간혹 제술과의 별과를 치렀는데, 예전에는 글을 잘하는 자가 많이 급제하였으나, 근래에는 과거를 빈번하게 시행해서 선비들이 제술을 많이 하고 독서는 적게 하여 마침내 책을 열어보지 않고 오로지 선배들의 과작(科作)을 표절하여 과명(科名)을 얻고자 힘쓴다. 그러므로 식견이 어둡고 비루하며 원래 논할 만한 학술이 없다.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는 조정암(趙靜菴)이 조정에 있을 당시에 한 번 시행했었는데, 기묘사화 뒤에 폐지되고 결국 다시는 시행되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는 다만 식년과와 별과만 행해지고 있는데, 두 과거의 병폐가 자못 송(宋)나라 조정보다 더 심하니, 정자가 이것을 보신다면 마땅히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개탄할 만하다.
● 주 부자(朱夫子)께서 진준경(陳俊卿), 왕응신(汪應辰), 유정(留正), 조여우(趙汝愚) 등 여러 정승〔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간절하게 시대를 근심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잊지 못하신 뜻이 말씀 밖에 넘쳐난다.
비록 자신이 낮은 관직과 말단 관료로 있을지라도 때에 따라 정승들을 타이른 것이 반복하고 격절(激切)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게 하니, 우리 유가(儒家)의 법문(法門)은 본래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낮은 지위에 처하고 아랫자리에 있다고 하여 국가의 존망을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의 존망을 보듯이 무심하게 여겨 침묵을 지키고 한마디 말도 없다면, 이는 곧 과감히 세상을 잊은 자이니 유자(儒者)가 아닌 것이다.
● 정강(靖康) 이후로 송나라가 오랑캐인 금(金)나라에게 신(臣)이라 칭하였으나, 주자는 문자를 쓸 적마다 번번이 ‘이로(夷虜)와 융적(戎狄)’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하를 칭한 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고 또한 저들이 오랑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 문자에서 저들을 칭할 때마다 반드시 ‘적(敵)’이라 하고 ‘청(淸)’이라 하여 융로(戎虜)의 본래 칭호를 숨기고 쓰지 않는가? 아마도 이는 정축년(1637, 인조15)의 하성(下城)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기꺼이 신하로 복종하려해서 그런가 보다.
근래 모모 사람들의 문집을 보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음속으로 적이 놀랍고 비통하다. 주자의 책을 보다가 부질없이 이 글을 쓴다.
● “자제(子弟)는 차라리 1년 내내 책을 읽지 않을지언정 하루라도 소인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子弟寧可終歲不讀書, 而不可一日近小人.〕”라는 것은 유원성(劉元城)의 말이고, “장부(丈夫) 나이 50세이면 모름지기 행장(行藏)을 알아야 한다.〔丈夫五十年, 要須識行藏.〕”라는 것은 최덕부(崔德符)의 시이고, “사람을 쏘려거든 먼저 말을 쏘아야 하고 적을 잡으려면 먼저 왕을 잡아야 한다.〔射人先射馬, 擒賊先擒王.〕”라는 구절과 “사방의 이웃이 쟁기와 보습을 들고 나가니 구태여 우리 집까지 쟁기와 보습을 잡을 필요가 있으랴.〔四隣耒耜出, 何必吾家操?〕”라는 구절은 모두 두보(杜甫)의 시이고,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드는 것, 이를 일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네.〔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라는 구절은 불경(佛經)의 말이고, “밝은 하늘이 회복되지 않으니 근심이 끝이 없네. 천추(千秋)에 반드시 돌아오는 것은 예로부터 떳떳한 도이니, 제자가 배움을 힘쓰면 하늘은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秋必反, 古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는 것은 순자(荀子)의 말이고, “돌아가 편히 쉬시게나, 서강(西江)의 파랑(波浪)은 어느 때나 평탄해질까?〔歸來兮逍遙, 西江波浪何時平?〕”는 황산곡(黃山谷)의 사(詞)이고, “들불로 태워도 다 타지 않아 봄바람 불면 또다시 생기네.〔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는 백낙천(白樂天)의 시이다.
혹 이는 외가(外家)의 말이고 혹 이는 한만한 시구(詩句)이지만, 주자가 인용하여 비유할 적에 각각 그 사리에 합당하였다. 간혹 지은 사람의 말뜻과 전혀 상반된 것이 있는데, 이는 그 뜻이 단장취의(斷章取義)에 있는 것이다.
● 《주자대전(朱子大全)》 한 책은 실로 의리(義理)의 창고인데, 이 가운데에 편지글 한 종류에는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로부터 사물을 응접하는 절도에 이르기까지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글을 보면 주자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듯해서 더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하여 흥기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퇴계 선생께서 이 중에서 긴요하고 간절한 말씀을 뽑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0책을 만들었으며, 또 서(序)ㆍ기(記)ㆍ봉사(封事) 등 여러 편도 큰 의리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복(愚伏) 정공(鄭公)이 이 중에서 선별하고 또 편지글을 보태어 《주문작해(朱文酌海)》 8책을 만들었고, 우암(尤菴) 선생이 이 두 책을 보유(補遺)하여 4책을 만들었으니, 배우는 자들이 만약 《주자대전》 전부를 독파하기 어렵다면, 우선 이 두 책에 나아가서 연구한다면 또한 종신토록 수용하여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유사(儒士)들이 힘을 써야 할 것은 사서(四書) 이외에는 이 《주자대전》이 마땅히 급선무가 되어야 할 것이니, 만약 이것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구류(九流)와 백가(百家)를 널리 섭렵하더라도 끝내 마음이 막히고 식견이 고루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나도 평소 이 책을 존중하고 받들어서 서(書)와 봉사(封事)를 여러 차례 읽고 암송하였으나 독실하게 공부하지는 못하였는데, 지금 이미 늙은 나이가 되었으니 그저 망양(望洋)의 탄식이 절절할 뿐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 땀이 등을 적시곤 한다.
● 내가 젊었을 때 최창대(崔昌大)와 한원(翰苑)의 동료가 되었는데, 창대가 주자(朱子)의 학문이 취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였다. 내가 매우 놀라 꾸짖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감히 이런 악담을 하니, 어찌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
하였다. 창대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 또한 세속의 논의에 빠져 있네. 자네는 한번 주자의 태극(太極)에 관한 문답(問答)을 보게나. 이는 다만 장사꾼의 말버릇이지, 어찌 조금이라도 함양(涵養) 공부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나는 더욱 놀라서 그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뒤에 《사변록(思辨錄)》과 《예기유편(禮記類編)》의 일이 계속하여 나왔는데, 이는 평소 주자를 경시하였으므로 주자의 주해(註解)를 보고 망녕되이 하자를 지적할 생각을 내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편으로는 애처롭다.
또 우옹(尤翁 우암)이 매양 주자를 존숭(尊崇)함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우옹을 미워하는 자들이 주자에게 분노를 옮겨서 모든 주자의 말씀과 관계되는 것이면 반드시 배척할 것을 생각하였다. 수백 년 전 중국 사람인 주자가 오늘의 시비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처럼 저들에게 분노와 시기를 당한단 말인가. 또한 가소롭다.
우옹은 일찍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문작해(朱文酌海)》 두 책을 합하여 한 책을 만들었는데, 숙종(肅宗) 말년에 이 책을 진강(進講)할 적에 정승 이자빈(李子賓)이 임수간(任守幹)과 함께 옥당관(玉堂官)이 되어 입시(入侍)하였고, 판서(判書) 이인엽(李寅燁)이 경연관(經筵官)으로 들어갔다.
임수간은 주자의 한만(閒漫)한 서찰(書札)들을 굳이 법연(法筵)에서 진강할 필요가 없다고 극언하였는데, 이 정승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자 임수간이 또 등등한 기세로 변론하여 배척하였다.
이 판서가 임수간의 말을 지지하여 두 사람이 교대로 발언해서 모두 이 정승을 배척하니, 이 정승은 평소 담론을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이를 마음속에 품은 채 물러나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주자는 바로 천하의 주자이시니, 내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분이 아닌데, 두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배척하니, 내가 어찌 피곤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여기서 또한 시배(時輩 소론)들이 주자를 높이지 않는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 학문을 하는 요체는 독서를 지극히 정밀하게 하는데 있으니, 만약 깊이 연구하지 않고 대충 읽고 지나가면 비록 천 번을 읽더라도 무슨 효험과 이익이 있겠는가. 《주자어류》에 독서법(讀書法)을 매우 자세히 논하였으니 상고하여 볼 수 있다.
내가 젊었을 적에 농암(農巖)이 독서하시는 것을 보니 소리를 길게 빼어 여운을 남겨 두면서 반복하여 영탄(詠歎)하였다. 이로써 한 편을 읽는데 매우 오래 걸리셨으니, 책을 읽는 정밀함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학문의 득력(得力)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선비는 먼저 과거(科擧)와 독서(讀書)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중요한 지를 분별하여야 하니, 만약 독서에 7푼의 힘을 기울이고 과거에 3푼의 힘을 기울이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약 과거에 7푼의 힘을 기울이고 독서에 3푼의 힘을 기울이면 장래에 반드시 과거 공부만 성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생각은 과거에만 전념하게 되기 때문에 늙도록 전혀 힘을 다할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지극한 말이다.
이른바 ‘독서’라는 것은 쓸데없는 책을 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성현(聖賢)의 책을 읽어서 마음을 다하여 묻고 배움을 말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한가로운 책마저도 읽지 않고 다만 앞 사람들의 과문(科文)만 모아 기록하고 표절하고 모방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료로 삼으며, 심한 경우에는 혹은 과장(科場)에서 대신 짓게 하고 혹은 시험관과 서로 은밀히 통하여 농간을 부리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명분과 의리가 바르지 않으면 큰일을 행할 수 없고 할 만한 일이 없으니 떠나감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명분과 의리가 바르지 않는데 큰일을 한 자가 있지 않으니, 강제로 큰일을 하고자 하면 비단 큰일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도 구차히 영합한다는 비판이 있을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난세에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은 주자의 이 말씀을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여 언제 어디서나 기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정자(程子)의 여러 문인들 중에 훗날 선학(禪學)에 물든 사람이 많았다. 《주자어류》에서 이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이천(伊川)의 문하 중에 상채(上蔡)는 선문(禪門)으로부터 와서 그의 말에도 또한 잘못됨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사상채(謝上蔡), 유정부(游定夫), 양구산(楊龜山)의 무리들은 마지막에 모두 선학(禪學)으로 들어갔으니, 필시 이것은 정 선생(程先生)이 당초에 고원(高遠)한 경지를 말씀해주자, 저들이 그 일단(一段)만을 보고 하면(下面)의 착실(着實)한 공부는 부족하게 생각하여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유정부, 양구산, 사상채 등 세 군자는 처음에 모두 선(禪)을 배웠는데, 뒤에도 이러한 습속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배운 분들이 대부분 선(禪)에 빠졌으니, 유 선생(游先生)의 학문은 대부분 선학이었다.”라고 하였다.
또 “구산(龜山)이 아직 이천(伊川)을 만나보지 않았던 소년 시절에 먼저 《장자(莊子)》와 《열자(列子)》 등의 문자를 보았으므로 훗날 비록 이천을 만났으나 이 생각에 익숙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노장(老莊)의 사상이 때로 표출되었는데, 이것이 유정부는 더욱 심하였으며, 나중소(羅仲素)는 때로 뜻이 또한 여기에 있었다. 화정(和靖)은 호구산(虎丘山)에 있을 적에 매양 아침에 일어나서 부처님께 정례(頂禮)하였으며, 장사숙(張思叔)의 시(詩)는 모두 선(禪)과 같으니 그가 애초에 행자(行者) 출신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여여숙(呂與叔)은 후일에 또한 불서(佛書)를 보았다.”라고 하였다.
또 주자의 《잡학변(雜學辨)》에 〈여씨대학해(呂氏大學解)〉를 논변하여 이르기를, “여씨(呂氏)의 학문이 가장 바름에 가까웠지만 부도(浮屠.부처)와 노자의 말에 미혹되었기 때문에 종국에는 출입(出入)의 폐단이 없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주자의 〈기의(記疑)〉에 이르기를, “우연히 잡서(雜書) 한 편을 얻었는데, 누가 기록한 것인지 알지 못하나 의심이 없지 않기에 인하여 변론한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이는 모두 근세 선학(禪學)의 학풍을 익히 듣고서 사모하여 배우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서로 이끌어 속이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살펴보건대 이 잡서는 왕신백(王信伯)의 글이다.
주자는 또 〈장무구중용해(張無垢中庸解)〉에서 장무구의 《중용설(中庸說)》을 변석(辯析)하였는데, 장무구의 설은 더욱 괴이하여 전체가 선가(禪家)의 화두(話頭)이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주자가 철저히 해부하고 변석하여 미진함이 없으니, 진실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장무구는 비록 정자의 문인은 아니었으나 양구산(楊龜山)에게서 배워 스스로 얻은 것이 있다고 여긴 자였다. 구산의 무리에 또 소자장(蕭子莊), 이서산(李西山), 진묵당(陳默堂)이 있으니, 이들은 모두 선(禪)을 말하였고, 구산이 죽자 이서산은 뒤에 불경의 소(疏)를 추천한 일이 있었다.
호문정(胡文定)은 또 참선을 하였는데, 호문정 또한 구산을 종유(從游)한 자로, 모두 《주자어류》에 보인다.
정자의 문인 가운데 구산이 가장 장수하였다. 그러므로 유파(流波)가 더욱 멀리 퍼져 우리 유학(儒學)에 폐해가 됨이 더욱 심하였다.
● 구산이 70이 넘은 나이로 채경(蔡京)에게 더럽힘을 당했으니, 그의 출처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뒷말이 있게 되었다. 채경은 만년에 점점 사세(事勢)가 낭패에 빠짐을 깨닫고는 깊이 근심하였다. 그의 종자(從子)인 응지(應之)가 찾아와 뵙자, 채경이 쓸 만한 인재가 있는 지를 물었다. 응지가 놀라며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인재는 모두 태사(太師 채경)의 손에서 양성되고 있는데,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감히 이 질문을 감당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채경이 말하기를,
“아니다. 내 생각해보니, 눈앞에 있는 자들은 다 면전에서 아첨하여 관직을 얻는 사람들이다. 산림 사이에 인재가 있는 듯하니, 이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다.”
라고 하였다. 응지가 마침내 말하기를,
“복주(福州)에 자가 유직(柔直)인 장학(張觷)이라는 자가 있어 포부가 구차하지 않은데, 불러올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채경은 이에 장학을 불러 숙객(塾客 글방의 스승)으로 삼았는데, 장학은 사도(師道)로써 스스로 높이고 제생(諸生)들을 엄격히 대하니, 제생들이 견디기 어려워하였다.
하루는 장학이 제생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일찍이 달리기를 배웠느냐?”
하고 물었다. 제생들이 말하기를,
“저희는 평소 선배들과 장자(長者)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다만 천천히 걸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장학이 말하기를,
“천하가 너의 아버지에 의해 파괴되었다. 조만간 도적 떼가 일어나서 맨 먼저 너의 집에 이를 것이니, 너희들이 만약 달리기를 배운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제생들이 크게 놀라 자기 아버지에게 달려가 아뢰기를,
“선생님이 갑자기 정신이 이처럼 이상해지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채경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라고 하고 곧바로 서원(書院 글방)으로 들어가서 장학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인하여 대책을 묻자, 장학이 마침내 구산을 천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구산이 황제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 내용이 《주자어류》에 자세히 보이는데, 장학의 사적(事迹) 또한 기이하다.
● 주자와 동시대 사람인 육자정(陸子靜) 형제는 선학을 주로 하였고, 여동래(呂東萊) 형제는 사학(史學)을 주로 하였고, 진동보(陳同父)는 공리(功利)의 설을 주로 하였는데, 주자가 이미 통렬하게 이들을 공격하였으니, 서찰 가운데 육자정, 진동보, 여동래, 유청지(劉淸之)와 문답한 내용에서 볼 수 있고, 《주자어류》에 보이는 것 또한 많다. 배우는 자가 이것을 자세히 살핀다면 또한 식견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 주자는 여조겸과 진량을 육구연보다 더욱 우려하여 말씀하기를
“백공(伯恭.여조겸)의 문인 중에 동보(同父 진량)의 학설을 말하는 자가 있으니, 두 학파가 이질적인 것을 넘어 하나로 합쳐진 것은 괴이할 만하다.”
라고 하였고, 또
“강서(江西.육구연)의 학문은 오직 선학(禪學)이고, 절강(浙江.여조겸과 진량)의 학문은 오로지 공리(功利)이다. 선학은 후대의 배우는 자들이 모색하여 한 층을 올라가면 더 이상 모색할 것이 없어서 스스로 돌아가지만, 공리 같은 경우는 배우는 자가 익혀서 곧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이는 매우 근심스러울 만하다.”
라고 하였으니, 주자가 세도(世道)에 대해 우려한 것이 지극하고 간절하다고 할 만하다.
● 진동보가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을 비난하고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낙양(洛陽)에 살면서 《통감(通鑑)》만 이해(理解)하였을 뿐 원우(元祐) 연간에 나가서 한 일은 미진하였으니, 이 때문에 후래의 화(禍)를 당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반박하여 말씀하기를,
“온공(溫公)이 한 일은, 지금 다만 옳은가 옳지 않은가와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인가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를 논할 수 있을 뿐이니, 어떻게 온공이 뒷날의 화를 불러들였다고 말하는가. 이는 순전히 이해(利害)만 따지는 논리이다. 온공이 진실로 처음부터 대책을 강구(講究)함에는 미진한 점이 있었으나, 그 시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약 온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온공은 바로 천지를 돌려놓아 국세를 일신한〔旋乾轉坤〕 공(功)이 있으니, 온공의 이 마음은 천지에 질정할 수 있고 유명(幽明)을 통하게 할 수 있다. 어찌 용이하게 미칠 수 있겠는가.
후대의 여미중(呂微仲), 범요부(范堯夫)가 조정(調停)의 설(說)을 주장하여 소인(小人)을 겸해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뒷날의 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잘못을 조정의 설에 돌리지 않고 도리어 원우(元祐)의 정치에 돌린다. 만약 진실로 군자와 소인이 함께 자리할 수 없음을 안다면 어떻게 감싸고 보호함을 바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주자의 이 말씀은 명확하다고 할 만하다. 용천(龍川 진량)의 언론이 매양 이해(利害)에 나아가 말하였으므로 그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민(閩) 땅의 수재(守宰.지방 수령)인 방숙규(方叔珪)가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본조(本朝)의 인물이 매우 많으면서도 공업(功業)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소인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이 무슨 의논인가. 소인을 어찌 제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본래 이는 합할 수 없는 물건이다. 향기 나는 풀〔薰〕과 악취 나는 풀〔蕕〕을 한 그릇에 담아두면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악취가 나는 법이니, 만약 소인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순(舜) 임금이 당시에 사흉(四兇)을 제거한 것이 잘못이 된다.’ 하셨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유정(留正)에게 준 편지와도 같은 뜻이다.
지금 사람들의 소견은 대체로 방숙규 무리의 뜻일 뿐이니, 세도(世道)가 어찌 여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주자어류》에,
“선배들이 잡다한 것을 기록한 책자에 기록되어 있기를 ‘이중화(李仲和)의 할아버지가 포 효숙(包孝肅)과 함께 절에서 독서하고 있을 적에 어떤 부자가 초대를 하자, 두 분은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후일에 그 부자가 다시 같이 식사하자고 매우 간곡하게 청하니, 이공(李公)은 가려고 하였으나 포공(包公)은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저들은 부자이니, 우리가 망녕되이 저들과 교유하면 어찌 뒷날의 누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 하였으니, 선배들이 마음을 확고히 하고 남을 대하는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이를 통해 생각해보니, 지금의 재상이나 유명한 관리와 여항(閭巷) 사이에서 부자라고 이름난 자들은 모두 거의 친척보다 더 서로 긴밀하게 결탁하였으니, 포공의 행동과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가. 선비는 마땅히 포공처럼 힘써서 절대로 이런 등속의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 사서(史書)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편년체(編年體)이니, 좌씨(左氏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과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송(宋)나라 강지(江贄)가 또 《자치통감》을 요약하여 지은 《통감절요(通鑑節要)》와 명(明)나라 장광계(張光啓)가 지은 《절요속편(節要續編)》과 진건(陳建)의 《황명통기(皇明通紀)》 와 왕여남(王汝南)의 《명기편년(明紀編年)》과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이 있다.
주 부자(朱夫子)께서 공자(孔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따라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지었는데, 편년체 가운데 강(綱)을 세우고 목(目)을 나누었으니, 이는 또 하나의 예(例)이다.
송(宋)나라와 원(元)나라의 경우는, 우리나라 김우옹(金宇顒)의 《송원강목(宋元綱目)》이 있고, 명(明)나라는 이현석(李玄錫)의 《명강목(明綱目)》이 있고, 고려는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이 있으나, 신라ㆍ고구려ㆍ백제 등 삼국(三國)이 빠졌었는데, 근래에 임상덕(林象德)이 지은 《동사회강(東史會綱)》에 모두 실려 있으니, 이들은 모두 《통감강목》의 의례(義例)를 따른 것이다. 이현석과 임상덕이 편수한 것은 간행이 되지 않아 내가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
두 번째는 기전체(紀傳體)이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와 진수(陳壽)의《삼국지(三國志)》, 당태종(唐太宗)의 《진서(晉書)》와 심약(沈約)의 《송서(宋書)》, 소자현(蕭子顯)의 《남제서(南齊書)》와 요사렴(姚思廉)의 《양서(梁書)》ㆍ《진서(陳書)》, 위수(魏收)의 《위서(魏書)》와 이백약(李百藥)의 《북제서(北齊書)》, 영호덕분(令狐德棻)의 《후주서(後周書)》와 이연수(李延壽)의 《남사(南史)》ㆍ《북사(北史)》, 위징(魏徵)의 《수서(隋書)》와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와 구양수(歐陽脩)의 《오대사(五代史)》이니, 이것이 십칠사(十七史)가 된다.
또 태태(脫脫)의 《송사(宋史)》와 송렴(宋濂)의 《원사(元史)》가 있는데, 모두 우리 집에 보관되어 있으나, 게혜사(揭徯斯)의 《요사(遼史)》ㆍ《금사(金史)》만은 보관되어 있지 않다.
《명사(明史)》는 듣자하니, 저 청나라 사람들이 한창 찬수하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교원(何喬遠)의 《명산장(名山藏)》과 추의(鄒漪)의 《계정야승(啓禎野乘)》을 통해 대략 고증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가 있다.
세 번째는 기사체(紀事體)이니, 기사라는 것은 한 가지 일의 시작과 끝을 기록한 것이다. 송(宋)나라 원추(袁樞)가 처음으로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을 저작하였는데 주(周)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기록하여 오대(五代)에 이르렀고, 명(明)나라 심조양(沈朝陽)이 《기사본말전편(紀事本末前編)》을 지었으니 반고씨(盤古氏)로부터 기록하여 위열왕 앞까지 이르렀고, 명(明)나라 진방첨(陳邦瞻)이 지은 《송원기사본말(宋元紀事本末)》과 청(淸)나라 곡응태(谷應泰)가 지은 《명기사본말(明紀事本末)》이 있고, 근래에 정승 서문중(徐文重)이 《조야기문(朝野記聞)》을 지어서 국조(國朝)의 일을 기록하였으니, 또한 기사본말(紀事本末)의 예를 따른 것이다.
● 선진(先秦) 이전의 제자(諸子)를 개괄하여 들어보면 총 25가(家)이다. 노자(老子), 장자(莊子), 열자(列子), 순자(荀子), 관자(管子), 안자(晏子), 묵자(墨子), 등자(鄧子), 문자(文子), 윤문자(尹文子), 관윤자(關尹子), 육자(鬻子), 갈관자(鶡冠子), 자화자(子華子), 항창자(亢倉子), 귀곡자(鬼谷子), 공손자(公孫子), 상자(商子), 사마자(司馬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울료자(尉繚子), 한자(韓子), 여자(呂子), 굴자(屈子)이다.
이 밖에 책을 저술하였으나 후세에 전해지지 못한 자 또한 반드시 많을 것이다.
● 노자(老子)의 글은 깊고 은미하고 심오하여 제자(諸子)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노자》를 몹시 좋아하여 자못 힘들여 연구하였으나, 뜻이 황홀하여 끝내 알 수 없었다. 이에 읽기를 중지하고 《장자》를 읽었는데, 장자의 글은 《노자》의 주각(註脚)이었다.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노자는 용(龍)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나는 ‘비단 노자는 사람이 용과 같을 뿐만 아니라 그 글 또한 용과 같아서 거의 《능엄경(楞嚴經)》과 서로 비슷하니, 이 모두 천하의 지극한 글들이다.’라고 생각한다.
● 노자의 학문은 무(無)를 종(宗)으로 삼는다. 그러나 무(無)로는 천하와 국가와 집안을 다스릴 수 없으니, 이는 장차 한 세상을 들어서 공환(空幻)의 세계로 만들 뿐이다. 그러나 그 은미한 뜻은 바로 여기에 이르지 않는다. 노자는 주(周)나라 때 문(文)이 지나쳐 질(質)이 사라져 권모술수가 갖가지로 많이 나오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이 글을 써서 이를 바로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의 사업 또한 볼 만한 것이 많이 있으니, 지금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한(漢)나라의 조참(曹參)과 송(宋)나라의 이항(李沆)과 같은 분들은 재상이 되자 이 방도를 써서 또한 충분히 정무를 다스리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으니,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우리 조선조의 신현옹(申玄翁), 장계곡(張谿谷) 역시 이 학문을 공부한 분들이다.
● 《열자(列子)》 8편은 그 정밀한 말과 오묘한 뜻이 《남화경(南華經)》과 백중(伯仲)이 된다. 《남화경》에 실려 있는 것이 간간이 이 속에 끼여 있는데 〈황제(黃帝)〉 한 편에 더욱 많으니, 아마도 후인들이 견강부회하여 이 책을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남화경》의 〈설검(說劍)〉ㆍ〈도척(盜跖)〉 등의 편은 이미 후세 사람들로부터 위작이라는 의심을 많이 받고 있으니, 《열자》에 기재된 내용들을 후인들이 추후에 편찬하여 《남화경》의 〈설검〉ㆍ〈도척〉 등의 편 가운데에 집어넣어 기재한 것인지 알 수 없다.
● 《순자(荀子)》 한 책은 〈성악(性惡)〉 등의 편을 제외하면 의논(議論)이 순정(純正)해서 격언(格言)과 명리(名理)가 많으니,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깝다. 또 문사(文辭)가 풍성하고 화창하며 넉넉하고 중후하니, 많이 읽어 득력(得力)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뛰어난 문장가가 될 것이다. 창려(昌黎)의 문장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 관자(管子)의 책은 세상을 경륜하는 위대한 문자로, 문장이 마치 구슬이 흩어지며 길게 쏟아지는 것과 같아서 기교를 견줄 데가 없고 붓 끝이 묘하게 고무(鼓舞)함을 또 말로 형용할 수 없으니, 이것을 읽을 때마다 항상 쉽게 다 읽어버릴까 두려워하게 된다.
이오(夷吾)는 바로 패자(霸者)의 보좌로 진실로 한 시대의 인걸이며, 글 또한 남보다 걸출하다.
안자(晏子)의 책은 《안자춘추(晏子春秋)》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군주를 풍간(諷諫)한 말로 의논이 순수하고 간곡하며 문장이 전아하니, 또한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 묵자(墨子)의 글은 물 흐르듯 유창하고, 등자(鄧子)의 글은 간략하고 질박하며, 문자(文子)의 글은 간절하면서 깊고, 윤문자(尹文子)의 글은 학식이 넓고, 관윤자(關尹子)의 글은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육자(鬻子)의 글은 특별히 새로운 말이 없고 문장 또한 그다지 통창하고 왕성한 면이 없는 듯하다. 갈관자(鶡冠子)의 책은 비록 후세 사람의 위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중간 중간에 기이한 말이 많다.
자화자(子華子)의 책에는 안자(晏子)라고 칭한 것이 많으니, 아마도 안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가 보다. 그 책 서문에 “조간자(趙簡子)의 가신(家臣)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안자와 동시대의 사람이 아닌 듯한데, 글이 자못 훌륭하다.
항창자(亢倉子)는 바로 장주(莊周)가 말한 노담(老聃)의 제자인 경상초(庚桑楚)란 자이니, 그 글이 또한 기이하다.
귀곡자(鬼谷子)는 바로 전국 시대 임기응변의 선구(先驅)이고 노자의 유파이다. 그 글이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종횡무진하여 예측할 수 없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그의 글을 얻어 유세(游說)로 발신(發身)하여 높은 지위를 얻었다.
공손자(公孫子)는 귀곡의 한 유파에서 다소 변하여 견백 동이설(堅白同異說)에 의탁하여 이름을 떨치니, 혜시(惠施)의 무리이다. 그 말이 막히고 통하지 않으니, 《장자》의 이른바 ‘남에게 이기는 데만 정신을 써서 도리의 학술이 없다.〔存雄無術〕’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니, 이는 진실로 말할 것이 못된다.
상자(商子)는 비록 성품이 가혹하고 엄격했으나 부국강병의 술수에 있어서 또한 얻은 바가 있으니, 그 글이 그의 성품과 똑같다.
이상을 총괄해 보면 귀곡자가 가장 뛰어나고, 상군(商君 상자)이 다음이며, 공손자가 가장 뒤떨어진다.
● 《사마자(司馬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울료자(尉繚子)》는 병가(兵家)의 책이다. 이들의 글은 손무(孫武)가 가장 뛰어나고 오기(吳起)와 울료(尉繚)가 다음이다. 《사마법(司馬法)》 또한 간략하고 간절하여 즐겨 읽을 만하다.
● 《한비자(韓非子)》의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등의 편은 《귀곡자》에서 조금 변한 것인데, 인정에 간절하고 일의 중요한 기틀에 깊은 식견이 있으며, 문장 또한 다채롭고 변화가 많아서 다독(多讀)할 만하다.
● 《여람(呂覽 여씨춘추)》의 글은 침중하고 깊이가 있으며 정밀하고 오묘하다. 이 책은 여불위(呂不韋)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천금(千金)의 현상(懸賞)을 내걸고 사방의 인사(人士)를 구하여, 이들로 하여금 저마다 자신의 소견을 가지고 글을 짓게 하고서 이 중에 기이한 글과 빼어난 말을 모아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든 것이니, 이 때문에 본래 볼 만하다.
●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사부(詞賦)는, 여항(閭巷)의 가요를 모은 《시경》으로부터 한 번 변하여 천고(千古) 사가(詞家)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정의(情意)나 흥(興)을 의탁하는 경우에는 비록 황당하고 올바르지 못한 말이 적지 않으나, 충의(忠義)에서 나오는 분노와 비분강개함이 있어 저절로 성정(性情)의 바름을 볼 수 있고, 사구(詞句)는 굳세고 빛나서 또 시가(詩歌)의 적통이 될 만하다.
내가 젊은 날에 이를 매우 좋아하여 자못 힘써 읽고 외웠는데, 재주가 둔하여 끝내 얻은 바가 없다.
● 제자(諸子) 이외 선진(先秦) 이전의 책으로는 《가어(家語)》,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황제소문(黃帝素問)》, 《음부경(陰符經)》, 황석공(黃石公)의 《소서(素書)》ㆍ《삼략(三略)》, 강태공(姜太公)의 《육도(六鞱)》, 《삼분서(三墳書)》, 《월절서(越絶書)》, 《급총주서(汲冢周書)》, 《죽서기년(竹書紀年)》, 《목천자전(穆天子傳)》이고, 한(漢)ㆍ위(魏) 시대에는 경방(京房)의 《경방역전(京房易傳)》, 초공(焦贛)의 《역림(易林)》, 육가(陸賈)의 《신어(新語)》,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유향(劉向)의 《신서(新序)》ㆍ《설원(說苑)》,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홍열해(鴻烈解)》,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ㆍ《십주기(十洲記)》, 공부(孔鮒)의 《공총자(孔叢子)》ㆍ《소이아(小爾雅)》,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신배(申培)의 《시설(詩說)》, 한영(韓嬰)의 《한시외전(韓詩外傳)》, 대덕(戴德)의 《대대례기(大戴禮記)》,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ㆍ《법언(法言)》ㆍ《방언(方言)》, 유흠(劉歆)의 《서경잡기(西京雜記)》,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ㆍ《한무내전(漢武內傳)》, 영현(伶玄)의 《비연외전(飛燕外傳)》,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 황헌(黃憲)의 《외사(外史)》, 순열(荀悅)의 《신감(申鑒)》, 곽헌(郭憲)의 《동명기(洞冥記)》, 응소(應劭)의 《풍속통(風俗通)》, 상흠(桑欽)의 《수경(水經)》, 석신(石申)의 《성경(星經)》,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유희(劉煕)의 《석명(釋名)》, 마융(馬融)의 《충경(忠經)》, 채옹(蔡邕)의 《독단(獨斷)》, 제갈량(諸葛亮)의 《제갈량심서(諸葛亮心書)》, 무명씨(亡名氏)의 《잡사비신(雜事秘辛)》ㆍ《삼보황도(三輔黃圖)》, 왕찬(王粲)의 《영웅기(英雄記)》, 서간(徐幹)의 《중론(中論)》으로 모두 50여종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별도로 사실(事實)을 기록한 책이므로 여기에서 나열하지 않는다.
여러 책들이 각각 순수한 것과 잡박한 것,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있으나, 요컨대 옛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추구하려는 자가 채집할 만하고 나 역시 대강 한 두 차례 모두 열람해 보았다.
대략 가감하고 취사하여 한 책을 만들어서, 아가위〔楂〕와 배〔梨〕 등 각각 다른 맛을 나열함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으나 미처 책을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늙고 게을러서 할 수가 없다.
● 누동(婁東) 사람 장부(張溥)는 명(明)나라 사람인 듯한데, 한(漢)ㆍ위(魏)와 육조(六朝) 사람들의 문집을 모아서 한 편의 거질(巨帙)을 만들었다.
서한(西漢)은 9명의 문집이니 가의(賈誼)ㆍ사마상여(司馬相如)ㆍ동중서(董仲舒)ㆍ동방삭(東方朔)ㆍ저소손(褚少孫)ㆍ왕포(王褒)ㆍ유향(劉向)ㆍ양웅(揚雄)ㆍ유흠(劉歆)이고, 동한(東漢)은 11명의 문집이니 풍연(馮衍)ㆍ반고(班固)ㆍ최인(崔駰)ㆍ장형(張衡)ㆍ이우(李尤)ㆍ마융(馬融)ㆍ순욱(荀彧)ㆍ채옹(蔡邕)ㆍ왕일(王逸)ㆍ공융(孔融)ㆍ제갈량(諸葛亮)이고, 위(魏)나라는 12명의 문집이니 조조(曹操)ㆍ조비(曹丕)ㆍ조식(曹植)ㆍ진림(陳琳)ㆍ왕찬(王粲)ㆍ완우(阮瑀)ㆍ유정(劉楨)ㆍ응창(應瑒)ㆍ응거(應璩)ㆍ완적(阮籍)ㆍ혜강(嵇康)ㆍ종회(鍾會)이고, 진(晉)나라는 22명의 문집이니 두예(杜預)ㆍ순욱(荀勗)ㆍ부현(傅玄)ㆍ장화(張華)ㆍ손초(孫楚)ㆍ지우(摯虞)ㆍ속석(束晳)ㆍ하후담(夏侯湛)ㆍ반악(潘岳)ㆍ부함(傅咸)ㆍ반니(潘尼)ㆍ육기(陸機)ㆍ육운(陸雲)ㆍ성공수(成公綏)ㆍ장재(張載)ㆍ장협(張協)ㆍ유곤(劉琨)ㆍ곽박(郭璞)ㆍ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ㆍ손작(孫綽)ㆍ도잠(陶潛)이고, 송(宋)나라는 8명이니 하승천(何承天)ㆍ부량(傅亮)ㆍ사영운(謝靈運)ㆍ안연지(顔延之)ㆍ포조(鮑照)ㆍ원숙(袁淑)ㆍ사혜련(謝惠連)ㆍ사장(謝莊)이고, 제(齊)나라는 6명이니 소자량(蕭子良)ㆍ왕검(王儉)ㆍ왕융(王融)ㆍ사조(謝朓)ㆍ장융(張融)ㆍ공치규(孔稚圭)이고, 양(梁)나라는 19명이니 소연(蕭衍)ㆍ소통(蕭統)ㆍ소강(蕭綱)ㆍ소역(蕭繹)ㆍ강엄(江淹)ㆍ심약(沈約)ㆍ도홍경(陶弘景)ㆍ구지(丘遲)ㆍ임방(任昉)ㆍ왕승유(王僧孺)ㆍ육수(陸倕)ㆍ유효표(劉孝標)ㆍ왕균(王筠)ㆍ유효작(劉孝綽)ㆍ유잠(劉潛)ㆍ유효위(劉孝威)ㆍ유견오(庾肩吾)ㆍ하손(何遜)ㆍ오균(吳均)이고, 진(陳)나라는 5명이니 진숙보(陳叔寶)ㆍ서릉(徐陵)ㆍ심형(沈炯)ㆍ강총(江總)ㆍ장정견(張正見)이고, 북위(北魏)는 2명이니 고윤(高允)ㆍ온자승(溫子昇)이고, 북제(北齊)는 2명이니 형소(邢卲)ㆍ위수(魏收)이고, 북주(北周)는 2명이니 유신(庾信)ㆍ왕포(王褒)이고, 수(隋)는 5명이니 양광(楊廣)ㆍ노사도(盧思道)ㆍ이덕림(李德林)ㆍ우홍(牛弘)ㆍ설도형(薛道衡)으로, 모두 합하여 103명이 된다.
기이한 문장과 뛰어난 문채가 나올수록 더욱 새로우며 눈길 가는 곳마다 모두 주옥처럼 아름다워 응접할 겨를이 없으니, 정신과 기운을 소생시키고 시름과 적막함을 깨뜨릴 수 있는 것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내가 적소에 있을 적에 매양 경서(經書)를 송독하는 여가에 이 책을 유식(游息)의 자료로 삼아서, 나그네의 회포를 떨쳐 버리는데 힘입은 것이 진실로 많았다.
양(梁)나라 소명(昭明)이 별도로 《문선(文選)》을 만들었는데, 이는 이 책의 대전(大全)이 된다. 이 책에서는 다만 팔조(八朝)의 문인(文人)과 재자(才子)들 중에 지은 바가 드물고 적어서 한 문집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흠이 될 만하니 빠진 부분은 《문선》에서 따로 볼 수 있다.
● 진(晉)나라 사람들은 호방하고 광달(曠達)함을 즐기고 청담(淸談)을 좋아하여 그 폐단이 국가(國家)에까지 미쳤다. 오호(五胡)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혀 벼슬아치들이 도망가 흩어지니,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이른바 “이보(夷甫)는 허황하기만 하고 평숙(平叔)은 앉아서 공리를 논하니, 소양전(昭陽殿)이 마침내 선우(單于)의 궁궐이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夷甫任散誕, 平叔坐論空, 豈悟昭陽殿, 遂作單于宮?〕”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담론과 풍격(風格)을 문자로 쓰면 담아(澹雅)하여 기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매우 좋아하게 된 이유이다. 이것을 가지고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저들을 직접 보고 저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어찌 경도(傾倒)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명나라 사람이 그 번잡한 것을 산삭하고 기이한 것을 보충하여 한 책을 만들었으니, 진실로 예림(藝林)의 진귀한 볼거리이다.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이 가지고 와서 유서경(柳西坰)에게 주어 마침내 우리나라 문장가들이 기뻐하면서 보게 되었다.
● 명나라 사람 북해(北海) 풍유눌(馮惟訥)이 고시(古詩)를 모았는데, 공자께서 시를 산삭(刪削)한 뒤로부터 진(秦)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10권이고, 한나라가 10권, 위나라가 9권, 오(吳)나라가 1권, 진(晉)나라가 24권, 송(宋)나라가 11권, 제(齊)나라가 8권, 양(梁)나라가 34권, 진(陳)나라가 10권, 북위(北魏)가 2권, 북제(北齊)가 2권, 북주(北周)가 8권, 수(隋)나라가 10권이며, 외집(外集) 4권은 신선과 진인(眞人)과 귀신의 작품들을 모았다.
또 통론(統論)과 품조(品藻), 잡해(雜解)와 변증(辨證) 등을 채록한 12권을 합하여 156권을 만들고 이름을 《고시기(古詩紀)》라 하였는데, 당나라 이전의 시(詩)ㆍ가요(歌謠)ㆍ언(諺)이 모두 이 안에 실렸으니, 실로 고시의 부고(府庫)이다.
또 오기(吳琦)란 자가 편집한 《전당시기(全唐詩紀)》가 있는데, 여기에 실린 시가 모두 수천, 수만 수이다. 선(仙)ㆍ불(佛)ㆍ신귀시(神鬼詩)로 외집(外集)을 만들었는데, 이보다 먼저 초당(初唐)ㆍ성당(盛唐)의 시 170권을 판각하였으니, 모두 나의 서고(書庫)에 있다.
다만 호원서(胡元瑞)의 《시수(詩藪)》에 “풍여언(馮汝言)의 《고시기》는 양경(兩京)으로부터 육대(六代)에 이르기까지 구비하여 기록하지 않음이 없고, 계민부(計敏夫)의 《당시기(唐詩紀)》는 수나라 말기로부터 양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겸하여 수록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풍여언은 바로 유눌(惟訥)이다.
계민부의 《당시기》를 오기의 《시기(詩紀)》와 비교하면 어느 것이 선후(先後)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대저 오기와 계민부 두 사람은 모두 집록(輯錄)한 저술이 있는데, 계민부가 집록한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고, 오기가 집록하여 편각한 것은 성당(盛唐)에 그쳤으니 흠이 될 만하다.
뒤에 《전당시》 한 질을 샀는데, 바로 청(淸)나라 강희(康煕) 44년(1705)에 한림시독(翰林侍讀) 반종률(潘從律)과 팽정구(彭定求) 등이 대교(對校)하고 찬집(纂輯)한 것이다. 오랑캐 황제가 서문을 지어 판각을 하였다. 여기에 실린 시는 모두 4만 8천 9백여 수로 정리하여 9백 권을 만들었는데, 당나라 초기로부터 오대에 이르기까지 짧은 구(句)와 작은 운(韻)도 채록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당시(唐詩)의 대전(大全)이다.
● 당나라 문장은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 이외에 이고(李翺)ㆍ손초(孫樵)ㆍ이한(李翰)ㆍ이관(李觀)ㆍ황보식(皇甫湜)ㆍ원결(元結)ㆍ두목(杜牧)ㆍ원진(元稹)ㆍ백거이(白居易) 등이 뛰어나다.
또 당나라 초기에는 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ㆍ양형(楊炯)ㆍ위징(魏徵)ㆍ진자앙(陳子昂)ㆍ소정(蘇頲)ㆍ장열(張說)ㆍ장구령(張九齡)ㆍ적인걸(狄仁傑)ㆍ요숭(姚崇)ㆍ최융(崔融)ㆍ서언백(徐彦伯)ㆍ유지기(劉知幾)ㆍ여재(呂才)ㆍ공장(孔璋)ㆍ위관(韋瓘)ㆍ임지송(林之松)이 있다.
성당(盛唐) 이후는 왕적(王績)ㆍ왕진(王縉)ㆍ왕유(王維)ㆍ이옹(李邕)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고적(高適)ㆍ장위(張謂)ㆍ이화(李華)ㆍ장순(張巡)ㆍ안진경(顔眞卿)ㆍ유태(劉蛻)ㆍ소정(蕭定)ㆍ양숙(梁肅)ㆍ독고급(獨孤及)ㆍ독고욱(獨孤郁)ㆍ독고림(獨孤霖)ㆍ왕사원(王士源)ㆍ상곤(常衮)ㆍ양염(楊炎)ㆍ권덕여(權德輿)ㆍ최우보(崔祐甫)ㆍ육지(陸贄)ㆍ유식(柳識)ㆍ배도(裵度)ㆍ우승유(牛僧孺)ㆍ이덕유(李德裕)ㆍ이신(李紳)ㆍ유우석(劉禹錫)ㆍ단문창(段文昌)ㆍ왕애(王藹)ㆍ오무릉(吳武陵)ㆍ양식(楊植)ㆍ정안(程晏)ㆍ주열(朱閱)ㆍ성균(盛均)ㆍ고참(高參)ㆍ이발(李渤)ㆍ이감(李甘)ㆍ교담(喬潭)ㆍ서원여(舒元輿)ㆍ가속(賈餗)ㆍ유가(劉軻)ㆍ범전정(范傳正)ㆍ심택(沈宅)ㆍ진암(陳黯)ㆍ손합(孫郃)ㆍ진월석(陳越石)ㆍ장욱(張彧)ㆍ이강(李綱)ㆍ노원보(盧元輔)ㆍ위응부(韋應符)ㆍ육희성(陸希聲)ㆍ풍용지(馮用之)ㆍ구양첨(歐陽詹)ㆍ구양거(歐陽秬)ㆍ유암부(劉巖夫)ㆍ유항(柳伉)ㆍ이상은(李商隱)ㆍ피일휴(皮日休)ㆍ육귀몽(陸龜蒙)ㆍ단성식(段成式)ㆍ배휴(裵休)ㆍ배연한(裵延翰)ㆍ나은(羅隱)ㆍ사공도(司空圖)가 있으며, 제왕(帝王)으로는 태종(太宗)ㆍ덕종(德宗)이 모두 문장으로 뛰어났다.
이들은 모두 볼만한 편장(篇章)이 있는데 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의 변려문(騈儷文)과 소정(蘇頲)ㆍ장열(張說)의 제책문(制冊文)과 선공(宣公)의 주의(奏議)는 또 이 무리 가운데 특출난 것이다.
● 명나라 사람들은 송나라 시를 업신여기고 배척하여 전혀 송나라 시를 모아서 기록하지 않았는데, 근래에 들어 점점 명나라 사람들이 한나라와 당나라를 헛되이 사모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마침내 송시(宋詩)를 표창(表彰)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성쇠(盛衰)와 승제(乘除)의 이치이다.
문(文)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이들은 글을 지을 적에 오로지 평이함을 숭상해서 이반룡(李攀龍)ㆍ왕세정(王世貞)의 유파가 지금 한 사람도 남아있는 자가 없으니,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으려 함이 너무 심하여 시문이 모두 밋밋하고 골격이 약해서 사람의 뜻을 고무시키고 감동시키는 부분이 거의 없다.
강희(康煕) 신해년(1671) 연간에 오지진(吳之振)이란 자가 송나라 사람의 시집을 두루 취하여 전집(全集)을 거의 기록하였으니, 권질(卷帙)이 매우 많다. 이 가운데에서 작가의 지은 시가 대부분 실전되고 다만 5, 6수만 전하여 문집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들을 모아 별도로 한 편을 만들어 전집(全集)의 뒤에 붙였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책을 완성하고 난 뒤에 또 스스로 서문을 지었는데, 이 서문에 이르기를,
“가정(嘉靖)과 융경(隆慶) 이후로 시가(詩家)를 말할 적에 당나라를 높이고 송나라를 배척하여 송나라 사람의 문집을 가지고 장독 뚜껑으로 쓰고 벽을 발라서, 버리기를 마치 힘을 다하지 못할 것처럼 하였다.
송나라 사람의 시는 당나라에서 변화되어 자신의 생각으로 지어졌는데, 가죽과 털이 다 떨어져 나가고 정신만 홀로 보존되니, 알지 못하는 자는 진부하다고 여긴다. 후인들이 무식해서 강구(講求)하는데 게으르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도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이 부(腐)라는 한 글자를 받들어 전체의 송나라 시를 폐기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송나라를 배척하는 자는 모두 송시를 보지 못한 자들이고, 비록 보았다 하더라도 그 원류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 이러한 병통은 송나라를 배척하려는 것보다는 당나라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높인 것은 가정ㆍ융경 이후에 사람들이 말하는 당나라이고, 본래 있었던 당ㆍ송 사람들의 당나라가 아니다. 당나라가 본래의 당나라가 아니라면 송나라도 본래의 송나라가 아니니, 진부하다고 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송나라는 당나라와 시대가 가까워서 송나라 사람이 당나라에 힘을 쓰는 것이 더욱 정밀하고 전일하였다. 지금 졸렬하고 거칠며 표절한 말로써 옛사람을 능멸하고 자신을 추켜올리고자 하는데, 이는 아버지를 쫓아내고 할아버지를 아버지 사당에 모시는 것과 같으니, 진실로 다만 송나라 사람들의 박장대소의 대상이 될 뿐만이 아니요, 당나라 사람들에게도 ‘다른 종류의 제사에 흠향하지 아니하여 제수를 토해낸다.’는 것이다.
지금 당나라를 높이는 자들은 눈으로 미처 당시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가정과 융경 사이의 고루한 근본에 집착하니, 이는 모두 송나라 사람들이 이미 진설했던 추구(芻狗)로 그 머리와 허리를 밟아서 땔감으로 삼아 불을 땐 지 오래되었는데, 이를 다시 취하여 대광주리에 넣어서 화려하게 수를 놓아 장식해서, 옛말을 그대로 답습하여 천 명의 입이 일제히 부르짖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부(腐)라는 것이다.”
하였다. 부패한 자는 부패하지 않은 것을 부패했다고 하니, 이는 미친 나라 사람이 미치지 않은 것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양대학(楊大鶴)이란 자 역시 강희(康煕) 때의 사람으로 육방옹(陸放翁)의 시초(詩抄)에 서문을 썼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시(詩)라는 것은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물의 시초와 근원이 되어 신명(神明)처럼 변화하니, 시대를 가지고 구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을 통해 대신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반드시 구구하게 시의 규모와 체재와 격식에 구애되어 분촌(分寸)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이로써 한 세대에 높이 추앙하고 일가(一家)로 명성을 날리는 도구로 삼는다면, 어찌 한계지어 스스로 작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창명(李滄溟 이반룡)이 당나라 이후의 시를 읽지 않았고, 왕엄주(王弇州 왕세정)가 그 말에 동의한 뒤에 마침내 감히 송시(宋詩)를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遷都)한 이후는 또 논할 것도 없다.”
라고 하였다.
오지진의 서문은 왕세정과 이반룡의 주장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기에 온 힘을 다하였고, 양대학의 서문은 말은 비록 완곡하나 왕세정과 이반룡을 배척한 것이니, 그 논한 바가 진실로 식견이 있다 하겠다.
● 송대(宋代)의 산문(散文)의 경우, 구양수(歐陽脩)ㆍ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ㆍ증공(曾鞏)ㆍ왕안석(王安石) 등 6대가의 산문이 모곤(茅坤)의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에 수록된 이외에는 기록을 남겨 책으로 만든 것을 보지 못하였다. 여동래(呂東萊)의 《송문감(宋文鑑)》에 선별된 것이 매우 적은데,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는 또 넣지 않았다.
송나라 사람의 유집(遺集)으로 내 집에 소장하고 있는 것 중에 《이정전서(二程全書)》ㆍ《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ㆍ《이정유서(二程遺書)》ㆍ《주렴계집(周濂溪集)》ㆍ《양구산집(楊龜山集)》ㆍ《장남헌집(張南軒集)》ㆍ《황면재집(黃勉齋集)》ㆍ《진서산집(眞西山集)》ㆍ《육상산집(陸象山集)》은 모두 성리학에 관한 책들이고, 《범문정집(范文正集)》ㆍ《범충선집(范忠宣集)》ㆍ《사마온공집(司馬溫公集)》ㆍ《이충정주의(李忠定奏議)》는 경륜(經綸)에 관한 책들이고, 《종충간집(宗忠簡集)》ㆍ《악무목집(岳武穆集)》ㆍ《문문산집(文文山集)》은 절의(節義)에 관한 책들이고, 《황산곡집(黃山谷集)》ㆍ《진회해집(秦淮海集)》ㆍ《육방옹집(陸放翁集)》은 문장가들의 책이다.
또 위재(韋齋) 주송(朱松)의 문집 세 권과 옥란(玉瀾) 주고(朱橰)의 문집 1권이 있으며, 장횡거(張橫渠)의 문집, 윤화정(尹和靖)의 문집, 나예장(羅豫章)의 문집, 이연평(李延平)의 문집, 여동래(呂東萊)의 문집, 진극재(陳克齋)의 문집, 한위공(韓魏公)의 문집, 석조래(石徂徠)의 문집, 사첩산(謝疊山)의 문집은 장백행(張伯行)이 편집한 《이학전서(理學全書)》 가운데 들어있다. 장백행은 강희(康煕) 때 중승(中丞)의 벼슬을 하였는데, 한(漢)ㆍ당(唐) 이후로부터 근래의 청나라에 이르기까지에 지어진 책 중에 다소 도학에 가까운 것들을 모아서 한 책을 만들어 무려 1백 3, 40권에 이르니, 가장 보기 좋다.
● 원호문(元好問) 유지(裕之)는 금(金)나라 말기 사람인데, 사학(詞學)이 가장 풍부하고 아름다워서 마땅히 금원(金源)의 거벽(巨擘)이 된다. 금나라가 망하자 원(元)나라에 벼슬하지 않으면서 많은 논저(論著)를 지었다.
원호문이 편집한 《중주집(中州集)》 10권은 모두 금나라 시를 채록한 것으로, 시인이 총 2백 55명인데 매 시인마다 반드시 소전(小傳)을 지어 시의 머리에 두었으며, 시는 모두 1천 9백 2십 수이다. 또 사(詞)를 편집하여 1권을 만들고는 이름을 《중주악부(中州樂府)》라고 하였는데, 작자가 36명이고 사(詞)는 1백 8십 수가 된다. 금나라 한 왕조의 시편 가운데 그래도 작자(作者)라는 말에 부합될 만한 것은 모두 이 편에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금나라의 시는 문학적 자질이 송나라에는 미치지 못하나, 사장(詞場)의 문채(文彩)는 원나라의 선구가 될 만하다.
● 강희제(康熙帝) 때 사람인 고사립(顧嗣立)이 원나라 백가(百家)의 시를 엮어 10권을 만들었는데, 끝 편에 속집이 뒤이어 나올 것이라고 주를 달았으나 간행되지 못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문집 전체를 수록하였으니, 산삭한 것이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원유산(元遺山 원호문)의 《중주집》의 예를 따라, 시인마다 각각 소전을 만들어 시의 머리에 두었으나, 시편이 적어서 문집을 만들 수 없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끝 편에 이어 문집을 만들지 못한 자들을 실으려 하였는데 미처 간행되지 못한 것일 것이다.
원나라의 시는 대체로 풍부하고 화려하고 농염하며 재사(才思)가 난만하고 꾸밈이 눈에 가득하여, 송나라 사람의 노련하고 꿋꿋하고 우뚝하고 돌올(突兀)한 자태가 전혀 없으니, 시대마다 숭상(崇尙)함이 변천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흥망성쇠의 이치가 또한 그러한 것이다.
● 원나라는 산문(散文)이 시보다 뛰어나다. 원나라 사람 소천작(蘇天爵)이 《원문류(元文類)》를 편집하여 시와 산문의 모든 체가 각각 구비되었다. 다만 이 책은 바로 원나라 사람이 직접 선별한 것으로, 소천작 이후로부터 원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지어진 여러 작품들은 빠지고 기록되지 못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흠이 될 만하다.
원나라 사람의 문집은 세상에 전해진 것이 많지 않아서, 내 집에 소장하고 있는 것은 다만 《오초려전집(吳草廬全集)》이 있을 뿐이고, 《허노재집(許魯齋集)》ㆍ《웅물헌집(熊勿軒集)》은 《이학전서》 가운데에 들어있는데, 허형(許衡)ㆍ오징(吳澄)ㆍ웅화(熊禾)는 모두 학문에 종사한 자들이다. 원나라는 호로(胡虜)들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한 나라이지만, 성리학과 문사(文詞)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우뚝하고 당당하게 이어졌으니, 이로써 송나라의 뒤를 잇고 명나라의 문운(文運)을 연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성리학과 문사가 조화를 이루어 찬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명시(明詩)를 선별한 자 또한 많은데, 이 중에 전목재(錢牧齋)의 《열조시집(列朝詩集)》이 마땅히 하나의 큰 책이 된다. 원말(元末)과 명초(明初)로부터 명나라 말엽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시편들을 수집하여 다 기록하지 않음이 없으며, 승려와 도사와 향렴(香奩)과 외복(外服)의 작품들까지 사방으로 모아서 또한 빠뜨린 것이 없으니, 진실로 명시(明詩)의 부고(府庫)이다.
다만 목재(牧齋)가 평소에 왕세정과 이반룡의 시학(詩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격함이 지나치게 혹독하였다. 그러므로 북지(北地)와 창명(滄溟 이반룡) 및 엄원(弇園 왕세정)의 여러 작품들의 경우, 수록된 것이 매우 적다. 이분들의 시편이 매우 풍부하니, 그 가운데 나아가 필요한 것만 뽑더라도 어찌 그리 유명하지 않는 자의 작품 한두 편에 미치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자의 작품은 지나치게 많이 수록하면서 이분들의 작품은 가혹하게 도태시켰으니, 또한 치우쳐서 공평하지 못한 듯하다.
강희 때 사람인 주이준(朱彝尊)이란 자 또한 명나라 시를 수집하여 하나의 큰 편을 만들고서 이름을 《명시종(明詩綜)》이라 하였는데, 이 책 또한 널리 찾아 모두 채록하였으니 완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다만 무명 시인들의 작품은 비록 한 두 편이라도 모두 수록하였으나, 대가(大家)의 이름난 문집에 있는 많은 시편은 수록한 것이 매우 적으니, 이것은 미진한 점이다.
또 진자룡(陳子龍)이 편집한 《명시선(明詩選)》과 종백경(鍾伯敬)이 편집한 《명시귀(明詩歸)》는 혹 정밀함에 힘써 시를 널리 채집하는 일은 부족하였고, 혹은 간략함에 힘써 편협한 데에서 잘못되었으니, 모두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 원씨(元氏 원호문)의 《중주집》은 시인마다 소전(小傳)을 만들었으니, 이는 이전에 시를 선별하는 자들이 하지 않았던 일로 당시에 역사를 시에 붙였다고 일컬었는데, 인물의 출처를 상고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예이다. 전목재(錢牧齋)의 《열조시집(列朝詩集)》과 근래의 《원시선(元詩選)》 또한 이 예를 따랐다.
《열조시집》의 소전은 더욱 명나라 3백 년간의 인물들의 사적에 관계되어, 이들이 즐거워하고 웃고 성내고 욕하는 자태를 완연히 보는 듯하게 형용하고, 또한 이것에 근거하여 사전(史傳)의 옳고 그름을 고증할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명나라 유사(遺事)를 찾고자 하는 자라면 보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내가 일찍이 소전만을 초록(抄錄)하여 별도로 한 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베껴 내는 것도 힘이 들어 오래도록 결행하지 못하였고, 식암(息菴)이 초록하여 책을 만들었다고 들었으나 보지는 못했다.
뒤에 연경에 갔다가 우연히 이 소전을 별도로 초록하여 간행한 책을 보고 서둘러 구매하여 왔으니, 지금부터는 별도로 등사하는 수고로움이 없게 되었다.
● 명나라 글을 등사하여 한 책을 만든 것으로 진인석(陳仁錫)의 《명문기상(明文奇賞)》이 있는데, 이것이 가장 규모가 큰 책이다. 또 《십대가문선(十大家文選)》과 《명문영화(明文英華)》가 있으니, 이 두 책은 간략하여 한 시대의 제작(制作)을 상고하여 살펴보기에는 부족하다.
《명문기상》에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 종백(宗伯 예부 상서)에게 올린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모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에 관한 것이다. 이때 상사(上使 정사(正使))인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이름으로 이 글들을 올렸기 때문에 글의 저자가 황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위의 한 수는 질정관(質正官) 최간이(崔簡易)의 작품이고, 아래 한 수는 서장관(書狀官) 고제봉(高霽峰)의 작품이다. 두 작품에 모두 관주(貫珠)와 비점(批點)을 가하였는데, 위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설명하는 자가 이르기를 ‘조선 사람들은 일찍이 송나라 사람들의 글을 읽지 않았으므로 그 글이 고아(古雅)하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이가 본래 후세의 글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글이 고아할 뿐이요, 조선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조선 사람은 송나라 글에 익숙하고 고문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병통이었는데 중국 사람은 도리어 이와 같이 알고 있으니, 이는 지나치게 인정했다고 이를 만하다. 한 번 웃는다.
● 명(明)나라 문집으로 세상에 간행된 것들이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방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로〔汗牛充棟〕 너무 많아서 다 논할 수가 없으나 대략 네 파(派)가 있으니, 우선 나의 집에 보관된 것을 가지고 말해보겠다.
방손지(方遜志)와 유 성의(劉誠意), 송잠계(宋潛溪)는 의리(義理)와 학술(學術)로 문장을 표현한 자들이니 이들이 한 파가 된다. 이 중에 방손지의 문장이 더욱 거침없고 성대하여 명나라 3백 년의 문장가 중에 여기에 미칠 만한 자가 전혀 없고 잠계(潛溪)는 그 아류이고 성의는 또 잠계의 짝이 될 만하다.
양명(陽明)과 백사(白沙)는 이단의 학문으로 문장을 지었는데, 이 중 양명의 글이 더욱 맑고 시원하니, 신학(新學)은 마땅히 배척해야 하나 문장에 있어서는 취할 만하다. 이탁오(李卓吾)의 기궤(奇詭)함에 이르러서는 양명에서 말미암아 위로 올라가 더욱 제멋대로 자신의 뜻을 펼친 자이니, 이 세 대가의 문집이 마땅히 한 파가 되어야 한다.
공동(空同)ㆍ대복(大復)ㆍ엄주(弇州)ㆍ창명(滄溟)은 선진(先秦)의 제자(諸子)들을 배워 새로운 격식을 만든 자들이니, 마땅히 한 파가 되어야 한다.
녹문(鹿門)ㆍ형천(荊川)ㆍ승암(升菴)ㆍ진천(震川)ㆍ목재(牧齋)는 옛것을 배워 말이 몹시 순해서 너무 심한 짓을 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에 승암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문장과 목재의 호탕함은 점차 본색과 달라졌으나 진실로 마땅히 이 파에 속해야 하고, 왕세정ㆍ이반룡의 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문장(徐文長)과 원중랑(袁中郞)은 또 방계(傍系)로 나와서 지혜와 이익을 으뜸으로 삼았는데, 이 두 사람 또한 왕세정ㆍ이반룡의 파가 될 수 없으니, 마땅히 이 파에 소속되어야 한다.
이서애(李西涯)ㆍ장태악(張太岳)ㆍ섭 창하(葉蒼霞)는 조정에서 세상을 경륜하는 글을 지었으니 또 마땅히 한 파가 되어야 한다. 이 중에 서애의 풍부하고 해박함은 또한 문장가의 종장(宗匠)이 될 만하다.
기타 문목 허국(文穆許國)ㆍ양성 근학안(兩城靳學顔)ㆍ구산 왕형(緱山王衡)은 자질구레하여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고황제(高皇帝)의 문집에 실린 글은 대부분 조령(詔令) 등의 글이고 여기에 또 시율(詩律) 약간 수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기력이 혼후하여 진실로 창업(創業)한 영명한 군주의 글이다.
또 방손지(方遜志)ㆍ우 충숙(于忠肅)ㆍ양초산(楊椒山)의 글을 합하여 한 책(筴)을 만들고 《삼이인집(三異人集)》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절의(節義)가 뛰어난 인물들의 문집만을 모은 것이다.
《이학전서(理學全書)》에 들어있는 것은 조월천(曹月川)ㆍ설경헌(薛敬軒)ㆍ호경재(胡敬齋)ㆍ나정암(羅整菴)과 해강봉(海剛峰)의 문집들인데 조월천ㆍ설경헌ㆍ호경재ㆍ나정암은 모두 성리학자이고 해공(海公)은 비록 강직함으로 이름난 자이나 또한 도학(道學)을 숭상하였다.
● 청나라 사람 고시정(顧施禎)이 자기 나라의 시를 선별하고 《성조시선(盛朝詩選)》이라 이름하였고, 또 위헌(魏憲)이 청나라 시를 선별하면서 끝 편에 대부분 자기의 시를 수록하고 《백명가시(百名家詩)》라고 이름하였다.
《백명가시》의 첫머리에 〈승평가연시(昇平嘉宴詩)〉를 수록하였는데, 이는 바로 강희(康煕) 임술년(1682) 정월에 청나라 황제와 여러 신하들이 백량대(柏梁臺)의 고사를 따라 칠언시를 연구(聯句)로 지은 것이다. 청나라 황제가 지은 시의 서문이 맨 앞에 수록되어 있다.
● 청나라 문인들의 글을 많이 보지는 못했으나, 대체로 시문의 문세가 유약한데, 이는 이미 내가 앞에서 논하였다. 청나라 문집으로 내 서고에 있는 것은 우통(尤侗)의 《서당집(西堂集)》, 송락(宋犖)의 《서피집(西陂集)》, 왕사진(王士禛)의 《잠미집(蠶尾集)》, 서가염(徐嘉炎)의 《포경재집(抱經齋集)》이고, 또 《우재집(愚齋集)》,《가서집(稼書集)》은 《이학전서》 가운데에 들어 있다.
우통은 재주가 풍부하고 능력이 넉넉하여 저술(著述)이 매우 많고, 송락이 그 다음인데 송락은 갑술생이니 식암(息菴)과 동갑이다. 부친 송권(宋權)이 명나라 조정의 도어사(都御史)로 있다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죽은 다음에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받았고, 송락 또한 청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가 나이 들어 치사(致仕)하였는데, 그가 스스로 쓴 연보(年譜)는 78세에서 그쳤으나 어느 해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송락의 경우 아들 5~6명이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고 손자 또한 매우 많았으며 나이와 관작이 모두 높았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좋은 운명이었다. 그가 저술한 제술문(製述文) 또한 많은데, 내가 일찍이 우통과 견주어 논해보니, 문채는 미치지 못하나 문법은 그보다 낫다.
《잠미집》과 《포경재집》 두 문집도 볼만하다. 우재(愚齋)는 바로 웅사리(熊賜履)이고 가서(稼書)는 바로 육농기(陸隴其)이니, 모두 학문으로 이름난 자들이다. 지은 글 또한 독실한 듯하고 또 육상산과 왕양명의 학문을 힘써 배척하였으니, 숭상할 만하다.
● 《잠미집》에 〈왕세덕지(王世德誌)〉가 실려 있는데, 세덕은 호가 상고(霜臯)이다. 명나라 말년에 금의위(錦衣衛)로 금중(禁中 궁중)을 숙위하다가 경사(京師 연경)가 함락되자 자결하려고 하였는데, 노복이 껴안고 저지하여 살아남았으나 그의 아내는 이미 부녀자들을 거느리고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 왕세덕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회남(淮南)에 은둔하였다. 이 〈왕세덕지〉에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왕사진(王士禛))가 젊어서 《송유민록(宋遺民錄)》에 기술되어 있는 당(唐)ㆍ임(林) 두 의사(義士)와 사고우(謝皐羽)ㆍ공성여(龔聖予) 등 여러 사람의 사적을 읽어보니, 대부분 인물들이 비범하고 호탕하며 뜻은 고결하고 행실은 아름다웠다.
간혹 때때로 문장에 의탁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는데, 대체로 시대에 대해 비분강개하고 번민하며 불평한 것으로, 능히 풍운(風雲)의 색깔을 변하게 하고 강해(江海)를 기립(起立)시킬 만하다. 내 번번이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였으니, 생각하건대 송나라 3백 년간에 충후(忠厚)하게 선비를 양성한 보답이 이와 같아서 충신과 의사의 마음 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순치(順治) 말엽에 객지인 회남(淮南)에 우거하면서 우연히 《숭정유록(崇禎遺錄)》 한 책을 얻어 읽어보고는 내심 송나라 유민의 부류라고 의심하였는데, 오랜 뒤에야 마침내 이것이 상고(霜皐) 선생의 작품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야사(野史)가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후세에 진실을 전할 수 없음을 개탄하고 팔뚝을 걷어 부치고 붓을 휘갈겨 《숭정유록》 한 권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제(先帝)인 의종(毅宗)께서는 인자하고 검소하며 영민한 군주였는데,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신 지 17년 만에 국가의 불행을 만나 끝내 나라를 잃었으니, 아! 하늘의 탓인가? 사람의 탓인가? 신은 낮은 직위의 신하로 날마다 좌우에서 모셨으니, 화를 초래한 것이 이유가 없지 않음을 알고 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자, 역신인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주륙하고 환관을 배척하고는 마음을 비워 유신(儒臣)들에게 임무를 맡겼으나, 이른바 유신이라는 자들은 대부분 용렬하고 교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국가의 일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당(黨)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줄만 알았으니, 강토는 날로 위축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중외(中外)를 둘러봄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파격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서 걸출한 인재를 구하여 국가를 구제하려고 하니, 비록 한두 명의 쓸 만한 인재가 있었으나 당파의 고착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었다. 만일 자기와 같은 당파이면 강력하게 비호하여 붙들어 주었고 자기의 당파가 아니면 설령 쓸 만한 재주가 있더라도 반드시 여러 방법으로 배척하여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면서 국가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자가 중론을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고, 중론을 배척하여 인재를 등용하더라도 효험이 없어서, 아침에 한 사람을 등용했다가 저녁에 무너뜨리고 저녁에 한 사람을 등용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주륙하였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인순(因循)하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치성해지니, 천자께서는 외롭게 고립되어 방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종묘사직이 뒤따라 망하였으니, 아 국가의 멸망이 누구의 죄인가.
매번 대신을 소대(召對)할 때마다, 성상께서 천하의 큰 계책을 하문하셨는데, 내가 가만히 들어보면, 여러 신하들은 땀을 흘리며 부끄러워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바로 자질구레하게 늙은 유생이 하는 상투적인 말로 책임을 면하는 것이었다. 간간이 한두 사람의 충직하고 과감한 주장이 있었으나 또 오활하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해서 쓸 수가 없었으니, 내가 속으로 한스럽게 여겼다.
또 저 환관 위충현이란 자가 정권을 도둑질하여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였는데도, 선제께서는 방년 17세의 나이로 성음(聲音)과 안색(顔色)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시며 손수 그를 제거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보통의 군주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늘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선조의 가르침을 따르며 경연을 부지런히 열고 관리의 치적을 살피며 백성의 폐해를 구제해서 일찍이 단 하루도 스스로 한가하게 보내지 않았으니, 만일 군신간이 덕을 하나로 합치고 장수와 재상이 공경하며 합심하였더라면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는데, 불행히 훌륭한 군주는 있었으나 뛰어난 신하가 없어, 끝내 몸은 사직을 따라 죽고 중궁(中宮)은 목을 매어 죽었으며 공주는 손수 칼로 찔러 죽였으니, 예로부터 나라를 위해 죽은 충렬(忠烈)이 선제보다 더한 분이 없고, 망국의 통한이 선제보다 통렬했던 적이 없었다.
마침내 지조를 버린 불초한 무리들이 스스로 청의(淸議)의 성토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는 제멋대로 비방하여, 혹은 선제께서 전비(田妃)를 총애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다 하고, 혹은 이익을 탐하고 재물을 아끼다가 멸망에 이르렀다 하고, 혹은 자신의 계책을 쓰기를 좋아하여 멸망에 이르렀다 하여, 망국의 허물을 군부(君父)에게 전가시켜서 자신들이 나라를 망친 죄를 경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전(展轉)하며 서로에게 이것을 말하였고 또 책에 써서 천하 후세의 이목을 속이려고 하였다.
나는 이 때문에 절치부심하면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선제께서 후세에 장차 덕을 잃은 군주와 같이 치부되어 함께 비난을 받을까 매우 두려웠다. 이에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해서 모든 야사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그런대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의 일부를 갖추었으니, 부디 이로써 유언비어가 멋대로 유포되어 선제의 명예를 더럽히지 못하기를 바라고, 또 훗날 사필(史筆)이 혹 이 기록을 취하기를 바란다.’
이는 평소 선생의 뜻이 모두 이 책에 의탁되어 있는 것이다.
강희 18년(1679)에 《명사(明史)》를 찬수하라는 조칙이 있자, 유서(遺書)를 사방에서 구하였는데, 유사(有司)가 부본(副本)을 기록하여 사관(史館)에 올렸고, 선생이 별세함에 차자(次子) 원(源)이 장례할 적에 초고를 함께 묻었으니, 아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왕세덕의 저서가 명나라가 망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이 내용이 《명사》에 보이는 바가 없다. 이 기록은 명나라 말기 사실을 고찰함에 크게 관계되는데, 이현석(李玄錫)이 과연 이 기록을 얻어 보아 채록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겠다.
왕사진(王士禛)은 청나라 사람으로 왕세덕을 이처럼 세상에 널리 알렸으니, 또한 숭상할 만하다. 나는 이현석이 이 기록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혹자들의 날조한 말만 믿고 이를 잘못 기재할까 염려되므로 자세히 기재하는 것이다. -계속-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성백효 김창효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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